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9. 23:51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

 

 

 


산타페 광장에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대성당 내부

 

 

 

 

 


대성당 안에서 만난 예수 수난상

 

 

 

 

 


대성당 앞뜰에서 만난 '물 위에서 춤 추는 프란체스코 성인'[Monika B. Kaden의 작품]

 

 

 

 

 


대성당 앞뜰에 서 있는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상'
미국 최초의 인디언 여성 성인으로 추존되었음. 

 

 

 

 

 

산타페의 가톨리시즘은 세속화된 미국을 정화시키는가? [산타페-2]

 

 

 

산타페의 구시가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이었다. 사실 뉴멕시코의 어느 도시에서도 프란체스코 성인을 모신 성당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도시들도 적지 않았다. ‘산타페 로만 가톨릭 대 주교구[The Roman Catholic Archdiocese of Santa Fe]’의 모태 교회가 바로 이 성당인데, 이 성당의 뜰엔 눈길을 끄는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성 성인으로 추존된 인디언 출신의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순결의 덕목과 육신의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짧은 생애에 많은 기적을 이룬 그녀였다. 결국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諡福)되고, 2012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6세에 의해 시성(諡聖)된 스물넷의 아름다운 그녀가 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프란체스코 대성당을 나온 후 지금은 홈리스들에 의해 점령된 산타페 광장으로부터 대성당 앞을 지나 잠시 걷자 스프링 모양의 계단으로 유명한 로레토 채플(Loretto Chapel)이 나왔다. 채플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린즐리(Richard M. Lindsley)씨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어 안내문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북한의 참상에 대해서 진심으로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그 날짜 신문에 보도된 북한의 실상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던지 이것저것 질문을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도 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1852년 가을 로레토 수녀회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켄터키로부터 산타페에 도착하여 이 성당의 전신인 로레토 학원을 건립한 역사가 한글판 소개문에는 실려 있었다. 특히 강조된 내용은 원형계단의 건축학적 특징이었다. 수녀들이 도착한 몇 년 뒤 로레토 학원이 완성되었고, 그 후 몇 년 뒤에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배당 안의 마루와 성가대석을 연결하는 통로를 낼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일이 성사되기를 염원하며 수녀들은 9일간의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의 마지막 날 한 백발노인이 당나귀에 연장을 싣고 도착했다. 수녀원장을 만나 그 일을 해결해주겠노라고 말한 그는 톱 하나와 T, 망치하나만을 갖고 즉시 작업에 착수하여 단시일에 이 원형 계단을 완성했다. 중심 지주도 없이 33개의 디딤판만으로 360도 원형의 계단을 완성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성 요셉에게 기도를 드린 수녀들은 이 불가사의한 일이 그 기도의 응답임을 믿었으며, 상당수는 그 늙은 목수를 성 요셉으로 믿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수녀들이 보여준 지극한 신앙의 증거물이었다. 내 느낌에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발타키노와 같은 컨셉으로 보이는 이 원형계단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로레토 성당[Loretto Chapel, Built in 1873]

 

 

 


로레토 성당 입구의 안내 표지와 전설에 등장하는 늙은 목수

 

 

 


채플 안에 있는 '기적의 계단'

 

 

 


로레타 채플 내부

 

 

 

 

그 다음으로 간 곳이 바로 최초의 어도비 건축 양식의 성당인 산 미구엘 미션[San Miguel Mission]’이었다. 스페인 식민시대 멕시코의 성당이었던 산 미구엘 미션1610~162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로 꼽힌다고 한다. 이 성당은 1680년의 푸에블로 반란때 손상을 입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재점령한 1710년에 재건축되어 스페인 병사들을 위한 예배당으로 사용된 곳이다. 그 후 수없이 보수가 이루어지고 재건축이 반복되면서 많이 가려지긴 했겠으나, 원래의 어도비 양식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또한 아름다웠는데, 특히 제단 뒤쪽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 벽[reredos]의 아름다움은 탁월했다. 더구나 그 장식들 속에 자리 한 미카엘 성인 상의 제작연대는 적어도 1709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합중국의 국가 역사 유적으로 지정된 이 성당은 산타페를 영적으로 충만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산 미구엘 성당[San Miguel Mission]

