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3. 6. 00:39

 1월 27일  2시 45분, 과디아나 강에 놓인 ‘시간의 다리’를 건너 드디어 포르투갈로 들어섰다. 포르투갈의 민중가요 파두(Fado)가 발산하는 아련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나그네의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우리처럼 오래도록 이민족의 억압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일까. 그들의 노래도 어쩌면 우리의 그것과 닮아있는 듯했다.

 눈을 차창 밖으로 돌리니 야산에 깔려있는 아몬드 꽃이 하얗게 눈부시다. 면적 9만 2천 평방킬로미터, 인구 1,100만 명의 소국.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고, 인구는 4분의 1에 불과한 나라다. 국민 1인당 연간 소득은 18,000불로 35,000불의 스페인에 비해 반이 조금 넘는 수준. 국토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붙어 있다. 1140년 알퐁소 엔리께가 왕국을 선포하기까지 기원전 그리스, 페니키아, 로마, 게르만, 무어인 등의 지배를 거쳤으며, 무어인들로부터 국토를 회복한 이후 리스본은 이 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국토가 좁은 대신 그들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희망봉과 인도항로, 브라질을 발견하는 등 식민지 개척을 통해 대항해 시대를 연 그들이었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의 지배하에 놓였다가 독립한 뒤 18세기 초 식민지 브라질로부터 금을 들여와 한동안 번영을 구가하기도 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브라질의 독립, 열강의 침입, 정파들 간의 싸움 등으로 화려했던 날들은 저물어 갔다. 1910년 선포된 공화정은 1930년대 살라자르의 독재로 막을 내리고 1974년 혁명에 의해 다시 공화정은 시작되었으며, 1986년 EU의 회원국이 되었다.

 우리의 눈에 포르투갈의 국력은 비록 약해 보였으나, 스페인에 비해 안온한 느낌이었다. 야산의 푸른 숲 사이에 조성된 마을들이 평화로워 보였고, 그 사이에 피어있는 아몬드 꽃들은 이국적인 정취를 발산했다.

 어두컴컴해서야 리스본에 들어갔다. 시내의 한 식당에 들어가 ‘바깔랴우(Bacalhau)'라는 대구 요리로 저녁을 때웠다. 이곳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요리라 하나 얼큰한 대구탕이나 대구머리 요리에 익숙한 우리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웠다. 식당에서의 실망은 그대로 호텔로 이어졌다. 방이 춥고 썰렁했다. 사실 이 시기의 유럽은 어딜 가나 난방이 문제다. 뜨끈한 우리나라의 온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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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로부터 포르투갈 고속도로 변 휴게소의 점원 아가씨, 리스본의 식당 발렌시아에서 먹은 바깔랴우, 리스본에서 1박을 한 호텔 코스타 다 카파리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5. 15:42

 

스페인 기행 4-2 : 종교 간의 불화가 빚어 만든 메스키타(Mezquita)의 조화와 부조화-꼬르도바(Cordoba)행의 감동


 정갈하고 유서 깊은 유대인 거리를 지나자 메스키타(Mezquita)[메스키타는 모스크를 지칭하는 스페인 말이다] 혹은 Cathedral-Mosque, 즉 ‘모스크 겸 성당’과 거대한 종탑이 나타났다. 술탄의 정원에 들어서니 무성하게 자란 대추야자 나무들이 우릴 반겼다. 대추야자는 그 옛날 모하멧이 살았던 곳에 흔히 자라던 나무였는데, 모스크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그런 대추야자 나무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이 사원에서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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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입구>

 원래 무어인들의 모스크였던 건물을 기독교 왕조가 접수함에 따라 안쪽 중앙에 성당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요소요소 이슬람 왕조 시절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었던지, 대부분 모스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원래 이 건물은 780년 서고트 왕국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압둘 라흐만 1세가 세운 것이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친 확장공사 끝에 현재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메카 방향의 미흐라브(Mihrab)를 향해 좌우 대칭으로 지었어야 하나 공간의 협소함으로 건물은 균형을 잃게 되었다. 대추야자 나무와 우물[모슬렘들이 기도하기 위해 몸을 정결하게 하던 연못의 흔적]이 있는 오렌지 정원과 모스크가 합쳐진 건축물이 바로 메스키타였다. 바로 이 건물의 중앙에 성당이 있었다. 기독교군이 이 건물을 접수한 다음 성직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시의 왕 카를 5세가 지은 것이다. 그러니 이 건물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우리는 잠깐 동안 난감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모씨드럴(Mothedral)’이란 조어(造語)를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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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정원의 대추야자나무와 오렌지 나무들>

 모씨드럴은 찬란했던 꼬르도바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이 성전은 24,000㎡의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메디나(Medina)의 아사하라(Azahara)궁과 함께 이슬람 예술로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바탕 위에 기독교의 모습이 덧씌워져 묘한 조화와 부조화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원래 한 뿌리였던 이슬람과 기독교.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 뿐 아니라 발생의 바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민족적․정치적 이해가 엇갈리면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변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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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추야자나무의 모양을 본떠 만든 메스키타 내부의 열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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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내부 성당의 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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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스키타 내부 성당에 진열된 성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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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스키타 정원의 종탑>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2. 01:58


 다음 날 호텔에서 이른 아침을 먹은 다음 서둘러 나간 곳이 이번 여행의 꽃인 알함브라 궁. 멀리 보이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엔 비구름이 걸려 있고, 나그네의 외투 깃으로 빗방울이 파고들었다. 과연 알함브라는 이슬람 문화의 정수였다. 가이드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알함브라를 느껴보라 했지만, 알함브라에 엉겨있는 역사의 고비들이 너무 복잡하여 나그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이 미국 공사관의 자격으로 마드리드에 재직하던 중 알함브라 궁에 머물면서 무어(Moor)인들의 전설을 기록한 <<알함브라 이야기(Tales of the Alhambra)>>에 넘쳐나는 낭만적 상상으로도 이미 지쳐있는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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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함브라궁의 출입구에 모여선 관광객들. 이 날 비가 내리고 있었다>
 
13세기 전반, 옛날부터 존재하던 알카사바를 확장하면서 궁궐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알함브라는 현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왕궁, 카를로스 5세 궁전, 알카사바, 헤네랄리페(General Life)으로 구성된 알함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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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카사바에서 내려다 본 창고 터, 무기고 터, 군사들의 숙소 터>

 우리는 전망대를 빼곤 흔적만 남은 알카사바에 맨 먼저 올랐다. 벽채의 반 이상이 날아가고, 아래쪽 흔적만 남은 공간들이 바둑판처럼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라나다 왕국의 무하마드 1세가 9세기에 이미 존재하던 성채를 정비․확장한 곳이다. 군인들의 막사, 식량창고, 목욕탕 등이 흔적만 남아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저 멀리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이고 가까이는 민간 가옥들의 내부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벨라탑(Torre de Vela)의 전망고 그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시에라 네바다의 정상에 덮인 흰 눈처럼 왕궁 근처 민가들의 벽채도 모두 새햐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헤네랄리페~알바이신 지구, 사크로몬테 언덕, 그라나다 중심부 등이 이곳에선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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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의 탑에서 내려다 본 그라나다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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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의 탑에서 내려다 본 그라나다 민가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