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9. 9. 16:08

       이르쿠츠크의 꿈, 러시아의 꿈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4

 

 

                                                                                                            조규익

 


우리는 바이칼 인근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앙가라강과 이르쿠츠크 시가 개념도


아름다운 이르쿠츠크


앙가라강



이르쿠츠크 강


사진 찍으러 강가에 나온 한 쌍

 

725() 아침 무렵 단잠을 깬 우리는 하바로프스크 역에 잠시 내려 고려인협회장을 비롯 인사차 나온 여러 명의 고려인들을 만났다. 조선 볼셰비키 여성 혁명가인 김 알렉산드라, 19184월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임정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등이 활약한 역사적 공간이자 극동 최대의 도시가 바로 하바로프스크였다. 횡단열차를 탈 경우 모스크바로부터는 약 8,500km 지점으로, 7시간의 시차가 생기는 곳이다. 시의 중심부분은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이 합류하는 부분의 우안(右岸)에 있었고, 철도역사 뒤로 부요한 시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데,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듯 했다. 원래 러시아의 극동진출을 위한 거점이었으나, 1918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만난 고려인들과 헤어진 뒤 다시 열차에 올랐다. 그로부터 또 한밤을 새워 만주횡단철도(TMR: Trans-Manchurian Railway)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가 연결되는 카림스카야를 지나 울란우데를 만났다. 그 지역부터 환바이칼 코스가 전개되는데,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의 밀림이 만화경처럼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울란우데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구간 최고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코스이자 몽골 횡단철도 분기점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을 더 달려 바이칼 인근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톡 출발 사흘째인 27() 오후 4시경. 72시간 만에 드디어 땅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참 아름다운 도시, 이르쿠츠크(Irkutsk)였다. 앙가라(Angara) 강과 이르쿠츠크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여 그 풍광이 기가 막혔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들을 비롯 제정 러시아 시대의 전통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돋보이는 것들은 예수공현 성당(Epiphany Cathedral), 즈나멘스키 수도원과 보고야블렌스키 성당(The Znamensky Monastery and the Bogoyavlensky Cathedral). 전자는 1718년 건축을 시작하여 1746년 완성된 성당이었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에게 봉헌된 후자 즈나멘스키는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수도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보고야블렌스키 성당은 이르쿠츠크 최대의 종교적 기념비이자 시베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은 1689년 건립되었고, 보고야블렌스키 성당은 1693년에 건립되었으니, 300여년이 넘은 건축물들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막 완공한 듯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수공현 성당


성당내부


성당 내부


즈나멘스키 수도원


시청 앞 영혼의 불꽃

 

러시아의 파리로 불리는 이르쿠츠크. 동 시베리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자 바이칼 호 서쪽 65km 지점에 위치하여 차분하게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는 여름 휴양지였다. 앙가라강을 통해 흘러드는 바이칼호수의 깨끗한 물이 한낮의 햇살에 반사되어 도시 전체를 청결하게 만들었다. 65만 명이 모여 사는 곳. 바이칼 호수 관광의 기점으로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곳이 1920년 한인공산당이, 1921년 고려공산당이 창립된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버스는 칼 마르크스 거리를 지나 벨릐 돔 부근의 앙가라 강가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칼 마르크스 거리는 앙가라강변에서 도심 북쪽까지 연결된 중심대로로서, 길을 따라 박물관과 극장, 대학교 등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의 관심은 우뚝한 동상으로 남아 있는 알렉상드로 3세와 현재는 이르쿠츠크 국립대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는 벨릐 돔. 알렉상드로 3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나, 정작 그 아들 니콜라이 2세에 이르러 제정러시아는 종말을 고했으니, 위대한 황제가 이룬 역사(役事)와 역사(歷史)의 아이러니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그 철도 덕에 개발의 시대가 개막됨으로써 버려졌던 시베리아에 온기가 돌았는데, 그럼에도 제정 러시아는 막을 내리지 않았는가. 그 동상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건물이 우리로서는 몸서리쳐지는 조선공산당 선언식이 있던 벨릐 돔이었다. 천만리 머나먼 곳에까지 와서 자신들의 정치적 결사체의 선언을 한 것은 이곳이 바로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의 핵심부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그 이유가 있었다. 식민 치하의 조국에서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지원을 받으려는 목적의식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바이칼로 떠나기 전 찾은 곳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 박물관. 데카브리스트의 정신적 지주 세르게이 발콘스키(Sergey Volkonsky) 공작의 집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182512월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을 시도한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는 러시아어로 ‘12이니, 데카브리스트란 ‘12월 당원을 뜻한다. 182512,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낙후된 러시아를 살리기 위해 짜르 체제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갖고 청년 장교들 100여명이 봉기했으나, 실패한 혁명이었다.

