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1. 11. 01:51


“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서울 시장의 홈피[원순닷컴]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찌르는 말 한 마디를 발견했습니다.

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어문대학장인 유재원 교수가 박 시장에게 보낸 메일의 제목이었습니다. 유 학장의 호소 속에는 언어학자의 프로의식과 함께 말기에 접어든 우리의 병통을 호소하는 지식인의 절규가 들어 있었습니다. 우선 유 학장의 메일 내용을 읽어 본 다음 제 생각을 덧붙이겠습니다.

***

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위치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부터 영국의 대학 평가 회사인 QS(Quacquarelli Symonds)와 공동으로 실시하는 “아시아 대학 평가”에는 한국어 논문에 대한 점수가 아예 고려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 QS라는 회사는 2003년부터 영국의 The Times와 세계대학평가를 실시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The Sunday Times와 US News and World Report를 통해 세계 대학평가를 시행할 예정이라 한다.

조선일보의 대학평가 기준은 ▶연구능력(60%) ▶교육수준(20%) ▶졸업생 평판도(10%) ▶국제화(10%) 등 4개 분야를 점수화해 순위를 매기는 것으로 연구 능력과 국제화가 모두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을 전제로 평가되기 때문에 결국 영어 논문 비중이 70%나 반영되게 짜여 있다. 또 평가의 총괄 책임자도 벤 소터라는 영국 사람이 맡고 있다.

QS의 대학 교수 연구 능력 평가는 ‘스코퍼스(
http://www.scopus.com’)라는 네덜란드 회사가 만든 데이터 베이스와 검색 엔진을 이용하여 각 대학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과 논문 당 인용수를 검색하여 교원 수로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서의 스코퍼스 관리는 ‘엘즈비어 코리아’에서 하고 있음.) ‘스코퍼스’사는 세계 약 25,000여 개의 학술지를 국제 저명 학술지로 등록하고 있는데, 이 학술지들은 모두 영어로 쓰여 있다. 이 기준을 따르면 한국어로 쓴 논문은 ‘0’점으로 처리되게 마련이다.

이런 평가 기준에 대한 각 대학의 반응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모든 대학은 국제 저명 학술지 게재율을 높이기 위하여 상당한 특혜를 베풀고 있다. 보기로 부산대학에서는 SCI나 SSCI, A&HCI 1 편당 현재 1 억을 지급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경희대는 국제 저명 학술지 논문 1 편당 600 점을 부여한다.

이와 같이 한국어로 논문을 쓰면 ‘0’점을 받고 영어로 논문을 써서 국제 저명 학술지에 실리면 거금의 포상금을 받는 현실에서 한국 대학 교수들이 한국어로 논문을 쓰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어로 논문을 쓰는 교수는 ‘패배자[looser]’임을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만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우리말 한국어는 이 땅에서 학문어로서의 지위를 영원히 잃고 저급한 2류 언어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이것은 예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대학 개혁이 성공할 경우,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나 인도, 필리핀과 같은 나라의 위치로 전락할 것이다. 이들 나라의 지식인을 비롯한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모국어로는 학문도 철학도 할 수 없어 영어로 모든 고급 문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최대 지성이자 사회의 지도 계층인 대학 교수들을 비롯한 한국 학자들이 더 이상 한국어로 논문을 쓰지 않을 때, 한국어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학문과 문학을 창조하지 못하는 언어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지극히 간단한 이치다. ‘청(淸)’을 세운 만주족과 ‘원(元)’을 세게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던 몽골족도 한자와 중국어에 문화 주도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인류 최초의 학문과 사상, 문학을 꽃피웠던 수메르어와 산스크리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라진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지금의 유럽 문명의 모태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아직도 서양 여러 나라의 언어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모든 고급문화 생활이 영어로 이루어지게 되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문맹’에 빠지게 된다. 지금 영어를 문화어로 내세워 한국어를 말살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일반 국민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언어 차별은 인종 차별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땅에서 영어를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인종 차별을 받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한국어 천대 현상이 계속되는 한, ‘영어를 하는 한국인’과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으로 나뉘어 차별을 받게 될 날도 멀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무도 나서서 저항하지 않으면 말이다.

