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1. 28. 13:18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2: 엘크 시티(Elk City)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를 보고-

 

 

 

 

손 형,

 

2,400마일에 달하는 66번 길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까지 8개 주[일리노이(Illinois)-미주리(Missouri)-캔자스(Kansas)-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뉴멕시코(New Mexico)-애리조나(Arizona)-캘리포니아(California)]에 걸쳐 있고 시간대도 세 개나 들어 있으니, 이 도로의 길이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길이 주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미국의 간선도로[Main Street of America]’, ‘미국 도로의 어머니[Mother Road of America]’ 라는 별명들까지 얻게 되었지요.

 

 


66번 도로가 통과하는 8개 주

 

 

이 길은 숱한 질곡의 역사를 겪기도 한 것 같습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전국 규모의 추진 기구를 만들어 각 주의 동의를 얻고, 길을 뚫고 포장을 하고, 각종 부대시설을 만드는 등 지난(至難)하고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 이 길은 태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하이웨이가 뚫리고, 그것이 각 방면의 다른 길들과 연결되면서, 기존의 66번 도로는 버려지게 되었고, 그 도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도시들과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겠지요.

 


남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바로 남쪽 옛 철교와 길의
황폐화된 모습 


황폐화된 66번 도로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건물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식당 간판

 

 

그러나 언제부턴가 버려진 채로 죽어가던 66번 도로의 가치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지요. 자연스럽게 그 길은 새로운 모습으로 회생하게 되었고, 주변의 도시들 역시 쇠락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들은 매우 극적이었겠지요?

 


국립 66번 도로박물관의 네온사인

 

 

66번 도로가 지나는 곳곳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여러 권의 책과 팜플렛,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런 사연들이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애버리[Cyrus S. Avery]라는 사람이 AASHO[the American Association of State Highway Officials]의 회장이 되어 66번 도로를 완공했다 하여 그를 ‘66번 도로의 아버지[the Father of Route 66]’라 부르는 모양인데, 그가 오클라호마 주 털사 출신이라는 점은 66번 도로를 공유하는 다른 주들과 달리 오클라호마 주의 한 복판을 대각선으로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실과 흥미로운 연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군요.

 


66번 도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버리(Cyrus S. Avery)

 

 

사실 이 도로가 오클라호마 주와 일리노이 주만 중앙을 관통하고 있을 뿐, 나머지 주들의 경우 형식적으로 걸쳐 지났다는 것이 저 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네요. 미주리 주에서는 하단을 지났고, 캔자스 주에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지났으며, 텍사스 주에서는 북부의 일부를 통과한 정도지요. 그나마 뉴멕시코와 애리조나가 북쪽으로 약간 치우치기는 했으나 관통한 경우로 볼 수 있고, 캘리포니아는 남쪽을 통과하여 산타모니카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군요. 더구나 주도(州都)인 오클라호마시티를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지요. 그는 어쩜 이 도로야말로 미래의 역사적 공간으로 영속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고향인 오클라호마 주에 긴 부분을 할당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덟개의 주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오클라호마 주 안에 배당된 66번 도로의 길이도 시기마다 약간씩 달라지는데요. 1926년의 추정 거리는 415.4 마일이었는데, 1936년에는 383.7 마일, 1944년에는 381.7 마일, 1951년에는 368 마일로 점점 줄어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길을 고치거나 포장을 새로 하면서 굽은 길을 펴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면서 그렇게 된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총 연장 2,400 마일의 8개 주 산술평균이 300 마일인데, 400마일 가까이 차지했다는 것은 이 도로의 큰 몫을 오클라호마 주가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네요.

 

 

이 도로가 지나는 오클라호마 주의 큰 도시들만 헤아려 보아도 열 개가 넘어요. 아래 텍사스 주 쪽부터 꼽는다면, 에릭(Erick)-세이어(Sayre)-엘크(Elk)-클린턴(Clinton)-웨더포드(Weatherford)-엘 르노(El Reno)-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City)-아카디아(Arcadia)-챈들러(Chandler)-스트라우드(Stroud)-새펄파(Sapulpa)-털사(Tulsa)-클레어모어(Claremore)-빈타(Vinta)-마이애미(Miami) 등으로 연결되지요. 물론 이 도시들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이 도로에 연결된 도시들은 무수하지요.

 

 


오클라호마 주 내의 66번 도로

 

 

 

글쎄요. 우리는 이들 가운데 몇 군데나 둘러보았을까요? 맨 처음 오클라호마시티와 아카디아를 들렀고, 그 다음이 털사와 유콘, 그리고 최근 엘크 시티와 클린턴을 들렀네요. 사실 오클라호마시티를 다녀오는 길이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66번 도로를 탔다가 177번을 만나 스틸워터로 방향을 틀곤 했으니, 66번 도로는 우리에게 꽤 낯이 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몇 군데도 못 돌아 본 주제에 무슨 66번 도로를 말하려 하느냐?’고 책망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어디 한 솥의 국물을 다 마셔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된 겁니다.

 

 


오클라호마주의 66번 도로 지도

 

 

저는 이미 아카디아의 라운드 반[Arcadia Round Barn], 털사(Tulsa)의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 유콘(Yukon City)의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등을 둘러보고 그 공간들이 갖는 의미나 느낌들을 적어 이곳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앞쪽에 올린 미국통신 10, 12, 27을 참조해 주세요].

 


66번 도로 가에 있는 아카디아(Arcadia)의 라운드 반(Round Barn)

 

 

엊그제 우리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66번 도로를 통과하게 되었지요. 달라스로부터 포트워쓰(FortWorth)를 경유하여 오클라호마 주 66번 도로 상의 엘크 시티에서 1박을 하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클린턴 시티를 둘러본 다음 이곳 스틸워터로 귀환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엘크와 클린턴의 뮤지엄 방문기를 중심으로 66번 길에 관한 인상을 남기려 하는 겁니다.

 

달라스 가는 길도 엄청나게 멀었지만, 달라스를 탈출하여 엘크로 돌아오는 길도 그에 못지않더군요. 달라스를 빠져나오는 데만도 스무 번 가까이 길을 바꿔 탔으며, 완전히 빠져 나온 후에도 십여 개나 다른 길을 거쳤으니, 미국의 길들이 넓고 곧으며 길게 뻗어 있긴 하지만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한참 고생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쨌든 달라스의 숙소로부터 계산하여 5시간 가까이 걸려 엘크시에 들어왔습니다.