6백여명이 체포되고 121명이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주모자 5명은 교수형, 116명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그 가운데 31명은 종신유배, 85명은 장기유배였다. 형이 끝난 뒤 이들의 상당수가 이르쿠츠크에 정착한 것이다. 실패로 끝난 혁명이었지만, 친 유럽적인 이들의 삶이 이르쿠츠크에 자유로운 유럽문화를 이식하고, 농노제의 폐지와 입헌정치의 실시 등 민주주의의 기풍을 불어넣은 계기가 되는 등 이 사건의 반향은 매우 컸다. 이들 모두 귀족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들은 시대에 저항한 혁명가들이었고, 그 정신을 대표한 사람이 바로 발콘스키 공작이었다. 발콘스키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20년 유형의 판결을 받아 1826년부터 네르친스크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1835년부터 1851년까지 이르쿠츠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1847년부터 이 집에서 살았고, 1851년 형기 만료와 함께 떠났으며, 이 집은 1985년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방들에는 피아노, 침대, 의자, 식탁 등 당시의 삶을 보여주는 생활 집기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사진도 잘 정돈되어 있어,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푸쉬킨의 시 낭송 소리가 들려올 것 같고, 피아노에서는 무도곡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비록 뜻은 꺾였으나, 출중했던 이상주의자 데카브리스트들이 시국을 담론하면서 잔을 기울이던 기개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비록 볼셰비키 혁명으로 마무리되어 오늘날의 우리를 괴롭히는 비극의 단초가 되긴 했으나, 러시아 청년장교들의 꿈은 누구나 본받아야 할 보편 이상으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갑지만 시원한 동시베리아의 이르쿠츠쿠에서 자유혼을 크게 호흡한 우리는 다음 여정 바이칼호로 내쳐 달렸다.<계속>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1985년 박물관 개장날 몰려든 인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8. 28. 20:40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무들의 바다, 타이가(taiga)를 보았네!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2 

                                                                                              

                                                                                                                조규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톡의 금각만


전망대에서 러시아 모델 아가씨와


역사에서 바라본 철길


열차 침대칸에서 조갑상, 블라디미르 김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 산하


열차 객실에서


객실에서의 첫 파티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잠시 열차에서 내려


열차 식당 칸에서의 점심상

 

 

724일 저녁 7.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바리바리 채워 넣은 캐리어가 몸에 겨웠다. 때마침 퍼부어대는 소나기와, 바짝 닥쳐온 열차 출발시각에 온몸은 땀과 비로 흥건해졌다. 시간만 되면 무정하게 떠나버릴 것 같은 러시아 승무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우리를 겁먹게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드높은 승차대를 올라서니 날씬한 아가씨 하나 조심조심 지날만한 통로가 몹시 비좁아 놀라웠고, 가까스로 찾아 들어간 4인용 객실의 협소함은 더욱 놀라웠다. 땀과 비에 흠뻑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가까스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니, ‘~!’ 소리를 내며 열차가 움직였다. 출발 뒤 30분이나 지나야 에어컨이 가동된다는 말에 땀은 더 흘렀다.

