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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2.26 눈 내린 산길을 걸어서 출근하며 2
글 - 칼럼/단상2010. 9. 21. 12:12

추석유감

 

비가 내린다.

여름내 내리더니 추석 전날에도 내리고 있다.

쨍하는 가을볕에 뽀송뽀송 말린 마음으로 맞이하는 추석이라야 제격인데...

축축하게 젖어 썩은 내 풍기는 마음이 마를 겨를도 없이 다시 물에 퉁퉁 붇는다.

고요한 캠퍼스. 모처럼 즐기는 고적(孤寂)이라기엔 청승맞은 모습이라고들 수군 댈 것이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소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들이 쏟아지는 빗줄기들을 몹시도 성가셔 한다. 추석 전 날, 고향 찾은 우리네 이웃들의 설레는 마음과 달리 만상(萬象)은 차분하고 무겁다.

 

추석만큼 풍성하고 평화로운 명절이 있을까. 올 사람 없어도 기다려지고, 마땅히 갈 곳 없어도 두 발 동동거려지던 것이 추석을 맞던 내 유⋅소년기 추석의 서정이었다. 시골 집 앞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엔 수심 대신 웃음이 번지고,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을 함께 하고 마주 앉을 가족들 생각에 등짐 진 어깨에 힘이 솟곤 하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인천으로 돈 벌러 나갔던 동네 처녀애들이 쪽 빼 입은 채 동구 밖으로 모습을 나타내면,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며, 젊음도 울렁거리던 명절의 추억도 깡그리 잃고 말았다. 아니, 젊음이 흘러가니 고향을 떠나야 했고, 고향을 떠나니 명절도 사라졌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다만 빈 쌀독 밑바닥에 굴러다니는 몇 낱의 쌀알마냥 가끔씩 들여다보며 탄식하는 추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버려두고 떠나온 고향집 뒤란의 감들은 올해도 익고 있겠지만, 그 감나무를 타고 앉은 무심한 까치들은 ‘오늘도 이 집 자식들이 찾아오려나?’하며 우짖어대겠지만. 그 까치소리마저 이젠 매년 이맘때쯤 한 번씩 나를 불러일으켜주는 ‘마음속의 따르릉 시계’로나 남아 있을 뿐이다.

 

다산 정약용은 송파마을에서 추석날 풍속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추석에 시골 마을의 풍속을 기록하다(秋夕鄕村紀俗)>

 

맑은 날씨의 시골 마을 떠들썩 즐겁구나(晴日鄕村樂意譁)

가을 동산의 풍미는 자랑할 만도 하네그려(秋園風味向堪誇)

들 집 지붕 위엔 넝쿨 말라 박통이 드러났고(枯藤野屋瓜身露)

산언덕엔 병든 잎 사이로 밤송이 짝 벌어졌군(病葉山坡栗腹呀)

 

 

지붕 위의 박을 굴려 내려 톱질 할 일도, 후두둑 밤을 털 일도 없는 중년의 추석.

그렇게 명절맞이 하러 모두들 떠나 쓸쓸해진 도심의 한 구석에서

쓰디쓴 커피 마시듯 삶의 또 한 도막을 ‘아작 내고 있는’ 한심한 영혼이다.

 

2010. 9. 21.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26. 12:32
 

눈 내린 산길을 걸어서 출근하며



                                                          조규익



출근길의 어려움에 고통 받는 분들은 ‘미친 놈!’이라 욕하시겠지만, 밤에 눈이 내리면 못 말릴 정도로 들뜬다. 아침 일찍 아이젠에 배낭차림으로 산길을 걸어 학교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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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끝에 누가 있을까

 대도시의 한 구석에 둥지를 틀고 세상의 잇속으로부터 초연하려 애써온 20년 세월. 누항(陋巷)에 살면서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한겨울에만 서너 번쯤 맛볼 수 있는 ‘눈길 출근’ 덕분이다. 노트북과 책을 잔뜩 우겨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등산화에 아이젠을 차고 나서면 좋게 보아 ‘산사나이’ 서운하게 보아 ‘군밤장수’다. ‘배낭 속의 물건을 많이 팔고 오라’는 아내의 농을 뒤로 하고 산길로 접어들면 별세계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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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무와 눈의 조화여!

 나보다 극성스런 사람들이 벌써 발자국들을 찍고 지나간 산길이지만, 봄맞이 집 단장에 열성인 까치들의 노래 소리 만큼은 내 독차지가 아닐 수 없다. 아, 4계절 지겹게도 사람들의 체취에 시달리던 나무들이 오늘은 참하게 순백의 화장을 한 채 ‘거울 앞에 선 순이’의 형상을 하고 있구나! 소담하고 정갈한 그 자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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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눈길

***

내 어릴 적엔 눈이 많았다. 논바닥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를 때까지도 차가운 바람은 내 작은 몸 곳곳을 파고들어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눈과 얼음이 우리의 눈길을 벗어나는 적이 없었던 한겨울은 어떠했겠는가. 30리 들길과 산길을 걸어야 하는 등굣길의 고통이야 말하여 무엇 하리오. 얄팍한 고무신발의 밑창은 닳아 반들거리고, 가끔은 찢어져 너덜거리기도 했다. 얼음으로 판장 박힌 길에 나서자마자 앞·뒤·옆으로 곡예를 하거나 넘어지고 구르기 일쑤. 유도의 낙법(落法)은 그 시절 자연적으로 체득한 생존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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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들의 환성

 그러니 검은 때가 거북이 등처럼 더껑이 진 손등은 추위로 갈라져 늘 피가 비쳐 있고, 구멍 뚫린 장갑 밖으로 삐져나온 손가락들은 늘 쓰리고 아렸다. 자상하신 아버지는 발에 새끼를 둘둘 말아 ‘천연 아이젠’을 해주시곤 하셨지만, 성황당 재빽이[‘산등성이’의 충청도 사투리] 초입에서 다 벗겨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아이들은 구르고 자빠지며 시퍼렇게 질린 채로 요즘 아이들 ‘용평 스키장에서 미끄럼을 타듯’ 학교엘 오고 갔다. 땀과 눈에 절었다가 다시 추위에 얼어 서걱거리는 솜바지 저고리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개탄의 눈물 나는 열기 속에 두어 시간 수업이 지나서야 참새 같은 우리들의 몸은 녹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은 얼음물로 흥건하고, 얼었다 녹은 손발은 간지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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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그 시절 누군들 추위와 배고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랴. 그래서 하얀 눈은 아련한 설렘과 궁핍의 이미지로 나를 들뜨게 만드는 건 아닐까. 밤에 눈이 내리면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스키장 갈 생각에 잠을 못 이루겠지만, 유년기의 상처로 남은 마음의 궁핍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는 연구실에 도달하기까지 그 30분 남짓의 호사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 어쩌면 음력 그믐날 밤 설빔을 안고 잠 못 이루던 그 시절의 흥분이 이랬던가, 잠시 회상해본다.

                           2008. 2. 26. 눈 내린 산길을 걸으며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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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