 

 

 


미구엘 성당 내부

 

 

 


미구엘 성당 제대 뒤의 장식벽[Reredos]. 아래쪽 중앙이 미카엘 성인 상

 

 

 


산 미구엘 성당의 종

 

 

 

 

그 다음에 방문한 곳이 바로 이 지역 종교적 성향의 핵심인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로서,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꼽히는 곳이었다. 주 제단 뒤쪽의 벽장식은 모두 멕시코시티에서 가져온 것들이며, 내부 장식 모두는 멕시코 바로크 풍의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531년 멕시코 아즈텍 종족 출신의 후안 데 디에고(Juan de Diego)에게 현신하여 성당을 지을 것을 명령한, 갈색 피부를 가진 원주민 형상의 성모가 바로 과달루페 성모.

 

이 사건을 계기로 테페야크 언덕을 비롯한 각지에 성당들이 건립되면서 멕시코는 급격히 가톨릭 국가로 변모했다. 성모 현신의 이야기는 토착신앙에 물들어 가톨릭의 전파가 어렵던 당시 가톨릭 교단의 노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종교 설화로 보이는데, 그 덕에 지금은 미국의 땅이 된 산타페에서 그 성모와 성당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775~1795년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과달루페 성소3피트 정도의 두꺼운 벽을 가진 어도비 건축물이었고, 그 중심에 1783년 멕시코 거장 호세 데 알지바[Jose de Alzibar]의 과달루페 성모상이 있었다. 멕시코 전통 양식으로 조각채색된 예술품의 정수로서 리어다스(reredos)’라 불리는 제단 뒤쪽의 장식 벽, 19세기 진품 성구(聖具) 보관소, 각종 미술사적 자료들, 대주교 쟝 뱁티스트 레이미(Jean Baptiste Lamy)에게 봉헌된 도서 및 자료관, 성지에서 가지고 온 식물들을 심어놓은 정원 등, 이 성당을 이루는 핵심 부분들은 여전히 화려하면서도 경건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 성모 상 

 

 

 

과달루페 성소의 내부 

 

 

 


과달루페 성소의 스테인드 글라스 

 

 

 

과달루페 성소 그림[Tom Mallon 작, Oil on Canvas 42"×22"]

 

 

 

산타페의 정신적 바탕은 이 도시의 수호성인 프란체스코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이지만, ‘이곳의 문화와 전통에 융합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그것과 구별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원주민 출신의 성인 가데리 데각위타나 과달루페 성모를 만난 후안 데 디에고 등 이 지역에 가톨릭을 정착시킨 결정적 존재들이 있었고, 로레토 성당산 미구엘 성당과달루페 성당 등 핵심적 성소들이 어도비 건축양식을 채용함으로써 지역 전통 친화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자 한 점은 무엇보다 산타페만의 독보적인 모습이었다. 요소요소에 숨어서 빛을 발하는 가톨릭 교회들의 존재는 미국의 강한 세속성을 정화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산타페만의 매력일 수 있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 01:15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림멜 교수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는 러시아 역사 전문가, 림멜(Lesley A. Rimmel) 교수

   

 