비새고 바람 통하는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부려졌을 80년 전 고려인들의 고통을 맛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때마침 퍼부은 소나기의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린 뭘 회상했어야 하는 걸까?

 

비와 땀으로 축축해진 옷가지들을 대충 벗어 침상 밑 작은 공간에 숨기고 나니, 이 속에서 열흘을 견뎌야 할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누거(陋居)이긴 하나 자유자재로 몸을 펼 수 있고,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땀 흐를 새 없이 씻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고행의 공간을 함께 할 블라지미르 김(우즈베키스탄 거주/소설가레닌기치 전 편집국장), 조갑상(소설가/경성대학교 명예교수), 김병학(시인/전남대 연구원)’ 등 저마다 탁월한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지닌 방원(房員)들의 얼굴에도 잠시 걱정이 흘렀다. 정말로 출발 후 30분이나 되어서야 에어컨이 가동되었고, 에어컨이 가동되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축축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사전 교육에서 누차 공지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 화장실과 씻을 물, 끼니 등에 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모든 걸 그러려니!’하고 넘기라는 블라디보스톡 가이드 담양 댁의 말이 잊어서는 안 될 금과옥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원들이 정들기 시작했고, 오고 가는 보드카와 사마르칸트 꼬냑의 향기 속에 열차 안의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넓은 땅이다. ‘유럽과 극동두 대륙에 걸치는 광활한 땅덩어리가 부러운 러시아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차지하게 된 대초원 연해주. 태평양에 연하여 동방의 진주로 불려 온 천혜의 미항 블라디보스톡이 그 주도(州都)였다. 연해주를 벗어나면서 펼쳐지는 타이가(taiga)의 자작나무와 편백의 수해(樹海)가 심안(心眼)에 낀 티끌을 청소해주고, 몇 시간 만에 한 번씩 볼까말까 한 인가(人家)와 작은 마을들이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이토록 드넓은 땅에 인구는 적으니,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 아닌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우리가 카자흐스탄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노보시비르스크까지 50개에 육박하는 수의 역들을 지나야 한다. 그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일정시간 정차하는 역들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우글로바야(Uglovaya), 우스리스크(Ussuriysk), 시비르쩨보(Sibirtsevo), 무치나야(Muchnaya), 스빠스크-다이니(Spassk-Dalny), 루지노(Ruzhino), 다이녜레젠스크(Dalnerechensk), 루쳬고르스크(Luchegorsk), 비낀(Bikin), 베아젬스카야(Vyazemskaya),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비레비잔(Birobidzhan), 오블루치에(Obluchye), 아르하라(Arkhara), 부레야(Bureya), 자빗따야(Zavitaya), 벨로고르스크(Belogorsk), 스바보드니(Svobodny), 레자나야(Ledyanaya), 슈마노브스까야(Shimanovskaya), 뜨그다(Tigda), 마다가치(Magdagachi), 스카보로지나(Skovorodino), 예로페이 파블로비치(Yerofei Pavlovich), 아마자르(Amazar), 모고차(Mogocha), 쳬르니셰브스키-자바이깔스키(Chernyshevsky-Zabaikalski), 까림스카야(Karaymskaya), 치따(Chita), 힐노크(Khilok), 페트로브스크 자바이칼스키(Petrovsk-Zabaykalsky), 울란우데(Ulan-Ude), 바이칼스크(Baykalsk), 슬루잔까(Slyudyanka), 이르쿠츠크(Irkutsk), 앙가르스크(Angarsk), 지마(Zima), 뚤른(Tulun), 니즈녜우진스크(Nizhneudinsk), 타이셰트(Tayshet), 레쇼티(Reshoti), 일란스카야(Ilanskaya), 깐스크-예니셰이스키(Kansk-Yeniseiski),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아친스크(Achinsk), 보고똘(Bogotol), 타이가(Taiga), 유르가(Yurga),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무엇보다 끼릴 문자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역명들의 생소함이 기를 질리게 했다.

