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9. 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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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계 니콜라이’의 21세기 민족운동


알마티에서 만난 50대의 계(桂) 니콜라이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뚜렷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한일강제합방 뒤 북간도로 망명하여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계봉우(桂奉瑀·1880∼1959)의 손자다.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회 회장인 그가 보기에 중앙아시아의 한민족 공동체는 이미 와해됐다고 할 만큼 이 지역 고려인에게 민족정신의 상실은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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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농장에 서 있는 니꼴라이 선생>

한민족의 표지(標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이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을 잃은 세대 사이에 역사나 문화가 이어질 리 없다. 말과 역사를 잃은 경우, 본질적인 의미에서 민족공동체의 일원일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말과 글이 민족 정체성 회복의 관건이라는 계 니콜라이의 관점은 해외동포의 교육이나 계몽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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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백규와 니꼴라이 선생>

많은 고려인처럼 ‘편하게 잘 먹고 잘살아 오다가’ 나이 50이 넘어서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우쳤다는 그는 지배자 일본에 붙어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쳐 투쟁한 독립투사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관점을 바꿨다고 했다. 요즈음도 한국어교육원에 나가 우리말을 익히고 있을 만큼 말과 글에 거는 그의 기대는 크다. 무엇보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박봉의 대학교수 직을 접고 농장을 경영하며 고려인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보급하는 일에 나선 그의 삶은 계몽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조부의 행적과 흡사하다.

고려인은 사실 오랫동안 가족과 소비에트 국가만을 위해 일했다. 모국어 학교의 폐쇄를 강요당하면서도 변변히 저항 한번 못했다. 모국어 극장이나 신문이 지리멸렬해지는데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는 것이 고려인이다. 모국어가 탄압받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상황에서 그 언어로 쓰인 모국의 역사를 전승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활동 모두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언어의 상실과 함께 사실상 민족운동은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고려인 단체의 현실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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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들의 미래에 대하여 담론하고 있는 세 사람. 좌로부터 김병학 시인, 백규, 니꼴라이 선생>

그는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고 외부의 도전에 너무 쉽게 자신을 접어온 원인으로 ‘노예근성’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잘 먹고 잘살아 온’ 그간의 삶은 철저한 순응의 역사였다. 구소련의 동화정책에 맞서지는 못했다 해도 최소한 민족의 정신을 지키려는 가정 단위의 개별적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았느냐는 그의 주장을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역경 속에서도 민족공동체의 미래를 내다보며 현실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선각자의 고난을 그는 매 순간 떠올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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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책에 서명하고 있는 니꼴라이 선생>

이런 일에 착수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새로운 한글 신문을 제작하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우리 민족의 언어 문화 관습 정보 등 모든 것을 묶어 무가지(無價紙)로 배포하겠다고 한다. 그는 5, 6년간만 고려인 가정에서 우리의 말이나 역사에 관한 담론이 오갈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민족에 대한 인식이나 관점도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잘 먹고 잘사는 차원을 벗어나 가치 있는 삶을 모색할 때임을 강조하는 그가 있으므로 고려인 사회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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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8. 9. 17:18

바스러져 가는 고려인들의 목소리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공연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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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의 외관> 

‘탈식민(脫植民)’이 시대의 핵심적인 코드로 정착된 지금, 새삼 민족 정체성을 운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디아스포라(diaspora ; 離散)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아직도 그것은 절실한 문제다. 이산의 시련 속에서 우리의 민족문화나 민족정신의 현장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분리되어 왔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고 있는 중심부에서 살아있는 민족정신의 맥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제나 구소련의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물리적 디아스포라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정신적 방랑 혹은 방향성 상실의 관념적 디아스포라 시대다. 우리에게 탈식민이 요원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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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는 고려극장 중앙무대, 아래는 객석>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짐짝처럼 실려가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다. 그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카자흐스탄에만 10여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 고려인들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 보존의 핵심 기지 역할을 해온 고려극장. 1932년에 설립되었으니, 올해로 무려 77년 고난의 역사를 장하게 견뎌온 고려극장이다. 지금 이곳에서 한국 근현대사 혹은 민족정신사의 ‘노다지’가 썩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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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창고>

고려극장에서는 1932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연극이 공연되었다. 단순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놀이’로서의 연극이 아니라,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ㆍ「심청전」ㆍ「홍길동전」ㆍ「흥부전」같은 우리 고전들의 수용을 통해 민족정신을 환기시켜온 고려인들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런 연극을 통해 수시로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고자 했다. 구소련 시절 ‘대러시아’의 구호 아래 강요된 동화정책으로 고려인들의 정체성은 크게 붕괴되었고, 구소련 붕괴 이후 이 지역에서 불고 있는 민족주의의 바람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려인의 문화를 위축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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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대본들과 대본 모습>

