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소식2012. 2. 23. 17:30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삶에 관한 사진자료집 출간!!!

 

  <발간된 책>

  <우즈벡 지진허 마을의 백산옥 할머니(1909년생)>

  <우즈벡의 프라우다 농장 학교 교사들(1960년대)>

<평양에서.  오른쪽 첫번째가 최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오른쪽 네번째 인물이 김일성(1946년)>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 있었네!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2
김 이그나트, 김 블라지미르, 조규익 엮음
도서출판 지식과교양, 2012. 3./ 15,000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지나온 세월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자료집이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2’로 출간되었다. 숭실대 조규익 교수(한국문예연구소장/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지식인 김 이그나트 및 김 블라지미르 등과 함께 중앙아시아 고려인들[보통사람들로부터 유명인들까지]의 사진들을 수집하여 자료집으로 엮었다. 그동안 이 지역 고려인들에 관한 문서자료들은 꽤 출간되었지만, 두어 건의 작품사진집 이외의 사진자료집이 학술자료총서의 형태로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리말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조규익
  1부 : 고려인들의 삶
  2부 : 가르침과 배움
  3부 : 일과 일터
  4부 : 고려인 가족
  5부 : 풍속[돌⋅결혼⋅회갑⋅장례]
  6부 : 나라 밖의 북한인들, 북한의 고려인들
  발문 : 우리는 돌아간다-김 블라지미르 씀/오두영 역


 1937년 강제이주 시기[몇몇 경우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자료도 있다]부터 최근까지 고려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들을 선별했다는 점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 관한 어떤 연구서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자료들을 통해 고려인 연구자들이나 그간 고려인들의 삶에 대하여 말로만 들어왔던 일반인들은 고려인들의 생활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편자들은 그간 몇 년 동안 현지의 고려인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그간에 겪은 고초를 들었고, 그들의 선조와 자신들이 남긴 기록들을 수집했으며, 미래의 소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은 편자인 조규익 교수가 그간 진행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자료정리 작업과 연구 작업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확보한 사진자료만 1천 건이 넘기 때문에 기회 닿는 대로 나머지 사진들을 계속 출간하겠다는 것이 조 교수의 생각이다.


 구소련 체제 아래 우리와 단절의 역사를 지속해온 고려인이 우리 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지도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간 우리는 그들을 우리 민족의 일원이 아닌 ‘고려인’으로 타자화(他者化)하는, 잘못을 범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야 하며, 그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그들과 우리가 정신적으로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학술적 차원의 해석이나 연구보다 사진이나 기록물들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을 우선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 교수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조 교수가 머리말에서 강조한 것처럼 ‘지워진 민족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며, 국민적 관심 속에 이런 작업들의 의미와 가치가 강조되어야 하리라 본다. 강호제현의 일독을 기대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9. 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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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계 니콜라이’의 21세기 민족운동


알마티에서 만난 50대의 계(桂) 니콜라이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뚜렷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한일강제합방 뒤 북간도로 망명하여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계봉우(桂奉瑀·1880∼1959)의 손자다.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회 회장인 그가 보기에 중앙아시아의 한민족 공동체는 이미 와해됐다고 할 만큼 이 지역 고려인에게 민족정신의 상실은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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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농장에 서 있는 니꼴라이 선생>

한민족의 표지(標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이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을 잃은 세대 사이에 역사나 문화가 이어질 리 없다. 말과 역사를 잃은 경우, 본질적인 의미에서 민족공동체의 일원일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말과 글이 민족 정체성 회복의 관건이라는 계 니콜라이의 관점은 해외동포의 교육이나 계몽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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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백규와 니꼴라이 선생>

많은 고려인처럼 ‘편하게 잘 먹고 잘살아 오다가’ 나이 50이 넘어서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우쳤다는 그는 지배자 일본에 붙어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쳐 투쟁한 독립투사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관점을 바꿨다고 했다. 요즈음도 한국어교육원에 나가 우리말을 익히고 있을 만큼 말과 글에 거는 그의 기대는 크다. 무엇보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박봉의 대학교수 직을 접고 농장을 경영하며 고려인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보급하는 일에 나선 그의 삶은 계몽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조부의 행적과 흡사하다.

