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9. 29. 12:12

근황 1

 

 

미국식 혹은 오클라호마 식 인간관계

 

 

김형!

 

오랜만이오. 이곳에 온지 벌써 정확하게 한 달이 지났소. 외국에 나가면 조심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외국 생활을 두루 경험해 온 형은 잘 아시리라 믿소. 특히 외국에 정착하기까지 참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들이 많은 건 우리처럼 단기간의 체류자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오. 우리가 잠시 엉덩이를 붙인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Stillwater)는 미국의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도 참으로 특이한 곳이오. ‘조용함깨끗함단조로움으로 요약될 만한 자연 및 생활환경, 바이블 벨트(Bible Belt)로 통칭되는 이 지역의 정서, 그리고 미국인들 특유의 개인주의 등이 어울려 빚어내는 지역 색깔 말이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평지에 띄엄띄엄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그 한복판에 널찍이 들어선 대학 캠퍼스. 바둑판의 줄처럼 그어진 도로들을 따라 듬성듬성 조성되어 있는 상가들에나 나가야 그나마 다운타운의 맛을 약간 느낄 수 있을까요? 학생들과 대학 종사자들을 포함하여 2만 여명이 생활하는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면 사람 만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이 지역이오. 복잡한 서울에 살다가 이곳에 온 우리는 일종의 문화충격을 다독여 가며 쉽지 않은 적응의 한 달을 지내온 셈이오. 15년 전에 1년 남짓 살던 LA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이곳에서 맛보고 나서야 미국인들의 생활철학과 그들이 신봉하는 합리주의 혹은 실용주의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으니, 우리도 이제 철 들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백규 연구실의 달력


                                         연구실의 백규

 

***

 

이곳 도착 사흘 뒤 학과장[여기서는 ‘Head’라고 함] 로간 교수와 학과 비서들을 만났소.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인사가 끝난 뒤의 대화는 사무적인 내용으로 일관했소. 학과장은 학과 전반에 대한 소개와 부탁의 말씀을 한 다음 강의에 들어갔고, 비서들은 건물 출입문과 내 연구실 키를 주고 학과 시설에 대한 안내와 설명이 끝나자 모두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업무들을 보는 것이었소. 차나 한 잔 하자거나 점심이라도 함께 하자는 등의 말 거래는 일체 없었소.

 

며칠 뒤 아무래도 이게 아니다 싶어 한 수 가르쳐 줄 요량으로 로간 교수에게 연락하여 점심약속을 잡았소. 그런데 까페테리아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그는 먼저 작은 머핀 하나와 음료수를 고르는 것이었소. 그러는 그를 보며 나 또한 더 비싼 것을 고를 수 없어 같은 것으로 골라잡았소. 그런 다음 그는 자기 것을 자기가 계산하려 했소. 내가 화들짝 놀라며 오늘은 내가 함께 계산하겠다고 하자 마지못한 듯 그러라고 하는 것이었소. 내가 궁금하여 머핀 하나로 점심이 되냐고 묻자 집에서 빅디너(big dinner)를 먹기 때문에 괜찮다는 대답이었소. ‘참 인심 고약한 동네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소.

 

그 뒤 한 주쯤이 지나서 대닐로위츠 학장과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소.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 메일이 도착했소. “Dear Kyu-Ick/ I am delighted you have made it safely to our campus, and meeting you would be very nice. I have copied Terri Cushing to this email- she will contact you soon to see when we might be able to get together for 30 minutes or so. If you come to my office, I can provide coffee or soda as we visit./Sincerely, Bret[친애하는 조 선생님/당신이 우리 캠퍼스에 안전하게 오셨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나는 이 이메일을 비서인 테리에게 복사해주었습니다.-그녀가 조만간 당신에게 우리가 30분쯤 함께 만날 수 있을 때를 상의하기 위해 연락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내 사무실로 오신다면 나는 우리들이 방문할 때처럼 커피나 소다를 대접할 수 있습니다.]”

 

문면에서 친밀함이 넘쳐나긴 하지만, ‘30분쯤 만날 수 있다는 것’, ‘커피나 소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등의 말을 형은 이해할 수 있겠소? 워낙 시간 제약을 많이 받는 자리이니 전자야 그렇다 치고, 후자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소? 그들의 표현대로 거한 빅런치빅디너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커피나 소다를 대접한다는 자신들의 관습을 언급하며 생색내듯 한 건 왜일까요?


                                        Gary Young 선생과 점심을 하고                                      

 


                                           Stephen과 학교 바깥에서 점심을 하며

 

지난 주 수요일. 내가 이곳에 온 뒤 첫 패컬티 미팅(faculty meeting)’이 있었소. 우리로 말하면 학과 교수회의인 셈인데, 저에 대한 학과장의 소개에 이어 제 인사말이 끝나자 적지 않은 안건들이 논의됩디다. 무려 1시간 반이 넘는 회의였는데,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활발한 토론을 거쳐 결정하는 그들의 공동체 문화가 제 눈에 좀 자잘해 보이기는 해도, ‘별 뒷말들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교수회의를 하면서 차 한 잔도 함께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간다는 사실 등이었소. 한국에선 회의 중에 반드시 차 아니면 하다못해 물 한 잔씩이라도 앞에 놓아주고, 학과회의가 끝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저녁자리가 마련되곤 하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놀라고 말았소.

