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4. 9. 13:38

 

 


<올해 6월에 개장하는 로바니에미의 산타 파크> 


<산타마을 매장에서> 


<산타마을에서> 


<산타마을에서> 


<산타 파크에서>


<산타마을에서> 


<각국의 시민들이 산타에게 보낸 편지들, Etela-Korea, South Korea> 


<지도에 표시된 북극권> 


<산타마을의 위도> 


<로바니에미에서 헬싱키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뚜르꾸 시가지> 


<뚜르꾸의 아우라 강>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정문에 놓인 종> 
<뚜르꾸 Art Museum> 


<뚜르꾸 Art Museum>에서 


<뚜르꾸 Art Museum에 내걸린 작품> 


<뚜르꾸 Art Museum으로부터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 


<Art Museum hill에 위치한 레닌 흉상-레닌 망명시절의 집터>


                                                                             <4월 8일 1박을 한 래디슨 호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 산타마을, 영욕의 역사 현장 뚜르꾸(Turku)

 

 

사흘간의 로바니에미 체류를 마무리하기 위해 산타마을에 들렀다. 산타클로스! 꿈과 기대로 아이들을 설레게 하여 어렵던 시절을 무사히 넘기게 했던 환상 속의 존재였다. 산타를 대망(待望)하던 아이들이 자라나 지금 세계 곳곳의 중추로 자리 잡고 있으며, 또 그들의 아이들이 산타를 기다리며 자라고 있다. 누구는 만개(滿開)한 상업정신의 대표 장소로 산타마을을 꼽지만, 마냥 비판만 할 일은 아니다. 찬 공기 넘나드는 전나무와 소나무, 자작나무들이 주변을 둘러 있고, 단 몇 달을 뺀 나머지 기간엔 늘 눈과 얼음에 덮여 있는 이곳. 그나마 산타 할아버지의 인자한 얼굴을 형상하는 것 외에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그 환상을 세계 아이들과 공유하며 그들과 함께 성장기의 고뇌들을 넘어 미래에의 꿈과 희망을 갖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상업화된다 한들 무슨 상관있단 말인가. 가게 진열대들을 그득 채우고 있는 산타 관련의 온갖 캐릭터 상품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각종 동물 형상들과 의상들, 산타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각국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 카드들[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보내온 카드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미리 써서 보낼 수 있다는 우체국 서비스가 재미있었다.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보낼 카드를 미리 써서 부치면 산타클로스 우체국 마크를 찍어 크리스마스 즈음에 전달해준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발상들에 잠시 세상의 번뇌를 잊어보는 순간이었다.

 

북위 66도 32분 35초. 북극의 추위에 다져진 때문일까. 라플란드 지역의 핀란드인들은 다소 무뚝뚝한 표정 속에 성실하고 다감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다. 형상을 가진 모든 것들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따스한 난로가 하나씩 갖추어져 있음을 여행 중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추위 속에서 빛나던 그 난로 하나를 마음으로 얻은 우리는 찾아온 길을 되짚어 헬싱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도(舊都) 뚜루꾸로 가기 위해서였다.

 

***

 

예상했던 대로 뚜르꾸는 참하고 한적한 도시였다. 대(大) 화재로 모두 부서진 뒤, 1800년대에 새로 지었다는 도심의 건물들은 나름대로 고풍(古風)을 간직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러시아의 쌩뜨 뻬쩨르부르그나 동유럽 도시들에서 가졌던 느낌이 되살아났으나, 그 이유를 딱히 짚어낼 수는 없었다. 호텔[Radisson] 뒤편의 아우라 강 (Auranjoki) 도 꽁꽁 얼어 레스토랑이나 까페로 쓰이는 큰 배들이 제자리에 묶여 있지만, 넘실대는 여름날의 푸른 물 위에 불야성을 이룰 모습들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강 건너에 높은 언덕 중턱에 박물관이, 그 너머엔 뚜르꾸 대학이 있었으며, 자그마한 옛 성도 있었다. 아우라 강을 따라 발트 해로 연결되는 뚜르꾸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지배자 스웨덴 인들과, 스웨덴을 멀리 하려 헬싱키로 통치의 중심을 옮겨버린 또 다른 지배자 러시아인들의 갈등이 눈에 보이듯 도시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최신식 건물에 따스하고 안락한 분위기였다.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무엇보다 몇 권의 책을 안고 들어와 반납한 뒤 새로 대출해가는 점잖은 신사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아마 퇴근 후 들른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 퇴근 후 몰려드는 직장인들 때문에 예산을 들여 도서관을 증축할 수밖에 없다는 소식이 각 지방자치단체들로부터 들려오는 날은 그 언제일까. 우리의 진정한 르네상스는 그런 날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점을 이곳 뚜르꾸의 시립 도서관에서 깨달았다.