미국에 있는 동안 꽤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주로 교수나 강사, 박물관의 큐레이터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 등인데, 그 가운데는 오가는 도중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미국 지식인들이 타인들 특히 외국인들을 낯설어 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기도 하고, 남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를 통해 전공에서 만난 문제들을 풀기도 한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 브레이크 룸에서 커피를 데우고 있는데, 평소 눈인사 정도를 나누던 여 교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며칠 전 PBS에서 방영된 비밀의 국가 북한[Secret State of North Korea]’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참으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방영된다는 소식을 뉴스로 듣긴 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족의 끔찍한 참상들이 미국인들의 눈앞에 발가벗겨진 채 드러난 모양이구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포털사이트에서 그 방송을 확인했고, 며칠 후에는 다운로드해서 직접 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들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미국인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내용이었다. 특히 군사조직에 가까울 정도의 병영국가 체제, 대한민국과 미국을 주된 표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협박, 몽땅 쇼 윈도우의 컨셉으로 꾸며진 평양, 비참하고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들, 살아남을 힘마저 상실한 아이들과 일반국민들의 참상 등. 내게 북한의 현실을 일깨워 준 림멜 교수에게 달리 할 말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만나 South Korean들의 입장을 말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드디어 림멜 교수의 연구실에서 장시간 만나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 그녀의 관심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들 가운데 한 부분을 이곳에 올리기로 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림멜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게 된대표적 미국 지식인이다. 명문 예일 대학 역사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이듬 해 국제 교육 교류 위원회[Council on International Educational Exchange]’의 수혜자로 선발되어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레닌그라드 주립대학[Leningrad State University]에서 러시아어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키로프(Kirov) 살해와 소비에트 사회: 1934-35년 레닌그라드에서의 선전과 여론[The Kirov Murder and Soviet Society: Propaganda and Popular Opinion in Leningrad, 1934-35]’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1995-9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1998년 가을학기부터 이곳 OSU에 자리를 잡고 주로 러시아중앙아시아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과목들을 강의해 왔으며, 20여 종에 가까운 수상 및 그랜트(Grant) 수혜 경력을 갖고 있는 탁월한 교수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풀브라이트(1991-92), 앨리스 폴 어워드(Alice Paul Award/1991), 국제 교류 연구 기금(International Research and Exchanges Board Grant/1991-92) 등을 비롯,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혜를 받은 학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스탈린 시대 소련 역사에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었고, 전쟁을 비롯한 집단 폭력이나 지하경제와 같은 국제적 기층민중의 현실 등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북한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걸까. 북한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김정은을 입에 올리며 스탈린보다 훨씬 잔인한 그의 성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야기 도중 책장 위에 올려놓았던 스탈린의 배불뚝이 동상을 꺼내더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체형(體形)이 스탈린과 똑같지 않으냐고 내게 물었다. 국민들을 배고프고 괴롭게 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린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스탈린에게서 찾을 수 있고, 한반도의 김씨 3대는 바로 그 아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를 긴 세월 연구해 온 그녀로서 국민 착취 및 학대의 전형적인 독재자로 스탈린을 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체형과 인간성의 유사성까지 들면서 김씨 3대를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인물들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나마 스탈린은 자기 당대에 끝이 났지만, 김씨 왕조는 대물림을 하고 있으므로 훨씬 지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탈린이나 김씨 3대 등 배불뚝이 독재자들주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마적 지도자의 시각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그녀의 설명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독재가 결국 소련 해체의 단서로 작용한 것처럼 그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한반도 북쪽에 군림하고 있는 김씨 3대 특히 김정은의 폭력성이 조만간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녀의 관점이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연구실에서 필자에게 설명 중인 림멜 교수

 

***

 

주변에 입양된 한국의 고아들을 언급함으로써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이내 한국인 친구들이나 한국과의 친분을 강조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친밀감을 갖게 한 그녀.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삼성현대기아엘지•대한항공 등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장점까지 거론했으며,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뿐인가.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독재자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정착기의 대통령으로, 그 사이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을 과도기로 각각 규정하는 등 한국 대통령들의 이름과 공적을 꿰고 있었으며, 반기문 총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명사들의 이름을 줄줄 외움으로써 한국인인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산업화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도 정계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내가 설명하자 그 말을 수긍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물어왔다. 세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아 비교적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들이나 미국도 내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점과 함께 여성의 리더십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선례를 한국이 만들 것이라는 고무적 관측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북한이 매우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다양한 활약이나 선전(善戰)에 불쾌감을 느끼는 데 큰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그 나름의 분석을 보여주기도 했다.