고려인은 사실 오랫동안 가족과 소비에트 국가만을 위해 일했다. 모국어 학교의 폐쇄를 강요당하면서도 변변히 저항 한번 못했다. 모국어 극장이나 신문이 지리멸렬해지는데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는 것이 고려인이다. 모국어가 탄압받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상황에서 그 언어로 쓰인 모국의 역사를 전승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활동 모두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언어의 상실과 함께 사실상 민족운동은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고려인 단체의 현실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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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들의 미래에 대하여 담론하고 있는 세 사람. 좌로부터 김병학 시인, 백규, 니꼴라이 선생>

그는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고 외부의 도전에 너무 쉽게 자신을 접어온 원인으로 ‘노예근성’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잘 먹고 잘살아 온’ 그간의 삶은 철저한 순응의 역사였다. 구소련의 동화정책에 맞서지는 못했다 해도 최소한 민족의 정신을 지키려는 가정 단위의 개별적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았느냐는 그의 주장을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역경 속에서도 민족공동체의 미래를 내다보며 현실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선각자의 고난을 그는 매 순간 떠올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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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책에 서명하고 있는 니꼴라이 선생>

이런 일에 착수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새로운 한글 신문을 제작하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우리 민족의 언어 문화 관습 정보 등 모든 것을 묶어 무가지(無價紙)로 배포하겠다고 한다. 그는 5, 6년간만 고려인 가정에서 우리의 말이나 역사에 관한 담론이 오갈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민족에 대한 인식이나 관점도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잘 먹고 잘사는 차원을 벗어나 가치 있는 삶을 모색할 때임을 강조하는 그가 있으므로 고려인 사회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8. 9. 17:18

바스러져 가는 고려인들의 목소리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공연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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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의 외관> 

‘탈식민(脫植民)’이 시대의 핵심적인 코드로 정착된 지금, 새삼 민족 정체성을 운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디아스포라(diaspora ; 離散)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아직도 그것은 절실한 문제다. 이산의 시련 속에서 우리의 민족문화나 민족정신의 현장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분리되어 왔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고 있는 중심부에서 살아있는 민족정신의 맥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제나 구소련의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물리적 디아스포라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정신적 방랑 혹은 방향성 상실의 관념적 디아스포라 시대다. 우리에게 탈식민이 요원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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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는 고려극장 중앙무대, 아래는 객석>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짐짝처럼 실려가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다. 그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카자흐스탄에만 10여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 고려인들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 보존의 핵심 기지 역할을 해온 고려극장. 1932년에 설립되었으니, 올해로 무려 77년 고난의 역사를 장하게 견뎌온 고려극장이다. 지금 이곳에서 한국 근현대사 혹은 민족정신사의 ‘노다지’가 썩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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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창고>

고려극장에서는 1932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연극이 공연되었다. 단순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놀이’로서의 연극이 아니라,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ㆍ「심청전」ㆍ「홍길동전」ㆍ「흥부전」같은 우리 고전들의 수용을 통해 민족정신을 환기시켜온 고려인들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런 연극을 통해 수시로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고자 했다. 구소련 시절 ‘대러시아’의 구호 아래 강요된 동화정책으로 고려인들의 정체성은 크게 붕괴되었고, 구소련 붕괴 이후 이 지역에서 불고 있는 민족주의의 바람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려인의 문화를 위축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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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대본들과 대본 모습>

이제 고려 말을 구사하는 몇몇 고려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 만한 한 가닥 정신적인 끈마저 놓게 될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고려인들은 ‘아무데도 쓸 일이 없는’ 고려 말을 용케도 유지해왔다. 그런 고려 말을 재료로 문학작품을 쓰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며, 연극도 상연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고려 말은 임종을 앞둔 환자의 형국으로 변했다. 고려말로 연극을 공연할 배우도 없고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관객도 없는 현실에서 고려말 연극은 존속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 끈을 찾아낼 수 있는가. 77년간 이어온 고려극장의 찬란한 전통과 역사를 되살리는 것만이 그 유일한 길이다. 연선용, 태장춘, 채영, 김기철 등 당시의 뛰어난 극작 및 연출가로부터 최영근, 송 라브렌지 등 현재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고려인 연극의 맥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는 대본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들에 내재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200건이 훨씬 넘는 대본들에는 연극을 통해서 그들이 절규했던 ‘고려인들의 함성’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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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전 공연 포스터>
 
자신들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활자나 소리 아닌 연극을 매체로 선택했다. 그들이 연극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일제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불굴의 정신이다. 그걸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도 적은 돈이나마 확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고려극장의 보물을 건지기 위한 최소 비용조차 추렴하지 못한다면, 우린 문화국민의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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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7. 12. 20:34
 

알마티 통신 1 : 알마티의 매연과 천산의 만년설


2009년 7월 11일. 알마티에서의 첫날. 어딜 가나 시내에는 푸른 숲이 가득 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수백 년의 연륜을 족히 드러내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보고 깨끗한 공기를 상상했으나, 시가지에 깔린 공기는 매연에 쩔어 있었다. 들숨 가득 탁한 공기가 폐부를 찔러댔다. 그나마 고개를 들 때마다 압도해오는 천산의 만년설 덕분에 숨 막히는 매연으로부터 겨우 놓여날 수 있었다. 뜨람바이를 타도, 버스를 타도, 택시를 타도, 모든 공간엔 여지없이 매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스팔트에서 튀어오르는 열기와 매연이 어우러져 채워진 욕조를 유영하듯 힘겹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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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의 도로와 멀리 보이는 천산의 만년설>

