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0.12.06 '참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2. 2010.10.19 '멀리 떠나온 사람들'을 읽으며
  3. 2007.04.15 민족의 자존심
글 - 칼럼/단상2010. 12. 6. 09:02

‘참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근래 방송을 통해 해괴한 공익광고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해맑은 외국인 여자아이가 등장하여 대한민국이 ‘참 이상한 나라’임을 온 국민의 뇌리에 각인시켜 주는 광고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제작했고, ‘비영리성ㆍ비상업성ㆍ범국민성을 지향하는’ 공익광고라 하니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갖자’는 의도를 의심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러나 ‘참 이상하다’는 문구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마음에 걸린다. ‘이상하다’는 말은 ‘정상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 등등 여러 가지 내포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근래 들어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면에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비약적인 성취를 이룬 것이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사석에서는 더러 ‘이상한 나라’라는 말들이 오갈 수는 있다. 그러나 방송에 대놓고 ‘놀라운 나라’ 대신 ‘이상한 나라’라는 표현을 쓴다면, 참으로 듣기 거북하다.

 

그런데, 북한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도발을 당하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떠올린다면, 비로소 그 ‘이상한 나라’라는 표현이야말로 마땅히 들어가야 할 적소(適所)를 찾았다고 할 만하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야수 앞에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채 희희낙락 살아왔으니 참으로 이상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늘어서 있는 적군의 포진지들을 단 6문의 대포로 막아보겠다는 배포, 수만 명의 적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건너와 덮칠 수 있음에도 ‘평화수역’ 운운하며 병력 감축의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해온 정부의 어리석음,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대신 ‘윗돌 빼서 아래쪽에 고이듯’ 다른 전선의 무기를 임시방편으로 옮겨오는 치기(稚氣)어린 아마추어리즘, 매사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군과 정부, 정치권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등. 이런 속에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해온 것 자체가 기적이고, 그러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참 이상한 나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현란한 수사(修辭)로 포장 혹은 모면될 사안이 아닐 뿐 아니라 의견의 불일치를 보일만한 일도 아닌데, 간교한 좌파들이나 철없는 정치인들은 요설(饒舌)을 농하며 국론을 분열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이 정도의 희생으로나마 우리의 현실을 깨닫게 해 준 것을 ‘신의 가호’ 쯤으로 받아들이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해야 정상인데, 우리는 여전히 ‘욕심과 자만’의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완급과 경중에 따르는 순서가 있는 바, 이런 판국에 누구를 탓하고 끌어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정파들의 작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국방예산 몇 푼 증액해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노라 손을 터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나라의 암담한 미래를 대변한다. 155마일 휴전선을 밀고 내려오는 것만 전쟁이고, 연평도 포격사건은 전쟁이 아니란 말인가. 작은 전쟁을 막지 못하면 큰 전쟁도 막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상시전쟁(常時戰爭)’의 와중에 살고 있다.

 

급한 병과 마찬가지로 국가안보에도 단기처방과 장기처방이 있다.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우리는 제대로 된 단기처방도 못 내리고 있으며, 장기처방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다. 대포 몇 문 더 배치하는 것이 단기처방인지 장기처방인지도 모르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지도층의 의식수준이다. 국가안보가 위협을 받을 경우 국론이 통일되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위기를 맞아 국론을 통일하려면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 학교교육을 통해 올바른 국가관과 ‘상무정신(尙武精神)’을 함양해야 그들이 자라서 지도층이 되었을 때 ‘헛소리’들을 안 하게 되는 것이다. 장비만 좋으면 무엇 하는가.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썩은 정신으로 적의 심장을 제대로 조준할 수 있을까. ‘욕심과 자만이 전쟁의 원인이며, 눈물과 고통만 남겨주는 비참한 것’이 전쟁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왜 전쟁을 피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그런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론을 통일하고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정신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대비는 하지 않고 말만 앞세울 때 정말로 세계인들은 ‘참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이라 놀려댈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인문대 학장/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10. 19. 12:12

폭염(暴炎)이 불타오르던 칠월의 타쉬켄트.
40도를 넘어가는 수은주에 우즈벡 사람들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언 천산산맥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상큼하고도 달달했습니다. 시내를 가득 메운 씩씩한 나무들만이 그 바람과 더위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타쉬켄트 대학에서 고려인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블라디미르 김, 즉 김용택 선생이었습니다. 아담한 체구에 선량한 인상의 고려인 신사 김 선생께서는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정착사(定着史)를 실감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눈물 나게 하는 대목도,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대목도 있었습니다만, 그 분 말씀의 핵심은  ‘끈질긴 민족혼’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대 받아 간 김 선생 댁에서 이 원고를 받았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썼고, 최선하 선생이 유려하게 번역까지 한 이 원고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은 참담해졌습니다. 대충 일별해 보니 고려인들이 구소련 치하에서 겪은 고난의 세월이 갈피마다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큰 감동과 함께 ‘이 원고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라고 쾌재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출판하여 우리의 피붙이들이 타국을 떠돌며 겪어 온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김 선생을 만난 며칠 뒤 찾아간 김병화 꼴호즈에서 저는 김 선생 말씀의 진실을 얼마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400여 호, 500여 명의 고려인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그 마을엔 내가 어릴 적 고향 마을에서 보던 미루나무들이 하늘에 닿을 듯 서 있었습니다. 고려 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가운데 일부는 고려 말과 러시아 혹은 우즈벡 말이 반반씩 섞인 말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간절한 말씀을 들으며 대한민국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가 ‘정말로 잘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더 조이고 땀 흘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