 

고층빌딩들 중심의 다운타운을 갖고 있는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의 어느 도시나 그렇습니다만. 이곳도 평탄한 들판에 넓은 중앙로와 주변도로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서 시가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다만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거리에 따라 약간씩 고풍이 느껴지는 곳들도 있고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나 상업지구들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을 갖고 있는 점은 아주 좋았어요.

 


엘크 시에 들어오며

 

 

엘크 시티가 언제 출발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154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코로나도(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가 이 지역을 통과한 첫 유럽인이긴 했으나, 실제로 엘크 시티의 역사는 오클라호마 서부 지역에 셰이옌-아라파호족 (Cheyenne-Arapaho)의 보호구역이 문을 연 1892419일을 출발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군요. 이 때는 첫 백인 정착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 도시 역시 아메리칸 인디언과 인연이 깊은 곳임은 말할 것도 없어요.

차를 몰고 시내에 진입하자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깔린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걷고 싶은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갈 길이 바빠 먼저 박물관을 찾기로 한 우리는 잠시 달려 신시가지 끝부분에 넓게 조성된 박물관을 만났지요. 그곳엔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하나의 부지 안에 세워져 큰 단지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이 도시의 작은 규모에 비하여 꽤 큰 박물관 단지라고나 할까요? 여기서는 이 단지 이름을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oute 66 Museum Complex]’라고 부릅디다. 이 안에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National Route 66 & Transportation Museum]’,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등이 들어 있었어요.

 


엘크시 '옛 동네 박물관'의 건물과 입간판

 

 

우선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에 들어갔지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가 우리를 안내하여 가정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코너와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둘러 보았지요. 초기 오클라호마 주 개척자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어요. 1층에는 초기 개척자의 삶, 성조기들, 아메리칸 인디언 갤러리,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수잔(Susan Powell)의 사진과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초기 카우보이와 로데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사실 2층에 전시된 많은 것들은 유명한 로데오 증권 도입자인 뷰틀러(Beutler) 형제들이 기증한 것들이라네요. 참 대단합디다.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거실 및 식당)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아이들 방)


옛날 생활용품들


당시 피아노


엘크시티의 역사를 보여주는 휘장


생활사 자료실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엘크시티 춣신의 수잔(Susan Powell)


로데오로 유명한 뷰틀러(Beutler) 형제들


로데오 회사 지분 일부를 뷰틀러의 아들에게 결혼선물로
양도한다는 증서


로데오 관련 포스터와 의상 및 소품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 및 랜드런을 소재로 한 그림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당시 카우보이를 묘사한 그림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이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이었어요. 그곳에 들어서자 길 가는 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길 주변에 흔히 있던 것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습디다. 옛날 풍의 차들, 주막, 레스토랑, 자동차 번호판 등과 미국 하이웨이의 서사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들로 전시장 안이 가득 차 있었어요. 특히 1955년도에 만들어진 핑크색 캐딜락, 자동차 영화관에서 고전적인 쉐보레의 임팔라(Impala)를 타고 앉아 감상하던 흑백영화 등이 압권이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전시된 각종 자동차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눈길을 잡아 두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 했어요.

 


매점 등이 들어 있는 건물


66번 도로 표지판들


66번 도로 표지판 도안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차량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자동차와 도로 상황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인디언 가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생활사 자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차량 번호판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1940년 셰보레에서 출시한
당시 최고급 자동차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화물적재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주유소와 군용 지프

 

 

거기서 나와 길을 건너니 붉은 색의 창고 형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데요. 오른쪽이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왼쪽이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만 보기로 했지요. 박물관에 들어서자 그곳을 지키시는 노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대뜸 물으시는 거예요.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신이 21살 때(1954) 부산에 미군으로 주둔해 있었다고 하시네요. 그 후 원주, 강릉 등으로 주둔지가 바뀌었던 모양인데, 고령으로 말씀은 어눌하셔도 우리나라에 대한 기억들을 분명히 갖고 계셔서 아주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 박물관에는 서부 오클라호마주 초기 농업과 축산업자들의 생활에 쓰인 도구들이 광범하게 수집, 전시되어 있었어요. 대장간의 실제 모습, 각종 풍차 콜렉션, 트랙터의 각종 시트, 각종 수수 탈곡기, 가시철망 콜렉션 등이 이채로웠어요.

 


왼쪽은 '대장간 박물관', 오른쪽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에서 만난 80대의 노인 관리자[21세 되던 1954년
한국에 파병되어 부산, 강릉, 원주 등지에서 근무했다 함)


박물관에 전시된 풍차


트랙터


농기구 전시장


밭을 갈던 트랙터의 일종


당시 주유기


당시 전화기들과 전화선 수리공의 모습


각종 농기구들의 전시장


당시의 각종 공구


당시의 각종 공구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는 미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풍차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농업에 바람을 이용한 이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지요. 지금도 이런 모습의 풍차들은 들녘에 많이들 서 있었어요. 말하자면 삶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모습이었지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자 철로와 역사(驛舍)가 재현되어 있고, 당시 사용되던 엄청난 증기기관도 생생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어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 전시된 각종 풍차들


엘크역에 근무하던 역장의 모습


당시 열차의 증기기관


재현해 놓은 당시의 오페라 하우스

 

 

***

 

텍사스 주를 기점으로 할 경우 66번 도로상에서 엘크는 에릭(Erick), 세이어(Sayre)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거점도시인 셈인데, 우리가 둘러본 박물관 역시 규모나 내용상 그에 걸맞은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특히 박물관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지요.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대부분 1980년대 말에서 1920~1930년대의 것들이었는데, 특히 자동차와 농업기계들에서 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시기 우리는 어땠나요? 사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농촌에서는 꼬박꼬박 지게로 짐을 져 나르고, 괭이와 쟁기로 논밭을 갈아 왔거든요. 그 경험을 저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목화밭에 나가 한 송이 두 송이 여린 손으로 목화를 따 앞자락에 담던 기억들이 왜 그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지요? 그런데 이들은 당시에 모든 일들을 기계로 해내고 있었어요. 목화 따는 일은 물론 목화로부터 솜을 뽑아내는 일까지 일관작업으로 해내는 기계를 이 박물관에서 목격하고 말았답니다. 하기야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수적이었겠지만, 우리와 너무도 대비되는 이들의 풍요로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 말대로 이들과는 잽도 안 되는우리가 이제 기술이나 무역의 면에서 이들과 경쟁을 벌이는 위치로까지 올라섰으니, 장하지 않아요? 가끔은 우리 스스로 자랑도 하고 살아봅시다. 어쨌든 다음 날 클린턴(Clinton)을 거쳐야 하는 우리는 조용히 깊어가는 엘크의 밤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지요.<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


