'아마추어리즘'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12.06 '참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2. 2010.10.11 '노벨상' 강박증
글 - 칼럼/단상2010. 12. 6. 09:02

‘참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근래 방송을 통해 해괴한 공익광고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해맑은 외국인 여자아이가 등장하여 대한민국이 ‘참 이상한 나라’임을 온 국민의 뇌리에 각인시켜 주는 광고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제작했고, ‘비영리성ㆍ비상업성ㆍ범국민성을 지향하는’ 공익광고라 하니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갖자’는 의도를 의심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러나 ‘참 이상하다’는 문구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마음에 걸린다. ‘이상하다’는 말은 ‘정상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 등등 여러 가지 내포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근래 들어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면에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비약적인 성취를 이룬 것이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사석에서는 더러 ‘이상한 나라’라는 말들이 오갈 수는 있다. 그러나 방송에 대놓고 ‘놀라운 나라’ 대신 ‘이상한 나라’라는 표현을 쓴다면, 참으로 듣기 거북하다.

 

그런데, 북한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도발을 당하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떠올린다면, 비로소 그 ‘이상한 나라’라는 표현이야말로 마땅히 들어가야 할 적소(適所)를 찾았다고 할 만하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야수 앞에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채 희희낙락 살아왔으니 참으로 이상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늘어서 있는 적군의 포진지들을 단 6문의 대포로 막아보겠다는 배포, 수만 명의 적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건너와 덮칠 수 있음에도 ‘평화수역’ 운운하며 병력 감축의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해온 정부의 어리석음,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대신 ‘윗돌 빼서 아래쪽에 고이듯’ 다른 전선의 무기를 임시방편으로 옮겨오는 치기(稚氣)어린 아마추어리즘, 매사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군과 정부, 정치권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등. 이런 속에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해온 것 자체가 기적이고, 그러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참 이상한 나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현란한 수사(修辭)로 포장 혹은 모면될 사안이 아닐 뿐 아니라 의견의 불일치를 보일만한 일도 아닌데, 간교한 좌파들이나 철없는 정치인들은 요설(饒舌)을 농하며 국론을 분열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이 정도의 희생으로나마 우리의 현실을 깨닫게 해 준 것을 ‘신의 가호’ 쯤으로 받아들이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해야 정상인데, 우리는 여전히 ‘욕심과 자만’의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완급과 경중에 따르는 순서가 있는 바, 이런 판국에 누구를 탓하고 끌어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정파들의 작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국방예산 몇 푼 증액해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노라 손을 터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나라의 암담한 미래를 대변한다. 155마일 휴전선을 밀고 내려오는 것만 전쟁이고, 연평도 포격사건은 전쟁이 아니란 말인가. 작은 전쟁을 막지 못하면 큰 전쟁도 막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상시전쟁(常時戰爭)’의 와중에 살고 있다.

 

급한 병과 마찬가지로 국가안보에도 단기처방과 장기처방이 있다.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우리는 제대로 된 단기처방도 못 내리고 있으며, 장기처방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다. 대포 몇 문 더 배치하는 것이 단기처방인지 장기처방인지도 모르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지도층의 의식수준이다. 국가안보가 위협을 받을 경우 국론이 통일되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위기를 맞아 국론을 통일하려면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 학교교육을 통해 올바른 국가관과 ‘상무정신(尙武精神)’을 함양해야 그들이 자라서 지도층이 되었을 때 ‘헛소리’들을 안 하게 되는 것이다. 장비만 좋으면 무엇 하는가.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썩은 정신으로 적의 심장을 제대로 조준할 수 있을까. ‘욕심과 자만이 전쟁의 원인이며, 눈물과 고통만 남겨주는 비참한 것’이 전쟁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왜 전쟁을 피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그런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론을 통일하고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정신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대비는 하지 않고 말만 앞세울 때 정말로 세계인들은 ‘참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이라 놀려댈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인문대 학장/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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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0. 11. 08:35