김병학 시인의 안내로 햇살에 달구어진 시내를 책 읽듯 훑어나갔다. 카자흐스탄 첫 방문, 알마티 첫 방문. 모든 것들이 생소하면서도 신기했다. 구소련의 문화적 동질성에 갇혀 있었건만, 러시아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게 신기했다. 걷는 동안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찾아 이곳 사람들의 경건한 신심을 확인했고, 시장을 찾아 삶의 박동도 느꼈다. 시내 한복판에 ‘푸른시장(질료녜 바자르)’이란 이름의 재래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81세의 고려인 서올랴 할머니를 만났다. 아직도 고운 자태를 잃지 않은 고려인 할망은 올망졸망 찬거리들과 각종 양념들을 늘어놓고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앉아 있었다. ‘장사가 안 된다’고 혀를 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표정에 적이 안도가 되었다. 심심하던 차였는가 은근히 잡으려는 할망을 뒤로 하고 2․8공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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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시 러시아 정교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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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 제대 뒤의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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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질료녜 바자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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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료녜 바자르의 서올랴 할머니>

그곳엔 거대한 조형물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적진을 향해 무기를 들고 돌진하는 군인들이었다. 그 밑의 글자들이 걸작이었다. “위대한 러시아! 모스크바를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뜻의 문구였다. 모스크바를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속뜻일 것이다. 그야말로 구소련의 살기 어린 구호였다. 그 옆쪽에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조형물들이 붙여져 있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용기 있게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영원한 영광 있으라!”는 구호가 보는 이의 내면을 압도해왔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흔히 사용하던 선동의 구호와 문구들을 알마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전쟁기념관을 그득 채우고 있던 선동의 모티프가 이곳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토요일이기 때문일까. 결혼하는 커플들이 많았다. 결혼식을 마친 커플들은 이곳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에 헌화하는 것이 관례란다. 하얀색 예복을 입은 신부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그들이 들고 있는 백합 다발은 순결한 영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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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2-8 공원의 조형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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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의 전통악기 돈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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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악기 박물관의 악사 까를라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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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 앞뜰의 아름다운 신부>
 
러시아 정교회 안에도 결혼식을 마친 커플, 결혼식을 올릴 커플, 그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로 만원이었다. 밀려드는 인파를 피해 찾은 곳은 공원 한 켠의 악기 박물관. 그곳에서 카자흐스탄 민족의 음악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의 비파 비스름한 카자흐스탄 전통악기 돔브라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악기들을 본 다음 문을 나서려는데 우리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참하게 생긴 카자흐스탄 아가씨가 우리를 위해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겠단다. 카자흐스탄 돈 200원을 투자하여 한동안 애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었다. 노래를 끝낸 그녀는 ‘까를라가쉬’라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제비’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피곤하지만, 카자흐스탄과의  의미있는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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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 - 자료2008. 3. 24. 11:13
연합뉴스  관련기사 클릭해서 보기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 교수)가 ‘구소련 연해주 4월 참변 추모제 및 국제 학술발표회’를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갖습니다.


1. 행사의 의의 : 1920년 4월 4일~5일에 걸쳐 연해주에 진출한 일본군에 의해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 특히 주요 한인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어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되었다. 4월 참변 추모행사는 한국과 러시아 양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추모행사로서 양국의 국가 간에 추진되는 역사적 연대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행사이다.

2. 추모제 내용

  1) 한·러 합동 추모제 :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우수리스크 시정부 문화국,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공동주최

     (1)일시 : 2008. 4. 4. 오후 4시

     (2)장소 : 우수리스크 ‘영원의 불꽃’ 광장

  2) 추모 학술대회 :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우수리스크 국립사범대학 공동 주최

     (1)주제 : 구소련 시대 문예활동에 나타난 시대정신과 민족의식

     (2)일시 : 2008. 4. 5.

     (3)장소 : 우수리스크 국립사범대학교

     (4)발표자 및 논제

       ①구소련 러시아인들의 삶과 의식--오.베.린샤(우수리스크 사범대 교수)

       ②구소련 고려인들의 항일투쟁--반병률(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③구소련 고려인 노래의 한국전통민요 수용 양상--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④구소련 고려인의 서사적 형상화-박계주의 경우--곽원석(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연구기획팀장)

       ⑤구소련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의 문화적 교류양상--엔.아.부쩨닌(우수리스크 사범

                                                          대 교수)

       ⑥구소련 고려인 노래의 서정미학--엄경희(숭실대 국문과 교수)

       ⑦구소련 한인 노래의 음악미학--김보희(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국제팀장)

   3)고려인 노래에 대한 강연 및 공연 :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나홋트까 고려인민족문화

     자치회, 빨치산스크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 아리랑 가무단 공동 주최

      (1)일시 : 2008. 4. 6.

      (2)장소 : 나홋트까 고려인 민족자치회회관, 빨치산스크 민족자치회회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