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8. 7. 22:04

중국에 가려는 여섯 명의 야당 초선의원들에게

 

 

 

시경소아(小雅)편의 상체(常棣)라는 시가 있다.

4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兄弟䦧于牆   형제가 담장 안에서는 싸우지만

外禦其侮      밖으로는 (힘을 합하여)남의 업신여김을 막는다네

每有良朋      매양 좋은 벗이 있으나

烝也無戎      돕는 바가 없도다

 

지금 이 시를 읽는 마음이 곤혹스럽다. 어쩜 이렇게 우리나라의 형편을 잘 꼬집었을까.

우리는 같은 편임에도 늘 싸워왔다. 오히려 강한 외국에 붙어 제 민족을 못살게 굴어온 예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역사상 우리가 저질러온 편싸움(당파싸움)을 거론해 왔고, 당파싸움으로 기울어지는 나라(한국역사교육연구회, 한국가우스)라는 책도 이왕 나왔으니, 이 자리에서까지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싸드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정부가 싸드 배치 계획을 발표하고 나서 지역주민들은 반발하고 있으며, 이때다 싶은 일부 인사들이 주민들을 부추기며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급기야 누구의 표현대로 철없는야당의 초선의원 여섯 명이 중국에 가겠다고 나섰다. 이미 중국은 싸드라는 것을 빌미로 우리를 길들이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북한의 핵을 막아 달라 간청해왔건만, 그간 손 놓고 있었거나 암암리에 방조하고 있다가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마저 뺏으려 드는 중국이다. 동맹체제의 바탕 위에 배치하고자 하는 싸드는 한미 양국의 합치된 현실분석의 소산이다. 힘으로 당할 수 없는 미국에는 한 마디 못하면서 대한민국에는 완력으로 나오는 중국의 행태를 전형적인 깡패행위로 보는 입장은 이미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다. 덩치는 말할 수 없이 크되, 대의(大義)나 명분(名分)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지금 모습이 개탄스럽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그 글의 핵심이었다.

 

북한이 핵을 만들어 날이면 날마다 위협을 가하고 있는 이상 비록 완전치 못하지만 싸드라도 배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필자 같은 장삼이사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싸드를 안고 살아가게 될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

는 것은 혹 그럴 수 있다 해도,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한 야당들이나 일부 시민단체, 이른바 학자라는 사람들이 대안도 없이 나서서 무조건 정부를 성토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일들이야말로 지금껏 이어져 내려온 편싸움의 반복이거나,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여적(與敵) 혹은 이적(利敵)’ 행위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언필칭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주문을 남발하지만, 그간 우리가 해온 일이 외교 아닌경우가 있었던가. 그간 벌여온 외교로 되지 않아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우리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소한의 방패라도 마련해야 곧 날아올 깡패의 주먹을 일부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 방비마저 하지 말라는 것은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여 나라를 내주거나 처참한 파괴를 감수하라는 말과 같으니, 과연 그들을 우리 편으로 볼 수 있겠는가.

 

대안도 없이 이런 기회를 정권쟁탈의 호기로 잡아, 무모한 공격이나 가하고 있는 거라면, 그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하긴 마찬가지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 최소한 나라를 구하는 문제에서만큼은 힘을 합쳐 대응하는 것이 옳다. 성주를 찾아가 격앙된 주민들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고, 공산당의 명령 하에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에 찾아가 싸드 배치를 반대하겠다는 국회의원들은 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이란 말인가. 중국이 언제 우리를 도와 북한을 꿇어앉힌 적이 있으며, 앞으로 그렇게 할 거라는 조짐이라도 내 비친 적이 있는 나라인가. 앞의 글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이른바 중국몽(中國夢)’은 한반도까지 자신들의 품에 넣어 중화제국을 재현하겠다는 포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반도를 품에 넣으면 일본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고,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하면 미국도 힘을 못 쓰게 되는 상황을 계산에 넣고 있다는 점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이미 대미(對美) 병참기지로 굳어진 북한과, 경제로 옭아놓은 남한까지 집어 삼키면, 중국은 G2 중의 하나가 아니라 곧바로 G1에 등극하여 이 지역을 쥐고 흔들며 타고난 '깡패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