‘노벨상’ 강박증

 

2010년 10월 7일 오후 8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시각이었다. 며칠 전부터 언론 매체들이 고은(高銀) 시인의 수상 가능성을 확신하는 듯 떠들썩하게 기대치를 높여 왔던 만큼, 사람들은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흡사 고 시인의 노벨상 수상이 민족적 ‘비원(悲願)’이라도 된다는 듯, 사람들은 그 시각이 가까워지자 입을 모아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올해 역시 그 예측은 빗나갔고, 기원은 허사로 돌아갔다. 다시 기다려야 할 1년을 지루하게 느끼며 사람들은 노벨상에 대한 관심을 접어 둔 채 조용해졌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이 화학 분야에서 공동 수상자를 배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의 표현대로 ‘민족적 모욕’에 견줄만한 일이 벌어졌으므로, 우리는 쓰라린 가슴을 접어 눌러야 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후만 해도 일본은 10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그들 모두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이다. 우리가 물리학이나 화학, 생리학, 의학, 경제학 등은 꿈도 꾸지 못한 채 겨우 문학 분야 하나에만 목을 매다시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미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겐자브로(1994) 등 두 명이 문학상을 받은 바 있고, 기초과학과 평화상까지 합하면 총 1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간 해온 방식대로 올해도 몇몇 언론매체들은 일본과 한국의 교육을 비교하는 데서 원인을 찾아 제시하는 것으로 전 국민적 실망감을 누그러뜨리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점이다. 언론의 분석은 이유가 궁금한 대중들의 갈증을 우선 풀어줄 ‘한 컵의 물’일 뿐이다. 좀 더 근본적인 요구는 국가차원의 정책과 실천일 텐데, 국가나 국민 모두 아마추어리즘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우리의 한계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노벨상 보기를 집중적으로 대표선수 몇 명 길러 금메달을 따내는 올림픽 대하듯 한다. 사실 ‘올림픽의 금메달’이 스포츠의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활 속에서 즐기게 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도록 하는 것이 스포츠의 본질이다. 지난 시절 사회주의권 국가들이나 저개발 국가들에서 특정 분야의 뛰어난 선수들만을 돈 들여 키우는, 이른바 ‘엘리트 체육’이 성행했는데, 그것은 체육인구의 저변확대를 통한 선수육성이라는 본질과 거리가 멀다. 당분간 금메달은 따오겠지만, 그것으로 그 나라의 총체적인 수준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의 분석과 처방을 거치지 않고, 특정 분야 특정 선수 한 두 사람에게 노벨상을 받아올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대책 없는 노벨상 기대심리’는 오히려 ‘엘리트 체육’보다도 못한 셈이다. 설사 내년에 고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탄다 해도, 후속 수상자의 배출은 다시 ‘요행’이나 ‘기적’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고 시인 급(級)의 ‘잠재적 노벨상 수상 후보자들’ 수십 혹은 수백 명이 우글거리도록 만들자면 길게 보고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문학교육을 제대로 시키고, 다양한 외국의 인재들을 불러다 제대로 된 우리 문학의 번역자로 키워야 한다. 기초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려면 지금과 같은 교육과 학문의 토양을 완벽하게 바꾸는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자면 많은 시일과 돈이 필요할 것이니, 상당 기간 우리는 노벨상의 존재를 잊어야 한다. 투자와 노력도 안 하면서 노벨상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행위는 국가적 차원의 ‘파렴치’일 뿐이다.

 

노벨상은 목표가 아니라 우리 노력의 부산물이어야 한다. ‘문학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노벨상 수상자도 나오더라’는 말이 정답이다. 문학이든 기초과학이든 노벨상이 전부는 아니다. 1964년 프랑스의 문호 장폴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노벨문학상이 아니라도 자신의 문학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그는 견지했을 것이고, 또 사실이 그렇다. 수준 높은 문학과 학문을 가꾸어 나가고, 그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을 높여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노벨상 강박증’을 극복할 수 있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