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2. 14. 18:10

속물적 포퓰리스트 혹은 어설픈 마키아벨리스트들의 난장판

 

 

 

 

촛불과 태극기의 행렬이 주말마다 도심에서 경찰의 차벽을 사이에 두고 세를 겨룬다. 흡사 아프리카 늪지대의 하마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서로 더 크게 입을 벌려가며 우열을 겨루는 형국이다. 현직 대통령을 광장의 단두대에 매달고 그 앞에서 벌이는 들판의 싸움이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살벌한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대통령 되어 보겠노라고 나선 몇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 주변에 죽 늘어선 대열이 참으로 가관이다. 그 가운데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람들의 눈도장을 찍으려는 인물들은 더더욱 볼만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광장에 모인 군중의 정치적 위임을 받은 자들임을 처음부터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권력만 뺏으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바보들의 행진을 자랑스레 벌이고 있지 않은가. 국민을 대신하여 복잡한 나랏일을 처리하는 것이 자신들 본연의 업무임을 잊어 버렸으니, 그들에게 정치인으로서의 지혜나 자격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군중의 대열에 파묻혀 들어가 자랑스레 사진들을 찍어 뿌리기 바쁘다. 흡사 나는 바보야!’ 희죽이 웃으며, 바보짓을 하는 그들이 참으로 가관이어서 슬프다.

 

그들은 국민이 거리로 나서기 전에 자신들에게 부여된 의무를 제대로 했어야 하고, 거리로 나서려는 국민들을 설득하고 다독였어야 한다. 국민이 나서기 전에 국민을 안심시키고 자신들이 싸움판에 들어가 얻어 맞으면서라도 잘못들을 바로잡았어야 한다. 사실 지금 대통령과 여당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야당의원이라고 나라를 난장판 만들어도 되는면허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흡사 자신들이 잘 해서 국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기라도 한 듯, 거리의 민중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저들을 보라. 심지어 서투른 선동술을 구사하며 그들을 차가운 광장으로 불러내기까지 한다. 사실 그들이 제대로바보이기나 하다면 나라를 위해서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들은 교활하기까지 한' 바보들이라서 나라에 비극적이다. 그들은 왜 그럴까. 아마 그들의 눈엔 사람들이 모두 표로 보일 것이다. 언론에 자기 얼굴 비치는 데만 신경을 쓰는 그들을 보라. 추운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과 어깨동무하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놓고, 며칠 후의 여론조사 수치에만 신경을 쓰는 자들이 이 땅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애당초 이들의 관심과 목표는 국사를 잘 다루는 데있지 않았다. 대통령과 여당이 죽을 쑬수록 이들은 쾌재를 부른다. 국민들이 힘들어 불만이 쌓일수록 이들의 얼굴엔 화색이 돈다. 그 엄청난 권력이 아른아른 손에 잡힐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반대와 비난의 목청만 높인다. 그것을 선명성혹은 야당 기질이라 착각하는 그들이다.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식민주의자들이 조선의 당파싸움을 부각시켜 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우리 민족에게 심어줄 패배주의의 근거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저급한 생각을 '속물적 포퓰리즘(populism)'이나  어설픈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으로 합리화 하기도 한다. 이미 많은 지적들이 있어온 우리 정치인들의 속물적 성향은 너무 자명하여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후자의 성향에 대해서는 약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래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지배자의 여우와 같은 간사한 책략/사자와 같은 힘은 그 나름의 대의명분을 지니고 있어, 지금 우리 정치인들의 안목 없음과는 주소가 다르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에 휘황한 로마문명의 힘을 불러 일으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 마키아벨리의 급이 높은계산이었다. 경우에 따라 도덕이나 정의보다 개혁이 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야 가능한 일. 그래서 지금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를 마키아벨리즘으로 보는 것은 마키아벨리즘을 우롱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스트가 본다면, 우리 정치인들의 저급함에 깜짝 놀라지 않을까.

