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7. 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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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아끼는 후배 하나가 연구실로 찾아왔다. 40을 넘긴 나이. 공부를 할 만큼 했고, 연구력도 인정받고 있는 그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는 매우 지친 낯빛이었다. ‘이제 밀려드는 삶의 피곤함을 어쩔 수 없노라’고, 처음으로 그에게서 진한 푸념을 들었다. 지방에 있는 한 명문 공대의 ‘글쓰기’ 계약교수 채용에서 ‘물먹고 돌아온’ 패장의 행색이었으나, 비굴하진 않았다. 내 앞에서 그는 막 사라지려는 자존심의 끝자락이나마 부여잡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의 낙담한 표정과 절망적인 언사들이 화살이 되어 내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아, 이 모진 바늘방석이여!


 아무리 어려워도 궁티를 내보이지 않는 게 전통적인 선비들의 법도였고, 그것은 이 땅에 인문정신의 바탕으로 굳어져 내려왔다. 몇몇 존경하는 국문학계의 대선배들은 세상의 잇속으로부터 초연할 줄 알았고, 그런 정신은 지금도 국문학의 바탕에 얼마간 남아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이 변했고, 우리들의 생각도 크게 달라졌다. 선배들은 꺼낼 엄두마저 내지 못하던 푸념을 나 스스로 늘어놓을 수 있게 된 것도 시대가 변한 덕분일까.


 산업화로 치닫던 70년대를 거쳐, 지속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신기술 개발과 제품의 고급화를 추구하던 80년대. ‘아랫도리가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렵사리 학부와 대학원에서 국문학 공부를 마친 필자는 ‘좋았던 시절’의 막차에 가까스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5공과 6공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한 엄혹하던 시절이었다. 88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정보화의 물결은 도도하게 이 땅을 적시며 흘렀다. 경제의 팽창은 해외여행으로 사람들을 들뜨게 했고, 프로 스포츠와 컬러텔레비전의 도입, 성욕 표현의 무한한 자유는 사람들의 손에서 책을 앗아갔다. 미처 전통학문의 굴레를 빠져 나오지 못한 국문학이 유례없는 도전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짧은 기간 우리가 경험한 것은 바로 ‘격변’이었다. 그 물결에 대응하는 국문학자들의 모습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필자 자신이 ‘제대로 공부하는’ 주류의 대열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나손 김동욱, 연민 이가원 등 한 시대를 이끌던 큰 학자들의 어깨 너머로나마 그 분들의 마지막 숨결을 느낀 건 행운이었다. 비록 그 숨결 속에 움트고 있던 새 시대의 기운을 읽어내지는 못하고 말았지만.


 국문학이 지리멸렬해질수록 그 분들의 통합적 사고나 거시적 안목만큼은 꼭 붙들었어야 했는데, 자잘하고 고만고만한 후학들이 힘들여 잡은 건 ‘썩은 동아줄’에 불과했다. ‘학제 간의 연구’나 ‘통섭’을 논하며 그것들이 흡사 하늘에서 떨어진 보배라도 되는 양 대견해하는 모습들을 보며, 좋은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는 나날이다.


 사회가 정보화를 담론하고 ‘디지털’만이 살 길이라고 고창(高唱)할수록, 국문학이 그들에게 양질의 원료를 공급하고 떡 부스러기 정도나 얻어먹는데 만족하는 현실은 엄청난 수치다. 한갓 ‘제국주의자들’의 원료 공급기지로나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걸 일컬어 ‘국문학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까. 국문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디지털 기술자들이 국문학자들로부터 제공받은 콘텐츠로 만들어낸 제품을 다시 사다가 후학들에게 먹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급기야 ‘국문학과’의 간판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다는 몇몇 대학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름까지 바꾸었을까만, 내실까지 바뀌지 않을 경우 간판만 보고 찾아온 어린 학생들이 실망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다음엔 또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