 

10~20분씩 잠시 쉬어가는 역들의 앞마당엔 동네 아줌마들의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 두 끼씩이나 각자 해결해야 할 승객들에게 싱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아줌마들의 눈빛과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빵과 물고기, 야채와 과일, 꿀과 화분 등 다종 다량의 음식물들이 좌판에 제법 쌓여 있기도 하고 팔에 걸고 다니는 바구니에 그들먹하게 들어 있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은 잠시 정차되어 있는 열차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환전상도 찾아와 돈을 바꾸라고 채근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숲이 지나고, 약간 험한 산세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큰 바다 같은 호수가 눈앞에 닥친다. 바이칼(Baykal)이었다!<계속>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 산간의 소도시


시베리아의 산간 마을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달리는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일몰


작은 역에서 내려 차장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역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백규


하바로프스크 역에 내린 일행들


끝없는 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8. 10. 16:33

  연해주에 찍힌 고려인들의 발자국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1

 

                                                                                         조규익                               

 


라즈돌노에 역사(정면)


라즈돌노에 역사(측면)


라즈돌노에 역사 내부(매표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간 거주했던 집


표지판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아리랑가무단 단장 발레리아(오른쪽), 발렌찐


오딧세이 참가 명찰

 

 

고려인들 아니 고려인들의 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난 지 10.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조선족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고, 미국에 체류하는 기회에 재미한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으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소련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다. 세상사 대부분은 필연을 내포한 우연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난 것도 어떤 필연적인 힘의 시킴이라 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이전까지를 주로 더듬는고전문학도로 살아오면서 잘못된 역사의 파생물이나 식민주의의 희생자들로만 생각하던 재외동포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왜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고 뿌리 뽑힌 잡초 신세로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는지, 비록 황무지라 해도 뿌리 내리기가 어찌 그리도 어려웠으며, 이제 할아버지의 나라가 제법 먹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끝날 줄 모르는지 등등. 그간 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379월부터 12월까지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마련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현지 고려인들 몇 분도 합류하게 되었다.

 

***

 

2017723일 아침 7.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푸른 색 유니폼을 입은 80여명의 각계각층 희망 대장정대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한항공 KE981편으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7월 하순의 뜨거운 태양이 러시아 동진의 상징적 공간인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을 달구고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닌, 태평양 쪽 유일의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톡은 식민시대 고려인들의 집거지 신한촌을 품고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를 피해 몰려든 공간. 그 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고국,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일제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여장을 풀기 전 우리는 먼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항일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고, 고려인문화센터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가는 길에 강제이주 첫 출발역인 라즈돌노에(Razdol’noe)역을 잠시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역과 함께 수만의 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열차에 실린 곳. 지금은 역사(驛舍)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엔 겁에 질린 고려인들의 한숨과 비명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빙 둘러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지류가 흐르고, 그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 철로를 짓누르며 엄청난 길이의 열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驛舍)는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도 굳게 닫혀 그 날의 일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8694, 처음으로 이주민 10가구가 정착하면서 이룩한 육성촌(六城村).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던 이들이 날 벼락같은 명령서 한 장에 마을 앞의 역사로 끌려나온 것이다 1937년9월 하순에 시작되어 12월까지 계속된 고려인 강제이주.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폭행이자 인류사의 기록적인 만행이었다.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간첩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러한 만행의 명분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감과 함께 자신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모의 고려인에 대한 복합심리가 작용한 정치적 편견의 소산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지향해야 할 노선을 식민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확인하고자 한 것이 함께 대장정에 나선 지식인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역사 근처에 김정일의 생가가 있다거나,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던 학교가 남아 있다는 등의 말도 들려 왔지만, 이번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무명의 고려인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즈돌노에 역으로부터 한참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항일투사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4월까지 거주하던 주택에 들렀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달리,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 자체는 물론 앞 뒤 진입로와 하수도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최재형 선생의 혼이 편안하게 머물 만큼 제대로 집을 다듬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장대 같은 러시아 인부들의 손놀림이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재형 선생의 뜻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걱정스러웠다. 공사 중인 집안으로 들어서자 특이한 페치카를 비롯 넓지 않은 방들이 당시의 삶을 증언하듯 우리를 맞았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유택은 거사 지역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우선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을 품은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신경을 쓴 흔적은 외벽에 부착된 팻말("최재형의 집")이 유일했다. 과연 이 집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혼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표본으로 오롯이 남을 것인가. 