 이 책에는 20여 편의 체험 수기(手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표면 상 독립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은 ‘디아스포라적 삶의 고통’과 ‘억척스런 극복의 역사’입니다. 김 선생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김 선생 개인을 통해 본 고려인들의 생활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 뿐인가요? 남북 분단의 민족 현실에 대한 아픈 지적과 함께 이념이나 체제경쟁에서 이겼다고 자만하는 우리에게 ‘무서운 일침(一鍼)’을 가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글 전체를 연결해서 읽다보면, 조분조분 건네는 ‘일인칭 화자’의 말을 통해 한 편의 자전적(自傳的) 소설(小說)을 짚어 나가는 착각에 빠져들게 합니다. 아들 ‘빠벨’에게 자신의 험하면서도 소중한 경험을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은 구소련 고려인들이 100년 가까이 겪어온 고통을 조국 특히 대한민국의 동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나 아닐까요? 우리가 언필칭 ‘해외 동포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들의 지나 온 세월과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면 모두가 구두선(口頭禪)일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인이라면 모두 읽어야 할 ‘해외동포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학계의 인사들이나 해외동포 관련 정책에 관여하는 인사들은 안두(案頭)에 두고 밥 먹듯 펼쳐 보아야 할 책입니다.

 오늘, 이 책을 대한민국 앞에 내어놓습니다. 김 선생이 대신 쏟아놓은 고려인들의 이야기에 부디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가을, 이 책을 통해 해외동포들과의 의미 있는 만남 이루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0. 가을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학장/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 규 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5. 22:54
민족의 자존심

                                                                                                                      조규익

자격 있는 자만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원문보기 클릭-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중국의 공권력에 폭행을 당했다. 국가 간의 이해(利害)가 개입된 문제라고는 해도 ‘때린 놈’이나 ‘맞은 놈’ 모두 우습게 되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때린 놈의 역성을 드는 집단이 우리들 속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점잖다 해도 ‘불량배에게 맞고 들어온 자식’을 꾸중하는 부모는 없다.

사실 중국을 지렛대로 북한을 움직이려면, 중국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란 어렵다. 북한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면서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이득까지 챙기려는 중국인들의 계산법은 천하공지(天下共知)의 사실이다. 분단된 우리 민족을 뒤에서 조종하며 실익을 챙기자는 그들의 ‘꼼수’를 우리는 민족사 최대의 수치로 받아들여야 정상이다.

따라서 이번 일을 국제화 시대의 나라들 간에 일어날 만한 외교적 사건으로 단순화 시킬 수는 없다. ‘민족적 자존심’의 원칙적 잣대는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최우선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그 잣대가 좀더 복잡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0년 전의 일을 떠올려 보자. 반정(反正)으로 인조(仁祖)를 옹립한 서인(西人)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중국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지 못하면 국내에서 반대파를 누르고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의 기세가 바야흐로 명(明)나라의 숨통을 끊어갈 무렵이었다. 이덕형(李德泂)을 정사(正使)로 하는 주청사(奏請使)가 명나라 조정에 파견되었고, 그들은 넉 달 가까이 북경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사가 ‘시랑(侍郞)’ 정도의 관리들에게 농락을 당하기 일쑤였고, 자신들의 뜻을 요로에 전하기 위해 뇌물을 밥 먹듯 써야 했다. 북경의 혹심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새벽부터 길거리에 꿇어 엎드려 출근하는 각로대신(閣老大臣)들에게 손을 비비던 노구(老軀)의 정사는, 바로 역사 속에 그려진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다.

그뿐인가. 천신만고 끝에 각로들을 만난 정사. 그들의 괜한 트집으로 섬돌에 내동댕이쳐져 울부짖던 그 참상을 다시 무슨 말로 표현할까.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다지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농락해 온’ 저들의 무례함을 제때 제대로 징치(懲治)했더라면 현대사는 좀더 다른 방법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징치’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만이라도 강구했었다면 지금 이렇게 온 국민이 참담함을 되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빌붙어 국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일부 무리들의 ‘꼼수’는 결국 민족의 자존심을 망치고 그후 조선에 잦은 전란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가 된 것만 보아도, 통치 집단의 지혜로움은 분명 민족사 전개의 향방을 가르는 지표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세상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겉모습은 달라져도 본질은 변할 리 없다. E H 카(Carr)의 말처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임에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운 것 없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말았다. 특히 21세기 초입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집단들이 매우 우매(愚昧)하고 게으르다는 점, 국민으로서는 그것이 못내 통분하다.

역사책의 한 쪽만 넘겨 보아도 우리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진실은 그득하다. 지금 중국은 남북의 분단 상황을 지렛대로 삼아 그 사이에서 철저히 이익을 취하고 있다. 그 와중에 농락당하는 건 남북한 모두의 자존심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