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9. 18. 12:07

 

 


오클라호마 장터축제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며


축제장 입구에서


축제장의 모습


장난감 부스 옆을 지나며


장난감 부스들의 모습


축제장 입구에서 만난 바비큐장


익어가는 바비큐


만화가와 가족들


칼 가는 장인의 포스


스시 장인의 맵짠 눈길


짐 노릭 경기장 앞에서


 노릭 경기장 안에서(Disney on Ice의 한 장면)


축제장 안에 설치된 모터쇼의 현대차

 

문화답사1

 

오클라호마 스테이트 페어(Oklahoma State Fair)

 

 

해외의 어디를 가든 우리의 1차적인 관심 대상은 박물관이나 교회 혹은 성당이었다. 그런 공간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912.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뒤 최근까지 분주히 지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9월도 반 가까이나 흘러 버렸다.

 

아뿔싸.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텍사스나 아칸소, 미주리, 캔자스 등 오클라호마 주변 지역들은 고사하고 오클라호마의 문화답사조차 물 건너가는 것 아닌가. 그 때 마침 우리 숙소를 관리하는 OSU의 FRC[Family Resources Center]로부터 입주민들에게 인근의 오클라호마 시에서 열리는 오클라호마 스테이트 페어[Oklahoma State Fair]’를 구경시켜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오클라호마 스테이트 페어’란 쉽게 말하여 주() 차원의 장터축제였다.

 

우리는 박물관, 교회, 혹은 성당이라는 문화답사 1순위의 원칙을 깨고 무조건 버스에 올랐다. 지금 살아 움직이는 삶의 문화를 느끼려면 박물관보다도 그곳이 썩 나은 현장이었다. 토요일 아침 830분에 출발한 버스는 1시간 남짓 달려 축제장에 도착했다. 드넓은 평원의 울긋불긋한 포장들. 어째 낯이 익다 했더니, 바로 우리나라의 무슨 무슨 축제장들, 바로 그 모양새 아닌가.

 

실제 들어가 살펴보니 각종 먹거리, 아이들 장난감, 놀이기구, 의상, 생활용품, 세계 자동차 쇼 등 종류나 품목들이 다양하고, 한 구석에 아이스링크를 갖춘 큰 경기장[Jim Norick Arena]도 자리 잡고 있었다. 축제장 중앙에 큰 규모의 모터쇼[현대기아자동차의 빛나는 신차들도 큰 자리를 잡고 구경꾼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나 아레나에서 열리는 디즈니 아이스 발레단의 공연만 빼고는 여느 우리나라 지역 축제들과 유사한 포맷이었다.

 

우리나라 축제장에서는 각설이 타령, 뽕짝 등 사람들의 귀가 찢어져라 틀어대는 음악 소리에 혼이 반쯤 날아가는 것이 예사인데, 이곳은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는 것이 분명한 차이였다. 김연아의 빙상예술로 한껏 높아진 우리의 눈을 만족시키지는 못했어도 장장 2시간에 걸친 아이스 발레단의 연기 정도가 이 축제를 여느 장터축제들과 구별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할 수 있을까.

 

주민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높이는 행사가 축제라면, 오클라호마 주 장터 축제는 비교적 성공적인 듯 했다. 특히 인종의 전시장이라 할 이 나라에서 하나의 미국이란 기치 아래 수많은 인종들 간의 장벽을 헐고 하나로 묶는 데 장터 축제만큼 효과적인 이벤트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너른 들판을 꽉 메운 자동차와 인파에 이 사람들이 모두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호기심이 생길 만큼 성황이었고, 먹고 입고 타는 모든 것들을 한 곳에 오롯이 모아놓음으로써 주민들에게 현실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말 그대로 장터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엇보다 이채로운 것은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전혀 없이 조용했다는 점, 그 많은 인파와 규모의 축제에 술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참으로 부럽고도 희한한 일이었다. 축제라 하면 늘 노래 소리 울려 퍼지고, 이따금 술 취해 싸우거나 야바위판 돌아가는 데 익숙해 있는 백규거사의 눈에 오클라호마 주 페어의 차분한 분위기는 미래 축제의 한 모델로 보였다. 오클라호마가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의 성향이 강한 바이블 벨트(Bible Belt)의 한 축이기 때문일까? 이 점은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직접 관찰하고 분석해볼 내용이다.

