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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1.01
글 - 칼럼/단상2011. 2. 2. 14:37


  <올리브산 예수승천교회 표지판>

  <예수승천교회 모습>

  <예수님이 밟고 승천하셨다는 돌>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순례객들>

 <승천교회 문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순례객들>

  <교회 앞 길가에 서 있는 올리브 고목>
  

  <승천교회에서 주기도문 교회 가는 도중에 만나는 계곡의 민가들>

  <올리브산 쪽에서 예루살렘 성 방향으로 내려가며>

  <올리브산에서 건너다 본 예루살렘 성 안과 밖의 풍경> 
 
  <승천교회 입구>


이스라엘 제1신 : 올리브산, 그 초월과 극복의 공간 

 

2011년 1월 9일, 이스라엘에서의 첫날. 쌀쌀한 날씨 속에 올리브산을 찾았다. 전망산, 시온산[성전산]과 함께 기독교 상징의 극치를 보여주는 올리브산. 그 정상에 자그마한 성전[예수 승천교회]이 아랫마을들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증거의 자리를 드디어 만나는 순간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시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예수님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누가복음』(24장 50~53절)>는 기록으로 나타난 곳. 바로 승천교회였다. 올리브 이파리들은 쌀랑한 바람에 흔들리고, 밀려드는 순례자들은 비좁은 교회 내부 한 복판의 돌에 연신 친구(親口)의 예를 행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발을 디디셨다는 바위. 위쪽엔 이슬람 세력이 씌웠다는 둥근 돔이 하늘을 막았고, 돌 벽의 창틈으론 비둘기들이 들락거렸다. 문밖에는 아랍 청년으로 보이는 노점상이 순례자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고, 주변은 돌투성이의 황무지였다. 대체 예수님의 말씀이 저 척박한 돌들 사이에서 어떻게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세상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지, 경이로운 일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정교회 사제가 순례에 나선 한 무리의 아이들을 이끌고 들어와 예배를 집전한다. 그의 무겁고 둔탁한 표정이 사방의 돌들에 햇살로 부서지는 성령을 받아들인 것인지, 자못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교회 밖으로 나오니 늙은 올리브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쪽과 건너편 예루살렘 성 밖은 온통 석관들이 할 말 많은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듯 열 지어 누워있었다. 지금까지 양지 바른 언덕에 누운 저 석관들의 수를 과연 헤아려본 자가 있었을까. 건네다 보이는 예루살렘의 성채는 말없이 세상을 안과 밖으로 나누고 서 있는데, 그 안과 밖은 말하자면 삶과 죽음의 공간이었다. 성 안은 산 사람들의 세계, 성 밖은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나 할까.

 

유독 황금사원이 두드러져 보였다. 지금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여 무슬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그곳이 그들에겐 3대 성지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 황금빛이 너무 강렬하여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어쨌든 성 안은 살아있는 생명의 공간이었다. 이승의 삶을 마감하면 분문(糞門)을 통해 양지 바른 성 밖의 공동묘지로 나아가 누운 채 부활과 영생을 기원하는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네 서민들이 술 한 잔 거나해지면 부르는 노래 <성주풀이>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 고금을 통해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기 저 모양 될 것이니 엘화 만수 엘화 대신이야!”라는 노래만큼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절절한 아우성이 또 있을까. 중국의 북망산(北邙山)은 낙양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던가.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는 성문을 열자마자 그곳이 바로 북망산이었다. 이곳 사람들도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며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인 저승을 꺼렸으리라. 이왕이면 여럿이 함께 누워 두려움들을 덜어보려 했을까. 베이지색에 가까운 석관들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신 이곳 올리브산에서 그 모습을 건너다 보시고 예수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으리라. 곧 무너질 예루살렘 성을 생각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욕망의 삶에서 허우적대는, 어리석은 인간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올리브산 정상에서 5~6분 걸어내려 간 자리에 눈물교회가 조용한 자태로 서 있었다. 제자들이 잠든 모습을 보시며 잠시 후 로마군에 체포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며 안타깝게 기도하던 바위. 그 위에 세워진 만국교회도 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신 유적들이 나그네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들고 말았다.


세속의 권력에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승천하신 공간에 그득하게 남아있는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증거의 한 끝이나마 잡을세라 줄줄이 누운 시신들이었다는 것. 인간의 어리석음이 만발한 욕망과 허무, 그러나 끝내 초월과 극복의 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승리의 현장이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 1. 14:33


술 

                                                                                                                                                           조규익

어딜 가나 술이 있고, 술 때문에 문제도 생긴다. 성 추행범 등 파렴치범들을 붙잡아도 대개는 술 핑계를 대곤 한다. 난동을 부리고 나서도, 사람을 폭행하고도 술 핑계만 대면 된다고들 생각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애꿎은 술만 억울하게 생겼다.