당시의 우물


농기구 전시장에서 


오클라호마 지역의 가축 우리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3. 09:05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1-

 

 

손 형,

 

참 오랜만입니다. 그간 본의 아니게 격조했었군요. 오늘은 형께 모처럼 길 이야기를 건네 볼까 합니다. 뜬금없이 웬 길 이야기를 하느냐고 타박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가 작은 발과 짧은 다리를 움직여 꼬박꼬박 넘어 다니던 그 옛날의 시골길이 생각나시나요? 고갯길, 원둑길, 논둑길, 고샅길, 신작로 등 갖가지 길들이 이어져 우리의 시골길을 이루고 있었지요. , 혹시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기억하시는지요? 함께 감상해 보실까요?

 


목월 시인의 젊은 시절 모습<동리목월기념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시 속의 나그네가 단순한 존재는 아니겠지요. 아마도 그는 어떤 복잡한 사연을 갖고 길을 떠난 게 분명하군요. 물론 무작정 길을 떠났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달처럼 미끄러지듯 남쪽을 향해흐트러짐 없이 가고 있는 모양으로 보아 속으로는 어떤 목적과 사연이 있을 겁니다. 그가 가고 있는 길 또한 단순한 도로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시인도 남쪽지방으로 삼백 리나 벋어 있는 외줄기 길을 말했을 겁니다.

 

~길에는 온갖 사연들이 스며들어 있었겠지요. ‘사랑, 미움, 믿음, 배신, 약속등등 몇몇 기호로 요약되는 복합적 인간사가 이 길바닥에는 깔려 있을 겁니다. 길목 마다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는 주막에는 늘 술이 익어가고, 그런 술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사가 좀 복잡합니까? 얼굴 반반하고 몸매 고운 주모라도 있는 경우라면 더 복잡해지겠지요. 고속도로와 철길이 생기면서 옛길은 사라졌지만, 우리의 목월 선생은 그 옛길을 잘도 찾아내서 우리에게 힌트로 던져 주신 것이지요.

 


엘크시티에서 스틸워터로 오는 길

 

 

우리에게도 삼백 리나 되는 남쪽 길이 있었다는 걸 알려 주려는 노 시인의 마음 씀씀이가 제겐 감동 그 자체입니다. 아마도 서울에서 저 전라남도 혹은 경상남도 바닷가 어디쯤까지 이어지는 길이었겠지요. 그걸 찾아내어 복원하라는 것이 목월 선생의 묵시(黙示) 아니겠는지요?

 

요즘 제주도에서 시작한 올레길이 뜨면서 그와 유사한 둘레길도 나타난 모양입디다만. 숲이 있는 곳이면 마구잡이로 파헤쳐 길을 만들어 놓고는 사람들을 유인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습디다. 말하자면 요새 만들어지는 길은 스토리 혹은 히스토리가 없는 무미건조한 공간일 뿐이지요. 걷는 자들이 무언가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물리적인 길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목월 선생이 발견하신 남도 삼백 리와는 비교될 수 없지요.

 

 


이중섭의 <길>(이미지 갤러리)

 

 

***

 

이곳에 와서 지낸 몇 달 동안 여러 가지를 목격했습니다만, 가장 가슴 뛰는 일은 ‘66번 길을 발견한 일입니다. 처음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요. ‘참 할 일 없는 미국인들이라고 빈정거리면서 말이지요. ‘넓은 땅덩어리에 필요하면 길을 뚫고, 그 길이 불편하면 뭉개버리고 새 길이나 다른 길을 뚫는 게 예사이지, 그 무슨 길을 가지고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가?’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한 번 두 번 지나다니면서 이게 예사 길이 아니라는 점, 길이란 그저 다니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하는 단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지요.

 


여덟개의 주[일리노이-미주리-캔자스-오클라호마-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
-캘리포니아]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다니면서 적지 않은 걸 경험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에드몬드 시티(Edmond City) 근처의 아카디아(Arcadia)에서 발견한 POPS를 볼까요? 66번 도로를 달리다가 멀리 앞을 바라보니 '빨대 꽂은 음료수 병'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지나면서 보니 주유소였는데, 미국에는 주유소에서 음식도 팔고 물건도 팔지 않아요? 주유소라면 그 흔한 이른바 폴 사인(pole sign)’을 세워 놓든가 영 뭣하면 주유기 표시라도 세워 놓을 것이지 대체 '빨대 꽂은 음료수 병'을 세워 놓은 건 참으로 요상했어요.

 


POPS 주유소 마당에 세워진 '빨대 꽂은 병' 

 

그래서 우리는 그 다음번에 작정하고 이 주유소에 들어가 보았지요. 과연 레스토랑의 유리창이나 벽에는 온갖 음료수 병들로 또 한 겹을 이루고 있습디다. 사람들은 음식을 주문해 놓고 벽 쪽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들고 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밖에 서 있는 거대한 병 모양의 조형물은 바로 이 음료수 병들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것이더군요 글쎄.

 


POPS의 내부 앞쪽 창 

 

종업원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여기에도 내력이 있더군요. 이게 바로 체사피크 에너지(Chesapeake Energy)라고,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천연가스 생산 회사이자 원유와 액화천연가스의 11번째 큰 생산회사로서 오클라호마 시티에 본부를 두고 있는 그 회사의 CEO 오브리 맥클레돈(Aubrey McCledon)이 아이디어를 내고, 건축가 랜드 엘리옷(Rand Elliot)d이 디자인한 것이라네요. 2007년 여름에 문을 연 뒤 급속하게 66번 도로 관광의 매력포인트로 부상했다는군요. 66번 도로 주변을 돋보이게 하는 66피트 높이의 소다 병이 바로 이것이지요. 그리고 이 POPS는 주유소 편의점 안에 비치되어 있는 수백 종의 소다 향들과 각종 브랜드들을 자랑하고 있지요. 이 뿐 아니라 이 편의점과 함께 각종 버거, 소다, 셰이크 등 다양한 식당 음식들도 갖추어져 있구요. 여기서 우리는 66번 도로가 살아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이미 존재하는 66번 도로', 이 도로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 그리고 그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바로 66번 도로를 살려 낸 힘의 원천이었어요.  