***

유 학장의 글을 읽어보신 소감들이 어떠신지요? 참, 절박한데도 그동안 여러분이나 저는 전혀 그 절박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요? ‘말 없는 삶’을 상상해 보셨나요? ‘말을 잃으면 정신을 잃는다’는 격언도 들어서 알고들 계시겠지요? 우리에겐 우리말을 빼앗긴 채 살아본 세월이 있었습니다. 또 우리말을 표기할만한 글자를 갖지 못하고 살아온 긴 세월이 있었지요. 최근 어떤 방송에서 한글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 세종대왕의 삶을 스토리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된 바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내용이 사실인지 허구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민족사[혹은 민족 정신사]의 방향을 바꾸게 된 세종대왕의 깨달음이나 결단이 어디서 나왔으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작가 나름의 ‘상상력’이 얼마나 핍진(逼眞)하게 마음에 와 닿는지 우리 모두 공감하지 않았던가요?

독일의 애국자이자 철학자인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를 잘 아실 겁니다. 그의 유명한 글 <독일국민에게 고함>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독일’ 대신 다른 어느 국가나 민족의 이름을 넣어도 통할만한 보편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글 가운데 오늘날의 우리 현실과 관련하여 큰 깨달음을 주는 문제가 바로 ‘언어’의 존재와 의미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언어를 매개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은 국어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 언어는 한 민족의 특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 즉 한국인[피히테가 말한 ‘독일인’을 제가 한국인으로 바꾸었습니다]은 한국어라는 살아 있는 특수한 언어를 통해서만 무한히 한국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 살아 있는 한국어를 말하는 한국인은 ‘신적 본질’을 지향하여 드높여질 수 있다는 것[고양(高揚)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가 주장한 민족어의 중요성이지요.

우리나라에도 고금을 통해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선각자들은 많았습니다만. 그 가운데 ‘한문지상주의(漢文至上主義)’ 시대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를 살다 간 최고의 지성 서포 김만중 선생이 그의 글「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펼친 다음과 같은 주장은 오늘날에도 금과옥조로 삼을만한 선언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생각[마음]이 입에서 나온 것을 말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어문(語文)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우니, 가령 십분 서로 비슷해 보여도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길거리의 나무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서로 깔깔거리고 화답하는 말들이 비록 비루(鄙陋)하다 해도 그 진위(眞僞)를 논한다면 정말 학식이 많은 사대부들의 이른바 시부(詩賦)라는 것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

한문으로 쓴 글만이 글로 인정을 받던 시절에 한문의 대가 서포선생은 이런 말로 ‘자국어’와 ‘자국 글자’의 가치를 설파했습니다. 그가 한문의 대가였으면서도 ‘우리말이나 글이 한문에 비할 바 없이 귀하다’고 한 것은 그 분 스스로 말과 글이 인간의 정신적 산물임을 깨닫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외국어문을 잘 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강점입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는 요인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자국어로 사색하고 자국어로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 인문학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인문학 논문을 영어로 써야 한다면, 그것은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쓴 논문[실제 종이 위에 적은 것이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든]을 영어로 번역한 데 불과한 것입니다. 독일어문이 언제 그렇게 훌륭한 학문어가 되고 문학어가 되었나요? 오랜 세월에 걸친 독일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민족자주’를 외칩니다. 일본에게 말과 글을 빼앗겼다가 간신히 찾은 때로부터 지금 몇 년이나 지났나요? 그 혹독한 시련에서 벗어난 지 겨우 60년 남짓 지났을 뿐입니다. 우리의 민족 지사들이 일본의 그런 무자비한 폭압에 맞서 얼마나 가열 찬 투쟁을 벌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말과 글을 빼앗은 일제시대의 민족적 비극과 저항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영어의 쓰나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말과 글을 버리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밤을 밝혀가며 우리말로 사유하고 우리 글로 써 내는 논문들을 평가의 대상에도 넣지 않으려 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니, 아예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민족을 떠들고 세종대왕을 우러러 본다고 하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것을 버리고 우리가 어디에 가서 우리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국제 학문시장에 나가 우리 인문학의 연구결과를 영어로 발표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일 뿐, 전체이거나 본질은 아닙니다. 요즘 들어 왜 우리 사회는 한사코 일의 본말(本末)을 뒤집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없는 정권이 몰고 온 말기적 증상이라 간단히 치부해 버리기엔 무언가 찜찜하고 불안한 구석도 없지 않습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우리가 지금처럼 중심을 잡지 못할 경우 앞으로 민족사의 비극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근래 들어 엄습해 옴을 느끼는 것은 저 혼자만의 기우(杞憂)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2012. 1. 10.>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1. 1. 00:30

