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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07 이른바 국회의원이란 자의 천박한 입 3
  2. 2010.12.29 스마트폰 2
글 - 칼럼/단상2012. 8. 7. 21:23

이른바 국회의원이란 자의 천박한 입

 

                                                                                                                                                         백규

 

본인에게는 약간 미안한 말이지만, ‘이종걸’이란 국회의원[통합민주당]이 있었는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트위터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그년’으로 지칭했다 하여 언론매체들이 떠들썩하다. 네티즌 가운데 몇 사람이 표현의 지나침을 지적하자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이라고 강변했다니, 더욱 기가 찰 일이다. 30년 가까이 국어선생을 하고 있지만,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로 일상 언어생활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서야 알게 되었으니, 나도 문제적 인간인가?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번 김용민이란 사람이 막말파동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리에서 쫓겨난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같은 당에서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걸 보면 바야흐로 이제 정치의 계절은 시작된 것 같다. 5년 전 선거철에도  정치인들의 험한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언어순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조선일보 바로가기] 그러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지금, 반복되는 ‘역사의 법칙’이나 씁쓸하게 떠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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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렇게 험한 말들이 속사포처럼 튀어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를 요즈음 사람들이 ‘없으면 단 한 시도 못 산다’는 SNS 즉 ‘사회적(사교적) 연결망 서비스’에서 찾게 된다. 긴 문장 대신 짧은 문장으로 수시로 일어나는 상황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그런 서비스이다. 어떤 사실을 목도하거나 말을 들었을 때, 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잠시잠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돌멩이 던지듯 뱉어내는 것이 바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다.

 

참 가관인 것은 나이가 지긋이 들었다고 생각되는 서울시장도, 정당의 대표나 국회의원도, 상당수 대학교수들도 여기에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의 진위를 따져 볼 겨를도 없이 그냥 쏘아대고 만다. 그 말은 즉각 팔로워(follower)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또 자신들의 팔로워들에게 리트윗(retweet)함으로써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간다.

 

일단 트윗 혹은 리트윗된 말들은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속삭이듯 건넨 말도 주워 담을 수 없거늘 하물며 수십만 수백만에게 전달된 말을 무슨 수로 주워 담는단 말인가. 그런 말들은 진위에 관계없이 여론이란 허울을 쓰고 나라를 흔들어 놓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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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도, 서울법대 조국 교수도, 소설가 이외수 씨와 공지영 씨도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SNS 애용자들이다. 엄청난 팔로워들을 거느린 그들이 부러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이들의 한 마디 말이 갖는 의미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 자신들의 말 한 마디에 따라 대중들이 쉽게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말들을 가볍게 SNS로 던져댈 일은 아니다. 그래서 SNS에 의존하는 요즈음의 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 문화인들이 그렇게 천박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한 마디 말을 꺼내기 위해 수십 번 되 뇌이고 고민하는 과정을 이들은 아예 생략해 버린다. 일단 던져놓고, 나중에 잘못이 드러날 경우 수정하면 된다는 배짱들일 것이다. 그래서 늘 강호에는 무책임한 말들로 인한 혼란 때문에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인사들이 아닌가. SNS를 애용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흡사 ‘고자질하는 애들’ 같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일단 자신이 곰곰 생각하며 해결하거나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팔로워들에게 큰 소리로 떠들고 본다. ‘그들이 어떻게 해주겠지’ 하는 심산일까.

 

팔로워들 가운데는 얼마나 단세포적이며 생각 없는 어린애들이 많은가. 이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공공의 일들을 ‘아가들’에게 고자질하여 들고 일어나게 만드는 격이다. 그래서 나는 툭하면 SNS에 의존하는 현대의 정치를 ‘고자질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종걸이란 국회의원도 아마 그 SNS의 마력에 빠져 있는 인물인 듯하다. 박근혜 후보에게 잘못이 있다면 기자회견을 하든 칼럼을 쓰든, 아니면 만나서 항의를 하든 방법은 많을 것이다. 어쩌자고 ‘그년’이란 상말 호칭을 사용하여 수많은 팔로워들에게 뿌려댄단 말인가. 그러고도 스스로가 국회의원임을 내세울 수 있는가? 국회의원으로서의 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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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설자(口舌者)는 화환지문(禍患之門)이요 멸신지부(滅身之斧)라[입과 혀는 화가 들어오는 문이고 몸을 망치는 도끼다]”, “상인지어(傷人之語)는 환시자상(還是自傷)이니 함혈분인(含血噴人)이면 선오기구(先汚其口)니라[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스스로를 해치니 피를 머금고 남에게 뿜으려 하면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히게 되느니라]” 등의 말들은 모두 옛날에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과서 <<명심보감(明心寶鑑)>>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몹쓸 시대로 변했다 한들, 환갑 진갑 다 지냈거나 그에 가까운 어른들이 옛날 열 살 남짓되던 아이들만도 못해서야 쓰겠는가? 정치인들이여! 부탁하노니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당분간 제발 그 입들에 자물쇠 좀 채워주기 바란다.