 

그 뒤로 점심시간에 교수들의 동태를 예의 관찰해 보았소. 점심을 싸와서 연구실에서 먹든가 각자 까페테리아 등에서 학생들 틈에 앉아 다소곳이 한 끼를 때우는 것이었소. 서울에서 점심때가 가까워 오면 혹시 누가 없는가 이 연구실 저 연구실로 전화를 넣곤 하던 내 문화와 관습이 여지없이 망가져버리는 순간이었소.

 

점심이나 저녁만 문제겠소? 밥도 함께 안 하는데 술자리야 엄두도 못 내지요. 몹쓸 동네에 왔다는 생각이 무겁게 나를 누르는 것이었소. 한국에서야 밥 먹으러 가면 우선 두꺼비참이슬이 밥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이 공식 아니오? 그런데 도통 이곳에서는 술을 구경할 수가 없소. 하도 궁금하여 술가게[Liquor Store]를 찾았더니, 그마저 몇 군데 없었소. 그 크고 흔한 월마트에서도 맥주조차 팔지 않는 동네임을 깨닫고, 그 원인을 내 나름대로 요모조모 분석해 보았소. 거리에 나가면 고색창연한 교회들이 곳곳에 멋진 자태를 뽐내며 서 있어요. 주로 침례교회[Baptist Church]가 많은데, 이곳이 그 유명한 바이블 벨트의 한 부분임을 많은 교회들이 입증해주고 있었소. 아직 교회 예배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도들로 가득 찬다고 합디다. 서구사회에서 주일마다 신도들로 가득 차는 교회를 구경해 보신 적 있소? 그러니 사람들의 일상이 매우 단조로우면서도 정결하고, 조용하면서도 경건하기까지 하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소.


                     First Baptist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First Methodist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First Presbyterian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

 

도착하고 나서 여러 경험들을 했고, 한 주 두 주 그런 경험들이 겹치면서 처음 가졌던 내 느낌과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은 이상한 일이오. 잘 아시지 않소? 서울에서야 때마다 호기롭게 점심을 사는 사람도 많고, 반면에 뜬뜬하게구두쇠 노릇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요. 그러다 보니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아무개는 술 한 잔 사는 법이 없다!’는 투의 원망과 비난이 자주 생기고, 그게 상호간의 반목으로 커지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 아니겠소? 끼리끼리 술자리에 어울리다 보면 이해를 달리 하는 타인에 대한 험담[이른바 뒷 담화]이 오가기도 하고 정당하지 못한 거래도 이루어지는 법이니, 그 자체가 투명사회에 역행하는 일이지요. 그 때문에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부패 선진국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아닌가요? 모두 술 인심, 밥 인심, 담배 인심이 후한 데서 빚어지는 악폐라 할 수 있지요.

 

서로 간에 밥 한 끼, 술 한 잔 안 사는 미국교수들을 보며 투명한 미국사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어요. 생각해 보시오. 툭하면 갖는 저녁회식에서 술 몇 잔 돌리다 보면 2, 3차로 이어지고, 그 후유증으로 한 두 주 허송한 다음 몸에서 알코올 기가 떨어질 즈음이면 다시 그 일을 반복하니, 강철로 된 몸인들 배겨날 것이며, 책상 위에 그득 쌓인 연구는 언제 할 수 있겠소? 술 마실 땐 즐겁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허탈과 상실, 미움과 반목의 갈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 아니겠소? 선진국 교수들은 제 밥 저 먹고 조용히 앉아 강의와 연구에 매진할 때,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일부교수들은 술친구 따라 우왕좌왕하며 시간만 죽이며 지낸다면, 참으로 암담한 일 아니겠소?

사실 한 달쯤 이런 문화에서 지내다 보니 언젠가부터 이곳 분위기가 참으로 편하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소. 우선, 술을 사지도 얻어먹지도 않으니, 마음이 태평양만큼이나 여유로워졌소. 술을 사기 위해 지갑 속의 돈을 헤아릴 필요도, 술을 사지 않는 구두쇠를 원망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말이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여기서 한 달 동안 지내다 보니 한국에서 평균 한 달에 한 번 꼴로 마셔댄 알코올 기가 내 혈액에서 모두 빠져나갔다는 점이오. 술에 잠겨 해롱거리는 인간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나도 이젠 술 생각 전혀 나지 않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났으니, ‘미국의 바이블 벨트에 온 보람이 있지요? 엊저녁 이곳 대학의 한국인 교수 모임에 참석했었지요. 한국인들의 밥상에 술 대신 물이나 탄산음료가 나오는 것을 보며 참으로 신기한 생각이 듭디다. 이곳 학과 교수회의 때 경험한 일을 옆의 장영배 교수께 여쭈었더니, ‘이곳은 어느 학과나 그래요. 그리고 그게 마음 편하고 좋아요. 그게 한국과 다른 점이에요.’라고 하십디다. 나도 그 말씀에 맞장구를 치며 속으로 재미는 없지만, 길게 보면 이 길로 접어드는 것이 한국 지식인들의 의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소.