  

서둘러 그곳을 떠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선생의 유택을 떠나 문화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큰 공연장과 유물 전시실 등이 새로 생겨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규모를 갖춘 것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곳에 '고려인을 위한 진혼'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혼제는 여러 예술장르들로 짜인 의식이었다. 김 발레리아 부부가 이끄는 아리랑가무단이 무대예술을 통해 러시아에 뿌리 내린 민족미학을 보여주었다. 꽃 같은 소녀들의 노래와 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흘러간 노래들이 우리 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고려인들이 이 사회에서 식민시대 타자(他者)의 입장을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재현된 과거의 예술은 조만간 그런 굴레를 극복하게 하는 신비의 명약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 남녀 노인들의 합창과 젊은 아리랑 가무단의 춤과 노래는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네 전통 춤사위가 북국의 빠른 율동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유지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아리랑 가무단의 발레리아 단장과 그 남편 발렌찐, 그리고 그들의 예쁜 딸이자 리드싱어인 악사나가 여전한 모습으로 고려인 공동체의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들의 활동 공간이었고, 후에 임시정부로 변신한 대한국민회의 건물이 살아 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 우수리스크. 전통예술 같은 소프트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유지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공간이었다. 

 

 

***

 

우수리스크로부터 2시간 가까이 걸려 블라디보스톡의 현대호텔에 도착했다. 갓 수인사를 끝낸 룸메이트 손진홍 선생과 함께 김병학 선생의 호출에 이끌려 두 분의 블라디미르 김 선생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블라디미르 선생은 이미 10년 가까이 교분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오신 또 다른 블라디미르 선생은 초면이었으나, 모두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열차 여행 내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벡 블라디미르 선생의 톤 높은 입담에는 자신의 부모가 겪은 강제이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흥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렇게 대장정의 첫날 밤, 원동의 중심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는 보드카 한 잔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724,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 급했다. 최초의 재외동포 집거지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한촌은 우거진 나무숲과 잡초, 풍상에 낡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나지막한 아파트들로 휩싸여 물리적 자취가 묘연했다. 1920년 신한촌 사건과 4월 참변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만,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과 작은 돌들로 구성된 기념비만이 그곳의 역사성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돌기둥들이 하늘바람 혹은 남한북한해외동포를 상징한다 하나, 해석은 자유이리라.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비석이 특이하고 의미심장했다. 졸지에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심정을 문장으로 쓴들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림으로 그린들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흰 돌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만이 그 시절 고려인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관리들의 착취로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조선 왕조 말기, 한반도의 지근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한촌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186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삶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전대미문의 시련에 말려든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었다. 강제이주에 따라 이곳의 신한촌도 고려인들의 자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난 19998,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는 건립되었다.

 

기념비로부터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러시아인들의 아파트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경사면에서는 옛 주택들이 막 철거되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인 거주 지역의 마지막 증거인 철제 도로 표지판이 젊은 인부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울 거리라는 선명한 글자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쓰레기로 버리거든 주어올 것을. 갈 길이 바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인에게 요청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값나가는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젊디젊은 주인 녀석의 약삭빠른 계산속이 얄미웠다. 나동그라진 표지판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고통을 추체험하겠노라 나선 우리의 노정 또한 알량한 역사지식이나 선입견을 모두 버린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계속>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


서울의 거리 철거 광경


'서울스카야(서울의 거리)' 표지판


신한촌 주변의 러시아인들의 아파트


블라디보스톡 혁명의 광장


고려인마을 기념물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끼릴문자를 만든 선교사 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대호텔 근처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9. 11:32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치원(致遠)의 성과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을 읽고-