 


POPS 내부 마트 

 

또 하나 예를 들어 볼까요? 이 주유소에서 멋진 음료수 하나를 골라 목을 축인 다음 다시 길에 올랐지요. 한참을 가다가 루터(Luther)라는  지역의 경계에 들어오자마자 길가에서 주차장인지 마굿간인지 버려진 폐가인지 언뜻 분간이 가지 않는 허름한 건물 하나를 발견했어요.

 

차를 세우고 보니, ‘66번 도로의 경계선 레스토랑[The Boundary Restaurant on Route 66]’이란 멋진 이름의 식당이었어요. 버려진 길가 건물을 외부는 그냥 두고 내부만 수리하여 레스토랑으로 개업한 경우이겠지요. 내가 보기에 내부는 온갖 앤틱 풍의 재료들로 덕지덕지 혼란스러웠지만, 미국인들의 성향은 잘 반영하고 있었지요.

 


66번 도로 Luther에서 만난 길가 '바운더리 레스토랑'


'바운더리 레스토랑' 의 문 


옛날 화폐를 이용한 이 식당의 인테리어 디자인이 눈에 띈다.

 

 

바비큐, 핫독, 소세지 등을 팔고 있는 그 집 음식의 맛은 그저 그랬지만, 중동계 이민의 후예로 자신을 소개한 주인은 자신의 요리와 식당의 인테리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식대가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끊임없이 들어 왔지요. 그들이 만약 속도와 시간의 경제성에 충실한 현대인이었다면, 이 길로 접어들어 오지도 않았겠지요. 경제성에 충실한 사람들 사이에 살다보니 많이 피곤을 느낀 사람들이 옛날의 66번 도로를 찾아 여행을 하는 것이고, 입맛이나 분위기 또한 지난 시절의 그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겠지요.

 


'바운더리 레스토랑'의 주방장 겸 주인이 요리하는 모습 


'바운더리 레스토랑'의 음식. 옛날 식 음식이라 함.


 '바운더리 레스토랑'에서 주인과 함께

 

 

그런 분위기, 복고풍이랄까요? 실제 삶에서는 절대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인의 일반적 성향 아니겠어요? 그런 현대인들이 가끔씩 자신의 공간 밖에서 순간적인 일탈을 꿈꾸는 것이고, 그런 일탈의 욕망이 66번 도로에 대한 향수로 표출되는 것이겠지요. 66번 도로를 복원시킨 사람들도 일반인들의 그런 심리를 간파한 것이겠고요. 그래서 이 길을 현대인의 경제논리를 넘어서는[beyond economic logic of modern people]’ ‘수퍼 하이웨이 66번 도로[Super Highway Route 66]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2. 12:58

 

 

미국에서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 지내기

 

 

 

#1 세관 검사나 입국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시카고 오헤어 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DS-2019 서류와 비자를 내밀자 그 여성 심사관은 , 풀브라이트, G-1, 팬태스틱!’하며 서류를 대충 훑어 보고 기본적인 사항만 확인한 뒤 선선히 통과시켰다.

 

#2 스틸워터(Stillwater)에 도착하여, OSU의 역사학과 사무실을 찾은 때는 섭씨 40도가 넘는 한여름 대낮이었다. 학과 비서 수잔(Susan Oliver)이 연구실로 나를 안내했다. 연구실 문 옆에 ‘Dr. Cho, Kyu-Ick/Visiting Fulbright Scholar’라고 선명하게 쓰인 명패와 깨끗하게 청소된 연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며칠 뒤에는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고 명시한 학과의 명함도 찍어 주었다. 정중하게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풀브라이트의 수혜자로서 이 학과를 연구기관으로 선택한 것은 내가 처음이란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껏 나는 그들이 내게 베풀어주는 호의에 감사하고 있었는데풀브라이터가 그들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도 영예일 수 있다는 점을 비로소 느껴 알게 되었다.

 


연구실 명패


한국에서 연구기관 신청의 메일을 보내자 마자 환영의 답신을 보내 준 대닐로위츠 학장

 

#3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셋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소셜 시큐리티 넘버[Social Security Number]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야 보험계약이나 은행계좌 개설을 할 수 있듯이, 이곳에선 그게 필요했다. 15년 전 LA에서의 기억으로 미루어 보면,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는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곳이었다. 당시 내 앞의 어떤 사람은 사무원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여 퇴짜를 맞는 경우도 보았다. 그런 기억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를 맞이한 나이 든 여성 사무원은 참으로 고상하고 친절했다. 시스템을 검색하더니 아내의 번호는 남아 있으나, 내 기록은 아예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풀브라이트로부터 받은 편의 요청공문과 미 국무성이 보증한 비자[U.S. Department of State (Fulbright Scholars Bearer Is Subject To Section 212(E)]를 보여주자, 놀란 표정으로 여기서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며 간단한 인적 사항만 확인한 후 일을 처리해 주었다.

 


친절한 직원을 만난 스틸워터의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

 

#4 거쓰리 시티(Guthrie City)답사하다가 박식하고 교양이 풍부한 찻집 주인을 만났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도중 서로의 연락 정보가 필요하여 학교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펼쳐 보더니 풀브라이트 학자시군요!’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끝내고 나가며 커피 값을 계산하려 하자 극구 사양했다. 우리는 팁이라 우기며 간신히 5불을 놓고 나왔다.

