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규서옥'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4.10.09 책 단상
  2. 2014.04.30 고려인들과 ‘고려인 문학’
  3. 2014.01.30 미국통신 57: 설날 인사 3
  4. 2014.01.01 미국통신 45: 새해인사 1
  5. 2011.01.01 새해인사 2
글 - 칼럼/단상2014. 10. 9. 19:51

책 단상

 

 

 

초년병 시절. 책을 한 권 내면 세상의 한 모퉁이라도 정복한 듯 설렘으로 붕 뜬 채 며칠을 지내곤 했다. ‘사람들이 아마 요건 모르고 있었을 거야!’ 초등학교 소풍 날 보물찾기 시간, 후미진 곳에서 하얀 쪽지를 찾아낸 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아이가 그러했으리라. 책도, 책을 내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내로라하는 학계의 거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시던 유일한 지표가 저서였다. 잘 나가는 일간지들의 신간안내에는 무게 있는 학술서들이 가끔 소개되었고, 나는 그 기사를 오려갖고 다니다가 서울 가는 기회에 그것들을 사서 소중하게 모셔오곤 했다. 요즘과 달리 방방곡곡의 제제다사들이 총집합하는 학회에 갈 때는 혹시 이 거물들을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 그 분들이 출판한 책 제목과 목차라도 몇 번씩 훑어보고 가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저자의 급에 따라 달랐겠으나, 책을 내면 초판 1,000권이 기본이었고, 초짜인 내게는 인세조로 100부가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평소 손꼽아 두었던 학계의 어른들과 동학들에게 정성스레 헌사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드리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구 말대로 출신이 한미하여’^^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책과 논문 혹은 입소문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는 그 분들에게 내 목소리를 보낸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무슨 반응이 오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고, 다만 비웃음이나 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몇 차례 그런 일 들이 반복되는 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몇 분들로부터 반응이 있었는데, 잊히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있다. 소재영, 김대행, 이규호, 성호주, 박노준, 이상보, 조재훈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이었다. 어떤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편지 혹은 엽서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주셨는데, 의례의 수준을 넘는 곡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돌아가신 성호주 선생님은 내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다. 책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 주쯤 되었을까.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뜯어보니 속옷과 양말 한 세트, 그리고 정성스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도 물건도 감동이었다. 그로부터 책을 받으면 최소한 답장만이라도 정성스럽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매우 혼잡한 어떤 인사의 서재

 

 

그 뒤로 세상은 마구 변했다. 누구 말대로 아무나 책을 내는시절이 되었다. 학술서의 원고를 들이밀면 출판사에서도 외면을 한다. 거짓말이나 허접한 거라도 좋으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원고를 가져 오란다. 돈이 될 만한 원고를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학술서를 낼만한 모모 인사들도 이젠 가벼운 대중서를 통한 매명(賣名)의 덫에 걸린 것 같아 안타까운 요즈음이다. 재미있는 책도 안 읽는 세상이니 고리타분한 학술서를 읽을 턱이 없다. 학술서는 초판 500부 혹은 300부가 고작이다. 그나마 정부에서 우수학술도서제도를 통해 돈을 주니 찍어내는 것이겠지만, 우수학술도서라는 것도 로또일 수밖에 없다. 선정되는 우수학술도서 저자들의 분포를 보며 심사위원들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나중에 공개되는 것을 보면 대개 맞는다. 누군가는 그것도 권력이라고, ‘짬짜미가 있다는 말도 하지만, 대체 한 두 번 책을 만지작거린 뒤 수천수백 권의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우수학술도서를 골라낸단 말인가.