 

   위 <천리포의 일몰-2011. 7. 20.>
   아래 <동해의 일출-양양 솔비치 앞바다, 2010. 1. 18.>

                                         
 몇 시간만 지나면 또 한 해를 맞는다. 누군들 예외일 수 있겠는가만, 신묘년이 한 뼘 가량 남은 지금 심사가 적잖이 복잡하다. 대충 계산해 보아도 지난 한 해 개운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잘한 일과 잘못한 일들을 저울에 달 경우 약간 뒤쪽으로 기운다면 일단 후회가 많은 한 해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 옛날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작비금시(昨非今是)’의 감회를 노래했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에게 ‘벼슬에 앉아 있던 시간대와 벼슬에서 벗어나 고향에 돌아온 시간대’는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벼슬살이가 잘못된 일이었고, 벼슬을 던지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 옳은 일이었다는 깨달음을 그 시에서 강조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난 시간대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뉘우친다. 어리석음과 잘못을 1년 단위로 뉘우쳐서 지난해의 그것들이 무(無)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스타트 라인에 다시 올라서서 가벼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포맷이 불가능한 컴퓨터’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모두 안고 가야하며 그에 따르는 부담을 함께 져야 하는 운명적 존재다. 잘한 일이 많으면 밝은 인생을 살 수 있고, 잘못한 일이 많으면 어두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어제의 잘못을 깨끗이 반성하고 ‘새 출발’을 한다고들 말하지만, 그 기억과 상흔이 컴퓨터 포맷하듯 어찌 말끔하게 지워질 수 있으랴. 그래서 사람들은 번뇌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가슴을 치기도 하고 발등을 찍기도 하며, 스스로를 호명하며 저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회가 나 같은 필부(匹夫)들만의 일은 아니다. 임기 말의 레임덕에 사로잡힌 대통령도 지금쯤 아마 그런 심정일 것이다. 취임 초부터 지금까지 능력 있고 청렴한 사람을 쓰지 못한 채 한사코 주변의 사람들, 인연을 맺은 사람들만 쓰는 대통령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에 널린 필부들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 준 사례가 바로 대통령의 인사였다. 인사청문회에 서는 후보들마다 어쩌면 그리도 오점들로 가득하단 말인가? 모래알처럼 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찌 하여 그런 인사들만을 골랐을까? 대통령과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람만을 골랐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내 집 안방의 구들장을 놓을 때도 능력 있는 기술자를 골라야 하거늘, 황차 국가대사를 맡기는 장관을 고르는 일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리오? ‘까짓것 어떠랴? 일만 잘 하면 그만이지!’라고 밀어붙였으리라. 그런 일들이 누적되다 보니 임기 말에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아마 대통령도 지금쯤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사사건건 사람을 천거하며 압력을 넣던 ‘형님’이나 측근 몇몇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못한 것도 후회일 것이다. 그러나 일을 그르치고 나서 후회한들 무엇하랴! 최상급의 지도자는 처음부터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고, 그 다음 등급은 한 번 실수 이후에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며, 최하급은 같은 실수를 연달아 저지르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대통령을 최하급이라 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 

사실 그렇다.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사람을 잘 못 보는 일’이다. 사람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는 일만큼 뼈아픈 일도 없다. 국가나 공동체의 공직에 부적합한 사람을 선택하여 후회하는 일은 지금 눈 아프게 목도(目睹)하고 있으므로 논외로 하자. 개인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를 잘못 판단한 남녀 간의 사랑은 씁쓸한 비극의 단초다.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요즘 청춘남녀들의 애정 사고는 공부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포함하여 각종 인간관계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에 속아 가까이 한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사례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속을 끓이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부지기수일 것이다. 사람들을 잘 못 보고 믿다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낀 것은 올 한 해의 쓰라린 후회들 가운데 하나다. 그 기억을 지울 수 있으면 좋겠으나, 간단히 포맷할 수 없으니 어쩌랴! 그 영향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니 그 또한 근심이다.