이제 고려 말을 구사하는 몇몇 고려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 만한 한 가닥 정신적인 끈마저 놓게 될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고려인들은 ‘아무데도 쓸 일이 없는’ 고려 말을 용케도 유지해왔다. 그런 고려 말을 재료로 문학작품을 쓰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며, 연극도 상연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고려 말은 임종을 앞둔 환자의 형국으로 변했다. 고려말로 연극을 공연할 배우도 없고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관객도 없는 현실에서 고려말 연극은 존속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 끈을 찾아낼 수 있는가. 77년간 이어온 고려극장의 찬란한 전통과 역사를 되살리는 것만이 그 유일한 길이다. 연선용, 태장춘, 채영, 김기철 등 당시의 뛰어난 극작 및 연출가로부터 최영근, 송 라브렌지 등 현재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고려인 연극의 맥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는 대본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들에 내재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200건이 훨씬 넘는 대본들에는 연극을 통해서 그들이 절규했던 ‘고려인들의 함성’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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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전 공연 포스터>
 
자신들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활자나 소리 아닌 연극을 매체로 선택했다. 그들이 연극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일제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불굴의 정신이다. 그걸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도 적은 돈이나마 확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고려극장의 보물을 건지기 위한 최소 비용조차 추렴하지 못한다면, 우린 문화국민의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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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7. 14. 09:36

7월 13일, 알마티에서 처음으로 맞는 월요일이자 고려극장 가는 날. 새색시마냥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영근 문예부장의 차를 타고 공항 가는 길로 나가다가 시가지 외곽에서 빠졌다. 상처투성이의 길을 숨차게 돌고 돌자 아담한 단층의 고려극장이 나타났다. 그동안 걸어온 80년 영욕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장부 이 류보위 극장장은 예의 그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준다. 극장장의 방에서 간결하게 의전 절차(?)가 끝난 뒤 나와 최영근 부장이 찾은 자료실. 그곳엔 먼지와 시간에 절고 절은 대본들이 쌓여 있었다.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필체로 쓰인 대본들이 눈물겨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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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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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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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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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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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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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

10여 만 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구소련 중앙아시아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역.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 이후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고려극장은 그 중심이었다.

 일제 통치 하의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 지사들과 고려인들이 우리 문화와 민족 전통을 유지⋅보존하겠다는 의지로 설립한 기관이 바로 1932년에 설립된 고려극장이다. “1932년 이후 극장이 걸어온 운명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려극장-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999)는 전 극장장 김 겐나지의 말에서도 암시되는 것처럼 고려극장의 문화적ㆍ역사적 의미는 쉽게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최근 발행된 『고려극장의 역사』에도 고려극장의 의미나 사명은 다음과 같이 천명되어 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하게 된 고려극장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족 유산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이며 자랑할 만한 전문적인 문화 발원지로 변모했다. 고려극장의 무대에서 카자흐, 서양, 러시아 극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75년 기간 극장은 수많은 유명한 배우들을 배출했고, 오늘날도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 고려인 문화 발전을 위한 사명을 다하고 있다. <149쪽>

 

창립 이후 고려인ㆍ카자크스탄인들을 비롯한 수백 만 명의 관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수백 편의 연극과 음악회가 열릴 정도로 고려극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한인 극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200여 편의 연극을 통해 고려인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희곡들이 단순히 예술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들은 아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심청전」⋅「홍길동」⋅「흥부전」 등 우리의 고전 등 넓은 내용적 편폭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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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상연된 연극대본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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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연극대본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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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쌓여있는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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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를 정리 중인 최영근 문예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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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포스터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희곡작품들이 정리되지도 못한 채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 인력과 자금이 모자라는 현지에서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없다면, 우리라도 그 자료들의 정리⋅연구⋅출판(보급)에 적극 나서야 한다.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이 지역에서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민족주의’ 성향과 그에 따른 고려인 문화의 위축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나설 필요가 있다.

내가 불원천리 이곳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여행의 중심이자 종착역이다. 먼지투성이의 자료들, 기나긴 연륜 속에서 누렇게 바래고 바스러지는 종이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내게 최영근 부장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다. “이 분들은 그동안 왜 한 번도 정리를 하지 않았까.”라는 힐난을 내 표정에서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장춘, 연성용, 김기철, 채영, 맹동욱, 최영근 등 쟁쟁한 고려인 문사들의 손때가 묻은 대본들. 그것들은 역사의 굽이굽이 고난을 극복해온 ‘고려인의 함성’으로 다가왔다. 나는 과연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단장시켜 사람들 앞에 내놓을 것인가.