 

***

 

학자로서 자신이 전공한 학문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체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걸출했던 역사철학자 E. H.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가 역사라고 했다. 그 대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온당한 해석 행위이고, 그런 해석을 통해 역사의 객관성은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역사적 사건들의 해석을 통해 단순히 그 시대의 규명에나 그치고 만다면, 그것을 진정한 역사가의 안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학자를 만나자마자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씨 3대 혹은 북한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통찰을 림멜 교수는 내게 보여준 것이리라. 여지없이 엄정한 시각을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해석에서 얻어내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들을 만나는 일이 내겐 큰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을 림멜 교수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컴퓨터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는 림멜 교수

 

 


림멜 교수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

 

 


2013. 12. 14. PBS에서 방영한 '비밀의 국가 북한' 타이틀 화면[방송화면 캡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의 어린이[방송화면 캡쳐]

 

 


군 진지를 순시하는 김정은에게 달려가며 충성을 과시하고 있는 인민군들[방송화면 캡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
알림2013. 8. 2. 16:05

 


책 표지


1980년대의 한진


                                                        1988년에 펴낸 <<한진 희곡집>>


1965년작 <의부어머니>


1991년 작 <나무를 흔들지 마라>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2011년 8월 백규 연구실에 만난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한양대 박사과정 재학)와 저자들

 

 

조규익 교수(숭실대 국어국문학과)와 카자흐스탄에서 활동 중인 김병학 선생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 7.]을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2로 펴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매우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극작가 한진 선생만큼 복잡다단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이는 드물다. 그는 북한에서 인텔리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기간에 초⋅중등교육과정을 마치고 1948년에 북한 최고의 교육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에 들어갔다. 공부에 취미가 남달랐던 그는 곧바로 학업성적에 두각을 나타내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6⋅25동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고 전쟁의 와중에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도 변함없이 최우등의 학업성적을 보였다. 시쳇말로 그는 ‘최고의 스펙’을 쌓은 전도유망한 청년학도였다. 그의 앞에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안정과 명성이 보장된 미래를 던져버리고 돌연 디아스포라의 가시밭길을 택한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가 격화되면서 자유가 억압되고 문화예술은 이념의 시녀로 추락하고 있던 조국이 더 이상 기쁘게 돌아가 양심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의 작품들은 그의 의식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따라 네 단계로 나뉜다. 망명과 정착 과정에서 갖게 된 콤플렉스를 ‘원 모성으로부터의 절리(切離)와 새로운 모성의 발견 및 정착’으로 형상화시켰다고 보는데, 이것을 1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새로운 조국과 이념의 발견]이라 할 수 있고, <의부어머니>, <고용병의 운명> 등이 이에 속한다. 정착지에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지극한 사모(思母)의 정이었고, 어머니를 만날 수 없게 만든 조국 북조선의 현실이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것이 2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모정에 대한 그리음과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었고, <어머니의 머리는 왜 세였나>, <량반전>, <산부처> 등이 이에 속한다. 2-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르바초프에 의해 천명된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은 소련의 분위기를 바뀌어 놓았고, 그에 따라 그로 하여금 다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추구할 수 있게 했다. 비록 풍자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체제의 모순을 비판할 수도 있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인 어법으로 조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낼 수도 있게 되었다. 3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주제의 다각화와 다양한 미학의 추구]이 가능했던 것도 그런 상황의 변화 덕분이었고, <토끼의 모험>, <나 먹고 너 먹고>, <폭발> 등이 이에 속한다. 4단계에 이르러 소련의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대두됨으로써 조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 또한 새롭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진으로서는 이념이나 힘의 우위가 아니라 동질성에 입각한 ‘분열된 민족의 통합’만이 가장 바람직한 조국의 미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나무를 흔들지 마라>를 통해 이 시기의 이면적 주제의식[민족통합의 당위성 추구]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가 망명지에서 표면상 극작가 혹은 소설가로 살아갔지만, 이면적으로는 일관되게 민족정신이나 정서를 추구한 민족주의자로 살아갔다고 본다. 그 결과 그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의 극작품들은 독특한 미학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밝혀진 것만 해도 12편의 희곡, 19편의 단편소설 및 소품, 5편의 단행본, 16편의 번역극, 수 미상의 평론 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창작 및 번역 희곡들 대부분은 최근까지 고려극장을 통해 상연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조국과 영영 만날 수 없는 부모형제는 그가 일평생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근원이 되었지만, 그는 이 아픔을 자신이 창작한 희곡에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극장을 찾은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그가 말년에 쓴 희곡 「나무를 흔들지 마라」는 오직 한진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국통일에 대한 독특하고도 통찰력 있는 비전을 담아낸 역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마치 예언자처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남과 북의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해답을 선취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직접 발을 담갔던 한진이 소련에 유학하던 첫해부터 자신을 되돌아보며 평생을 붙들고 다듬어온 구상으로,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겼다.