***

 이제 밝아 올 임진년엔 형형(炯炯)한 용의 눈과 과감한 용의 심성을 닮고자 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수직으로 치솟는 용의 기상을 배우고자 한다. 급격히 흐릿해져 가는 육안(肉眼) 대신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심안(心眼)을 갖추는 일에 매진하고자 한다. 일에 직면하여 이리저리 재며 소리(小利)를 탐하기보다 대의(大義)를 향하여 맹진(猛進)할 것이다. 더불어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전하신 사물잠(四勿箴)[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을 ‘똑 소리 나게’ 한 번 지켜보고자 한다. 나이 먹을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고 지혜가 고갈되어 주변 소인배들의 교언영색에 스스로 무너지는 나 자신이 가련하니,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 ‘발등 찍는 일’은 반복하지 않을 일이다. 입에 칼을 물고라도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을 사전에서 도려낼 일이다.

                             묵은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시점에
                                       
                                        백규, 재계(齋戒)하고 다짐함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2. 29. 17:50


제부도 행

 

백규

 

겨울의 제부도는 쓸쓸했다. 텅 빈 바닷가에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결이 몹시 차가웠다. 차갑다 한들 살을 에기야 하겠냐만, 바람결에 봄기운의 약속은 단 한 오라기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하늘에선 깔깔한 햇살이 내려 쪼이고, 팔리길 고대하는 도자기들을 겹겹이 쌓아놓은 길가의 가게도 운치를 더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 해안에 도착한 것이 오후 3시 반쯤. 30분쯤 기다리니 제부도를 건너는 길이 열렸다. 물에 잠겼던 시멘트 길이 열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세의 기적’이라 불렀다. 조금 전까지 물에 잠겼던 증표일까. 번질번질한 길옆엔 검푸르게 질려버린 바닷물이 금방이라도 길바닥으로 넘어올 듯 철럼거렸다.

 

차를 몰아 2km를 건너는 5~6분 동안 ‘왜 제부도라 불렀을까’를 두고 오른쪽의 바닷물과 왼쪽의 갯벌은 무수한 말들을 교대로 들려주었다. 사람들은 ‘제(濟)’와 ‘부(扶)’를 들어 ‘제약부경(濟弱扶傾)’을 그 어원이라 했다. 즉 “송교리에서 제부도 사이의 갯고랑을 어린아이는 업고 노인들은 부축하고 건네 준 것을 '제약부경'이라 하였는데, 제자와 부자를 따서 제부도라 하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춘추정전(春秋正傳)>>에 나오는 ‘제약부경지의(濟弱扶傾之義)’로부터 명칭을 따왔다니 참으로 섬에 대한 명명치고는 너무 유식해서 재미없다. 물이 빠지면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몰려 나와 바지락도 캐고, 낙지도 잡고, 망둥이도 잡았겠지. 그러다가 물이 들어올 때쯤이면 함께 손을 잡고 부축하며 갯벌에서 빠져 나왔을 것이다. 원래 ‘제부섬’이라 불러왔는데, 언젠가부터[아마 일제 때였을 것] 그 섬 이름을 한자로 등재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그런 광경과 결부시켜 한자로 적다보니 ‘제약부경’의 의미까지 갖다 둘러  댄 것이리라. 어쩌면 그 옛날 해안에 살던 사람들은 봄이 오면 그 섬으로부터 제비 떼가 몰려오는 것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람들도 적고, 주변 갯벌에 먹이도 많아 제비들이 이 섬에 떼지어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섬을 ‘제비섬’이라 했을 것이고, 그것이 오랜 세월 ‘제부섬’으로 와전(訛傳)되었을 것이며, 결국에는 ‘제약부경’을 견강(牽强)하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나 아닐까.

