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12. 4. 16. 18:17

 

 

한국문예연구소 논문집 <<한국문학과 예술>>(9집) 출간!!!


한국문예연구소에서는 반년간 학술지 <<한국문학과 예술>> 9집을 출간했다. 이번 호에는 “1990년대 이후 패러다임과 문학지형의 변화”라는 주제 하에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소설적 형상화」(이경재), 「1990년대 이후 한국 연극의 변화」(백로라), 「윤대녕 소설의 노스탤지어 미학 : <<은어낚시통신>>을 중심으로」(백지혜), 「멜랑콜리 시학」(류신), 「현대시에서의 그로테스크」(이해운), 「이미지에서 서사로, 악몽에서 일상으로-편혜영 소설의 변화와 2010년대 소설의 향방-」(서영인) 등 6편의 특집논문과 1편의 일반논문[「조선조 文宣王樂章 연구」/조규익]을 실었고, 「중국 석학이 바라 본 지난날의 우리 모습-<<해동삼유록>>(위욱승 지음)을 읽고-」(소재영), 「난해한 선천역학의 닫힌 문 열기-<<소강절의 선천역학(고회민 저/곽신환 옮김)>>을 읽고-」(조희영), 「한 식민지 엘리트 군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경천아일록>>(김경천 지음/김병학 옮김)을 읽고-」(김기철), 「발로 쓰는 학문태도의 정수-<<동아시아 문화 교류론>>(소재영 지음)을 읽고-」(김태준), 「사행록 텍스트 다양하게 곱씹어보기-<<조선시대 사행록의 텍스트와 콘텍스트>>(정영문 지음)를 읽고-」(한태문) 등 5편의 서평과 자료 및 자료해제[「가사로 풀어낸 조선왕조의 이면사-박순호 본 <한양가(1)> 소개-」]를 실었다. 지금까지 <<한국문학과 예술>>에는 국내외 석학들에 의해 작성된 해당분야의 주목할 만한 논문들과 서평들, 해제들이 실림으로써 한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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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8. 23. 16:44
조선일보 기사보기


30년대 강제이주 이후 고려극장에서 공연한 한글대본 200여편 발굴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 일제 강점기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한인들이 고향 땅을 그리며 무대에 올린 우리 고전들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국립 고려극장이 지난 80년간 우리 말로 무대에 올린 연극 대본 200여편과 공연 일정이 공개됐다. 한글로 쓰인 이 연극 대본 가운데는 우리 학계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우리 문학·연극사 연구에 획기적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극장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곳이다. 조규익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장은 최근 알마티 고려극장을 방문, 극장 설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 대본들을 정리·발간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고려극장은 알마티로 옮겨온 뒤, 한인과 러시아 극작가들의 창작 희곡·번역 희곡 등 200여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려 왔다. 조 소장이 공개한 대본 목록에는 우리 고전과 역사 인물을 각색한 작품들이 가장 많았다. 《토끼전》(1959) 《장한몽》(1935) 《흥부와 놀부》(1946)와 김두칠의 《논개》(1962), 정동혁의 《온달전》(1972) 등이 대표적이다.


▲ 1956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올린 연극〈흥부와 놀부〉. 가운데 담뱃대를 들고선 이가 놀부 역을 맡은 인민배우 리 니꼴라이./최 아리따·김병학 제공

특히 1942년 태장춘(1911~1960)이 쓰고 공연한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전투의 주역이자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우상인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홍범도 장군은 만년에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수위를 지내는 등 곤궁한 생활을 하다 1943년 세상을 떴다. 스탈린 치하인 1953년 셰익스피어의 고전 《오셀로》를 무대에 올린 것도 눈길을 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고리키의 《사람들》(1940)과 고골리의 《검찰관》(1952)과 함께 이념극으로 보이는 《동쪽의 빨치산》(1934) 《38선 이남》(1950) 《모란봉》(1962) 등도 무대에 올렸다.

고려극장은 한인 극작가·연출가들의 산실(産室)이었다. 그 가운데 태장춘은 《밭두렁》(1934), 《신 철산》(1935), 《노예들》(1937), 《행복한 사람들》(1938), 《생의 흐름》(1945), 《흥부와 놀부》, 《해방된 땅에서》(1948), 《노예들》(1948) 등 거의 해마다 신작을 발표한 고려극장의 주요 작가였다. 문세준·연선용·김기철·채영·이정림·김해운·이길수·최길춘·한진·최영근 등도 우리 말로 대본을 쓰고 공연한 예술가들이다. 조규익 소장은 "고려극장은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매년 우리 말로 연극 공연을 올려 온 유일한 해외단체"라면서 "이들이 올린 연극 대본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들이나 고려인들의 삶을 다룬 역사적 기록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고에 보관 중인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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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8. 9. 17:18

바스러져 가는 고려인들의 목소리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공연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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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의 외관> 

‘탈식민(脫植民)’이 시대의 핵심적인 코드로 정착된 지금, 새삼 민족 정체성을 운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디아스포라(diaspora ; 離散)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아직도 그것은 절실한 문제다. 이산의 시련 속에서 우리의 민족문화나 민족정신의 현장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분리되어 왔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고 있는 중심부에서 살아있는 민족정신의 맥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제나 구소련의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물리적 디아스포라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정신적 방랑 혹은 방향성 상실의 관념적 디아스포라 시대다. 우리에게 탈식민이 요원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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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는 고려극장 중앙무대, 아래는 객석>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짐짝처럼 실려가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다. 그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카자흐스탄에만 10여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 고려인들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 보존의 핵심 기지 역할을 해온 고려극장. 1932년에 설립되었으니, 올해로 무려 77년 고난의 역사를 장하게 견뎌온 고려극장이다. 지금 이곳에서 한국 근현대사 혹은 민족정신사의 ‘노다지’가 썩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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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창고>