 

***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통령과 함께 어리석고 교활한 정치인들을 한꺼번에 바꿔버리기 위해서는 촛불이나 태극기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민심의 방향을 제시하는  집단지성은 감성보다 냉철한 이성을 토대로 보다 굳건해질 수 있다. 냉철한 이성으로 방황하는 정치인들을 다그쳐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인들에게 제대로 된 정치를 가르쳐 본 적도 요구해 본 적도 없다. 지금 촛불을 끄고 태극기를 접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2. 28. 13:36

 

 

역사상 우리의 중세를 지배한 사상은 유학이었고, 그 이데올로기는 통치의 이론적 근간이 되어 왔다. ‘염치란 현대의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들 가운데 하나인데, 그 역시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지금 대부분의 국어사전이나 한자사전들에는 남에게 신세(身世)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상태(狀態)” 혹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등으로 설명 되어 있으나, 한자를 그대로 풀면 부끄러움을 살핌부끄러움을 행동이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마음이 바로 염치다. 그래서 염치는 예의(禮義)’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남들의 사회적 행동을 평가하거나 헤아릴 때 염치의 유무(有無)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관계에서 작동하는 가치기준이 바로 염치임에 틀림없다. 누구도 혼자 있는 상황에서 염치를 거론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처럼 염치를 중시하고, 염치 때문에 쭈뼛거리게 되는 집단정서를 갖고 있는 민족도 많지 않을 것이다. ‘찬물 마시고 이빨 쑤시면서도 배고픔의 기색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자존심 강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염치는 집단적 수퍼에고(super ego)의 가장 확실한 발현태(發顯態)라 할 수 있다.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누항사(陋巷詞>의 한 부분.

 

가뭄이 몹시 심하여 농사철 다 늦은 때에

서쪽 두둑 높은 논에 잠깐 갠 지나가는 비에

길 위에 흐르는 물을 반쯤 대어 놓고는

소 한 번 빌려 주마 하고 엉성하게 하는 말을 듣고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 없는 저녁에 허위허위 달려가서

굳게 닫은 문 밖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에헴' 하는 인기척을 꽤 오래도록 한 후에

, 거기 누구신가?”<*농민의 물음>

염치없는 저올시다.”<*박인로의 대답>

초경(初更)도 거의 다 되었는데

무슨 일로 와 계신고?”<*농민의 물음>

해마다 이러하기 구차한 줄 알지마는

소 없는 궁가(窮家)에 근심 많아 왔삽노라.”<*박인로의 대답>

 

 

양반 박인로가 소 한 마리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부자 농민에게 쭈뼛거리며 찾아가 수모를 당하는 광경이다. 의 핵심은 염치. 염치가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염치를 잠시 접어둔 정황이 드러난다. 생각해보라. 어엿한 양반으로서 임진왜란에 수군의 하급 장교로까지 참전해가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지도적 신분계층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그토록 중시했으며, 같은 작품에서 일노장수(一奴長鬚: 노비의 길게 기른 수염)는 노주분(奴主分: 노비와 주인의 명분)을 잊었다고 변화된 세태를 탄식하기도 한 그였다. 그런 그가 자신과 가족들의 배고픔 때문에 염치 불고(不顧)하고 상민에게 찾아가 구차한 말을 건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당한 그는 집에 돌아와 밤새 잠 못 이루며 번민하던 끝에 결국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이념적 허울 속으로 들어가 잠시 잃어버렸던 염치를 찾아내고 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 땅의 지도층이 추상같이 지키려던 염치였다. 구복(口腹)의 억압을 뛰어넘어 지키고자 했던 자존심의 문고리가 바로 염치였다.

 

중세시대 이래 우리는 늘 염치를 강조해왔다. 비록 쌀독이 비어도 염치를 잃어선 안 된다고 역설해온 것이 우리 민족이었다. 그 염치는 체면이고 자존심이다. 굶어죽을지언정 돼지우리 속의 밥알을 줍지는 않겠다는 오연한 패기가 바로 염치다. 허균(許筠)이 말한 도문대작(屠門大嚼)’ 즉 돈이 없어 푸줏간을 그냥 지나치면서도 크게 입 벌려 씹는 시늉을 하는 행위는 고기를 먹고픈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구차한 말을 건네지 않고 내면의 욕망을 억누르는 염치의 극적인 표출이었다.

 

그동안 세월은 참 많이도 변했다. 어느 사이 염치란 무능이나 무력함을 합리화하는 값싼 수단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다수가 되었다. 99원 갖고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1원을 빼앗아 더 부유하게 되는 사람을 치열한 승자로 선망하는 사회, 달랑 몇 푼 되는 재산이나마 덜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을 비아냥 거리는 시대, 배고프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좀 더 가진 사람을 배 아파하며 욕심 부리는 시대가 되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예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재물까지 탐하는 게 일상이 된 것이다. 반대로 재물을 가진 사람들은 그 재물을 이용하여 명예까지 확보하려 애쓴다.