바다 멀리 풍력발전소의 바람개비들은 끊임없이 돌고, 바닷물은 이빨을 드러내고 다가들었다. 제부도에 들어가니 갯벌이 끝나는 곳까지 모래와 자갈이 깔려 있고, 그 위엔 환한 햇살 아래 어선 두어 척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인영(人影)이 불견(不見)!’ 따스한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인파로 붐볐을 이곳이 이토록 텅 빈 것은 차가운 바람 때문은 아닐까. 숙박을 위해 들른 펜션도 추위에 질려 있었다. 방에 들어가 앉으니 가슴 위를 찬바람이 휭 하고 훑는다. 그래, 사람의 온기가 끊어진 몇 주일 간 그 빈자리를 이 찬 바람이 제멋대로 들락거렸구나. 차라리 바다에 맴도는 바람 맛이나 볼까. 해안으로 나오니 바다도 갯벌도 모래사장도 모두 추위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서해바다로 연결되는 목이 보이고, 그 언저리에 큰 배들이 조용히 떠 있었다. 아마 짐 가득 싣고 먼 길을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팔을 벌려 보니 양 손 닿을 만한 곳에 큰 굴뚝들 두 셋이 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마도 화력발전소들이겠지. 전국의 바다 풍광 좋은 목들엔 어디고 할 것 없이 발전소가 서 있었다. 화력발전소에서는 뜨거운 폐수가 바다로 흘러나올 것이고, 그 뜨거운 물은 상큼한 주변의 바닷물을 뜨뜻하게 만들 것인즉 바지락이며 망둥이며 낙지가 견뎌낼 재간이 없을 것인데. 과연 그들은 이 바닥을 떠나 어디로 이사들을 간단 말인가. 비록 탈황을 했다고 해도 하얀 연기를 보는 순간 내 천식은 또 다시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수천 년 사람들이 파먹고 뒤 엎어도 끈질기게 다시 생명을 내어놓곤 하던 갯벌이었다. 아침녘에 갯벌을 훑어가며 바지락을 캐내다가 지쳐 집으로 돌아가 하룻밤 자고 다시 가서 호미를 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싶게 다시 오글오글 바지락들이 들어차 있곤 했다. 그게 갯벌이었다. 왕성한 복원력을 자랑하는 현란한 생명의 현장이었다. 그 바닥이 지금 가슴 벅차게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제부도! 장어, 농어, 숭어, 망둥이 등이 뛰놀고, 굴과 바지락과 김을 키워내는 곳이다. 누천년 들락거리는 바닷물과 쓰다듬듯 불어대는 바람이 함께 이곳의 생명을 낳고 키웠으리라. 그 생명의 현장을 누군들 버리고 싶으랴? 너와 나의 끝없는 탐욕이 종국에는 이 갯벌도 삼켜 버릴 것임을 우리 모두는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내 스스로가 가련한 존재 아니랴? 그저 수굿이 제 할 일만 하고 있는 제부도의 바닷물과 바람과 갯벌을 바라보며 반성이나 하다 갈 일이다.<2011. 12. 22.>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8. 13. 19:30


아, 두메솔 선생님!



남의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려 보기 그 얼마만인가? 갈수록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유한함을 깨달으며 내 이웃의 비극을 ‘타자화(他者化)’하는 데 익숙해지는 나날이다. 선생의 글과 시는 ‘인간 실존’에 대한 통곡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어 세속적인 행복을 누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불행. 요즘 흔히 보는 남녀 간의 다툼이나 이른바 ‘황혼이혼’ 같은 류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아니 죽음보다 못할 수도 있는 삶의 한 복판에서 겪는 실존의 위기를 이보다 더 절절하게 외칠 수 있을까.

우리는 입만 열면 인간의 본질을 말한다. 신을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착각하는 인간, 완전무흠한 신의 곁으로 올라가고자 애쓰는, 아니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 인간. 그러면서 수시로 맞닥뜨리는 온갖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불쌍한 존재가 인간 아닌가. 우주 최고의 영장류(靈長類)로 자부하지만, 인간이 갖는 ‘영성(靈性)’이란 그 얼마나 하잘 것 없으며 비극적인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거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오늘 두메솔 선생의 글에서 아프게 확인한다.

일생을 함께 한 배우자의 불행 앞에서 그 불행의 완력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두메솔의 절망과 불안이 어찌 선생 혼자만의 것이란 말인가. 사랑하는 배우자 주변에 어른거리는 죽음과 불안, 아니 자신의 주변에 어른대는 그런 불안이 어찌 두메솔 혼자 안고 가야할 개인적인 숙명일 것인가. 선생이 절규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절절한 현실이다. 우린 흔히 그럴 듯한 논리로 객관과 보편을 논하지만, 그런 논리가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

두메솔 선생의 <<나와 미학, 실버세대를 위하여>>(조이웍스, 2011)를 눈물을 훔치며 읽었다. ‘지우며 읽는 시화집’이란 부제가 페이지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이 책. 두메솔 선생의 평소 모습처럼 깔끔하고 단정한 장정(裝幀)의 이 책이 슬픔을 배가해주는 건 글 속에 가득 들어찬 진실 때문이다. 루푸스 증상과 그 합병증으로 나타난 뇌경색, 아내의 뇌경색 징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두메솔 선생의 자책,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잊은[아니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 도시의 미로를 헤맨 두메솔 선생. 선생은 그 미로를 다음과 같이 ‘미로’라는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신이 머릿속 지도를 지우기 시작한 날

나는 지도를 꺼내들고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전화하기를 그만 둔 그 때부터

나는 애원했습니다.