  ***

천산의 만년설 위로 해가 지니 종이 썩는 냄새에 찌든 내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다 해도 최영근 부장과 이 스타니슬라브 시인을 마주하고 한 잔 할 시간마저 없을 소냐? 자, 누군가의 성공을 축하하고, 무언가를 위하여 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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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야외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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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의 산천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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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무렵의 천산, 그 만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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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7. 12. 20:53


까를라가쉬와 헤어진 우리는 한국식당 청기와에서 시장기를 지웠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천산의 만년설이 잡힐 듯한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최석 시인을 만나기로 했다. 택시로 30분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마중 나온 최 시인의 차를 만났고, 함께 하기로 연락된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문희권 선생 등을 만났다. 최 시인의 차로 20분 이상을 달려 올라간 산중턱에 빨간 지붕을 한 최 시인의 집이 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엔 과수원이, 저 멀리로 알마티 시가지가,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알마티 시가지 너머에는 보일락 말락 지평선이 그어져 있고, 발코니에서는 천산의 만년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과연 신선이 깃들만한 곳. 아니 내 자신이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매연에 절은 인세홍진(人世紅塵)의 추억이 먼 옛날의 일인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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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서 올려다 본 천산의 만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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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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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뜰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

그곳에서 만난 세 시인 모두 고려인 사회의 독특한 존재들이었다. 우선 최석 시인.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1987년부터 무크지『현실시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89년 시집『작업일지』를 도서출판 청하에서 펴냈으며, 현재 카자흐스탄에서『고려문화』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시인이다.

 전남 신안 출생인 김병학 시인은 1992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와 한글학교 교사, 대학 한국어과 강사, 고려일보 기자 등을 역임했고, 2005년 시집 『천산에 올라』를 도서출판 화남에서 펴냈으며, 2007년에는 『재소 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Ⅰ과 Ⅱ를 도서출판 화남에서 펴내는 등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자취를 발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1959년 우슈또베에서 고려인 3세로 출생한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그는 1985년 시집 『이랑』을 알마티에서 출판했고, 1997년 제2시집『별들은 재 속에서 간혹 노란색을 띤다』를 출간했으며, 1999년 카자흐스탄 공화국 11학년용 교과서에 그의 시가 수록되었고, 최근 러시아 문학잡지 『유노스찌/청춘』에 그의 시가 실리는 등 문학적 성가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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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 선 세 시인-왼쪽부터 최 시인,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김병학 시인>

보드카의 주향 속에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의 미래에 관한 이들의 담론들은 무르익어 갔다. 다민족 사회의 소수자인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한글로 문학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려인들끼리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나갈 것인가, 등등. 천산의 만년설은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데, 민족의 미래를 놓고 토론하는 이들의 가슴은 장작불마냥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어둠을 밝히고, 중앙아시아의 평원을 고독하게 걸어가는 고려인들의 앞길을 이끄는 향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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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6. 25. 05:32


2009년 6월 25일. 타고난 반공주의자(?) 백규의 출현을 알고나 있었던 것일까. 모스크바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6·25의 원흉 구소련은 러시아로 이름을 바꾼 채 목하(目下) 자본주의의 실험을 펼치고 있는 중인데, 백규 일행은 그 심장부 모스크바에서 과거를 발판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탐지하고자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

오전엔 전쟁기념관을 찾아 러시아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의 질곡들과 만났고, 오후에는 트레챠코프 미술관을 찾아 러시아 미술의 진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저녁에 ‘최후의 고려인’ 정상진 선생과 열망하던 만남을 갖게 되었다. 6·25날에 그 전쟁의 한 당사자였던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쉽게 말할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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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택에서 정상진 선생과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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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살고 있는 따님과 정선생, 그리고 사위>

모스크바 외곽의 울리쨔에 있는 그 분의 아파트로 찾아간 시각이 오후 5시쯤. 함께 살고 있는 사위가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반색을 하며 맞아주시는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족, 이념, 문학을 중심으로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들이 그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고려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거울삼아 한민족 공동체가 꾸려나가야 할 미래였다.