 

***

 

도서관을 나와 ‘손바닥 만한’ 뚜르꾸 시가지를 체험하는 도중 언덕 위에 우뚝 선 ‘Art Museum'을 만났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건물의 모습은 물론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위치가 범상치 않았다. 뮤지엄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大路)가 그대로 도시를 관통하여 아우라 강을 자르며 맞은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건 그 뮤지엄 바로 밑에 레닌의 흉상이 서 있는 일이었다. 아, 그곳이 바로 10월 혁명 이전 몇 차례의 거사에 실패하여 짜르에게 쫓긴 레닌이 망명생활을 하던 곳 이었다! 이상한 열기가 몸에 전해진다 싶었는데, 혁명가의 열정이 아직도 살아남아 벌떡거리는 박동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혁명의 와중에 유일하게 적군이 백군에게 패한 곳이 핀란드였는데, 레닌이 바로 그곳에 망명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어, 귀국하면 그 역사를 다시 들춰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핀란드와 가까운 곳에 레닌그라드[현재 쌩뜨 뻬쩨르부르그]가 있고, 도시 전체에서 미미하나마 러시아나 동유럽의 기풍을 감지한 내 첫 느낌이 그 사실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내일 이곳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와 박물관을 찾아 이 느낌의 합리성을 따져 보기로 한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13. 4. 7. 13:10

 
                                                                        <아르크티쿰 정문 간판> 

 


<아르크티쿰 정문 앞에서-임미숙, 조경현> 

 


<아르크티쿰에서 사진으로 만난 사미족 소년> 

 


<께미 가는 길> 

 


<께미 가는 길 표시> 

 

<한적한 께미 시가지> 

 


<께미 시가지에서 만난 베트남 식당> 

 


<스노우 캐슬 입구>

 


<스노우 캐슬 입구-엄마와 아가> 

 


<스노우 캐슬 채플 입구> 

 


<스노우 캐슬 내부에 부조된 여인상> 

 


<스노우 캐슬 안에 소조된 마귀할멈(?)> 

 


<스노우 캐슬 안의 여인상> 

 


<스노우 캐슬 안에 조형된 앵그리버드> 

 


<스노우 캐슬 밖 설원의 스키어들> 

 


<열심히 스키를 타는 꼬마>

 


<스키를 가르치는 아버지와 배우는 아들> 

 


<당당한 꼬마 스키어> 

 


<당당한 꼬마 스키어> 

 



<께미에서 만난 루터 교회>

 

 
<께미에서 로바니에미로 돌아오는 길>

 


<맛있는 저녁식사의 추억 : 레스토랑 니리>

 


<레스토랑 니리의 벽에 걸린 옛 등>

 


<레스토랑 니리의 천정에 걸린 멋진 등>

 

 

 

꿋꿋한 사미족, 얼음에 피를 돌게 하는 핀란드인들

 

 