 

 

                                                                                                                            이경재(숭실대 국문과 교수)

 

 

 

1. 학문이 다다른 곳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읽으면서, 제갈공명이 쉰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가 생각났다. 계자서의 핵심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된다. 이 중에서도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치원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먼 곳에 도달한다는 뜻의 치원은 남들보다 크고 무겁고 많은 성취를 이룬다는 뜻이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산 너머의 이웃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어려웠을 옛사람의 관념을 드러내는 이 말은, 자신이 갈 방향을 뚜렷하게 정한 채 그 길을 꾸준하게 가면 마침내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저서야말로 필자가 초인적 노력의 결과 다다른 학문적 먼 곳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꼴호즈나 솝호스 등 CIS 지역 고려인들의 생산 및 생활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생적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던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살펴보았다. 소인예술단은 꼴호즈 등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아마추어 단체이고, 전문예술단은 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던 예술인 집단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극장이 유일하다. 구소련 체제의 대중예술은 전문예술과 소인예술의 분담과 협업으로 지탱되어 왔다. 인적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의 근원은 소인예술단에 있었으나, 상호 보완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자는 구소련의 공연예술을 완성시키는 두 축으로 정립되었다.

 

원래 소인예술단의 경우 연극, 노래, 춤 등이 주된 장르였고,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의 경우 연극 전문으로 출발했다가 공연예술로서의 노래와 춤이 추가되었다.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예술인 집단이 전문예술단으로서의 고려극장인 것이다.

 

고려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당시 극작가들은 민족정신의 유지와 확인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고전작품들을 연극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창작극 외에 그들이 집착한 분야는 고전의 각색이었다. 고전의 각색은 민족정신이나 민족어의 보존과 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함양시켜온, 일종의 민족 정체성 고양의 메카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극작가들을 등장시켜 활약하게 한 일은 고려극장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다. 그 가운데 극장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연성용과 태장춘이었고, 최고의 연극미학을 보여준 인물은 한진이다. 한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집요한 바가 있어,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발간된 거의 동시기에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이라는 책을 김병학 선생과 공저로 출판하였다.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2. 지속과 변이

 

자료는 말한다. 이 명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자료는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만났을 때, 비로소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만한 두께의 단일저서가 그에 걸맞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힘들다. 이 작품이 고려인들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지속과 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원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타율적 디아스포라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공화국의 독립 이후에는 공화국의 주도 민족에 의해, 힘들게 찾아온 할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고국의 사람들에 의해 3중의 타자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방향으로부터 상반되는 인력을 느끼는 존재들이었다. 노래나 춤을 통해 표출되는 이념 지향적 의식이나 디아스포라 의식은 상반되는 인력에 상응하는 주제의식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중심의 언어 예술 정책을 폄으로써 고려인을 포함한 비 러시아인들은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를 내려놓”(5)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자민족 중심의 전통 형식 고수라는 구심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추구라는 원심력을 적절히 조정한 미학을 고안했다. 그로부터 나온 것들이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에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을 올려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이를 통해 집단주의라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의 폭력적 군림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민족 정서의 실낱같은 생명만큼은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동화정책을 밀어붙인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한 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정 덕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운율과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고, 노랫말을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새로 만든 것들도 있다. 전자를 지속의 측면에서 후자를 변이의 측면에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 지속의 측면은 고려인 혹은 한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서적 형태적 전승소이며, 변이의 측면은 적응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요소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 노래의 관습적 레퍼터리는 새로운 정착지의 생경한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들의 노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문화 접변 현상이다. 고려인들이 접변을 통해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새로운 이념에의 적응이라는 복잡한 원리가 그 근저에서 작동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3.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

 