 

권력을 지닌 자는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앗아내려 하니, 공동체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로 이보다 더 악독한 게 어디 있으랴! 그런 비정(秕政)들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음에도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며 오욕(汚辱)의 삶을 부지하고자 하니, 이런 통치자의 몰염치한 사례가 과거 역사의 어느 부분에 기록되어 있단 말인가. 탄핵이네 특검이네 복잡한 악다구니 속에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한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염치만 되찾는다면, 벌써 해결되었을 사건이 아닌가. 염치 앞에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던 조상들의 오연한 기개만 떠올려도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 아닌가. 눈꼽만큼의 의혹에도 내려와야 할 자리이거늘, 이미 벌여놓은 천하공지(天下共知)의 사건들 앞에 자기변호의 둔사(遁辭)나 농하고 있는 몰염치는 과연 무어란 말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4. 15. 14:21

 

 


영화 <내부자들>의 포스터

 

 

 


논설주간 이강희

 

 

 

내부자들의 파티

 

 

 

모처럼 한 건 올렸다. 은근히 보고팠던 영화 <내부자들>친견한 것이다. 비록 답답한 아파트 거실에서이지만, 모처럼 엔딩 타이틀이 뜰 때까지 졸지 않았다. 배우들의 미친 연기, 충격적인 장면들이 내내 나를 쫄게했다. ,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배우들을 갖고 있었던가? 도끼로 찍히고 톱에 썰려 나뒹구는 손목, 튀는 피, 빙빙 돌려 뽑은 의수(義手)로 상대의 눈앞에 종주먹을 들이대는 안상구(이병헌 분) 눈동자의 살기, 뜨거운 피를 얼려버리는 저음의 협박, 갈가리 찢기는 영혼...상대 심장의 생명 에너지를 느글느글 뽑아가는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분)는 아예 사이킥 뱀파이어(Psychic Vampire)’였다!

 

그러나 스토리는 뻔했다. 재벌정치인법조인언론인정치깡패 등등, 참으로 휘황찬란하지만 식상한 스타일의 내부자들이었다. 은밀하게 우리나라를 휘어잡고 있는 그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이는 배신과 복수극이 기똥차게리얼해서 오히려 미학적었다. 사실 미학이 아름다움의 원리만은 아니다. 아름다움을 뒤틀면 추함이 된다. ‘추한 아름다움추미(醜美)’가 엄연한 미적 범주의 하나로 정착된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부와 권력으로 옹골차게 짜인 최상층부 리그의 행태가 늘 궁금했다. 세계는 세계 나름대로, 나라는 나라 나름대로, 대학은 대학 나름대로 내부자들의 리그가 움직여 나가는 건 아닐까? 궁금증은 상상의 원동력. 상상력은 그럴 듯한 가설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늘 그러리란 가설을 내가 만들어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법과 정의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것이고, 세상을 돌리는 힘은 으레 내부자들의 스크럼에서 나오는 법. 제법 멋진 가설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연구실에 처박혀 읽히지 않는 논문이나 줄창써온 내겐 식은 죽 먹기라고나 할까.

 

그럴 듯한 글줄로 장삼이사들의 여론을 움직이고 뒷거래의 판을 짜는 논설주간, 뒷거래의 주역인 유력 대통령 후보와 재벌 회장. 이들이 만든 리그에 참여하려 애쓰다 버려지는 정치깡패와 족보 없는검사의 복수극. 이 영화를 보고나서야 내 가설이 그럴 듯했음을 알았다. 물론 내가 논설주간이나 유력 대통령 후보, 혹은 재벌회장 중의 하나가 되거나, 하다못해 족보 없는 검사 우장훈 아니면 정치깡패 안상구라도 되어야 내 논문의 그 가설은 완벽한 결론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 텐데. 멋진 원작, 멋진 각색, 멋진 캐스팅, 멋진 연기... 이제 바야흐로 더러운 세상비판도 예술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

 

덤으로, 우스갯소리 하나.

 

주고받는 비자금을 매개로 권력을 설계하며 검은 거래의 현장에 모인 그들은 늘 애국과 정의를 농하곤 했다.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어버리는 복수극 또한 또 다른 정의를 그들 식으로 패러프레이즈(paraphrase)한 데 지나지 않았다. 검은 거래에 복수가 따르는 것은 희랍 시대 이래 연극의 정석 아닌가. 그러니 그런 것들 쯤이야 내 논문 속에서는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에 불과할 뿐이다.

 

그보다 내 눈을 비비게 한 건 그들의 파티 현장이었다. 술상 뒤편으로 발가벗고 늘어선 팔등신 미녀들.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채 그녀들을 골라 앉힌 뒤 곧추세운 거시기로 폭탄주를 제조하며 미쳐가는 그들. , 두어 해 전 법무부 고위관리 아무개로 인해 세상에 까발려진 성 접대의 현장이 바로 그거였다! 벌거벗은 그들 사이사이에 발가벗은 여인들을 하나씩 끼워 앉히고 술을 마시며 고담준론(?)을 토해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옛날 책에 나오는 좌우보처(左右補處)’를 떠올렸으니, 나도 참 못 말리는 거시기임에 틀림없으리라.