 

정책의 같고 다름이나 장단점을 놓고 나라 안에서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사실 치열한 논쟁과 다툼을 통해 최선의 길을 찾는 게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다. 그러나 깡패가 문 앞에 서서 협박을 하는 지금. 서로 패거리의 소리(小利)를 탐하여 싸워야 옳은가. 작은 몽둥이라도 함께 만들어 밀려와 있는 적을 상대해야 될 것 아닌가. 형제끼리 담장 안에서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밖에서 우리를 업신여길 때, 최소한 그들의 편을 들어 동족을 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함께 뜻을 합해 바깥의 적과 싸워, 우선 내 집을 지키는 게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국회의원이란 막중한 자리를 차고앉은 여섯 명의 초선들이 당장 내일 중국으로 달려간다는데, 두고 볼 일이다. 그들이 과연 강한 외국에 빌붙어 우리 조상들이 저질러온 수치스런 패싸움의 과거를 반복할지, 아니면 밤중에라도 자신들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올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 볼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7. 15. 10:32

최근 들어 러시아어 권의 국가들을 자주 찾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족들을 수시로 만난다. 미국이나 일본, 혹은 중국에서 만나는 50대 60대 동포들은 대부분 한국어에 능숙하니 불편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구소련 권은 사정이 다르다. 최근에 이주한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구소련의 엄혹했던 ‘동화정책’은 대부분의 동포들을 철저한 러시아인들로 만들고 말았다. 진짜 속이야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타고난 제 말 혹은 조상의 말을 버리고 러시아어를 모어 혹은 모국어로 삼게 함으로써 내면까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이 다르면 생각도 달라진다고, 그들이 2대, 3대를 지나면서 바꾸어 가진 말 때문에 의식구조 역시 완벽하게 달라지고 말았다. 구소련 권의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말과 민족성의 문제를 새삼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는 한 가지 사례를 소재로 두 가지의 말을 하고자 한다. 말에 따르는 소외감, 말과 민족의식 등이 그것들이다.

       

   하나   


이번 여행 중 알마티에서의 어느 점심시간. 70대, 60대, 50대 등 고려인 3명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모두 고려인 3세들이나, 70대는 우리말과 러시아말에 유창한 이중 언어 구사자, 나머지 둘은 러시아말만 할 줄 아는 지식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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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의 한국식당들 가운데 하나인 '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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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들과 함께 점심을>

 두 언어에 능통한 70대가 본의 아니게 나와 나머지 두 사람 사이의 통역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만 능하다고 통역이 수월한 게 아님을 그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통역이란 언어능력과 순발력을 요하는 업무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 자리이기도 했다.

 통역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대화 판은 대부분 둘로 나뉘게 된다. 특히 통역해야 할 상대 언어 구사자가 단 한 사람이라면 그는 필경 본의 아닌 ‘왕따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에 따라 통역이란 징검다리를 거쳐야 하는 상대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행인 앞에 두 갈래 길이 있다 하자. 한쪽은 탄탄대로, 또 한 쪽은 차가운 시냇물에 덩어리 덩어리 던져놓은 징검다리라면 그가 어느 쪽으로 길을 잡아들지는 묻지 않아도 분명해진다.