 

또 연락하리다. 편안히 계시오.

 

2013. 9. 28.

 

스틸워터에서 백규 드림



Stillwater Public City Library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Melania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8. 07:40

 

 


OSU의 백규 연구실에서. 왼쪽이 수잔, 오른쪽이 다이아나

 

둘쨋날 부재중에  다이아나가 써놓고 간 메모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Fulbright Scholar로 선정되었음을 통보 받은 뒤 미국 내의 연구기관을 정하고 그 책임자로부터 초청장을 받는 일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토네이도 소식이 좀 걸리긴 했으나, 학교의 자매대학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아니라 한적한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연구와 힐링을 겸할 수 있다고 본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은 망설일 필요가 없는 적지(適地)였다.

 

우리의 인문대학에 해당하는 OSU‘College of Arts and Sciences’의 대닐로위츠[Bret Danilowicz] 학장에게 이메일을 보내자 하루 만에 쾌락의 응답이 왔고,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역사학과 학과장 로간[Michael F. Logan] 교수로부터 초청장이 도착했다. 그런데 그 초청장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내용은 선생님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우리는 선생님께 연구실, 비서의 지원, 컴퓨터와 인터넷 서비스 등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During your stay here, we will be able to provide you with and office space, secretarial support and computer and internet access]라는 요지의 약속이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비서의 지원(secretarial support)’.

 

대학에서 비서는 으레 총장실에나 앉아 있는 묘령의 여직원으로 알고 있던 내 상식으로 비서의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로간 교수의 말은 묘한 감동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30년 가까이 한국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제자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인 조교들로부터 강의와 연구에 도움을 받아오던 나로서는 학과 비서의 존재나 성격에 대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바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의 책과 드라마로 번역소개된 ‘The Paper Chase’가 한동안 대중의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킹스필드(Kingsfield) 교수에게 비서 노팅엄(Mrs. Nottingham)이 있었다. 외부인들 특히 학생들에게 타협을 모르던 고집스런 캐릭터였지만, 교수에겐 매우 충직한 비서였다. 이처럼 명비서 노팅엄[배우는 베티 하포드(Betty Harford)]의 존재 같은 간접자료를 통해 나는 겨우 미국 대학 학과들의 비서 상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역사학과의 비서는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인데,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주로 수잔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간결하면서도 자상하게 답신을 보내주던 그녀 덕분에 나는 준비과정에서 많은 수고를 줄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킹스필드 교수의 노팅엄을 잠시 잊은 채, 한결같이 이쁘고붙임성 좋은 한국의 비서들만 상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부친 짐의 배달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끙끙대다가 아무래도 학과 비서를 통해 알아보아야겠다는 계산으로 시차 적응도 안 된 사흘 만에 학과 사무실로 나가 수잔과 다이아나를 만났다. 중년 혹은 중년에 가까운 두 여성이 나를 맞았고, 그 가운데 약간 젊은 수잔이 매우 사무적으로 나를 배정된 연구실로 안내하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 아닌가. 그 때서야 이곳이 미국이고, 미국 대학의 학과들에는 노팅엄만 있을 뿐, 한국의 비서들은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미국 우체국으로부터 받은 전화번호와 연락처를 주며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자 ‘Yes!’하며 나가더니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학과 사무실에 가서 다이아나에게 수잔의 행방을 물은 즉 짐을 찾으러 우체국에 나갔다는 것이다.

 

 아뿔싸, 엄청난 무게의 박스 두 개를 연약한 여성이 어찌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곳 스틸워터(Stillwater)의 지리에 어두웠던 나는 다만 내 짐이 어느 우체국에 보관되어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찾아야 하는지만 알고자 했으나, 그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해당 우체국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조교에게 우체국 편지 심부름조차 시키길 꺼려하던 나인지라, 그 소식에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다. 40 만 원 이상의 탁송료가 들었던 박스 두 개의 중량이 미안함으로 내 마음을 짓눌렀다. 아무리 비서라지만, 첫 대면에 짐꾼 노릇을 명()한 셈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남아 있던 다이아나에게 사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노라고 구구하게 해명했지만, 그녀의 말은 간단했다. ‘It’s our duty!’란다. 결국 수잔을 만나지 못한 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하루 뒤 다시 들른 내 연구실에는 태평양을 건너 온 박스 두 개가 오롯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수잔, 박스에 대한 언급은 입도 뻥긋 아니 한 채 우리를 맞아 주는 게 아닌가.

 

그 해프닝을 통해 제 할 일에만 충실한미국인들의 업무 철학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연구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교수들의 일을 충실하게 거들고 해결해주는 것이 학과 비서들의 업무이고,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업임을 그들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혹 생색이라도 내면 어쩌나?’하고 걱정하던 내게, 그녀는 사무실의 꽃이 아닌 충직한 전문가로서의 존재의미를 120% 보여주고 말았다. 미국 도착 이후 내 인식의 한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첫 사례였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