이 책의 전반부에는 어릴 적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사진 및 원고사진들을, 후반부에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과 연구를 각각 실음으로써, 우리 민족이 배출한 구소련의 뛰어난 극작가 한진의 전모를 보여주게 되었다고 본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차례

머리말

 

제1부 사진 및 기록자료

1장. 사진

1. 평양 시절

2. 소련 모스크바 유학 시절

3. 러시아 바르나울 시절

4.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절

5.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전반기)

6.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후반기)

2장. 편지

3장. 육필 원고

4장. 신문 게재 원고

5장. 책․잡지 게재 작품 및 글

6장. 기타 자료

7장. 작품 목록

1. 희곡

2. 단편소설․소품

3. 직접 편찬했거나 편찬을 주도한 단행본

4. 번역 작품

   

 

제2부 한진의 생애와 문학

1장. 한진의 생애와 작품 세계

2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 세계

3장. 한진 희곡의 고전수용 양상

4장. 한진의 연보

5장. 참고문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8. 1. 09:29

중국은 무도(無道)한 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

 

                                                                                                                                           백규

 

근자 중국의 마수(魔手)로부터 가까스로 풀려나 귀국한 김영환 씨에 의해 중국의 치부가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중국을 다녀 왔거나 그들과 공식적인 거래를 해본 사람들은 대충 알고 있겠지만, 그들이 아직 원시적 야만의 의식수준에서 헤매고 있음은 분명하다. 세계에서 국가 공권력이 공공연하게 고문을 자행하는 나라의 대표적 사례가 북한과 중국이다. 공자와 맹자, 주자와 같은 훌륭한 선조를 모시고 있는 나라의 못난 후손들이 벌이고 있는 야만적인 폭거는 그들의 행태로 미루어 앞으로 몇 세기가 흘러도 청산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미개국을 이웃으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할까. 툭하면 잡아다 고문을 해도 모르는 척 하면서 '잡혀 들어간' 우리 국민의 '기민하지 못함'만 탓해야 할까. 어떻게든 덩치만 큰 '깡패국가' 중국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겠는데, 당장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다. '정신 바짝 차리는 것'만이 그나마 그런 깡패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 함께 지혜를 짜 내야 한다.

