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3. 22. 14:50

1월 30일 오전 8시 마드리드의 젬마 호텔을 나섰다. 날씨는 쌀쌀했으나 하늘은 맑았다. 마드리드 인근 세고비아(Segovia)를 찾아가는 길. 설레는 마음 한 구석으로 서운함이 슬며시 찾아들었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 그간 숨겨 두었던 보물, 세고비아로 향하게 된 것이다.

 호텔로부터 1시간 남짓 달렸을까.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나오고, 그 중심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시가 참하게 앉아 있었다. 한때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해발 1000m 고도(高度)의 고도(古都)였다. 이곳이 양모 산업의 중심이라 하나, 주변에는 밀밭과 보리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맨 처음 찾은 곳은 로마 수도교(水道橋). 유럽 곳곳에 남아있는 수도교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된다는데, 길이 728m, 높이 28m의 거대한 규모였다. 오늘날처럼 시멘트를 사용하는 대신 화강암 블록만을 2단의 아치형으로 쌓아올려 만든 다리인데, 기원 1세기경 트라야누스 황제시대에 만들었다 하니 그 기술수준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멀리 보이는 푸엔프리아 산맥에서 발원되는 아세베타 강물을 이곳 세고비아로 끌어들였으며, 지금도 수로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놀라운 지혜와 기술이여!

 수도교 앞에는 이곳에서 4대째 이어오는 ‘아기 통돼지 찜 요리’로 유명한 식당이 있었다. 이곳 말로 ‘꼬치니조’라 불리는 요리는 하몽, 빠에자, 아세이뚜나(올리브 절임) 등과 함께 스페인에서 맛보아야 할 4대 요리라 한다. 시내의 시외버스 주차장 광장에는 이 집의 창시자가 동상으로 남아 있었다.

 수도교를 구경한 우리는 비좁은 구시가의 골목을 지나 마요르 광장에 도착했다. 마요르 광장 한쪽에는 카테드랄이 우아하면서도 압도적인 자태로 서 있었다. 카테드랄은 1521년 코무네로스의 반란에 의해 크게 파괴되었으나 그로부터 4년 뒤 카를로스 1세가 재건을 시작해 1577년 완공되었다. 후기 고딕양식으로 전면에 걸쳐 우아함이 넘쳐났다. 구시가의 중심가에서는 이 성당 말고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미안 성당, 산 에스테반 성당 등이 보였는데, 모두 이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이었다. 산 미안 성당은 12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며 산 에스테반 성당은 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인 점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산 에스테반 성당의 경우 높이 53m나 되는 종루가 두드러졌다.

 무엇보다 우리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알카사르의 아름다움이었다. 디즈니의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이라 할 만큼 세고비아의 알카사르는 빼어나 보였다. 에레스마 강과 클라모레스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우뚝한 바위산에 서 있는 알카사르. 13세기에 축성된 이래 여러 차례의 증․개축이 이루어져 왔다. 원래는 왕실의 중심되는 성으로서 아사벨 여왕의 즉위식과 펠리페 2세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으며, 후대에 들어와 감옥으로 쓰이기도 하고 무기 제작소로 쓰이기도 했다.

엄청나게 깊은 해자를 건너 알카사르에 들어가니 역대 제왕들의 호화로운 삶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언덕 아래의 강물이 아득하게 실낱처럼 보일 정도로 이 성은 전략적 요충이기도 했다. 돈 후안 탑에 오르자 세고비아의 거리와 오고가는 사람들이 또렷이 보이고, 멀리로는 과달라마 산맥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멀리 보면 동화 같은 성채가 가까이 다가가 보면 온갖 영화와 우여곡절을 함축한 서사적 문맥으로 인식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인간사 모든 것이 ‘보는 거리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 세고비아의 알카사르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리라. 모를 때는 그다지 마음 당기지 않던 곳이었으나, 막상 와 보니 매력적인 곳이 스페인이었다. 곳곳에 널려 있는 역사의 흔적들과 문화의 적층(積層)은 유럽의 어느 국가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았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온난하고 습윤한 바람 때문인가, 사람들의 마음을 달뜨게 만드는 매력이 물씬 풍겨났다. 따지고 보면 스페인에 대한 갈증 만 키운 며칠이었다. 그런 스페인을 오늘로 이별한다. 피카소를 낳았고, 세르반테스를 낳은 나라. 많은 예술가들과 문학가, 탐험가들을 낳아 키운 나라. 역사의 도정에서 잠재된 정열을 간혹 활화산처럼 무섭게 터뜨려온 나라. 무적함대로 대양을 누비며 세계를 제패했던 나라...