이상으로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목에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글문학이라는 개념이다. 보통 국문학자는 국문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때의 국문학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글 창제 이전의 문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문학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의 일본어 작품이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쓴 영어 작품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교포의 한국어 작품 등을 과연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것은 뜨거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언어, 국적, 사상과 감정이란 세 가지 요소는 일종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운명체로서 느끼는 실감일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전에 한반도를 떠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러한 난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문학을 한글문학으로 칭하는 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이 저서에서 각지의 소인예술단들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는 전문예술단이 지난 시절 만든 한국어 노랫말과 극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백여 년 전에 한반도를 떠나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오만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 고려인들의 문학을 우리 것이자 동시에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섬세한 관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한 입장을 저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론격인 1부의 마지막은 조속히 청산해야 할 중심부의 시각으로 우리 정서의 맥을 힘겹게 이어 온 변방의 정서적 산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다.”(36)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고려인 문학을 접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솔직하고도 곤혹스러운 관점을 잘 드러낸 고백으로 읽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래도 고려인 문학은 우리 것이라는 입장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전통노래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해외에 우리의 문화영토 혹은 정신적 영역을 화복해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108)는 문장에서 고려인=대한민국인이라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의 마지막 문장인 “‘갈 짓 자행보 속에 마구 변해버린 또 다른 중심부 한반도. 그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성찰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56)라는 격정적인 문장에서도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로서의 고려인들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저서에 담겨 있는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에 대해서이다. 이 저서에서 조규익 교수는 소인예술단 공연 때 불리던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 고려인 민요의 전통노래 수용 양상, 고려인 한글노래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양상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찾아보았고, 1932년 고려극장 창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들(200여 편)을 개관한 다음 고려인 사회 연극의 초석을 놓은 연성용, 태장춘의 연극세계와 함께 구소련 고려인 문단에서 최고의 미학을 성취한 한진의 연극을 분석하였으며, 연극무대 혹은 그 바깥에서 가창된 노래들까지 살펴봄으로써 고려극장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밝히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 중에서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책상머리에서 자판 몇 번 두드려 얻을 수 있는 자료에 바탕한 것이 없다. 거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자료를, 별다른 선행 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이룩한 업적인 것이다. 후학으로서는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공력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발로 뛰며 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진으로 책의 여러 부분이 채워진 것이 그러하고, 전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뒤에 15페이지에 이르는 영문 초록을 붙인 것이 또한 그러하다.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앞으로 고려인 문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한국문학과 예술>> 12,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3. 9. 30.”에서 퍼옴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13. 7. 18. 15:10

 

 
<2007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립 75주년 기념공연 <춘향전>-연합뉴스 2013. 7. 18.>>


<최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한 장면>


<고려극장의 <심청전> 포스터>
     <소련군 장교 구락부 무대에 출연한 돌린스크시 조선 소인예술단 단원 신동식, 김진화, 노태석, 김해인, 윤상순 등 (1952년 10월 17일 돌린스크시)>


<한인-러시아인 합동예술단> 


<고려극장 창고에 가득 쌓인 연극대본들>

 

 

 

 

조규익 교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내년이면 이주 150년을 맞는 고려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선 후기 빈곤과 기아를 피해 연해주 등지로 내몰렸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먹고 살기의 고단함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이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실낱같은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펴낸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이 향유했던 공연예술의 텍스트를 통해 이들의 문예미학을 살펴본 책이다.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두 축은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이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소인예술단'과 정부가 관장하던 '전문예술단'이었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인 소인예술단은 주로 집단농장에서 증산(增産)을 독려하기 위해 활용됐다.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 선전구호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인예술단에서 활동하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에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을 붙여 부르는 방식 등으로 민족 정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표적인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후 카자흐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구소련의 폭력적인 동화정책 속에 잊혀가는 모국어를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고려극장의 연극을 통해 박탈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조 교수는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것이 전문예술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부, 즉 고국에 다가갈 날만 기다리면 변방, 즉 구소련 지역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민족예술을 가꾸어오던 고려인 예술인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다.