수신 좀 하라 먼저 끊지 말라

도시는 천 갈래 만 갈래.

인생의 미로보다 더한 미로,

어두운 골목에 있지 말고 큰 길로 나가요,

간판을 읽어요, 어딘지 물어요.

“나 힘들어 빨리 와줘” 라고 외치게 하는

솔직한 세포는 지워졌는가.

세포가 사랑보다 위대한 것인가

오토바이 소리가 귀청 울리는 거기

간판도 없는 회색의 미로에서

당신은 기진했으나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

며칠을 계속 걸었습니다.

분수광장 한 구석에서 누가 자고 있다.

커피를 엎지르며 마구 달려 가보니 남루한 사내.

이 무슨 실례의 상상일까

어딘가 조용한 벤치에 꼿꼿하게 앉아 눈 감고 있겠지

우리가 좋아라고 함께 마시던 커피 향기가 쓰다

죽을 만큼 쓰다.

나 같으면 지하철역을 택하겠다.

당신이 좋아하는 도넛 가게 그 옆엔 푹신한 소파와

나무의자, TV, 꽃무늬 벽, 바로 옆에 화장실,

조금 더 가면 초등학교, 어린 시절이 따라온다.

택시기사가 속도를 늦추며 눈을 닦는다.

차에서 내려 몇 발 못가 엉엉 울었다.

내게로 오는 길을 잊었어도 상관없습니다.

따지기 잘하는 사람과

평생의 미로를 뱅뱅 돌다가

시시한 기억부터 지워야 했겠지

그래도 서로 좋아하는 느낌,

너와 나의 골자,

사랑은 퍼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귀갓길을 잊어 버려 방황하는 아내, 그 아내를 찾아 미로를 방황하는 남편, 남편의 간절한 염원 등 우리가 주변에서 늘상 목격하는 광경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대책이 없다. 곁에 있다 사라진 아내를 찾아 남편을 찾아 헤매야 할 미로 만이 있을 뿐이고, 총명하던 시절의 음성이나 젊은 시절의 화사한 추억만 피곤에 절은 몸 안 어딘가에 남아 있을 뿐이다. 과연 사랑 만으로 그런 미로의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을까.

***

이제 본격적인 재활의 단계. 두메솔 선생의 마음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도 지쳐가고, 추억이 빠져나간 환자의 몸은 새로운 추억에의 갈구로 허전하고 피곤하다. 다음의 묘사는 바야흐로 후회의 무덤에 빠져들고 있는 우리를 건져내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리라.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내를) 화장실 문 앞에서 일으켜 세울 때, 소파로 돌아와 앉기와 일어서기 운동을 시킬 때, 내 손이 거칠었나 보다. ‘그것도 못해?’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이 되었다. 금방 움츠린다. 억지로 시키는 내가 밉다고 한다. 야단친다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욕한다’고 한다. 무슨 욕을 했단 말인가. 억울하다. 아랫도리가 추울 테니 하의를 하나 더 입자고 했다. 반발하며 입지 않는다. TV를 틀고 과일 한 쪽과 찻잔을 앞에 놓아주고 돌아서니 오전 11시. 미뤄두었던 설거지를 하는데 한숨이 나온다. 총명하던 당신은 어디로 가셨나요. 그립습니다. 그립습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또 왜 이러나요.”

그렇다. 뇌를 다친 아내는 낯선 이로 변해 내 삶의 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 앉아있으나, 피곤하고 낯설어 나 자신을 닦달할 뿐, 뾰족한 방도가 없다. 소통이 되지 않으니, 타인이다. 총명하고 조신하던 아내, 내 몸보다도 더 잘 소통되던 아내는 남으로 변했고, 그 ‘남처럼 낯설어진’ 아내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땅히 사용할 도구가 없는 이 상황을 선생은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그러나, 끈질긴 두메솔 선생, 드디어 소명(召命)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소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 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아니,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이 소명이다. 선생은 그 소명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아름드리나무도 못하는 일을 하란다.