 

 

이제 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책을 놓아둘 자리가 없는 아파트는 현대판 노마드의 텐트일 뿐이다. 어느 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는 소문에 서둘러 텐트를 걷는 노마드처럼, 춤추는 아파트 시세에 따라 수시로 짐을 싸는 존재들이 오늘날의 우리다. 그런 와중에 책만한 천덕꾸러기도 없다. 무겁지, 돈도 안 되지, 놓을 자리도 없지... 이삿짐 센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짐이다. 그래서 이사철 아파트의 쓰레기장에는 책들이 수북수북 쌓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배운 도둑질이라고, 책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책을 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볼 이유는 없으니, 내 돈을 들여서라도 사서 보내주어야 한다. 요즘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물어본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부 주어도 되겠나?”라고. 인사치레겠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주세요!”라고 하지만, 속내는 믿을 수 없다. 아마도 50~60%는 쓰레기장으로 가거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배냇짓처럼헌사를 써서 건네곤 한다. 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엔 우편으로 책을 부치는 일이 힘도 들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더 힘 빠지는 경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다. 나보다 연상으로부터 반응 없음은 늙어 귀찮으니 그렇겠지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동년배나 연하의 동업자들에게 반응이 없는 일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럴 지도 모른다. ‘누가 그깟 책 보내라 했나?’ 그렇다.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내놓고 서운해 하는 내가 바보인지 모른다. 어쩜 가뜩이나 연구실도 좁고 집도 좁은데 책까지 보내왔으니, 투덜거리며 뜯지도 않은 채 던져 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심한 추정을 해보자면, 발송인을 확인도 아니 한 채 아예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내온 책이 어떻든 상대방이 고심참담 끝에 만들어, 정성스런 헌사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온 선물이다. 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보내는 행위는 적어도 당신은 내 공부를 이해하고 조언해줄만한 분으로 생각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영광스런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한 손으로 밥을 떠 넣으며, 다른 한 손으론 SNS를 희롱하는 시절이다. 설사 방금 전 그 책을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해도, “선배, 좋은 책 잘 받았어요. 언제 그렇게 좋은 책을 내셨어요? 참 놀랍네요. 잘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잠시 엄지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무성의한 문구 하나 스마트폰으로 날리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하기야 책을 받은 뒤 전화 통화를 해도, 직접 대면하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부터라도 어쭙잖은 책 내려 하지 말고, 잘 있는 산의 나무들이나 건사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30. 16:55

 

 

 


            원동지역으로부터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여 토굴을 파고 살던
   우쉬또베 교외의 황무지. 지금은 공동묘지로 바뀌어 있음.

 


고려인들이 최근까지 거주하다가 모두 떠나 폐허가 된 우쉬또베 인근의 모쁘르 마을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막달레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들과 함께[수도 민스크에서]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고려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

 

 

우쉬또베의 바스쮸베 언덕에서 김병학 시인과 이 스따니슬라브 시인.
뒤쪽으로 보이는 하얀 시설물들이 고려인들의 공동묘지임.[2006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호텔 로비에서 소설가 블라지미르 김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 선생의 손녀 한율리아와 김병학 시인.[백규 연구실에서]

                                                                                 

 

 

*이 글은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의 머리말인데, 몇 분의 요청으로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고려인들과 ‘고려인 문학’

 

 

긴 여정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 전의 고려인이 되어 그들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하는 길이 간단치 않았다. 그들의 자취를 찾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곳들에 상상 속의 고려인들은 더 이상 없었다. 김경천 장군의 말발굽 소리도,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도, 작가 조명희의 빛나는 문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굽이굽이 복잡하기만 한 디아스포라의 역정(歷程)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일까. 자신들이 지켜오던 우리 말 아니 고려 말이 현실 속에서 그리도 무거운 짐이었을까. 스탈린의 폭력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標識)를 내려놓은 그들이었다.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에게서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유창한 러시아어를 굴리는 그들의 혀 밑에 우리말이 깃들 틈은 더 이상 없었다. 말을 잃으니 문학과 역사를 잃고, 문학과 역사를 잃으니 민족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의 지난날들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옛날 가설극장 영사기의 낡은 필름 돌아가듯 반복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민족의식의 희미한 끈이나마 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1세대 고려인들은 고려극장의 창고 한 구석에 버려진 이름으로 쳐 박혀 있거나 우쉬또베 근교의 황무지에 녹슨 묘비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려인 2세와 3세들의 표정 너머에 아련히 남아있는 부모세대의 근심과 좌절을 읽어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모토가 바로 스탈린이 표방한 동화정책의 핵심이었다. 흉포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피해 그 땅에 들어간 소수민족들 중의 하나가 고려인들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 되는 역사적 폭력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끄나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쫓겨난 고려인들은 그곳에서도 ‘주변인’으로 낙인찍혀 제국의 공민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찍이 식민주의⋅억압과 피억압 등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내놓은 선구자 프란츠 파농의 ‘인종이 곧 계급’이란 말은 사실 고려인들에게도 들어맞는 명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또 다시 ‘새로운 주변인’으로 타자화 되었다. 각 공화국의 주도민족에 밀려 또 다른 소수자로서의 설움을 맛보면서 새로운 식민화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탈식민의 조류 속에 ‘새로운 식민화’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으나, 이곳 또한 그들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국에서도 또 다른 주변인으로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최근 3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하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렸고,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다.