4월 16일 아침. 창밖으로 햇살이 밝게 비친다. 북극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일까. 햇살이 살아있을수록 기온이 차갑다는 이곳 날씨의 특성을 피부로 느낀다. 한낮에는 올라가겠지만, 영하 10도의 추위가 창밖에 아지랑이마냥 어른거린다. 그 추위에 대한 두려움을 풍성하게 차려진 호텔 식당의 아침식사로 한껏 눅일 수 있었다. 갓 구운 빵과 각종 치즈, 베리(berry) 쥬스와 스프, 야채, 과일 등의 풍미가 나그네의 허기를 채워준다. ‘핀란드 빵이 형편없다’는 내 선입견이 일거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식후 찾은 아르크티쿰(Arktikum).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극지(極地) 자연 및 생활문화사 박물관’쯤 될까. 시가지 한켠의 눈벌판에 오똑 세워진 건물 모습이 참했고, 입구 앞에 눈을 뭉쳐 세운 조형물들이 이채로웠다. 사미족의 어제와 오늘이 고스란히 살아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북유럽 어느 나라를 돌아보아도 존재가 뚜렷한 사미족. 그들은 스칸디나비아 북부에서 핀란드 북부, 러시아의 콜라 반도에 걸친 광범한 지역에 거주한다. 흔히 랩(Lapp)족으로도 불리는 그들은 현재 3만 명 정도가 남아 있는데, 핀란드에 사는 2,300여명은 주로 순록을 방목하고 사냥이나 물고기 잡이를 주로 하는 ‘삼림(森林) 랩’이다. 이들의 종교는 북유럽을 지배하는 루터파 신교가 대부분이고, 러시아 정교를 믿는 이들도 꽤 된다고 한다. 이들의 말인 랩어는 핀(Finn)계와 전혀 다르다고 하니, 그들이 생활․문화․역사의 면에서 핀란드인들과 판이하게 다른 종족인 것만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사미족은 라플란드의 원주민인데, 그들과 ‘행복하게’(?) 공존하는 핀란드인들의 마음이 신기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미족의 생활사를 목격하면서 미국 여행 중 둘러본 적이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이 생각났다. 미국에 300여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보호구역’ 아닌 ‘인디언 확장 억제 구역’이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카지노 사업을 할 수 있는 등 혜택을 받고 있는 듯 했지만, 전통적 삶의 방식과 미래에 대한 꿈마저 상실한 표정에서 정복자 백인들이 갖고 있는 ‘인디언 보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미족은 행복해 보였다. 살아있는 사미족으로부터 공존의 지혜을 생각하며 로바니에미로부터 130km이상 떨어진 께미(Kemi)로 달렸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눈과 얼음의 축제[‘스노우 캐슬(SNOW CASTLE)’]를 목격하기 위해서였다. 자작나무와 전나무, 소나무의 바다를 가르며 고속도로는 뻗어 있었다. 이 추운 북국에 서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움과 기품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자작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작나무가 돋보이는 주변의 숲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누군가에 의해’ 잘 디자인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가끔은 단조로움도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핀란드의 자작나무 숲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

 

우리로 치면 소읍(小邑) 정도의 시골 도회로서 바다를 낀 항구도시 께미. ‘SNOW CASTLE’ 축제 종료 전날이어선지, 마침 휴일이어선지, 도시 전체가 한적했다. 시장 끼를 지울 셈으로 널려있는 햄버거집들 피해 찾아낸 곳이 베트남 식당이었다. 모처럼 동양인을 만나서였을까. 우리를 맞는 호치민 출신 베트남 아가씨의 미소가 은근했다. 고추기름 얹은 베트남 국수가 별미로, 모처럼 땀을 뺄 수 있었다. 식후 바닷가의 스노우 캐슬을 찾았다. 장관이었다. 과연 눈과 얼음의 왕국답게 멋지게 세운 성채의 아이디어가 환상적이었고, 구조와 규모 또한 놀라웠다. 큰 예배당과 수십 개의 숙소들[싱글룸/스위트룸/단체룸 등], 레스토랑 등이 만들어져 있고, 곳곳에 각종 동화들의 세계가 부조되어 있어, 그곳은 하나의 별천지였다. 몇 년 간 수 백 쌍의 결혼식이 채플에서 이루어졌으며, 성수기에는 얼음숙소를 예약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인기라는 말을 듣고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차가운 눈과 얼음에 피를 돌게 하고 스토리를 새겨 넣은 장인(匠人)의 솜씨가 놀라웠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눈 녹듯’ 사라질 ‘허무한 형상’이긴 했지만, 예술적 창조를 지향하는 인간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새삼 궁금해지는 현장이었다.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놀라움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와 두껍게 눈 덮인 바다 위 얼음판으로 나왔다. 아, 그곳엔 핀란드인들의 모험과 강인한 삶의 근원적 단서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꼬마들이 부모와 함께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차마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어린 꼬마의 스키 걸음마가 내겐 부러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추위에도 움츠리지 않고 설원을 달리는 힘과 지혜를 자식들에게 전수하는 삶의 현장이었다.