축제는 축제답게 떠들썩해야 한다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이제 목청을 좀 낮추고도 축제의 본령을 구현할 만한 단계가 되지 않았을까. 오클라호마 주 장터축제를 보며 우리 축제의 미래를 생각해 본 하루였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5. 24. 21:5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봄을 맞은 휴일 한낮의 숭실대학교 캠퍼스>


축제가 사라진 캠퍼스

                                                                            조규익

봄꽃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갔으니 대학가에선 축제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제대로 된 축제는 간 곳 없고 놀이판만 질펀하게 벌어진다. 대학 바깥의 놀이판에서 흔히 목격되는 꼴불견들이 언제부턴가 축제의 탈을 쓴 채 대학가에 뚫고 들어와 낭만을 질식시키는 요즈음이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계곡에 평상을 깔고 앉아 흥겨운 ‘뽕짝’소리와 알코올 기운에 흔들거리는 바깥세상 놀이판과 흡사한 포맷의 난장들을 캠퍼스에서 목격하기가 어렵지 않다. 비싼 전파를 아낌없이 써버리는 연예인들의 오락프로가 축제라는 미명으로 대학가에 발을 붙인지도 오래다.

 학술제, 예술제, 문학제, 대동제 등등 대학가 축제의 빛나는 이벤트들은 언제부턴가 70년대 학번들의 기억 속에나 가물가물 남아 있을 뿐이다. 공동체의 단합을 추구하거나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주기적으로 정보를 주입하고 환기시키던 행사가 축제(festival)의 원류다. 세월이 흘러 본질에 변화가 생긴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축제가 갖는 상징성마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본질이 사라질 경우 그것들은 그냥 ‘난장판’이거나 의미 없는 ‘시간 죽이기’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축제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우리나라엔 축제가 지천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본질을 생각하고 신중하게 만들어진 축제는 거의 없다. 오늘날 축제를 기획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축제가 끊임없이 후손들에게 이어져 역사성을 지닌 문화적 자산이 되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없는 듯하다. 축제의 본질보다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수입이나 올려보려는 상업적 계산이 그들의 마음에 그득할 뿐이다. 축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편했던 기억과 짜증만 잔뜩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때 우리에게도 대학들이 사회의 축제문화를 주도하던 시절은 있었다. 특색 있는 대학의 축제들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인들은 대학의 문화나 행사들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그 기회를 잘만 활용했다면, 대학인들은 오늘날까지 사회를 주도할 문화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이 자율성을 상실하면서부터 사회와의 바람직한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대학을 묶어 놓으니 대학인들의 창조적 역량은 질식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그렇게 대학이 죽어가는 동안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차분하게 앞 뒤 옆을 분간하며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문화운동이며 정신운동이다. 뚜렷한 지향 없이 질주하는 사회를 차분하게 붙들어 앉힐 수 있는 효과적인 제동장치가 바로 문화운동이다. TV와 인터넷 등 대중매체들은 이들의 다급한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급급하여 건전한 문화운동을 주도할 리더십을 상실하고 말았다. 대중매체들은 오히려 순간적인 향락과 소비를 부추겼고, 사회의 문화의식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그들이 쉬지 않고 쏟아내는 오락성 프로들은 자라나는 세대들을 일찍부터 오염시켰고, 대학에 들어온 그들은 그런 풍조를 즐기고 대물림하는 전사로 자임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속적인 놀이문화가 대학에 역류된 것은 대학이 더 이상 문화 창조의 현장으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축제도 학생들을 위한 교육의 소중한 기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들이나 대학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축제에 대한 철학이나 기본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보고 배울 만한 대학축제의 모델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대학에서 배운 것을 건전한 놀이문화로 승화시켜야 대학축제의 이상은 실현된다. ‘대학축제’라는 대전제를 잊지 만 않는다면, 진지성⋅다양성⋅낭만성이 융합된 프로그램들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대학생들을 무한한 가능태로 키워내려면 올바른 축제를 부활시켜 한다. 캠퍼스에 건전한 축제문화가 살아야 공동체로서의 대학 정신이 살아날 수 있고, 대학의 정신이 살아나야 인재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키울 수 있다. 새로운 세대가 축제를 통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수 없다면, 대학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