 

<2012. 8.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12. 29. 21:01

스마트폰

 

체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툭하면 시골 들판을 떠올려 비유하는 나 같은 촌놈들을 보면 분명하다.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쟁기와 써레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괭이와 삽이 전부였을 것이다. 논뙈기 밭뙈기에 들러붙어 괭이와 삽으로 파고 두드려 논밭을 손질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쏟은 인간의 피땀은 엄청났을 것이다. 쟁기와 써레가 등장하고 소를 동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허리를 폈을 것이고. 그러다가 경운기가 등장했고, 트랙터도 굴러다니게 되었다. 나는 시골에서 써레질을 하면서 경운기와 트랙터의 위력을 흠모한 적이 있다. 불행히도 나의 노부(老父)는 경운기와 트랙터의 시대를 맞이하고도 쟁기질과 써레질을 고수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젊은이들과 함께 ‘우당탕’ 경운기를 몰고 다닐 자신이 없으셨을 것이다. 아니, 물렁한 진흙 속에서 소와 교감하면서 느릿느릿 삶을 영위해온 우리네 부모들은 경운기의 재빠름을 수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 때문인가? 중늙이가 된 지금도 나는 도구에 관심이 많다. 80년대 중반, 밤중 몰래 학원에 다니며 타자기를 배웠으면서도 꼬박꼬박 만년필로 원고지 수백 매 분량의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기계에 익숙지 않아서였을까. 그러나 우리 또래에게 흔한 ‘독수리 타법’을 웃어줄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타자기 덕분이었다. 그러다가 ‘문서작성기’가 나오자 냉큼 갈아탔고, 컴퓨터가 나오자 겁 없이 달려들었으며, 오늘까지 업그레드 되는 족족 그것들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제 ‘아, 옛날이여!’를 외치며, 컴퓨터에 사로잡혀 되는 말 안 되는 말 가리지 않고 내뱉으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로 여긴다. ‘286→386→펜티엄’으로 숨가쁘게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누구보다 빨리 갈아탔기 때문이다. 단어를 쉽게 외우는 기계, 환상적인 디지털 사진기, 사진 보관용 외장하드, 휴대용 복사기, 종이 안 걸리는 프린터, 등등. 이름을 대기에도 숨찬 많은 기계들을 그때그때 남들보다 일찍 어답팅해온 것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벅찬 기대감을 갖고 사용해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좀 느긋하게 ‘지둘렸으면’ 성능도 개선되고 가격도 내려갔으련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남들보다 앞서서 그런 기기들을 널름널름 사 제꼈는지 참으로 한심한 내 청춘시절이었다. 그러니 내 곁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눈총을 받은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휴대 전화기에 대해서만큼은 처음부터 인내심을 발휘하려 했다. 사실 휴대전화가 나올 때부터 내심 꼴불견들이란 생각을 했다. 집과 연구실에 놓인 전화기만으로도 충분 이상인데, 막중한 국가대사를 수행하는 것도 아닌 친구들이 무엇 때문에 손바닥만한 기계를 들고 걸어다니며 급하지도 않은 말들을 지껄이는지 도통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학교 학생들까지 휴대폰을 쓰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 스마트폰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아들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었다. 들어보니 환상적이었다. ‘고놈’ 하나만 들고 있으면 ‘만사OK'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살짝 들었다. 트위터란 것을 잘만 활용하면 내가 상대하는 학생들은 물론 소설가 이외수처럼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수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번거롭게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은행과 거래를 할 수 있고, 이메일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단어공부도, 영화감상도, 독서도 할 수 있고, 신문을 읽을 수도 방송을 듣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일일이 기억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기능들이 나를 유혹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내가 스마트폰을 갖고 나자 갖가지 문제점들을 알려주었다. 은행거래나 이메일의 기능은 해킹의 위험이 있으니 쓰지 말라 하고, 민감한 정보는 절대로 올리지 말라고 겁을 주는 것이었다. 트위터를 열었으나 내 강의에 들어오던 한 녀석만이 내게 팔로윙을 해주었을 뿐이다. 내 전화기의 트위터를 클릭하면 이외수의 글만 몇 페이지에 걸쳐 빽빽하게 올라와 있을 뿐이니, 그간 내가 올린 ‘주옥같은 글들’은 과연 누가 읽고 있단 말인가.ㅠㅠ

 

***

 

길을 걸어가는데 평소에는 연락도 하지 않던 누군가가 전화를 해왔다. 왜 전화를 했느냐고 물으니, 그는 되레 나보고 ‘왜 자기에게 전화를 걸었느냐?’고 묻는다. 아뿔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전화기를 끄지 않은 채 호주머니에 넣었더니, 무심결에 내 손에 닿은 전화기가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불러낸 모양이었다. 아, 이 스마트폰의 무지막지한 민감함이여!

문자를 찍으려 해도 둔감한 손끝이 자꾸만 오타를 낸다. A의 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실수로 B의 번호를 눌러 황급히 끊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둔중한 내 생체리듬과 스마트폰의 민감함이 빚어내는 불화는 가뜩이나 피곤한 삶을 더 괴롭게 하는 나날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고 만다면 ‘얼리 어답터’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을 터. 눈 꼭 감고 ‘천수만의 새우 튀듯’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스마트폰을 다루는 10대 아이들을 부지런히 곁눈질하리라. 혹시 아는가? 1년만 고생하면 환상적인 새 삶이 열리게 될지. 어쨌든 스마트폰 만세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