 

***

 

콧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는 라플란드 지역의 추위에도 꿋꿋하게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미족. 상상력이란 도구로 차가운 눈과 얼음에 피를 돌게 한 핀란드 인들, 스키를 신고 얼음판에서 걸음마를 배우는 아가들. 이들 모두가 내 선생님들이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6. 14:10

 


<헬싱키-반타 공항 모습> 


<헬싱키-반타 공항 내부>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헬싱키 근교>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가는 도중에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로바니에미 공항 바깥에서 만난 이정표> 


<로바니에미 공항 바깥 언덕에 세워진 순록 상> 


<로바니에미 공항의 앙증스런 간판-순록의 뿔로 만들었음> 


<로바니에미 첫날 저녁식사를 한 식당 BULL> 


<로바니에미 오우나스 강과 께미강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호수같은 강에서-미숙, 경현> 


<오우나스-께미 주변의 자작나무 숲 뒤로 석양은 불타고...> 


<오우나스-께미에서, 외로운 스키어>

 


<로바니에미에서 목격한 눈의 모습>

 

 

아직도 눈에 덮인 북극권의 낙원

 

 

참으로 먼 곳이다.

 새벽 5시에 기상, 인천공항 행 리무진에 오른 시각이 6시 45분. 공항에서 아침식사 해결 후 핀에어에 탑승한 시각이 10시였고, 이륙한 시각은 10시 30분이 넘어서였다. 베이징 상공, 모스크바 상공, 쌩뜨 뻬쩨르부르그 상공 등을 거쳐 발트해 상공에 들어선 것이 이곳 시각 오후 3시 가까이. 3시 5분경 헬싱키-반타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한국과의 시차는 6시간. 짐을 찾은 후 로바니에미 행 비행기 출발 시각인 4시 20분 전에 탑승구 22A에 도착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두어 해 전 북유럽 여행팀에 합류하여 잠시 거쳐 갔을 뿐인 이곳. 이번에 큰맘 먹고 그 속살을 보고 싶었다. 스웨덴에 650년간, 러시아에 200년간 통틀어 850년을 남의 지배 아래 살아왔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켰을 뿐 아니라 지배자들의 문화를 발전의 거름으로 삼아온 나라. 2차 대전에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을 잘못 선’ 죄로 철저히 파괴되었고, 전후 소련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기한보다 훨씬 앞당겨 갚아 버리고, 그 후 몇 년 만에 올림픽을 유치하기까지 한 나라. 면적은 남북한의 1.5배쯤 되지만 인구는 500여만 밖에 되지 않는 북유럽의 강소국. 아이슬란드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북극에 가까워 국토의 30%가 북극권에 들어가 있는 나라. 이 나라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 점이 궁금했다.

 

***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날아가는 1시간 30분 동안, 아직도 하얀 눈에 덮여 잠들어 있는 핀란드의 자연을 음미했다. 구릉 하나 보이지 않는 평원에 다닥다닥 둥근 공간들이 하얗게 널려 있는 건 핀란드 전역에 수만 개나 있다던 바로 그 ‘눈 이불을 덮고’ 얼어버린 호수들이었다. 그 뿐이랴. 온 평원엔 백설을 뒤집어쓴 전나무와 삼나무 숲이 들어차 있고, 누가 그었는가? 그 사이사이로 핏줄처럼 도로들이 교차하며 끝없이 뻗어 있었다. 호수와 숲의 나라. 그런데 아직 한겨울의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 겨울잠을 누가 있어 깨울 것인가? 나그네의 마음속 떠오른 부질없는 걱정과 의문이었다. 도회의 냄새는 로바니에미 인근에 도착할 무렵에서야 맡을 수 있었다. 사뿐히 공항에 내리니, 참으로 한적하고 ‘이쁜’ 시골 공항이었다. 공항 건물 앞 언덕 위엔 순록의 모형들이 달릴 듯 서 있고, 순록의 뿔을 이어 붙여 만든 공항 간판은 건물 뒤쪽에 숨듯이 달려 있었다. 렌터카를 몰고 나온 경현의 안내로 시티호텔에 여장을 푼 뒤 본격 탐사가 시작되었다. 호텔 옆 BULL에서 시장기를 지운 우리는 밤인데도 대낮같이 환한 시가지를 거쳐 꽁꽁 얼어붙은 오우나스강(Ounasjoki)과 께미강(Kemijoki)이 합쳐져 호수를 이룬 곳에 들어갔다. 텅 빈 얼음판엔 하얀 눈만 한 길 싸여 있고, 간혹 스키어들만 외롭게 그 공간을 왕래했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그제서야 넘어가는 석양이 불타듯 스며들었고, 아주 조금씩 우리의 품속을 파고드는 어둑발과 함께 숙소에 들어왔다. 시차를 극복하지 못하여 몸은 천근이었으나,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운 로바니에미의 첫 밤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7. 28. 15:00