나는 여기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 스페인에서 찾아낸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며 한동안 고민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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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로부터 세고비아 시내 이정표, 세고비아 시가지 원경, 세고비아 로마 수도교, 세고비아 꼬치니조(아기 통돼지 찜)의 원조, 세고비아 대성당, 세고비아 알카사르, 알카사르 앞마당의 John 2세 동상, 알카사르, 알카사르 해자 앞에서, 알카사르, 알카사르 아래 쪽에서, 알카사르 아래쪽에서, 마드리드 시내에서 만난 스페인 남자와 강아지, 프라도 박물관, 프라도 박물관의 고야 동상, 프라도 박물관의 노점상, 마드리드 하몽 전문식당, 마드리드 하몽 전문식당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27. 05:10
 

똘레도를 출발하여 그라나다로 향하는 길. 드넓은 스페인의 평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도 가도 산하나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다. 들판은 정연하게 늘어선 올리브 나무들. 뿌리와 꼭지만 남아 새 계절의 발아(發芽)를 꿈꾸는 포도나무들, 장미의 농원, 그리고 푸른 보리밭이 전부였다. 과연 스페인은 농업의 대국, 풍요가 땅 전체에서 넘쳐 났다. 면적 505,955평방킬로미터, 남한 면적의 약 5배에 달하면서도 인구는 4,350만명에 불과했다. 1인당 연평균 소득 3만 5, 6천불에 이르는 부국의 기틀이 이처럼 평평하고 기름진 땅에서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구역이 바로 라만차 지방. 돈키호테의 고향이었다. ‘건조한 땅’을 이르는 아라비아어 ‘라만차’. 작은 나라 대한민국 백규의 눈에는 부럽기 짝이 없었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황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 심은 올리브 나무들은 이곳의 황량함을 덜어주고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시대와 사회에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 세르반테스(1547~1616)의 의중이 라만차를 달리는 내내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그가 태어나 활약하던 시기는 이미 중세가 끝난 시점이었으나, 아직도 구체제가 남아 세력을 발휘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세르반테스로서는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요구와 시대정신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돈키호테라는 정신 나간 인물을 등장시켜 구체제의 시대착오적 허구를 통렬히 웃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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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게소 벽에 붙어 있는 동키호테>

 버스를 타고 지나다가 풍차마을을 만났다. 캄포 데 크립타나(Campo de Criptana)! 복잡한 마을 이름이었으나 언덕 위엔 10개 정도의 풍차들이 서 있었다. 언덕에 올랐다. 거대한 풍차였으나, 이미 맥박은 정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덕에 불어대는 바람은 사정이 없었다. 바람은 모자를 날리고 입을 얼려, 말을 이룰 수 없었다. 아, 이 바람. 이런 바람이라면 그 옛날엔 웅웅거리며 이 거대한 풍차를 돌릴 수 있었겠다! 어둑발이 내린 평원 저쪽을 걸어오던 돈키호테에게 언덕 위에서 소리 내며 돌아가는 풍차는 아주 도전적인 존재로 등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창을 비껴들고 풍차에 달려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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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고, 풍차 아래쪽의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에 언 몸을 녹이며 라만차의 아랫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들이 정겨웠다. 저 동네 어느 골목에선가 로시난테에 몸을 맡긴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를 대동하고 뛰어나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시내에는 요소마다 돈키호테의 상이 서 있었다. 소설 <<돈키호테>>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었다.