 고리타분하다 꾸중하겠지만, 공자가 말씀한 ‘정명(正名)’은 이 경우에도 합당하다. ‘이름과 실질의 일치’가 정명인데, ‘국문학’의 어디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우리 민족의 문학’이 국문학이다. 그 말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내용과 지켜야 할 책무가 포괄되어 있으니, 국문학은 그저 ‘국문학’일 뿐이다. 몇 해 농사를 지어먹곤 또 다른 산판으로 이동하여 불을 놓는 화전민처럼 쉽게 이름이나 바꾼다고 풍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변화에 대응하는 ‘철학’이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끈질긴 탐색이다. 실력 있는 국문학자들에게 밥이 보장되지 않는 문제적 현실. 그 근저에는 상황 판단의 성급함과 가벼움, 그리고 철학의 상실이라는 우리 모두의 병통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교수신문> 2008년 6월 30일자의 '학이사' 칼럼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6. 11. 12:07
 

*이 글은 『어문생활』 127호(한국어문회, 2008. 6.)의 ‘나를 움직인 한 권의 책’에 실려 있습니다.



   역사의 진화(進化)는 완성되었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을 읽고-


                                          조규익(숭실대 교수/한국어문교육연구회 이사)


 엄혹(嚴酷)한 냉전체제 속에서 내 삶은 시작되었고, 3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공산진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고프고 암울하던 어린 시절. 등굣길에 나서는 아침마다 북으로부터 날아온 삐라를 줍는 게 일이었다. 동네 어귀까지 바닷물 들어찬 어느 보름사리 한밤중엔 간첩선이 들어와 사람을 죽인 일도 있었다. ‘야수 같은’ 공산당을 저주하며 우리는 온몸에 소름 돋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틈날 때마다 너덜거리는 세계지도를 보며 빨갛게 칠해진 공산주의 국가들이 왜 그리도 넓고 위압적인지,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기도 했다. 실체를 보지 못한 공산당이 내 실존을 위협하는 불안과 초조의 근원이었다. 라디오에서는 툭하면 간첩단 사건이 보도되고, 툭하면 ‘북괴타도 궐기대회’가 열리곤 했다. 거동이 수상한 사람들을 지체 없이 신고해야 했고, 여차하면 얇은 고무신 벗어들고 달아날 태세를 갖춘 채 산길을 가야 했다.

 그렇게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면서 산업화 사회로 진입했고, 갖은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도 치러냈다. 그 무렵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소련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몰락의 대서사시가 전 세계에 거짓말처럼 펼쳐졌다. 장년을 눈앞에 둔 내 정신세계에도 드라마틱한 파도가 일었다. 그 때 이미 우리는 정보화 사회를 거쳐 고도 정보화 사회에 진입하려던 차였다.

 그 무렵 우리는 어린 시절의 굶주림을 거의 완벽하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역설하며 좌익사상에 빠져든 친구들도 배고픔을 참으려 하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을 보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누리는 자본주의의 풍요를 저주하는 모순을 범하곤 했다.

 그렇게 ‘도둑처럼’ 찾아온 세계의 변화를 설명해줄만한 선생님이 내겐 없었다. 그 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 권의 책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역사의 종언(終焉)과 최후(最後)의 인간’이란 충격적인 제목이었다. 헤겔이 신봉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야말로 후쿠야마가 명쾌하게 설명한 바로 그 ‘역사의 종말’이었다.

 5공, 6공,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권력자 못지않게 우리 스스로도 존엄한 존재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처럼 인류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 ‘멋진 사건’을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얻은 행복이었다. 흡사 길바닥에서 말라가던 물고기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연못으로 던져진 격이었다. 연못 안에는 뱀도 있고, 생활쓰레기도 있으리라. 그런 것들을 몰아내고 치워가면서라도 살아야지, 이곳을 떠나면 갈 곳 없는 우리들이다.

 보라, 우리의 반쪽은 아직도 진화의 물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유년시절의 굶주림과 절망이 그들의 산하를 덮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 ‘노동자 농민의 천국’임을 강변하고 있다. ‘이밥에 고깃국’ 타령을 얼마나 더 읊어야 그들이 소원(所願)하는 ‘역사의 종말’은 올 것인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