 


Guthrie City의 찻집에서 만난 지성적인 주인 셰릴(Cheryl)

 

#5 털사(Tulsa)에서 열린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가 끝나던 날, 주최 측에서 스틸워터까지 나를 태워 줄 자원봉사자를 주선해 주었다. 그는 OSU 털사 캠퍼스 행정부서의 고위직 인사였고, 털사에 살고 있었다. 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라이드 서비스를 받기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자기의 즐거움이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한 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를 운전해 왔다가 다시 돌아가셔야 하니 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자, 그는 풀브라이트 학자에게 이런 봉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부연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편했고, 그 역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털사에서 나를 태우고 스틸워터까지 왔다가 돌아간 Dr. Ron Bussert

 

#6 텍사스 주의 달라스(Dallas)시에 갔을 때였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달려 겨우 도착한 달라스는 오클라호마와 달랐다. 미국에서 다른 주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다른 도로 넘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한 우리였다.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면적이 우리나라의 두 배였다. 그러니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것과 오클라호마 주에서 텍사스 주로 넘어가는 것이 같을 리 없었다. 가보니 시내의 교통체계도 오클라호마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의 것이었다. 간신히 주차해놓은 다음, 아무래도 불안하여 막 떠나려는 어떤 중년 부부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차에서 내려 주차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네 차도 한국 차라며, 얼마 전 부산에 다녀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차종은 기아 소울이었다. 하도 반가워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찍고 나서 그의 이름과 주소 혹은 이메일을 물어보기 위해 내 명함을 건넸더니, 보고는 풀브라이트 학자라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Mr. Carl Smith]에게 사진을 보냈고, 그는 내게 정중한 답신을 보냈다. 그 답신 메일 가운데 우리는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뻤고, 더더욱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서 감격했습니다![We were delighted to meet you and thrilled to have met a Fulbright scholar!]”라는 문장이 있었다. ‘thrilled’란 말 속에는 전율을 느끼다, 기쁘다, 감격하다등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어떤 기분으로 이 말을 썼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매우 긍정적인 뜻으로 쓴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달라스의 한 주차장에서 만난 칼[Mr. Carl Smith] 선생 부부

 

***

 

1945년 아칸사(Arkansas) 주의 새내기 상원의원이던 풀브라이트(J. William Fulbright)가 입안하고 다음 해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사인함으로써 법안으로 성립된 것이 바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잉여 자산들에 주목한 풀브라이트 의원은 그것들을 팔아 교육, 문화, 과학 분야 학생이나 학자들의 교류를 통해 국제 친선을 증진시키는 자금으로 활용하자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1년 뒤 트루먼 대통령이 여기에 사인하여 확정을 본 것이 바로 이 법이다.

 

풀브라이트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사실 미국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년 미국 의회의 세출 승인을 받아 미 정부가 예산을 출연하고, 미국 이외의 국가들도 이에 상응하는 돈을 부담함으로써 문화 및 교육 교류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 프로그램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한국 내 Fulbright Commission한미교육위원단의 경우 한국과 미국 정부의 예산 출연으로 운영되며, 이 기구가 장학생 선발 및 프로그램 운영에 관한 모든 정책을 결정한다. 여기서 선발된 한국인 수혜자들은 미국에서 강의나 연구, 대학원 학위과정 이수, 중등교사 영어 연수 등에 참여하며, 미국인 수혜자들은 한국에서 강의 혹은 연구를 하거나, 중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

 

내 느낌으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학생이나 연구자가 누리는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색도 모른 채 연구비 주는 것만 고마워하다가 미국에 와서야 풀브라이트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내게 주어진 영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지내야겠다고 새삼 결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남들의 인식을 통해 풀브라이트의 진면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은 풀브라이트 수혜라는 영예가 내겐 일종의 개 발의 편자였던 셈이다. 아는 자만이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곰곰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0. 14:53

 

 

우린 언제쯤이나 존경할만한 대통령을 가질 수 있을까?

 

 

 

 

미국에서 알래스카 주 다음으로 크고 캘리포니아 주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내 느낌으론 미국 내에서 최고로 부유한 텍사스 주[State of Texas]의 달라스(Dallas)시에 와 있다. 1836년 멕시코로부터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다가 18451229, 미국의 28번째 주로 흡수된 텍사스 주. 이른바 '바이블벨트'로 불리는 이곳과 오클라호마 등 중남부의 여러 주는 전통적으로 높은 공화당 지지율을 보여주는 등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미국 입성 이래 서서히 쌓여온 피로에도 불구하고 달라스 행을 무리하게 시도한 것은 아무리 바쁘고 귀찮아도 오클라호마 주와 인접한 텍사스를 생략하고 떠날 순 없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나 초조감 때문이라 할까?

 

16일 오후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난 17일 오전. 도착 당일부터 오클라호마와는 현저하게 다른 교통체계와 북적대는 인파에 지친 우리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로 당장 돌아가고픈 마음이 절실했지만, 그 욕망을 잠시 억누른 채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

 

한 사람은 매사추세츠 주 출신의 35대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529~ 19631122] 대통령, 다른 한 사람은 텍사스 출신의 43대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76~ ] 대통령이다. 케네디는 가톨릭 집안 출신의 민주당적 대통령, 부시는 개신교 집안 출신의 공화당적 대통령이었다.

 


시민이 그려 박물관 계단에 붙여놓은 케네디 대통령의 초상화 

 

하버드대 정치학과 출신인 케네디는 44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46세에 암살되었고, 예일대 역사학과 출신인 부시는 200155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첫 임기를 마치고 2005년에 재선된 뒤 200963세까지 임기를 마친 행복한 인물이다. 정치경력으로는 케네디가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을 지냈고,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를 두 번째 역임하고 있었으니, 이만 하면 똑같이 대권을 거머쥔 두 대통령이지만 상당히 다른 인생역정을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취임연설을 하는 부시 대통령 

 

두 대통령의 가문이나 경력, 정치적 성향, 정책의 성패, 개인적 성격 등 자세한 사항들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 번거롭게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묘하게도 우리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50주년에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 점을 깨달은 우리는 달라스라는 같은 공간에 자취를 남긴 두 대통령을 찾아보고자 했다. 존경하는 대통령을 한 사람도 갖지 못했다고 자탄하는 우리 입장에서 이 좋은 기회에 대통령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먼저 방문한 곳이 이른바 ‘6층 박물관[The Sixth Floor Museum at Dealey Plaza]’.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가 창틀에 앉아 총을 쐈다는 교과서 보관창고 6층에 마련된 박물관인데, 사실은 일종의 사건 전말 영상 기록관인 셈이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이 이용한 교과서 보관건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음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 교과서 보관건물[오렌지색 건물] 6층 창문틀에서 오스왈드는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이 사진 속의 아스팔트 위를 지나던 케네디 대통령을 저격했다. 