 

2005년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지금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김문수 지사가 국회의원으로 있던 당시였다. 그가 중국에서 탈북자 문제인가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 현장에서 무도한 중국의 공권력으로부터 테러 비슷한 폭행을 당했다. 한 나라의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은 어느 나라에 가서든 최소한 외교관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김 의원을 잡범 다루듯 한 일은 국제법의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김 의원을 탓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무도함을 먼저 탓했어야 할 이 땅의 정치인들 혹은 지식사회가 억울한 김 의원을 비난한 것은 뿌리 깊은 '노예근성'의 발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종북주의자들'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필자는 당시 분노를 금치 못하고 아래와 같은 칼럼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다. 그 글을 통해 위정자들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이라도 마련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고 하는 위정자 그룹의 '대책없음'이 우리를 분통 터지게 만드는 요즈음이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을 꿈꾸는 이른바 잠룡(潛龍)들은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갖고 있어야  한다. 깡패국가의 볼모로 전락한 국민이나 국가의 대통령이 된들 무슨 영광이겠는가? 얻어 맞으면서도 배만 부르면 그만인 '돼지'로 만족할 것인가?

 

당시의 글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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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존심

 

 

▲ 조규익 교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중국의 공권력에 폭행을 당했다. 국가 간의 이해(利害)가 개입된 문제라고는 해도 ‘때린 놈’이나 ‘맞은 놈’ 모두 우습게 되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때린 놈의 역성을 드는 집단이 우리들 속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점잖다 해도 ‘불량배에게 맞고 들어온 자식’을 꾸중하는 부모는 없다.

 


사실 중국을 지렛대로 북한을 움직이려면, 중국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란 어렵다. 북한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면서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이득까지 챙기려는 중국인들의 계산법은 천하공지(天下共知)의 사실이다. 분단된 우리 민족을 뒤에서 조종하며 실익을 챙기자는 그들의 ‘꼼수’를 우리는 민족사 최대의 수치로 받아들여야 정상이다.

 

따라서 이번 일을 국제화 시대의 나라들 간에 일어날 만한 외교적 사건으로 단순화 시킬 수는 없다. ‘민족적 자존심’의 원칙적 잣대는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최우선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그 잣대가 좀더 복잡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0년 전의 일을 떠올려 보자. 반정(反正)으로 인조(仁祖)를 옹립한 서인(西人)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중국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지 못하면 국내에서 반대파를 누르고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의 기세가 바야흐로 명(明)나라의 숨통을 끊어갈 무렵이었다. 이덕형(李德泂)을 정사(正使)로 하는 주청사(奏請使)가 명나라 조정에 파견되었고, 그들은 넉 달 가까이 북경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사가 ‘시랑(侍郞)’ 정도의 관리들에게 농락을 당하기 일쑤였고, 자신들의 뜻을 요로에 전하기 위해 뇌물을 밥 먹듯 써야 했다. 북경의 혹심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새벽부터 길거리에 꿇어 엎드려 출근하는 각로대신(閣老大臣)들에게 손을 비비던 노구(老軀)의 정사는, 바로 역사 속에 그려진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다.

 

 

그뿐인가. 천신만고 끝에 각로들을 만난 정사. 그들의 괜한 트집으로 섬돌에 내동댕이쳐져 울부짖던 그 참상을 다시 무슨 말로 표현할까.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다지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농락해 온’ 저들의 무례함을 제때 제대로 징치(懲治)했더라면 현대사는 좀더 다른 방법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징치’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만이라도 강구했었다면 지금 이렇게 온 국민이 참담함을 되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빌붙어 국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일부 무리들의 ‘꼼수’는 결국 민족의 자존심을 망치고 그후 조선에 잦은 전란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가 된 것만 보아도, 통치 집단의 지혜로움은 분명 민족사 전개의 향방을 가르는 지표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세상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겉모습은 달라져도 본질은 변할 리 없다. E H 카(Carr)의 말처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임에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운 것 없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말았다. 특히 21세기 초입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집단들이 매우 우매(愚昧)하고 게으르다는 점, 국민으로서는 그것이 못내 통분하다.