 

                      

<민스크의 벨라루스 오페라 극장>

 

‘저녁이 있는 삶’

                                                                                                                                                          백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각다귀 떼 날아다니듯’ 지금 수많은 말들이 난무하는 것도 그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영혼이 지워진, 공허한 말들이 귓전을 때리고 사라지는 가운데, 얼마 전부터 우연히 내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한 마디가 있다.

   ‘저녁이 있는 삶’!

 알고 보니 통합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손학규 선생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가 드물게도 정치인들 가운데 내가 호감을 갖고 있던 인사라서 그랬을까. 그 말을 듣는 처음부터 무턱대고 콧방귀를 뀌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친 것도 아니었다. ‘한국의 정치권’. 바닥이 바닥인지라 처음엔 그저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 말이 내 마음에 일으킨 파문은 파도로 커져갔다. 그러다가 결국 가수 이태원이 세상 사람들에게 넌지시 타이르듯 불러주던 <솔개>의 삶을 동경해온 내게 ‘저녁이 있는 삶’이란 이 말은 참선 수행장(修行場)에서 고승이 질러대던 일종의 ‘할(喝)’*로 바뀌고 만 것이다.
최근 그의 말은 책으로 출판되었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책을 사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현학적 허세가 만들어내는 ‘언어의 감옥’에 갇힐 것 아닌가. KS로 호칭되는 국내 최고의 중⋅고⋅대학을 거쳐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가끔 대중 스피치에서 그 점을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 그가 책에 풀어 놓았을 현학의 덫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수라장 대선 판에서 모처럼 쓸모 있는 말 한 마디를 건졌는데, ‘현학의 수사(修辭)’로 망칠 일이 있겠는가.  
   ***
 몇 년 전 러시아 생뜨 뻬쩨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입장료가 비싼 극장이었는데,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반반이었다. 저녁 무렵 정장차림으로 좌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인상적이었고, 장면 장면 ‘브라바!’를 외치는 그들이 신기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잘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리라.  
 얼마 전 다녀 온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 저녁시간에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를 찾았다. 컴컴한 시 외곽지역에 환하게 불을 밝힌 원통형의 그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더 놀란 것은 혹시 빈자리가 날까 기대하며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무대 위의 공연에 몰두하던 어떤 할머니는 뒷좌석에서 소곤대던 여학생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참으로 품위 있어 부러운 그들의 ‘저녁 시간’이었다.
 대조적으로 미국의 도시들은 ‘알 수 없는’ 저녁시간들을 보내는 것 같았다. 6시쯤 되자 도시들의 다운타운은 약속이나 한 듯 텅 비어 버리는 것이었다. 텁텁한 고요와 노숙자들의 활보만이 그 공간들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저녁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지금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
 몇 번 늦은 밤에서 새벽까지 종로와 명동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다. 그곳에 생생한 ‘한국의 저녁’이 있었다. 불야성을 이룬 술집들, 해장국집들, 음침한 간판의 룸살롱들, 모텔들... 비틀거리는 취객들,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한 복판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사람들, 빵빵거리는 승용차와 택시들이 뒤엉긴 채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어떻게든 낮 시간을 보냈을 그들이 무슨 힘으로 이렇게 ‘찬란한 저녁[혹은 밤] 시간’을 보내는지 같은 한국인인 나도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아이들을 다 키워놓은 최근에서야 저녁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비뚤어진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결같이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다정한 저녁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언론매체들의 보도를 접하고 나서였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연구실에서 불을 밝혀야 하는 것’이 교수직이라고 생각해오던 내게 일종의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아, 나는 출처불명의 그런 말 한 마디에 매여 지금까지 내 가족으로부터 ‘저녁시간’을 빼앗았구나! 나는 ‘나 혼자만의 저녁’을 위해 ‘우리 모두의 저녁’을 희생시켰구나!
 때늦은 후회였다. 아이들은 이미 다 커서 나름대로의 세계를 가꾸고 있고, 아내는 그런 나를 체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닭장을 벗어난 병아리들을 모이로 유인하여 불러들이듯, 새삼 그들을 우리 안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 올 수도 없는 현실. 미물로서 어찌 해볼 수 없는 게 위대한 시간의 작위(作爲)인데, 나는 지금 시간의 준엄한 일갈(一喝) 앞에 무슨 같잖은 저항이라도 해볼 심산이란 말인가. 어쩌면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후회와 함께 밀려들었다. 그 구멍을 지금 와서 어떻게 메운단 말인가. 내 알량한 저서와 논문 한두 편이 역사와 사회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민족의 장래를 비춰주는 것도 아닌데, 좁좁한 연구실에 갇혀 젊은 날의 찬란한 저녁시간들을 불태우고 말았으니, 이 미련한 처사를 어떻게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
 손학규 선생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든 그렇지 않든, 아니 대통령으로 선출되든 그렇지 않든 ‘저녁이 있는 삶’은 지금껏 대한민국 국민들이 잊고 있던 소중한 삶의 지표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 표어를 국민들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정치를 펴야 할 것이다. 이 표어를 대선의 국면에서 벗어났다고 쓰레기통에 쳐 박아서는 안 된다. 대통령 후보들은 이 표어를 소중히 갖고 있다가 당선되는 순간 새 정부의 국정지표 맨 위쪽에 놓아야 할 것이다. <2012. 7. 28.>  