 

19631122일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달라스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케네디 대통령은 딜리 플라자(Dealey Plaza) 인근의  교과서 보관창고 6층에서 오스왈드가 쏜 3발의 총탄 가운데 두 번째 총탄을 머리에 맞고 숨졌다. 이 사건의 전말이나 상세한 재판 과정, 저격범 오스왈드를 둘러싼 의혹 등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 크나큰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래서 그런지 사건의 발발에서 종말까지의 전 과정을 40여 장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박물관의 핵심 컨셉이었다.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나자 암살사건의 전모와 함께 왜 미국인들이 케네디 대통령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지를 석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외견상 허름하지만, 이 박물관은 매우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기획되어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위치 및 사이트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입구
                                                                                     


달라스를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시민들

 
                    어떤 시민이 그린 케네디 대통령

 
어느 초등학생이 표현한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애정

  

그 다음 방문한 곳이 조지 W.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George W. Bush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남부 감리교 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캠퍼스 안의 부시 대통령 센터 안에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 부시와 어머니 바버라 여사 및 부인 로라 여사 등을 비롯한 화목한 가족들, 학창시절과 군복무 시절의 각종 자료, 대통령 시절에 이룩한 대내외 업적들, 백악관 생활자료 등등. 엄청난 규모의 자료들이 생생한 사진들과 함께 기념관을 그득 메우고 있었다. 대충 둘러보아도 대통령 스스로의 자부심이 묻어날 뿐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더 나아가 세계인을 위해 미국 대통령이 걸어 온 영예의 흔적들이 역력했다. 정말로 이국인인 내가 보기에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대통령의 암살에 대한 전말이나 의혹, 기념관에 전시된 업적들의 화려함이 아니었다미국인들은 과연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걱정했던 대로 관람객이 많이 몰려 우리가 케네디 박물관에 입장하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고, 넓게 만들어진 부시대통령 박물관에서도 사람들의 어깨가 걸려 편안한 관람에 지장을 느낄 정도였다. 그 뿐 아니라 대부분 미국인들인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긍지에 찬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점들 만으로도 대통령에 대한 관심과 존경의 증거로는 충분했다.

 

케네디 박물관에서 만난 그들은 대부분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어폰에서 울려나오는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40대의 젊은 대통령이 단 2년 동안 이룩한 업적에 놀랐고, 그가 바로 이곳에서 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물론 숱한 여인들과의 염문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고, 쿠바 미사일 위기나 흑인 민권법 등에 관한 대처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진실이 밝혀지고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직은 비운의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을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고 있는 듯 했다. 대통령이 피격된 지점의 길바닥에는 지금도 x 표시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내 눈에는 그것이 십자가[cross]로 보였는데, 어쩌면 미국은 폭력으로 점철된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케네디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나 아닐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런 복잡한 생각 없이 이곳에  x 표시를  해 놓았으리라. 차라리 그어놓지나 말든지 이왕 표시하려거든 말뚝을 박아 새끼줄이라도 쳐놓든지. 공사장 인부들이 아스팔트에 굴착지점 표시하듯이 백묵으로 찍찍 엇갈려 그어놓은 모습이란! 그러나 그것이 미국인들의 장점이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피격당한 지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키 여사


케네디 대통령 추모비


추모비 안쪽의 상석

 부시 대통령 박물관에서는 역사 진행의 합리성에 맞추어 가고자 한 그의 노력들을 읽어냈고, 대통령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들로부터는 잔잔한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 박물관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부분 자긍심과 존경심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흐뭇한 미소들을 띠고 있었고, 나 역시 그랬다. 물론 이라크 전쟁을 두고 부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정책의 실수 혹은 판단착오는 그것대로 계산하면서도 대통령으로서의 전체적인 공적이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는 일은 민주국민의 성숙한 자세일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9월 12일 달라스의 Texas State Fair에서 아버지 부시와 함께.
부자 간의 다정한 모습과 미소가 국보급이지요?


세계적인 테러와 투쟁해온 부시 대통령


초등학교 교실에서 1일교사로 참여한 부시 대통령


어린이들의 건강 캠페인에 참여한 로라여사 모녀


2005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로라 여사가 어린이들과 함께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자연보호 활동을 펼치는 부시 대통령


연례 100km 산악자전거 대회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에서 오른쪽 발을 잃은
다니엘[Daniel Gade]소령을 부축하고 있다.


 자궁경부암과 유방암 치료를 위한 부시 연구소 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 잠비아 Kabwe의 Ngungu Health Center 리노베이션 작업에 나선 부시 전 대통령.
왜 우리 대통령들에겐 이런 모습이 없는 걸까요?


2000년 12월 대통령 당선자 부시의 인사말 "나는 한 당파에 봉사하기 위해 대통령으로
뽑힌 게 아니고, 한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뽑힌 것이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들의, 
모든 인종들의, 그리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대통령이다. 당신이 내게 표를 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나는 당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며, 당신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할 것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조지 W.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 앞면

 

그렇다면 그들을 보며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했는가. 같은 자신들의 대통령이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존경을 보내는 미국인들을 보며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내겐 그들처럼 존경할만한 우리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직을 맡아 수천만 생령(生靈)들의 기대와 소망(素望)을 한 몸에 받은 입장이라면, 더구나 자연수명으로도 이제 살만큼 산 입장이라면, 무슨 세속적 욕망을 다시 추구하고 싶단 말인가. 아주 낮은 자세로 봉사활동에라도 나서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받은 벅찬 사랑을 아주 겸허한 자세로 한 톨 한 톨 갚아나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었으련만, 하나같이 가당찮은 물욕과 권력욕에 찌들어 재직 중엔 신성한 대통령직을 더럽히고 물러나서도 오욕(汚辱)의 구렁텅이에서 지금껏 헤매고 있단 말인가. 국민들에겐 실망을 안겨주고 역사에는 더러운 자취를 남기는 그들을 어떻게 존경스런 대통령으로 대접할 수 있단 말인가.