고려극장에서는 1932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연극이 공연되었다. 단순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놀이’로서의 연극이 아니라,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ㆍ「심청전」ㆍ「홍길동전」ㆍ「흥부전」같은 우리 고전들의 수용을 통해 민족정신을 환기시켜온 고려인들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런 연극을 통해 수시로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고자 했다. 구소련 시절 ‘대러시아’의 구호 아래 강요된 동화정책으로 고려인들의 정체성은 크게 붕괴되었고, 구소련 붕괴 이후 이 지역에서 불고 있는 민족주의의 바람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려인의 문화를 위축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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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대본들과 대본 모습>

이제 고려 말을 구사하는 몇몇 고려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 만한 한 가닥 정신적인 끈마저 놓게 될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고려인들은 ‘아무데도 쓸 일이 없는’ 고려 말을 용케도 유지해왔다. 그런 고려 말을 재료로 문학작품을 쓰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며, 연극도 상연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고려 말은 임종을 앞둔 환자의 형국으로 변했다. 고려말로 연극을 공연할 배우도 없고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관객도 없는 현실에서 고려말 연극은 존속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 끈을 찾아낼 수 있는가. 77년간 이어온 고려극장의 찬란한 전통과 역사를 되살리는 것만이 그 유일한 길이다. 연선용, 태장춘, 채영, 김기철 등 당시의 뛰어난 극작 및 연출가로부터 최영근, 송 라브렌지 등 현재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고려인 연극의 맥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는 대본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들에 내재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200건이 훨씬 넘는 대본들에는 연극을 통해서 그들이 절규했던 ‘고려인들의 함성’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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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전 공연 포스터>
 
자신들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활자나 소리 아닌 연극을 매체로 선택했다. 그들이 연극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일제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불굴의 정신이다. 그걸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도 적은 돈이나마 확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고려극장의 보물을 건지기 위한 최소 비용조차 추렴하지 못한다면, 우린 문화국민의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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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7. 14. 09:36

7월 13일, 알마티에서 처음으로 맞는 월요일이자 고려극장 가는 날. 새색시마냥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영근 문예부장의 차를 타고 공항 가는 길로 나가다가 시가지 외곽에서 빠졌다. 상처투성이의 길을 숨차게 돌고 돌자 아담한 단층의 고려극장이 나타났다. 그동안 걸어온 80년 영욕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장부 이 류보위 극장장은 예의 그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준다. 극장장의 방에서 간결하게 의전 절차(?)가 끝난 뒤 나와 최영근 부장이 찾은 자료실. 그곳엔 먼지와 시간에 절고 절은 대본들이 쌓여 있었다.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필체로 쓰인 대본들이 눈물겨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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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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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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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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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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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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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

10여 만 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구소련 중앙아시아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역.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 이후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고려극장은 그 중심이었다.

 일제 통치 하의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 지사들과 고려인들이 우리 문화와 민족 전통을 유지⋅보존하겠다는 의지로 설립한 기관이 바로 1932년에 설립된 고려극장이다. “1932년 이후 극장이 걸어온 운명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려극장-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999)는 전 극장장 김 겐나지의 말에서도 암시되는 것처럼 고려극장의 문화적ㆍ역사적 의미는 쉽게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최근 발행된 『고려극장의 역사』에도 고려극장의 의미나 사명은 다음과 같이 천명되어 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하게 된 고려극장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족 유산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이며 자랑할 만한 전문적인 문화 발원지로 변모했다. 고려극장의 무대에서 카자흐, 서양, 러시아 극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75년 기간 극장은 수많은 유명한 배우들을 배출했고, 오늘날도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 고려인 문화 발전을 위한 사명을 다하고 있다. <149쪽>

 

창립 이후 고려인ㆍ카자크스탄인들을 비롯한 수백 만 명의 관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수백 편의 연극과 음악회가 열릴 정도로 고려극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한인 극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200여 편의 연극을 통해 고려인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희곡들이 단순히 예술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들은 아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심청전」⋅「홍길동」⋅「흥부전」 등 우리의 고전 등 넓은 내용적 편폭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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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상연된 연극대본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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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연극대본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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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쌓여있는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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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를 정리 중인 최영근 문예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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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포스터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희곡작품들이 정리되지도 못한 채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 인력과 자금이 모자라는 현지에서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없다면, 우리라도 그 자료들의 정리⋅연구⋅출판(보급)에 적극 나서야 한다.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이 지역에서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민족주의’ 성향과 그에 따른 고려인 문화의 위축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나설 필요가 있다.

내가 불원천리 이곳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여행의 중심이자 종착역이다. 먼지투성이의 자료들, 기나긴 연륜 속에서 누렇게 바래고 바스러지는 종이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내게 최영근 부장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다. “이 분들은 그동안 왜 한 번도 정리를 하지 않았까.”라는 힐난을 내 표정에서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장춘, 연성용, 김기철, 채영, 맹동욱, 최영근 등 쟁쟁한 고려인 문사들의 손때가 묻은 대본들. 그것들은 역사의 굽이굽이 고난을 극복해온 ‘고려인의 함성’으로 다가왔다. 나는 과연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단장시켜 사람들 앞에 내놓을 것인가.

  ***

천산의 만년설 위로 해가 지니 종이 썩는 냄새에 찌든 내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다 해도 최영근 부장과 이 스타니슬라브 시인을 마주하고 한 잔 할 시간마저 없을 소냐? 자, 누군가의 성공을 축하하고, 무언가를 위하여 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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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야외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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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의 산천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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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무렵의 천산, 그 만년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