*불교 선종(禪宗)에서 고승이 참선하는 학승들이나 사람들을 지도하면서 질타하는 일종의 고함소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발하는 것. 즉 말⋅글⋅행동 대신 드러내는, 깨달은 자의 소리를 말함.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2. 24. 17:18

 <1945년 김병화 농장의 김남견과 레 베라 드미트로브나의 결혼식에서 연주하는 소인예술단(취주악단)>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 막달레나>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아 제법 부지런히 돌아다닌 몇 년이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즈스탄⋅벨라루스 등 쉽게 갈 수 없는 나라들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 고려인들은 없다!’는 것이 오랜 방랑 끝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빛바랜 사진 몇 장과 실실 부서지는 몇 권의 책자들에서나 그들의 모습을 훔쳐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려 온 고려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마주 앉아 보아도 모습만 같을 뿐, ‘소통할 수 없는’ 타자(他者)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엄혹했던 구소련 체제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절망에 갇힌 민족의 탈출구를 공산주의에서 찾고자 그 이념의 고향 소련으로 갔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한 조명희. 그를 추앙하여 문학에 빠져들었다가 22년 간 북극 유형 및 강제노동의 쓰라림과 후유증으로 인생을 마감한 강태수. 그들은 원동으로부터 가축이나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쓰레기처럼 부려진 고려인들의 황당한 집단체험을 극적으로 대변한다.  

오직 내가 원하는 바는
네가 속히 귀여운 아기들의
어머니가 되며
남편의 던지는 웃음에
두터운 정으로 대답하며
또 우리에게만 부족되지 않던
그 무엇으로 보태면서
무한히 행복하기를!
그리고 또 하나는!
너는 나를 “죄인”이라고
절대 부르지 말기를!
이곳은 모두다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줄 알어라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네철 내내 비가 내리겠는가.
사납던 징기스한의 무덤은
오늘도 나지지 않으며
로마에 불지르고도
“오, 나의 사랑하는 로마여!” 하고
웨치던 네로의 혼은
이날도 저주의 무쇠 탈 쓰고
아마 지옥에서 헤매리라
악은 백 년 후에도 발각되며
선은 민중의 부르는 노래에
오래오래 담겨진다.