 

***

 

그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 꼽을 수는 없으나, 물설고 낯 선 중앙아시아에서 밝은 눈과 귀가 되어 준 김병학⋅이 스타니슬라브⋅김 블라지미르⋅김 빅토리아 등 몇 분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김병학 선생으로부터 받은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젊은 나이에 카자흐스탄으로 건너 가 한동안 한글교사로 활약한 뒤 고려인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오고 있는 그를 능가할 만한 ‘중앙아시아 고려인 전문가’는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반영된 귀한 자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그는 국내에서 여러 권의 고려인 관련 서적들을 출간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관심이나 수준을 괄목할 만큼 높인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런 인재를 발탁해 쓰는 게 나라의 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이 연구 작업을 위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제공했고, 학자의 뜻을 세우던 시기에 손을 잡아주신 도서출판 태학사의 지현구 사장님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을 결산하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다. 고전문학도로 살아오던 중 우연히 ‘해외 한인문학’을 만나 탐구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그 한 부분인 ‘고려인 문학’을 수탐하여 미흡하나마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게 된 점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소담스런 책으로 만들어 주신 태학사 한병순 부장의 노고에 감사하며, 강호제현의 아낌없는 叱正을 고대한다.

 

 

2013. 6.

 

 

달마산 아래 백규서옥에서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30. 10:42

 


데이비드 킴볼 앤더슨(David Kimball Anderson) 작 <Big Mind: Bowing, Black Robe>,
뉴멕시코 주 산타페의 'New Mexico Museum of Art' 소장

 

 

 

 

설날 인사

 

 

 

작년 여름 저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땐 땡볕 더위에 외출조차 못할 정도였습니다.

시각이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게으름을 부릴 때도 많았는데,

벌써 갑오년 설을 맞이하였습니다.

 

먼저 저를 아껴 주시고 자주 백규서옥을 찾아주시는 손님 여러분께 세배 올립니다.

갑오년 새해에도 큰 복 받으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지금 설인지 뭔지 알지도 못하는 미국 사람들 틈에 끼어 있긴 하지만,

저희들은 늘 조상과 후손을 생각하고 나라의 장래까지 걱정하며

살얼음 밟듯남의 땅에서 한동안 잘 지냈습니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이야말로 저희 같은 민초들의 한결같은 바람 아니겠는지요?

정치하시는 분들, 옳은 판단으로 정신 좀 바짝 차리시고,

국가의 공직에 있는 분들, 한 결 같이 바른 마음을 가지시고,

기업하시는 분들, 한 눈 팔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 주신다면,

밑에 있는 저희들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위기가 기회라는 평범한 진리가

새해에는 남북통일의 결정적 계기로 구현되리라 믿어봅니다.

궤도를 벗어나 방황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화해와 화평의 큰 장에서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어봅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갑오년 첫날 아침

 

미국에서

 

백규 인사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1. 13:19

 

 

 

 

 

 

 

새해인사

 

 

 

계사년이 저물고, 대망의 갑오년이 밝았습니다.