자투리땅에 화초 심듯

은근슬쩍 시작하는 사랑 이야기

쉴 새 없이 귓가에 속삭이시니

토마토가 오직 바라는 것은

햇빛과 흙, 버팀목,

타드는 날 장대비,

그뿐

가야지, 달려가야지

두툼한 과육과 작은 씨앗 만들어

얇은 표피 안에 감추는 재미

누가 알까

영혼의 단맛까지

소쿠리 듬뿍 담아 그대에게 바치리.

선생도 방황을 했으리라. 하나님이 시키신 일은 사실 ‘아름드리나무도 못할’ 정도로 크지 않은가. 그럼에도 하라고 시키신 데는 큰 뜻이 있을 것이다. 애당초 시련을 주신 데는 더 큰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 크신 뜻을 따르는 일이 지금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임을 알고, 선생은 달려가려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아내와 함께 어디까지든 가야 한다는 것이 그 분의 소명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선생은 에필로그로 다음과 같은 아포리아(aporia)를 남겼다. 선생은 쉽게 말씀하시지만,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에겐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이면서 다른 방법이나 관점으로 새롭게 추구하고 탐구해야 할 출발점인 것이다.

“간병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봉사가 아니다. 손해만 보는 일이 아니다. 서로 친구가 되어 시간마다 함께 즐기는 일이다. 환자에게 우월성을 과시하듯 리드하면 실패하기 쉽다. 서로 돕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나는 환자를 돕고 환자는 나를 돕는다.”

2011. 8. 13. 텅 빈 교정에 내려 꽂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2. 2. 17:03

세밑에 홀로 앉아

 

창밖의 나목(裸木)들에 모처럼 햇살 비치는 오늘, 섣달 그믐날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홀로 창가에서 이 날을 지켰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넘어가는 시간의 질(質)에 변화가 없음을 느낀다. ‘그저께보다 나은 어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란 입에 발린 구호(口號)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제 발갛게 물들어오는 인생의 황혼을 향해 한 고비 넘고 있다는 뜻일까. 몸의 동력이 마음 같지 않은 나날이다. 당나라 때 천재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세모(歲暮)>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已任時命去 이미 시운에 맡겨 따라가는 몸

亦從歲月除 그저 세월 가는대로 따라갈 뿐

中心一調服 속마음을 하나로 고르게 가져

外累盡空虛 세상사 얽힘 모두 비워버리네

名宦意已矣 명예로운 벼슬자리에 뜻 이미 버렸으니

林泉計何如 자연으로 돌아갈 계책은 어떠한가

擬近東林寺 동림사 가까운 곳 어디쯤

溪邊結一廬 개울가에 한 채 오두막이나 지어볼까나

 

이제 50중반. 세상사 마음먹는 대로 흐르지 않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도 물결 속의 작은 입자(粒子)일 뿐 흐르는 물의 방향을 돌리는 키나 노가 아님을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수긍한다. 흐르는 물결은 더 큰 물결에 합쳐지고, 합쳐진 물은 더 큰 물에 합쳐져 강을 이루거나 호수를 이룰 뿐, 입자가 마음먹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없음을 아프게 깨닫는다. 애면글면 도모한다 하여 세상의 명리(名利)가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간절히 바란다 하여 애욕(愛慾) 또한 성취할 수 없음을 터득하곤, 이제 옛 어른들이 말씀한 ‘작비금시(昨非今是)’의 탄식을 금치 못한다.

중병에 신음하다 북망산으로 실려 가는 이웃들을 보며, 탐욕의 끄나풀을 한사코 놓지 않으려다 정년(停年)으로 쫓겨 가며 앙앙불락(怏怏不樂)하는 주변의 존재들을 보며, 이제 하산(下山)의 신들메를 고쳐 맬 때임을 깨닫는다. 그렇다. 만각(晩覺), 아니 지각(遲覺)이다. 왜 나는 늘 남들보다 한 발 늦게 깨닫는 것일까. ‘깨달은 그 순간이 가장 이르다’는 억설(臆說)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지만, 그저 위안을 주려는 것일 뿐 사실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세상일진대, 세상의 가치관이란 대부분 개개인들을 비교하여 도출해내는 ‘상대적인 개념’ 아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주변의 왕따에 죽음으로 항변하는 후배를 보며, 대학이나 교수집단이라는 지식사회도 시궁창 그 자체임을 진저리치도록 절감한다. 그러니 남은 시간에 무얼 더 도모하고 바라겠는가. 백거이의 말처럼 물 좋고 산 좋은 곳을 골라 오척단구(五尺短軀) 누일만한 누옥(陋屋) 하나 얽어놓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 아니겠는가.