 

 

역사책의 한 쪽만 넘겨 보아도 우리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진실은 그득하다. 지금 중국은 남북의 분단 상황을 지렛대로 삼아 그 사이에서 철저히 이익을 취하고 있다. 그 와중에 농락당하는 건 남북한 모두의 자존심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조선일보, 2005. 1. 1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 3. 08:10

2011년=민족자존심 회복의 원년


                                                                                                    조규익
                                                                        
 지난해의 천안함 격침과 연평도 포격만큼 최근 들어 우리의 현실을 각성시켜 준 사건들도 없었다. 북한에 의해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그간의 도발들이 지난 정권들의 '햇볕정책'과 맞물려 '안보 현실의 추상화'에 기여했다면, 이번 사건들은 우리에게 '안보 현실의 문제적 실상'을 구체적으로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지난 정권들의 '햇볕정책'이 얼마나 공허한 '짝사랑'에 불과했는가를 만천하에 드러낸 동시에 반사적으로 우리의 체제나 대비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사건들이다.


 그런데 두 사건의 바탕에는 간단치 않은 국제 정치적 맥락이 깔려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 뒤 한국과 미국은 서해에서 대규모 연합훈련을 했고, 이어 우리 군은 포격사건으로 중단되었던 정례적 사격훈련을 재개했다. 이 훈련을 트집 잡아 북한은 보복타격의 협박을 공언했고, 연평도 포격사건의 책임소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던 중국과 소련이 들고 나서서 사격훈련을 저지하려 했다. 심지어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한 국가가 자기 영토 안에서 실시하는 정례적 훈련'까지 포기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다수 이사국들의 반대로 무산되긴 했으나, 일방적으로 북한 편을 들고 있는 러시아나 중국의 태도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적 역학의 미래에 대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또 한 가지 공교로운 일은 한국과 미국의 공조로 연평도 포격사건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응급대비를 하는 와중에, 미뤄두었던 '한미 FTA'의 원안이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수정·타결된 점이다. 의도 여부를 불문하고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한미 FTA'를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타결되도록 한 지렛대로 작용했음은 뻔한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면 한반도의 현상유지가 바람직하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남한에 의한 통일국가가 출범하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게 껄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버려두면 무너지게 되어 있는 북한을 어떻게든 떠받쳐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이들 나라의 최고 전략이다. 더욱이 조만간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만나 대화의 재개에 합의할 것으로 관측되고, 그간의 강성 기조를 바꾸어 6자회담의 수용을 암시한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언급을 미루어 본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주판알 튀기기가 이미 본격 가동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그것대로 그들에게는 기회이고, 단순한 분쟁으로 끝난다 해도 한국에 고통을 주면서 통일한국의 출범을 막을 수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이익이다. 이런 와중에 국제적인 바보 역할을 하는 것이 남북한의 권력집단이고, 희생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민초들이다. 자국 내 이권을 담보로 식량이나 물자를 구걸하러 뻔질나게 중국을 찾는 김정일 집단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그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이익 확보에 바쁜 미국이나 일본의 힘을 빌려야 하는 남한 또한 떳떳치 못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의 안이했던 자세를 고쳐 안보 분야의 '주적 개념'을 손 보고, 북한 주민들을 회유하는 방향으로 통일정책을 수정한다 해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구조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렵다. 북한이 불시에 붕괴하도록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의 흡수통일 또한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의 입장에서야 분단구조의 고착화를 원할 텐데, 그 구조가 지속되는 한 안보 불안은 상존할 것이다. 이런 쉽지 않은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남북한 모두 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김정일 사후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탈북자들을 관리하는 현행 체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정비하여 통일 이후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불안감을 없애주어야 한다. 주변 열강들의 이해에 휘둘리는 것이 남북한의 현재 모습이다. 남북통일의 대전제는 민족의 자존심이다. 2011년을 남북한이 함께 민족자존심 회복의 원년으로 삼을 수 있도록 힘을 합해야 하는 것은 남북한이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지속되어 온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