미국의 이 지역은 한국에 비해 14시간이 늦은 관계로 이제야 새해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건도 많고 말도 많았던 지난해를 무탈하게 넘기시고 새해를 맞이하신 백규서옥 손님 여러분께 진심으로 큰 복을 빌어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들어 우리나라는 여러 면으로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개인들도 살아가기가 수월치 않은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체류하고 있는 오클라호마 주의 반 밖에 안 되는 면적에 5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으니, 많은 갈등과 다툼이 생겨날 것은 당연하겠습니다만. ‘원칙과 법치’, ‘양보와 신뢰만이 그나마 우리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묘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제게도 좋은 일, 궂은 일 등 곡절이 적지 않았습니다. 재직하는 학교에서 그 학교의 첫 아너 펠로우 교수(Honor Fellowship Professor)’로 선정된 일과 풀브라이트(Fulbright) 지원 학자로 선정되어 미국에서 연구와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받은 일은 제 일생을 통해 가장 과분한 영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덕에 도전과 힐링(healing)’이란 목표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정 기간의 반 이상을 보낸 지금 그 목표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반성하며 스스로 자책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약간 서운한 일도 물론 있었습니다. 인간 사이에서 오고가는 거짓이나 술수만큼 사악한 행위도 없을 것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겪은 경우는 올해가 처음입니다만. 그 모든 것들이 제 모자람에서 기인한 것이라 치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닦달하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결국 참회의 눈물을 보이며 돌아올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국가든 직장이든 개인이든, 새해엔 많은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리라 생각합니다. 주변의 여건들이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요즈음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중심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국가도, 직장도, 개인도, 중심이 없으면 허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로서의 중심을 다잡으려는 것이 올 한 해 견지하고자 하는 목표이자 과제입니다. 여러분께 많은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모쪼록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2014년 새해 아침에

 

백규 올림

 

 

 

 

Posted by kicho
알림2011. 1. 1. 15:33

새해인사

 

신묘년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백규서옥을 찾아주시는 귀한 손님 여러분께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올해 더욱 건강하시고 뜻하시는 모든 일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지난해는 국가적으로 다사다난했었습니다.

천안함 격침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 생각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게 만들었습니다만, 그나마 그런 궂은일들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정신무장을 다질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연구와 교육, 학장직 수행 등으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결산해보니 움직임에 비해 소득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논문이나 저서는 예년의 수준으로 발표했고, 프로젝트 건으로 우즈벡을 두 번 다녀왔으며, 학술발표와 학교 공무로 중국을 두 번, 학술답사 목적으로 대마도를 한 번 다녀왔습니다. 한국문예연구소를 통해 두 차례의 학술대회[국내/국제]를 비교적 성황리에 마쳤고, 두 차례에 걸쳐 논문집을 발간했으며, 10여권의 학술총서와 문예총서를 발간했습니다. 학장직과 관련한 굵직한 행사들도 몇 가지 있었습니다만, 숭실 시낭송축제, 고은 시인과 황지우 시인을 초대한 ‘인문학 포럼’ 등은 그 가운데서도 기억에 남는 일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적지 않은 일들을 수행했군요.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일들을 여하히 우리의 내부적 역량으로 축적해 나가느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의미를 건지지 못한 채 그냥 흘려버린 시간들이 적지 않았던 과거를 떠올리면, 지난해에 많이 움직였으면서도 소득이 없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올해부터는 많이 움직이는 것보다 차근차근 의미를 확보하는 데 주력고자 합니다. 올해의 움직임을 내년의 더 큰 움직임을 위한 발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잡고, 주어지지 않으면 일부러 찾아서라도 공동체의 삶을 발전시켜 나갈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는 소득 못지않게 문제도 많았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연구비 수주액이 미미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향후 연구소 운영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리라 보는데, 올해는 기필코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력투구해야 하리라 봅니다. 많은 도움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동참해주시고 도움을 주신 여러분에게 고마움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저희들을 지지해주시고 격려해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늘 건강하시고, 가정에 큰 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묘년 첫날 아침

 

조규익 드림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