 

케네디 박물관의 매점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샀다. 앤 보섬(Ann Bausum)<<Our Country’s Presidents>>란 책이었고, 이 책에는 조지 워싱턴부터 지금의 오바마 대통령까지 자랑스러운 얼굴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과연 우리는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란 자긍심 넘치는 책을 쓸 수 있게 될 것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11. 12:52

 

66번 도로[Route 66]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Yukon City)

 

 

 

 


66번 도로 가의 Arcadia Round Bahn에 전시 중인 66번 도로 표지판

 

 

우리가 유콘을 찾은 것은 112()이었다. 사실은 66번 루트에서 비교적 유명한 오클라호마시티 남쪽 엘크(Elk) 시의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National Route 66 & Museum)’, ‘옛 마을 박물관 단지(Old Town Museum Complex)’, ‘농업 및 목축업 박물관(Farm and Ranch Museum)’ 등 세 박물관들을 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선 길이었는데, 오클라호마시티에 들어오니 시곗바늘은 이미 11시 반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지는 스틸워터로부터 달려 온 만큼의 시간을 그로부터 더 달려야 하는, 100마일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도착하면 오후 2시쯤 될 것이고, 점심을 먹고 나면 3시쯤 될 것 아닌가. 난처했다. 박물관 하나를 겨우 보고나서 다시 되돌아 와야 하고, 되돌아오는 길 또한 300마일쯤이나 될 것이니, 오밤중이나 넘어서야 집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끔찍하게 드넓은 미국 땅. 그 중에서도 끝없이 펼쳐진 벌판의 왕국 오클라호마를 얕본 우리의 실책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출발했어도 쉽지 않을 거리였는데, 느직이 일어나 아침을 다 챙겨먹고 나선 길이니 여유롭게 돌아보고 오기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하이웨이의 출구를 빠져나와 주유소와 푸드마트, 구멍가게 등을 겸한 휴게소에 들렀는데, 마침 66번 도로가 그 휴게소 옆을 지나고 있었다. ‘작전 상 후퇴아닌 시간 상 노정 변경이었다. 마트에 들른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물으니, 하나같이 유콘시티를 추천했다. 그래, 오늘은 유콘을 탐사하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66번 길가에 묻혀 있던 유콘을 찾아낸 것이다.

 

***

 

시내에 들어서자 저 멀리 도시 입구 쪽의 메인 스트릿 양 옆에 원통형의 거대한 건물들이 서 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듯 그 건물들의 위압적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다가가 보니 두 건물 모두 제분공장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그 사이를 지나는 철길도 녹이 슬어 있어 이 제분공장에서 밀가루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알만한 단서는 아무데도 없었다. 퇴락한 옛날의 영화들이 건물 벽의 각종 글씨들에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제분공장들이라면 아마 이 근동 사람들이나 먹여 살리는 데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차에 실려와 조달된 밀을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그 기차로 다른 지역에 실어다 팔기도 했을 것이다.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리의 1차 관심처인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을 찾기로 했다.

 


유콘 제분소[Yukon Mill]-"유콘의 최고 밀가루"란 문구가 눈에 띈다


맞은편에 있는 또 하나의 제분소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그러나 작은 도시의 메인 스트릿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박물관을 찾았으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책자에 소개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규정상 미리 예약을 해야 볼 수 있으나, 오늘은 그냥 보여주겠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가니 80대로 보이는 깨끗한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은 캐롤(Carol Knuppel). 이른바 자원봉사 큐레이터였다. 건강은 좀 안 좋아 보였으나 맑고 지성적이며 자신들의 향토 역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유콘 역사박물관의 큐레이터 캐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캐롤과 백규 

 


생활사 관련 소장품을 설명하고 있는 캐롤


캐롤과 전직 소방관인 남편, 그리고 백규

 

폐교된 초등학교를 1 달라에 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개관한 박물관이었다. 우리가 이미 목격하고 온 밀가루 공장 유콘 밀(Yukon Mill)을 중심 컨셉으로 박물관의 콜렉션은 이루어져 있었다. 캐나디언 카운티(Canadian County)에 속한 유콘은 1891년 스펜서(A. N. Spencer)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클라호마시 인접 도시로 존속되어 왔다. 캐나다 카운티의 유콘 구역에서 있었던 골드러쉬(gold rush)를 바탕으로 명명된 유콘 시티가 지금은 오클라호마시티 직장인들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이 지역 농업의 중심지로서 대규모 제분작업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그런 역사적 바탕 위에서 비로소 우리는 Yukon Mill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콘의 시민들은 Yukon Mill에 대단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다는 말로 큐레이터 캐롤의 설명은 시작되었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체코인들의 자본으로 세워진 것이 이 제분소들이었다. 1891년 이 도시가 세워지고 철도까지 부설되자 이 도시는 급속히 번성하게 되었다. 1898년에 이르자 이 도시는 체코 이민자들의 보금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유콘은 '오클라호마의 체코 수도'로 알려질 정도였다.

 


박물관에 통째로 기증된 이발소


박물관 행사를 후원한 지역의 기업들


박물관 소장 사무용품


통째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치과의원


유콘시에 관한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해 놓은 자료들


통째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잡화상 콜렉션

  

1893년에는 소규모 제분공장인 유콘 제분 곡물 회사[Yukon Milling and Grain Company]가 사업을 시작하여 급속히 성장했고, 1915년에는 해외로 곡물을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그 첫 제분소는 없어진지 오래지만, 대형 곡물창고는 지금도 66번 도로와 철로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지금도 건물 북쪽의 외벽에는 유콘 제분소[Ykon Mills]”, “유콘 최고의 밀가루[Yukon’s Best Flour]” 등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동쪽에는 유콘 최고의 밀가루[Yukon’s Best Flour]/미국 최고급 근대 제분소[No finer or more modern mills in America]/유콘 제분 곡물 회사-유콘 오케이/유콘은 오클라호마의 체코 수도[Yukon Czech Capital of Oklahoma]” 등의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정부는 이 회사로부터 많은 밀가루를 사다가 굶주린 동맹국들을 도왔다는데, 그 덕에 이 회사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콘밀 관련 자료들과 설립자들


유콘밀 관련 자료들

 

유콘 제분소를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 산업과 경제 관련 생활사 콜렉션들을 설명한 다음, 캐롤은 우리를 1층으로 인도하여 이 학교를 거쳐 간 졸업생들과 교사들의 사진이 가득한 방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물론 각종 교과서, 학용품, 학교 비품, 생활기록부 등 학교와 학생들에 관한 생생한 자료들이 방 안에 그득하였다. 일종의 살아있는 아카이브(archive)였다.