***

가뭄에 콩 나듯, 술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다. 술이 들어가면 사람들 사이의 벽이 허물어져서 좋고, 오랜만에 ‘큰소리, 흰소리’를 겁 없이 내뱉을 수 있어서 좋다. 심한 주사(酒邪)만 아니라면, 술 몇 잔에 ‘곱게 취할’ 정도의 주량이라면, 술이란 인생의 윤활유가 아닐까. 세상의 아내들은 남편들이 술자리에서 실수할까봐 속을 태운다. 술 마시고 들어온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여자를 쳐다만 봐도 ‘성추행범’으로 몰리는 게 요즈음의 세태가 아닌가. 그러니 세상의 조신한 아내들이 늦은 시각에 남편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조바심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세상의 아내들이여! 몇몇 ‘주태백’을 뺀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저 취한 척할 뿐이란 사실을 알아주오. 그들은 값싼 술 몇 잔의 힘을 빌어 대낮에 뱉어내지 못한 ‘흰 소리, 큰소리’를 치며, ‘낙양성 십리허에~’로 시작되는 <성주풀이>나 목청껏 부르며 마음속의 찌꺼기들을 배설하고 있는 거라오. 그들의 흰 소리를 무슨 실정법으로 다스릴 수가 있겠소? 아니, 다스릴 필요가 있겠소?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 술 마시고 흰 소리 한 마디 내뱉지 못한다면, ××두 쪽을 싹뚝 잘라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

중국의 주호(酒豪) 유령(劉伶)은 천하의 명문 「주덕송(酒德頌)」을 남겼는데, 그 중의 한 부분을 운문으로 바꾸어 놓으면 다음과 같다.

 

여기 대인 선생이 있다네.

태초 이래의 시간을 하루로 보고,

만세의 긴 세월을 잠시라 생각한다네.

해와 달을 빛을 비추는 창문쯤으로 생각하고,

넓디넓은 천지를 집안의 뜨락이나

동네의 네거리쯤으로 생각한다네.

마음대로 활보하고, 좁은 곳을 싫어하니

그에게 집이 있을 수 없다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자리 삼아

마음 가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네.

멈추면 작은 잔, 큰 잔 가리지 않고 술잔을 기울이네.

어디를 가도 술통과 술독을 끌어당겨 술 마시기를 힘쓰니,

그 나머지 일이야 어찌 알겠는가?

귀한 인사들과 귀족의 자제분들, 높은 벼슬아치와 처사들

서로 흥분하여 칼날을 세우듯 대인 선생을 나무라나

선생은 술단지와 술통의 술을 마시고

술에 젖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두 다리를 뻗고 누울 뿐,

누룩을 베개 삼고 술 찌게미를 자리삼아 누울 뿐이라네.

온갖 생각과 근심이 사라지고, 즐거움만이 도도하다네.

홀로 우뚝 취하고 황홀한 기분으로 술에서 깨어난다네.

고요히 귀를 기울여도 하늘을 찢는 우레 소리 들리지 않고,

아무리 눈을 떠도 태산의 형체 보이지도 않는다네.

살갗을 파고드는 한서(寒暑)의 고통도 없고

무엇을 즐기고픈 욕망도 사라진다네.

만물이 뒤섞여 있는 속세를 굽어보며

모든 것을 양자강에 떠 있는 부평(浮萍)처럼 생각하고

선생을 성토하는 무리들을 나나니벌이나 푸른 배추벌레쯤으로나 여긴다네.

 

얼마나 멋진 배포이냐? 술 마시며 패거리 짓고 죄 없는 이웃을 안주 삼아 씹어대는 요즘 세상의 좀팽이들과는 비교도 하지 말라!

우리에게도 주호(酒豪)는 있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음주행각은 철학 차원의 정신적 바탕을 갖추고 있었으며, 김동명(金東鳴)의 <술노래>는 만세토록 이어갈 만한 절창이다.

 

샛말간 유리컵에

흥건히 고인 호박 빛 액체,

나는 무적함대의 사령장관인양 자못 호기로이

나의 적은 해양을 응시한다.

 

동구란 해안선에

넘치는 흰 거품,

아하, 인류 百億 해의

역사가 서렸구나.

 

안개인양 자욱이 피어오르는 향기 속에

시간은 갈매기 같이 날으고,

나의 좌석은

갑판보다도 더욱 흔들거린다.

 

어허, 이것 봐라, 하늘이 도는구나

물매아미 같이 뱅글뱅글 하늘이 도단 말이,

저 놀랍고도 새로운 천문학적 진실 위에

세대의 윤리는 성좌 같이 찬연하다.

 

여보게, 나는 이제

이 호박및 액체가 주는 마술을 빌어

나의 새끼손톱으로

요놈의 지구덩이를 튀겨버리려네.

 

유령이 말한 ‘대인선생’보다 훨씬 호탕하고 그럴싸한 주호(酒豪)를 김동명은 그려냈다. ‘호박 빛 액체’라면 대충 막걸리와 유사한 술이었을 텐데, 대체 몇 말을 마셔야 하늘이 돌고 지구덩이가 손톱만큼 작아진단 말인가.

***

가끔씩 막걸리 그득한 대접을 뚫어져라 응시해보기는 하지만, 새가슴처럼 작은 나의 배포로는 큰소리도 흰 소리도 못 치고, 기껏 기어들어가는 목청으로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를 웅얼거리며 인생의 허무함이나 달래볼 따름이니, 세상의 아내들이여! 혹시 남편들이 술자리에서 실수나 하지 않을까, 부디 전전긍긍하지 마옵소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