***

조선조 후기의 천재 시인 신위(申緯)는 “佳人莫問郞年幾(아가씨, 이 사람의 나이 묻지 마오)/五十年前二十三(오십년전엔 스물셋이었다오)”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신위만한 그릇으로도 ‘칠십이 되어서야 마음먹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은’ 공자 나이에 이르러서야 겨우 나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위의 그릇을 훔쳐 볼 수조차 없는 국량이면서도 그보다 이십여 년 앞서 나이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나는 망발지한(妄發之漢)쯤 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매미 껍질 벗듯 차분한 마음으로 욕망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내일 아침 새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리라.

 

경인년 묵은 해를 보내며

고요한 숭실동산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6. 25. 05:32


2009년 6월 25일. 타고난 반공주의자(?) 백규의 출현을 알고나 있었던 것일까. 모스크바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6·25의 원흉 구소련은 러시아로 이름을 바꾼 채 목하(目下) 자본주의의 실험을 펼치고 있는 중인데, 백규 일행은 그 심장부 모스크바에서 과거를 발판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탐지하고자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

오전엔 전쟁기념관을 찾아 러시아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의 질곡들과 만났고, 오후에는 트레챠코프 미술관을 찾아 러시아 미술의 진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저녁에 ‘최후의 고려인’ 정상진 선생과 열망하던 만남을 갖게 되었다. 6·25날에 그 전쟁의 한 당사자였던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쉽게 말할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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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택에서 정상진 선생과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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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살고 있는 따님과 정선생, 그리고 사위>

모스크바 외곽의 울리쨔에 있는 그 분의 아파트로 찾아간 시각이 오후 5시쯤. 함께 살고 있는 사위가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반색을 하며 맞아주시는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족, 이념, 문학을 중심으로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들이 그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고려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거울삼아 한민족 공동체가 꾸려나가야 할 미래였다.

***

북한의 문화선전성 차관을 지냈고, 6·25에 참전했던 그 분이 김일성으로부터 숙청을 당하여 소련으로 귀환한 뒤, 카자흐스탄 인으로 살아온 세월은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몸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사실 그는 2세 고려인으로서 고려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최후의 1인으로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20여 년 간 수십 차례 한국을 왕래하며 한국의 지식인들과 교유해오고 있는 선생임에도 당신의 거처로 찾아온 한국의 교수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은 듯 했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본 사람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그 분의 말씀은 역으로 공산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이른바 ‘관념적·이상적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대들을 만난 오늘이 내 명절이야!’를 반복하시는 90 노구의 지식인으로부터 비로소 ‘탈이념의 민족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정수를 얻어들을 수 있었다. 고려 말을 하는 고려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고려 정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바로 지금부터 고민해야한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꿈을 키우기 위해 북으로 왔다가 시련을 당한 많은 문인, 예술인들의 삶을 통해 그 체제가 갖고 있던 허위와 기만,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고발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선생은 대한민국에서 누리는 무한한 자유와 민주의 즐거움을 부러워하며, 그것만큼은 소중하게 지켜주기를 소망했다.

***

선생은 2005년에 펴낸 <<아무르 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를 통해 해방공간과 6·25, 대규모 숙청사건에 이르는 북한사회의 이면사를 보여준 바 있다. 선생은 조만간 그 책의 수정·보완판을 내고자 한다 했다. 매우 절제된 구술을 통해 이미 보여준 그 시절의 이면사에 덧붙이고 싶은 말들이 많은 것일까. 아마 ‘덧붙임’ 자체도 극도의 절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임은 ‘정확하지 않은 말’은 모두 잘라버리는 선생의 결벽증으로 미루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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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老少) 간에 왕래하는 정담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슴을 훑어 내리는 보드카의 주향(酒香)만이 지성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백야(白夜)의 한밤이었다.

2009. 6. 25.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