 

성종 때 대학자 성현(成俔)<<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일화다.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가 고참 관리들을 위해 열곤 했던 신고식이 허참면신지례(許參免新之禮)’였다. 그 중 신참에 대한 행패로 치면 예문관(藝文館)의 파티가 가장 심했다. 처음으로 직위를 받고 베푸는 연석을 허참(許參), 50일이 지나 베푸는 연석을 면신(免新), 그 중간에 베푸는 연석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했다. 춘추관과 여러 겸관(兼官)들을 청해 연석을 즐기고 한밤중에 파한 뒤 손님들이 돌아가면 그 때서야 본 공연(?)은 시작되었다. ‘선생들을 맞아 베푸는 연석인즉 상관장(上官長)이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 모든 관리들은 각각 기생 하나씩 끼고 앉는데, 그걸 좌우보처라 한다는 것. 원래 사찰의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 삼존도에서 아미타불의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배치되는 그것이 좌우보처였다. 그들만의 파티에서 좌우보처가 이루어지고 난 뒤 아래로부터 위로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던 모양이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을 부르는데, 매미 울음소리 같이 맑은 노래 사이에 개구리 들끓는 듯한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술에 취한 뒤 무슨 난장판이 벌어졌을지는 독자 여러분이 상상하실 일이다. 묘하게도 그 좌우보처의 광경이 영화 속 파티와 오버랩되었으니, ‘내부자들의 파티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들만의 일상아닐까.

 

 


대통령 후보 장필우

 

 

 

검사 우장훈과 정치깡패 안상구

 

 

 


안상구

 

*이 글은 <<인문시보>> 12호(숭실대학교 인문대학/2016. 4. 15.)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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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검증에 간판 중시 ‘지식범죄의 온상’ 돼버려

최근 며칠째 가짜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은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지식사회의 아름답지 못한 이면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일종의 ‘테러’다. 피터 드러커의 설명처럼 지식 노동자가 권력을 갖는 사회가 지식사회라면 이 땅의 총체적 부패는 지식인들로부터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추악한 테러의 무대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넘어 러시아와 필리핀까지 번졌으니 다시 어느 나라가 이 행각의 새로운 현장으로 연루될지 자못 불안하기만 하다. 한국판 지식 범죄의 국제화라고나 할까. 얼마 전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우리 학자들의 표절사건, 온 국민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황우석 사건’ 등과 함께 이번의 가짜박사 사건으로 우리의 지식사회는 결정적인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국가 발전을 선도해야 할 지식사회의 휘청거림과 무관치 않다.
지금 우리는 가짜박사 학위를 남발한 외국의 대학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그런 대학들에서 사온 가짜 학위로 학술진흥재단에 학위등록을 하고, 어엿한 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올랐으니 문제의 근원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 옳다. 가짜박사를 교수로 채용할 정도로 진짜와 가짜도 걸러내지 못한 수준이 우리 대학들의 한심한 실태다.
 
이런 현상은 지식사회의 마비된 양식, 국가의 학문정책 부재, 대학개혁의 실패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은 개혁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치장에만 주력할 뿐 정작 개혁해야 할 본질적 대상은 초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의 목적은 대학정신의 정립에 두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의 신설이나 보완이 그 구체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박사학위 보유자 비율로 선두권에 서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없거나 부실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필연적으로 저질박사들의 온상 혹은 가짜박사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보여주는 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식정보가 널려 있고 표절행위 또한 여전한데, 오히려 논문의 심사단계는 전보다 간소화되고 있다. 적으면 한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의 심사가 박사논문 검증의 전부다. 박사 학위의 양산체제에 온정주의까지 가세하여, 저질논문을 걸러내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 기업들은 대학의 박사학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관들은 반드시 박사학위를 요구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연구업적이 뛰어나도 박사학위가 없으면 아예 서류조차 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채용 과정에서는 가짜박사를 걸러내지 못한다.

구태의연한 검증 시스템과 지식사회의 낮은 윤리의식, 실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인력 수요자들의 무감각이 지속되는 한 가짜박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짜박사들은 죽은 지식사회에 기생하기 마련이다. 지식사회의 핵심인 교수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과 성실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발표된 서울대의 교수윤리헌장은 늦었지만 적절하다. 지식사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진리다. <2006. 3. 2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