 캄포 데 크립타나로부터 차를 달려 30분 만에 도착한 곳이 푸에르토 라피세(Puerto Lapice). 이곳에서 ‘벤타 델 키호테’를 만났다. ‘돈키호테의 정자’로 번역되는 이름의 허름한 주막 겸 레스토랑이었다. 돈키호테가 대관식을 가진 곳이 바로 이 집이라는 것. 우물도 있고, 장창을 곧추 잡은 돈키호테도 서 있었다. 가게에는 돈키호테의 캐릭터 상품들이 그득했다. 돈키호테를 뜯어먹고(?) 사는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갖고 있는 스페인과 스페인 사람들이 새삼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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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26. 06:05
 

스페인과의 첫 상봉, 돈키호테를 만나다


아침 8시 40분 인천공항을 출발, 암스테르담 국제공항에 도달한 것이 유럽시각으로 오후 12시 34분. 12시간의 먼 거리였다. 2시에 암스테르담을 떠나 4시 30분에 드디어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로부터 무려 15시간이나 걸린 장도였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지만 바람은 매섭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 눈이 쌓이고 한파가 맵게 몰아쳤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착륙 직전 비행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공항 주변의 마을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유럽을 돌면서 나를 주눅들게 했던 아름다운 건축들의 추억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드디어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나라에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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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워지기 시작한 마드리드 시가지>
 
600만의 대도시 마드리드. 재작년 대비 35%나 감소할 만큼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지만, 그래도 마드리드는 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었다. 아토차 역을 지나 프라도 미술관, 솔광장 등을 지나 사바티니 정원, 바일렌 거리를 지나 스페인 광장에 도달했다. 스페인 광장에서 산호세 교회 앞까지는 대략 1.3km에 달하는 그란비아(Gran Via), 말 그대로 ‘대로(大路)’가 펼쳐져 있었고, 이곳이 마드리드 구시가의 중심이었다.

 왕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원형지붕을 지닌 엄청난 자태의 산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이 좌정하고 있었다. 바일렌 거리와 만나는 마요르 거리(Calle Mayor)를 따라가니 마드리드 시청사, 시장 관사 등으로 빽빽이 둘러싸인 광장이 나왔다. ‘마요르’란 시장(市長)을 뜻하는 ‘메이요(mayor)'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톨레도 거리와 마요르 거리가 만나는 곳의 남동쪽에는 마요르 광장이 있었다. 마요르 광장에서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솔광장이 다시 나왔다. 솔광장으로부터 알카라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가니 왕립 산 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가 등장했다. 국회의사당과 이코 미술관 등은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산 페르난도 미술아카데미로부터 알카라 거리를 거쳐 약간 동쪽으로 이동하니 다시 그란비아와 합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시벨레스 광장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리 넓지 않은 곳을 한 바퀴 돈 셈이었다.

 그러나 어둑발이 들 무렵, 그란비아가 시작되는 곳의 스페인 광장은 처음 만나는 마드리드에서 무엇보다 감동적인 공간이었다. 형형한 눈빛의 돈키호테가 장창을 꼬나든 채로 날아오를 듯 기세가 등등했다. 옆엔 나귀를 탄 산초 판사가 그 반대쪽엔 연인 둘시네아가 돈키호테를 옹위한 채로 서 있었고, 돈키호테의 뒤로 세르반테스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앉아 있었다.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는 이 기념비는 스페인 빌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마드리드 타워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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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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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광장 앞의 플라타너스 길과 노인들>

어릴 적 만난 돈키호테는 촌놈인 내게 스페인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 적이 있었다. 소에게 풀을 뜯기러 찾아간 바닷가 백사장의 햇살 따가운 모래밭에 누워서 누군가가 번역한 <<동키호테>>를 읽었다. 책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읽어도 읽어도 다함없는 재미가 샘솟았다. 오늘 그 스페인에 온 것이다. 3년 반 전 자동차로 유럽을 돌다가 그만 ‘초읽기’에 몰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던 스페인이다. ‘말꼬리에 붙어 천리 간다는 파리’처럼 나도 수준 높은 일행의 꽁무니에 슬그머니 붙어 만리 장도 스페인을 밟았으니, 열 두어 살 시절 촌놈의 꿈을 지금서야 이루는 셈이다.

 오늘 밤엔 꿈이나 거창하게 꾸어볼 일이다. 스페인이여, 부디 내 품에!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