-강태수 <마음 속에 넣어 두었던 글> 중에서


고려시인 강태수는 북극유형이란 마지막 길을 떠나며 자신의 연인에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여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려 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자신의 상황이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뿐, 자신은 죄인이 아님을 절규한다.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사계절 내내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함께 징기스칸 및 네로의 악행을 예로 들었지만,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 인물은 징기스칸이나 네로가 결코 아니다. 그가 이들을 통해 암시하고 싶었던 인물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이주와 북극 유형을 통해 젊음과 사랑을 잃은 그였다. 그러니 그에게 스탈린보다 더 극악한 군주는 없었을 터. ‘저주의 무쇠탈을 쓰고 지옥에서 헤매리라’는 그 저주의 대상은 네로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야 시인은 자신이 몸담아 온 공간, 그간 생존을 위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과 증오를 이런 저주로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조명희나 강태수만 그러했을까.
***
1세대 고려인 한 분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날아간 키르기즈스탄. 비쉬켁 국제공항에 도착해 연락하니 그 분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일 하시는 중이었다. 이처럼 어딜 가도 1세대 고려인을 만나기란 불가능했다. 만날 수 있는 대상은 기껏 2~3세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우리말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우리말을 잃으니 우리 역사를 잃게 되고, 우리 역사를 잃으니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니 피차 민족적 동질감을 공유할 수 없었다. 찻집이나 식당에 마주 앉아도 그저 이민족을 만나듯 서로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이었다.
그러다가 산업연수생으로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 3~4세들을 만나게 되었다. 작업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우며 급속히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해가는 그들이 신기했다. 나라 밖에 흩어져 살며 정체성을 상실한 한민족 후손들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그들을 보며 2천년의 지독한 디아스포라를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 강고한 모습을 과시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떠올랐다. 겨우 1~2세기의 디아스포라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체면은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 된 컴퓨터 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DNA에 잠재되어 있는 말과 정신의 씨앗을 움틔우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한다. 뒤통수에 와 닿는 의심의 눈초리를 무릅쓰면서 이들 나라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도 혹시 우리 모두의 기억을 되살려 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희미한 의식의 끄나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단계에서 당장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다. 개개인의 수명엔 한계가 있지만, 민족의 수명은 영원하다!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 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나라들 사이에 이념의 장벽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정작 개인들은 이해관계의 장벽을 나날이 공고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우선하는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의 물결은 민족주의를 능가할 정도다. 우리의 과제는 소아(小我)를 넘어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발판으로 바람직한 내일을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의 기획은 그런 소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각처에서 고려인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귀한 사진자료들을 구했으며, 그것들을 일일이 디지털 자료로 만들었다. 그것들 가운데 1차적으로 묶은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남아있는 자료들을 정리⋅발간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려 내는 작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강호 제현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고대한다.

                               2012. 1. 1.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이 글은 최근에 펴낸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있었네!>>의 머리말입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7. 8. 13:43


내게 북유럽은 늘 낯설고 먼 곳이었다. 깔끔하게 디자인된 도시들과 조화를 이룬 전통, 비싸게 유지되는 맑은 공기와 자연, 복지를 떠받치는 경제, 늘 모자라는 햇볕 등등. 참으로 존경스러우면서도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면모들을 고루 갖춘 곳. 스칸디나비아 반도 [Scandinavian Peninsula]를 간다.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발트해를 건너는 9시간여의 비행 끝에 헬싱키 공항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1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코펜하겐. 유럽 북서쪽 끝의 발트 해를 낀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북쪽의 러시아와 핀란드를 기점으로 남쪽의 덴마크까지 인상적인 모양으로 누워 있는 지역이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에 노르웨이, 동쪽에 스웨덴이 있는 곳. 우리가 도착한 미항(美港) 코펜하겐은 반도 최남단의 거점이다. 현대와 전통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시가지 곳곳, 질펀하게 흐르는 도시의 운하들에선 안데르센의 숨결이 느껴진다. 생수 한 병에 17크로네[1크로네는 대략 우리 돈으로 200원]나 하는 살인적인(?) 물가가 조용한 시가지의 이면에 꿈틀대는 현실로 다가왔지만, 안데르센의 동화적 세계를 품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런 엄혹한 현실 또한 극복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내일부터 그 숨결을 느껴볼 것이다. 수난과 영광의 역사를 직조(織造)해나온 그들 역사의 저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산업의 조화를 통해 삶의 질을 관리해 나온 그들의 지혜는 과연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풍족한 삶을 바탕으로 한 자기절제의 정신적 근원은 무엇인지 등을 스칸디나비아의 곳곳에 남아있는 물질적 증거들로부터 찾아볼 것이다. <2011. 7. 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