 


학교 졸업생 관련 자료들


학교 졸업생 관련 자료들


1959년 교사들 사진

 

***

 

박물관은 작았지만, 그곳의 콜렉션들은 1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는 이 도시의 삶을 보여주는 스토리의 원천이었다. 설명을 들으며 폐교를 비싼 값에 매각, 처분하는 우리나라가 문득 생각났고, 무사려한 처사가 나를 많이 안타깝게 했다. 이곳에서는 폐교를 단 1달라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 넘기고, 그 공간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쓰도록 도와주고 있다 한다. 이미 썩어버렸거나 엿장수들의 손에 엿 값으로 넘어가 지금은 모조리 사라진 우리 고향의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보관, 전시할 지역 박물관을 폐교에 만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비까번쩍한건물로 우리의 외면을 치장한들 무엇 하랴. 역사와 스토리가 빠진 도시는 영혼이 빠져나간 인간의 육체나 마찬가지! 그런데 이들은 폐교를 활용하여 자신들이 스스로 모은 생활사 자료들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이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원봉사 큐레이터 역할을 함으로써 선대로부터 이어온 삶의 모습과 문화를 계승, 보존하며 후대로 이어주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철저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66번 도로의 역사성과 유콘 시티에 대한 부러움을 함께 느끼며, 우리는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입구 쪽 코너에 세워놓은 박물관 간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 14:02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마지막 날-좀 더 커진 마음을 안고 다시 스틸워터(Stillwater)!

 

 

 

짧았지만,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4일 만에 이 땅에서 일어난 수백년 격동의 역사를 추체험하는 일이 어찌 간단하겠는가. 종족과 종족이 맞붙어 수백 년 삶을 이어온 터전을 뺏고 빼앗기는 투쟁이 바로 이 땅에서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그 불씨는 꺼지지 않은 채 내연(內燃)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했다. 이 땅의 많은 학자들이 현장을 밟으며, 연구실에서 이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분석하고 예측하며 바람직한 방안을 연구해오고 있지만, 누가 그 정답을 알겠는가. 그 옛날 해저(海底)가 융기하여 하늘을 찌르는 산이 된 것처럼 어느 순간 역사의 주인은 바뀔 수도 있고, 수백 년 차별의 질곡에서 신음하던 자들이 채찍을 손아귀에 쥐는 순간도 있을 것 아닌가. 웅웅거리는 바람을 안고 누워 우리에게 겸허를 일깨워 주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의 드넓은 가슴을 보라.

 

***

 

큰 일정 대부분을 마무리한 토요일 아침. 이 날이 마침 36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털사 시민 마라톤의 날이었다. 어디서 그렇게들 모여들었는지 평소에는 한산하던 도로가 사람들로 가득했다. 호텔 바로 앞이 출발선이기 때문인지 적지 않게 시끄러웠다.

 


호텔 창 밖으로 보이던 성가족 성당


시민 마라톤 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공연 준비를 하는 악단(City of Tulsa Pipes & Drums) 


악단의 드러머 매튜씨[Mr. Matthew] 


출발선에 그득히 모여 신호를 기다리는 시민들 


출발신호와 함께 달려나가는 시민들

 

 

한 시간 늦게 아침식사를 하고 마무리 토론과 정리를 위해 호텔 2층의 시마론 볼룸(Cimarron Ballroom)에 모였다. 모두 개운한 표정들이다. 10여 개 조로 나뉘어 지난 며칠간의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토론을 벌였다. 이곳에서 얻은 견문에 각자의 모국을 결부시켜 바람직한 방안을 찾는 것이 핵심이었다. 모두들 자기 나라의 형편이나 상황을 설명하기에 열을 올렸다. 따지고 보면 땅덩어리나 자원, 인재 등 모든 것을 두고 보아도 미국만한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참석자들 모두 자기 나라의 장점을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큰 의미는 없겠지만, 그 모두는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리라. ‘자신의 나라도 미국처럼 이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적 사고의 표출이었으리라. 마지막 토론을 주관한 베키[Becky Collins, President and CEO, Tulsa Global Alliance], 마캄 박사[Dr. J. Markham Collins, Professor of Tulsa University], 덕 프라이스 박사[Dr. Doug Price, Dean of Global Education, Tulsa Community College]도 참석자들의 말들을 정리하고 요약하면서 연신 고개들을 끄덕거린다. 각국의 사례들이 그들에게 큰 참고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토론과 보고의 마무리 과정도 끝이 났다.

 


마무리 토론에 참여한 참가자들

 

***

 

방에서 짐을 꾸려 내려오니 스틸워터까지 나를 태워 가기로 약속한 론 박사[Dr. Ron Bussert, Vice President for Administration and Finance]가 벌써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티룸으로 모시고 가 커피 대접을 하며 통성명을 했다. OSU 털사 캠퍼스에 근무한다는 그 분의 집은 털사 시내에 있었다. 그러니 나를 집에 내려 준 다음 다시 그 길을 되짚어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하나의 약속을 받아냈다. 론 박사도 점심 전이고 나도 내 아내도 점심 전이니 스틸워터에 도착한 다음 점심 대접을 하겠다는 제의를 했고, 그 제의를 그 분이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미안감이 약간은 덜해졌다. 그 순간부터 이곳 풍습에 따라 편안한 마음을 갖기로 했다. 스틸워터의 집까지 오는 데 1시간 남짓 걸렸으나, 서로가 궁금한 게 많아서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 새 집 앞이었던 것이다. 아내를 불러내 그 분과 함께 괜찮은 레스토랑 프레디폴스(Freddi Paul’s)’로 직행했다. 토요일 점심이라선지 식당은 한산했고, 음식은 달았다. 나지막한 어조로 자상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론 박사는 참으로 편한 상대였다. 나누는 대화도 맛이 있고, 먹는 고기 맛도 일품이었다. 하이클라스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교양의 정도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두 시간 가까운 식사 동안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가벼운 피로가 기분 좋게 몰려드는 토요일 오후였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Ron 박사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Ron 박사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