***

북한의 문화선전성 차관을 지냈고, 6·25에 참전했던 그 분이 김일성으로부터 숙청을 당하여 소련으로 귀환한 뒤, 카자흐스탄 인으로 살아온 세월은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몸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사실 그는 2세 고려인으로서 고려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최후의 1인으로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20여 년 간 수십 차례 한국을 왕래하며 한국의 지식인들과 교유해오고 있는 선생임에도 당신의 거처로 찾아온 한국의 교수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은 듯 했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본 사람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그 분의 말씀은 역으로 공산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이른바 ‘관념적·이상적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대들을 만난 오늘이 내 명절이야!’를 반복하시는 90 노구의 지식인으로부터 비로소 ‘탈이념의 민족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정수를 얻어들을 수 있었다. 고려 말을 하는 고려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고려 정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바로 지금부터 고민해야한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꿈을 키우기 위해 북으로 왔다가 시련을 당한 많은 문인, 예술인들의 삶을 통해 그 체제가 갖고 있던 허위와 기만,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고발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선생은 대한민국에서 누리는 무한한 자유와 민주의 즐거움을 부러워하며, 그것만큼은 소중하게 지켜주기를 소망했다.

***

선생은 2005년에 펴낸 <<아무르 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를 통해 해방공간과 6·25, 대규모 숙청사건에 이르는 북한사회의 이면사를 보여준 바 있다. 선생은 조만간 그 책의 수정·보완판을 내고자 한다 했다. 매우 절제된 구술을 통해 이미 보여준 그 시절의 이면사에 덧붙이고 싶은 말들이 많은 것일까. 아마 ‘덧붙임’ 자체도 극도의 절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임은 ‘정확하지 않은 말’은 모두 잘라버리는 선생의 결벽증으로 미루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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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소(老少) 간에 왕래하는 정담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슴을 훑어 내리는 보드카의 주향(酒香)만이 지성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백야(白夜)의 한밤이었다.

2009. 6. 25.

Posted by kicho
자료 - 전공자료2008. 4. 30. 12:57
 

러시아 기행 2


             스러진 고려인들의 꿈이여, 열사들의 넋이여!



2008년 4월 4일, 4월 참변 당일이다. 추모식은 오후 4시에 열린다. 아침 일찍 우리는 최재형 선생들이 처형되어 묻힌 곳을 찾아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 감방이 있던 곳. 지금도 교도소로 사용되고 있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 맥그라소바 거리에서 북쪽으로 10분 쯤 30m 정도 올라간 야산 둔덕 ‘왕바산 재’. 그 언저리가 바로 네 분(최재형崔在亨, 김이직金理直, 엄주필嚴柱弼, 황경섭黃景燮)의 고려인들이 참살되어 묻혀있는 곳이다. 일본군이 이들의 시신을 묻고 흔적을 없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전날 마련한 간소한 제수를 땅바닥에 진설하고 제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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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사들의 영전에 헌작하는 반병률교수와 곽원석 박사>
 
최재형 선생의 영정과 다른 세 분의 이름을 모신 다음 순서에 맞게 추모의 정을 표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낭독했다.


2008년 4월 4일.

1920년 4월 참변을 당한 지 88년째인 오늘, 참변을 당하신 최재형․김이직․엄주필․황경섭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고려인 선열들의 영령 앞에 삼가 머리 숙여 고하나이다.


일제의 침탈과 만행으로 인해 나라와 고향을 잃어버린 채 이국땅에 떠돌이로 들어와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다시 그들의 총칼 아래 무참히 스러져 간 민족 지도자들의 기구하신 운명을 생각하오며, 새삼 추모의 정을 금할 수 없나이다.


님들의 희생 덕택에 고국에서 혹은 이 땅에서 편안히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은 님들이 뿌리신 피의 뜻을 잊지 않고 다시금 우뚝 일어서고자 노력하고 있나이다.


아, 오늘 만리 먼 고국에서 님들의 영전을 찾아 온 저희들 반병률․김보희․곽원석․조규익․엄경희 등과 이 땅에 살고 있는 발렌찐·발레리아 등은 보잘 것 없는 음식이나마 정성껏 님들 앞에 올리옵나니,

영령들이시여, 부디 이곳에 강림하시어 흠향하오소서!


          2008년 4월 4일


조규익·반병률·곽원석·김보희·엄경희 절하고 올림



우리의 제사는 간결·소박하나 엄숙했다. 땅바닥은 차갑고, 겨울 외투를 채 벗지 못한 북국의 공기는 싸늘했다. 그러나 혼령들이 감응하는 듯 왕바산 언덕의 두터운 땅거죽은 홀연 훈훈해져 왔다. 언덕 아래쪽 교도소에선 짙은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오후 4시 정각에 추모비로 나갔다. 러시아 군인들과 경찰들이 두런거리며 식장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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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말미에 헌화하는 러시아 어린이들>
 
