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4. 23. 17:37

고서(古書)의 마력(魔力), 인산(印山) 박순호 선생의 힘!

 

 

 

선생 댁 거실에서

 

 

 

선생댁 거실에서

 

 

 

선생댁 거실에서 양훈식, 선생, 백규

 

 

 

인터넷 서핑 중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글(<훔친 책 몰래 보관하기>)을 접했다. 책배 곯으며 고생해온 그분의 어린 시절이 어쩜 그리도 나와 똑 같을까? 놀라운 일이었다. 고희를 훨씬 넘기신 그 분과 나의 시차를 생각하며, 내가 겪은 책 굶주림이야말로 세대를 초월하는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게는 그 분이 고백한 책 도둑의 과거는 없으니, 책에 관한 절실함에서 내가 몇 수 정도 뒤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때문인가. 나는 지금도 책에 관해서라면 사족을 못 쓴다. 아직도 책배 곯던 시절의 궁핍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책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쫑긋해지고, 지방에 가서도 그곳 대학 도서관의 장서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고서점의 서가가 무척 궁금해진다. 해외에 나가서도 서점들이나 대학 도서관에서 눈에 번쩍 불이 나는 경험을 하는 건 마찬가지다. 늘 지방의 고서점과 고서 탐색 대열에서 만난 몇몇 동지들이 눈에 어른거리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훌쩍 지방행에 나서는 경우도 더러 있다. 가끔은 꼭꼭 숨겨놓은 몇 권의 고서들을 어루만지면서 한 자 한 자 써나간 책 주인의 정성을 느껴보기도 한다.

 

사실 고서이든 신간이든 내겐 모두 보물이다. 잘 만들어진 신간은 독서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세월이 흐르면 고서가 될 것이고, 후손들도 나처럼 그 책들을 어루만지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내가 지은 책들은 아낌없이 나눠주지만, 내가 마음먹고 사 모은 남의 책들은 선뜻 주지 못한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40여년의 세월을 버텨오는 중이다. 그러다가 뵙게 된 분이 원광대 명예교수이신 인산(印山) 박순호 선생이다.

 

대학원 재학 시절, 거질(巨帙)로 영인 출간된 <<한글 필사본 고소설 자료총서>>를 보며 인산 선생의 자료실이 궁금했고, 후학들에 대한 칭찬에 엄격하시던 나손 선생조차 인산 선생에 대해서만큼은 찬사를 아끼지 않으시는 이유 또한 늘 궁금했다.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안고 부초처럼 강호를 떠돌다가 21세기에 들어서고 나서야 선생을 면전에서 뵙게 된 것이다. <거창가>에 빠져 지내던 무렵 당신이 소장하고 계시던 이본들을 수차에 걸쳐 보내주셨고, 그 덕에 저서 <<봉건시대 민중의 저항과 고발문학 거창가>>는 크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로도 가끔씩 몸소 전화를 주시며 새로운 자료에 갈급하던 내게 중요한 귀띔과 격려를 건네곤 하셨다. 직접 찾아뵙고 자료를 받겠노라는 내 간청을 바쁜 데 그럴 필요 없다고 번번이 단칼에 자르시며 우편이나 인편을 통해 보내주시는 것이었다. 그저 감사의 편지나 전화로, 출간된 책이나 논문으로, 송구스런 마음을 표할 뿐이었다.

 

언젠가 인편에 보내주신 <궁즁도회가>를 분석하여 <<국어국문학>>(157)에 발표했는데, 그것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며 전화를 주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보내주신 10여 종의 <한양가> 이본들을 나와 내 문하생 5명이 함께 달려들어 분석연구하여 공저 <<박순호 소장본 한양가 연구>>(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3/조규익정영문김성훈서지원윤세형양훈식/학고방)를 출간했다. 그 직전에는 연구소 주최로 한국문예에 반영된 서울의 형상이란 주제의 전국 학술발표대회를 갖고, 그 자리에 인산 선생을 모셔 고문헌 탐색의 길에 만난 <한양가>”라는 발제 강연을 부탁드리기도 했다. 극도로 가난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울컥 눈물을 삼키시던 선생의 당시 모습이 내 마음에도 충격으로 다가와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은 선생의 가난과 내 가난이 순간적으로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최근 많은 자료들을 한글박물관을 비롯한 공공기관에 넘기심으로써, 좀 더 많은 학자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평소의 도타운 뜻을 실현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엄청난 자료들이 서고에 그득하시니, 그 점이야말로 민속학자와 서지학자로서 학계에 기여해 오신 선생의 생애가 남들이 추종하기 어려운 넓이와 깊이를 갖추고 계시다는 방증이 아닌가.

 