 

mihy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2013/07/18 10:43 송고

Posted by kicho
알림2013. 7. 13. 15:21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총서 42/태학사]이 출간되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즉 구소련 지역에 거주해 오는 고려인들의 한글문학을 종합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출간한 것이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다. 구소련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생산 및 소비 체제는 정부에서 관장하던 전문예술단(혹은 기관)과 함께 각 지역의 꼴호즈나 솝호스 등 생산단위 별 소인예술단들이 담당하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카자흐스탄 극성 꼴호즈의 ‘가야금 가무단’이나 뽈리뜨옫젤 꼴호즈의 ‘청춘 가무단’ 등 꼴호즈를 비롯한 생산현장이나 고려인 일반대중 사이에서 활동하던 비직업적 예술집단이 소인예술단이며, 1932년 원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세워진 ‘원동변강 조선극장’을 모태로 여러 지역으로의 이전과 개명(改名)의 과정들을 거쳐 1968년 카자흐 공화국 내각 결정에 의해 알마틔로 옮겨져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 음악극 고려극장’으로 최종 정착된, 이른바 고려극장이 전문예술단(혹은 기관)이다. 이들 예술단에서 창작⋅공연한 한글 노래들과 드라마 등을 분석하여 주제의식과 문예미학 등을 찾아낸 것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총서: 고려인의 문예미학, 그 정맥을 찾아

 

제2부 소인예술단과 한글문학

 

제1장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적 지향

Ⅰ. 생산현장과 소인예술단

Ⅱ.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생산 및 향유방식

Ⅲ. 구소련의 미학과 국문노래들의 주제의식

Ⅳ. 민족적 형식과 대중미학

 

제2장 고려인 노래의 전통노래 수용

Ⅰ. 전통노래와 변이의 당위

Ⅱ. 고려인들의 전통 민요와 변이의 단서

Ⅲ. 지속과 변이, 그리고 문화접변 현상

Ⅳ. 문화접변과 보편정서

 

제3장 고려인의 한글노래와 디아스포라의 정서

Ⅰ.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당위

Ⅱ.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문학적 형상화

Ⅲ. 디아스포라 의식의 관습성

 

제3부 전문예술단[고려극장]의 한글문학

제1장 고려극장의 존재의미와 가치

Ⅰ. 고려극장과 고려인

Ⅱ. 고려극장의 발자취

Ⅲ. 공연된 연극의 내용과 흐름

Ⅳ. 민족의식, 연극, 고려극장

제2장 고려극장에서 불린 한국어 노래들의 의미

Ⅰ. 전문예술집단으로서의 고려극장

Ⅱ. 가창된 노래들의 텍스트 양상 및 갈래

Ⅲ. 주제의식의 양상

Ⅳ. 고려인 민족예술미학의 메카, 고려극장

 

제3장 고려극장 1세대 극작가 연성용의 희곡과 고전 수용 양상

Ⅰ. 고려극장의 개척자, 연성용

Ⅱ. 예술적 성과에 관한 평가

Ⅲ. 고전의 발견과 재해석 향상

Ⅳ. 고전의 재해석과 변용

 

제4장 극작가 태장춘의 희곡과 역사 수용양상

Ⅰ. 고려극장과 태장춘

Ⅱ. 작품에 대한 당대의 인식과 평가

Ⅲ. 텍스트의 성립과 내용적 짜임

Ⅳ. 작가의식 및 주제

Ⅴ. 연극 미학적 해석의 모범적 선례

 

제5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새 고려인’으로서의 한진

Ⅱ. 언어와 민족문학, 고려인 문단에 대한 관점

Ⅲ. 주제적 관심과 미학적 성취

Ⅳ. 새로운 연극미학의 수립

 

제6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고전을 통한 현실의 해석

Ⅱ. 새로운 인물형의 창조를 통한 봉건체제 비판

Ⅲ. 봉건 착취에 대한 비판과 디아스포라의 정서

Ⅳ. 두 작품의 공시적⋅통시적 위상

Ⅴ. 고전의 해석과 연극미학의 수립

 

제4부 총결: 민족 문예미학으로 피어난 디아스포라의 역정

참고문헌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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