예쁜 초등학생들도 질서정연하게 어른들을 돕고 있었다. 우수리스크 부시장을 비롯한 러시아 관리들, 블라디보스톡 한국영사관의 김무영 총영사와 이우용 교육원장, 김니꼴라이 우수리스크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장, 한국에서 온 반병률 교수와 내가 중앙에 도열하자 러시아 군악대의 주악을 신호로 식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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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 도열한 러시아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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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서 조총을 쏘아 올리는 러시아 군인들>

사회는 당당하게 생긴 우수리스크 시정부의 여성 관리였고, 통역은 고려신문 편집장 엘레나였다. 추도사와 헌화가 진행되는 긴 시간, 잡담 한 마디 들려오지 않았다. 러시아인이나 고려인, 한국인들은 ‘숙연함’의 연대라도 이루어진 것일까. 숙연함은 러시아 무용단의 추모 무용에 이어 조총(弔銃)의 발사로 클라이막스에 올랐고, 사회자가 종료선언을 하자 사람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갔다.  강렬한 햇살이 차가운 바람을 덥히는 오후였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각인되어온 러시아인들은 ‘음습하고 냉랭한 이념의 노예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추모비 앞에 모여든 그들은 선량한 이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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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 참여한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

 어쩌면 내가 던진 추모사가 그들에 대한 화해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4월 참변에 희생되신 러시아와 고려인 유가족 여러분!


1920년 4월 참변 88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 순간 저는 혁명과 반혁명, 침략과 굴욕의 역사적 격랑이 소용돌이치던 당시 이 땅에서 자행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무자비한 살육을 떠올립니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본군은 연해주 지역 러시아 혁명군과 정부, 관공서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방화·가택수색·검거·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하늘과 땅이 노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령(生靈)들이 전율(戰慄)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미 역사에 밝혀져 있듯이, 이 땅에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었고,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 등과 함께 이곳으로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과 러시아 국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 열강의 군대들이 철수하게 되자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군은 4월 참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이만(달리네레첸스크), 포시에트 등지의 주요 도시에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과 고려인 지도자들은 대거 검거되거나 학살되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은 그들이 정식 재판의 절차도 없이 살해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우수리스크에서는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선생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들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그 분들의 시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땅에서 러시아 국민들과 고려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으로부터 혹독하게 시련을 당한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시련을 우리가 미래로 힘차게 뛰어나갈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불쾌하고 불행한 과거의 일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당한 두 민족의 지도자들을 추모하는 지금 우리는 과거 항일투쟁 과정에서 연대와 협력을 지속해온 역사적 교훈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은 미래 지향적 파트너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정치·경제·외교·문화계 인사들 간의 활발한 접촉과 교류를 통하여 러시아와 대한민국은 친선과 우의를 한층 단단히 다질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1920년 4월 참변에 희생되신 양국 지도자들의 명복을 빌어드리며, 유가족과 후손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더욱더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이상 추모의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 4. 4.


              대한민국 서울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은 절하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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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이 끝난 다음 추모비 앞에 선 한국인들>

***

5시 반. 추모식을 마친 우리는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을 만찬장에서 만났다. 주석단에 자리 잡은 우리를 흘끔거리며 호기심을 보인 고려인들은 마이크를 잡으면 하나같이 유창한 러시아 말로 장강대하의 언설들을 쏟아냈다. 이미 그들은 고려 말을 깡그리 잊어버린 상태였다. 우리들의 귀에는 생소했으나 그들은 사회주의 러시아의 노래들을 쉼 없이 불러대는 것이었다. 러시아 군대에서 공을 많이 세운 듯 가슴에 훈장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온 노인도 있었다. 어쩌다 한 번 몇몇 고려인 아줌마들은 우리를 의식한 듯 서툰 발음으로나마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주었고, 북한의 대중가요 <반갑습네다>를 이어서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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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하는 고려인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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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네다를 열창하는 고려인 할머니들>

모습은 우리네 이웃집의 자상한 아줌마들이고 아저씨들인데, 말소리를 들으면 천리만리 떨어져 사는 러시아인들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러시아 땅에 발을 붙이고 긴 세월 살아온 우리 동족들의 변한 모습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흘러내린 모진 세월이 안쓰럽기도 하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감정의 가교(架橋)’가 새롭게 놓여야 하는데, 지금은 시퍼런 강물만이 그득하게 우리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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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후 만찬장의 모습>

우리가 그 골을 메울 수 있을까? 우리와 그들 사이에 ‘정감의 다리’를 다시 놓을 수 있을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고려인들은 러시아인의 탈을 쓴 채 그들의 집으로 흩어져 가고, 우리는 이방인의 탈을 쓴 채 사회주의의 불친절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