최근 찾아뵙기를 간청하여 처음으로 허락을 받았고, 차를 몰고 내려 가 뵌 것이 지난 주말이다. 도착해보니, 놀랍도록 해박하시며 열정적인 신선한 분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책들의 숲에 조용히 앉아 계셨다! 선생의 장서들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고 계신 고려조의 불서(佛書) 세 권을 황감한 마음으로 친견했고, 보물급의 회화작품들로 오랜만에 안구(眼球)를 세정(洗淨)할 수 있었으며, 각종 필사본들과 두루마리 가사들에 손때를 묻혀보는 호사도 누렸다. 그보다 감격스러운 사실은 선생께서 몸소 귀한 자료들을 한 보따리나 챙겨 주신 점이다. 물론 그거야말로 내 둔한 머리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이자 마음의 짐이지만, 어쩌랴. 학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다니면서 달라붙어 씨름해야 할 화두(話頭)’ 한 자락 없다면, 그 또한 한심한 일 아닌가.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나로서는 선생의 깊은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과연 나라면 고색창연한 옛 문헌들을 자식에겐들 선뜻 맡길 수 있을까. 일생 손때 묻혀가며 애장해오시던 필사본들을 연구 자료로 기꺼이 내어주시는 선생의 깊은 뜻은 무엇이며, 나는 그 뜻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텍스트로부터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하는 작업 못지않게 난해한 또 다른 과제까지 안게 된 것이다. 그 옛날 누군가가 힘들여 써놓은 것들이 수백 년 풍우(風雨)와 수화(水火)의 고비들을 넘은 뒤 불쏘시개나 벽지, 아니면 종이공예의 재료로 망가지지 않은 채 학자들의 손에 오롯이 들어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인가. 선생으로부터 자료를 받아 석박사논문과 저서를 쓴 수십 명의 학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인으로 발간된 자료들로부터 혜택을 받은 수백, 수천 명의 학인들을 생각하면, 선생이야말로 우리나라 국문학계를 실질적으로 견인해 오신 주인공 아닌가.

 

아직도 유년 시절의 책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한 내 입장에서 스러지지 않는 책 욕심땅보다 두껍다’. 게다가 그 외경(畏敬)’^^의 영역인 고서에까지 욕심을 내게 되었으니, 욕망의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게 사실인 모양이다. 누구는 최신판으로 활자화된 자료를 갖고 논문 쓰는 학자들이 대부분인 우리 학계가 한심할 정도로 천박하다고 개탄한다. 원본의 글자를 잘못 읽어 오류를 범한 책들이 부지기수임을 감안하면, 그런 비판도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원본을 최신 활자로 정확하게 옮겨주기라도 한다면, 비록 소수만이 원본을 접할지언정 그나마 학계의 장래를 위해 다행한 일 아닌가. 이처럼 국문학계를 천박성의 나락에서 건져 주신 셈이니, 선생의 걸어오신 생애와 이루신 업적이 더욱 빛나고 그 빛은 앞으로도 영속되리라 느껴지는 순간이다.

 

 

<<구운몽>>

 

 

 

두루마리 규방가사들

 

 

 

두루마리를 펼친 가사작품

 

 

 

한국에서 가장 오래 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서

 

 

 

규방가사 <부여행신젼>

 

 

 

<궁즁도회가> 연구논문

 

 

 

박순호 본 <거창가> 소개부분

 

 

 

<<거창가>>

 

 

 

<<한양가 연구>>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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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도야마 대학의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가 일본 내 한국 고서 5만여 권의 목록을 집대성하여 펴냈다. 우리는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우리를 강점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우리의 문화재와 서적 등 정신적 자산들을 수없이 빼내갔다. 완전한 지배를 목적으로 그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철저히 조사했고, 당장 필요 없는 것들일지라도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은 닥치는 대로 긁어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서적들을 약탈당했는지 정확한 통계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부나 학계가 그간 약탈당한 고문서의 현황 파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거의 ‘무감각’ 수준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국의 고문서 동호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금도 이른바 ‘나까마(중간상)’들에 의해 수집된 고문서들 상당량이 일본으로 반출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 정부나 학계가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는 귀중한 고문서를 벽지로 쓰고 물건의 포장지로 써왔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우리는 그런 무지몽매의 세월을 살아왔다. 엿가락 몇 개와 바꾼 고문서들은 그간 물건 포장지로, 종이공예의 재료로 팔려 나갔고, 일본과 연결되는 수집상의 손으로 끊임없이 넘어간 것이다. 일본은 약탈해간 우리의 고문서들을 각종 컬렉션의 이름 아래 공공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에 묶어 두고 우리에겐 열람조차 제한하고 있다. 그들이 소장한 우리의 고문서 한 건을 복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절차와 세심한 안전장치들을 경험해보면 그들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차게 된다. ‘우리의 것’이면서도 일본의 재산이 되어 그들의 귀중본 서고에 보관된 고문서들을 보며 통분해 하는 우리의 학자들. 우리의 문화적 천박함이 초래한 업보쯤으로 여기며 그 억울함을 씹어 넘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우리 정부에서는 국가 차원의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을 일괄적으로 반환해오는 것이 최선일 것이나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자료들의 소장처를 조사한다거나 복사라도 해다가 한 곳에 비치하여 학자들의 수요에 응해야 할 것 아닌가. 학자들 개개인이 연구년을 이용하거나 특정 연구 과제를 수행하며 미국이나 일본 등지를 방문하여 필요한 자료들을 조사, 복사해오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그런 작업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복사해오는 자료들이 중복되는 폐단 또한 적지 않다. 국력의 낭비가 방치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해외에 소장된 우리 고문서 정보의 관리가 시급히 일원화 되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장서각이나 규장각 등 우리가 갖고 있는 고문서들을 정리하는 일도 급하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해외에 널려있는 우리의 서적들이나 고문서들의 현황을 파악하는 작업은 더 시급하다.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우리 고문서의 약탈 행위는 1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음지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혼을 담은 고문서의 상당 부분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몇 푼의 돈에 눈이 멀어 그런 일을 돕는 세력이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현실은 비극이다.

‘이 책이 일본의 정신문화를 연구하는 데도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후지모토교수의 말 속에 ‘한국을 지배하려면 한국의 정신문화를 연구해야 한다’는 식민시대의 논리가 살아 있음을 우리만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조선일보 2006. 5. 15. >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