 우리의 모임이 그랬다. 4명이 합석한 자리였는데, 3명이 같은 러시아어, 1명인 나는 한국어 구사자였다. 더구나 3명 중 2명은 러시아어 외에 영어 등 구사할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전혀 없었다. 반면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영어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3명 중 1명은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구사했지만, 수시로 통역의 임무를 망각했다. 말하자면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들과의 대화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연로한 때문인지 전혀 순발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힘겹게 대화에 끼어든 내가 “이 말 좀 통역해 주시오!”라고 소리쳐야 겨우 통역을 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러시아 말이란 얼마나 소란스럽고 수다스러우며 안하무인적(眼下無人的) 언어인가. 그들이 자신들의 일에 관해 요란한 러시아어로 떠들어댈 때 나는 우두커니 앉아 음식만 씹어댈 수밖에 없었다. 대화 판에서 사람이 외로움을 느낀다거나 일상생활에서 소외를 당하는 일이 사실은 다른 게 아니다. ‘자기들만의 언어로 자기들 끼리 만 소통함으로써 남을 문 밖에 세워두는 일’이야말로 현대사회의 비참한 소외현상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같은 언어’를 쓰느냐의 여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끼리도 서로 간에 얼마나 비참하게 소외시키는지를 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들만의 언어’를 쓰는 것이 소외의 가장 큰 조건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계유지의 어려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떠난 초기 이민들이나, 비슷한 이유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동남아의 새댁들을 생각해 보라. 언어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소외감이 어떠했을까를. 그럼에도 심지어 우리 중의 몰지각한 어떤 인사들은 우리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그들을 같은 자리에서 돌려세워놓고 험담을 하기도 한다. 차별의식으로부터 나온 우리 민족의 못된 습성이다. 같은 동족끼리도 말을 통해 소외시키기를 밥 먹듯이 하는 민족인데, 하물며 우리와 피부색과 사고가 다른 외국인들에 대해서야 오죽할까.


  

그 식사 자리에서 ‘고려 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은 60대나 된 사람들이 우리말을 한 마디도 모르는 게 눈에 거슬리던 차였다. ‘고려인들은 고려 말을 좀 배워야 하고, 젊은 세대는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였다. 그러자 대뜸 ‘우리는 러시아 말을 하고 있고, 외국어를 배우려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실로 따진다면야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늘 애틋하게만 생각해오던 동포들의 입에서 망설임도 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한국말을 배워서 어디에 써 먹느냐?’는 대답이었다. 한국말 배울 시간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고려인의 후예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고려 말 배우기에 열성적’이라는 말을 덧붙인 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한국말을 배워야 한국의 정신을 배울 수 있고, 한국의 정신을 익혀야 뿌리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설득의 말을 건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구소련 혹은 카자흐스탄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한국은 독일이나 중국과 같은 먼 외국일 따름이었다. ‘비록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의 피붙이들에게 잘 해 준 건 없어도 늘 애틋하게 생각해왔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한탄은 이미 그들에게 통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동안 혼자서 이들을 짝사랑해왔음을 그 순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생김새는 분명 나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어를 술술 구사하는 그들, 한국에 가서 며칠간 한국음식을 먹느라고 죽을 뻔 했다는 그들을 보며,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앤더슨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옮겨 심은 나무처럼 그저 그 땅에 적응하면 그 땅의 나무가 되는 것 아닌가. 누구의 말대로 ‘줄기와 뿌리는 이파리를 잡고 있으려 하나, 이파리들은 한사코 나무를 떠나려’ 하는 이치가 바로 이것 아닌가. 모체를 떠난 이파리인 그들은 결코 모체를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본향 회귀를 염원하는 1세대의 정신적 자장(磁場)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그들이었다. 그들에겐 돌아갈 본향도, 그리워할 음식도, 붙들고 울어야 할 피붙이도 없었다. 그저 기름 줄줄 흐르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음식들을 먹으며,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어로 수다를 떨며, ‘바로 지금 이곳’을 사는 이곳 사람들일 뿐이었다.


  ***


민족이란 무엇인가. 아니 가족이란 무엇인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는 그간 ‘피붙이’라면 끔찍이 생각해왔다. 준 것도, 줄 것도 없지만, 정 하나만큼은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해온 것이 해외의 우리 동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분명히 깨닫자. 그들에게 자신들의 나라는 카자흐스탄이요, 러시아일 뿐 대한민국이 아니다. 잘 나가는 대한민국을 특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의무도 그들에게 없고, 고국을 잊지 말하고 강요할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 너와 나는 그저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할 생활인들일 뿐임을 잊지 말자. 이런 바탕 위에서 해외 교민들에 대한 정책도 재조정되어야 한다. 민족의 실체 또한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