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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1. 12. 10:02

‘미네르바’가 가르쳐 준 것

 

‘미네르바’란 필명으로 사이버 세계에서 필봉을 휘두르던 인사가 사직당국에 잡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 격의 ‘허무개그’ 혹은 기껏해야 ‘허위정보 유출 범죄’ 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듯하나,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그가 전문대 출신의 무직자라거나 해외 체류의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 등은 사태의 핵심이 아니다.

그의 근거 부족한 말들이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총명을 흐리게 했으며, 나라 전체를 들었다 놓았을 만큼 큰 힘을 발휘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내뱉는 말의 무게나 의미와 관련하여 심상치 않은 점을 시사한다.

이 사건에서 현재의 시국을 불안하게 여기며 살얼음 밟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허한 마음과, 그 무엇에라도 기대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역으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과 언어 속에서 사물은 사물이 될 뿐 아니라 그 사물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고 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미네르바는 자신의 언어로 ‘숨겨져 있던 세계’를 드러냈거나 만들어낸 셈이다.

그러나 그는 개인이기 이전에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자아를 대변하는 존재로 한동안 군림해왔고, 튀어나온 그의 말들은 다시 집단 심리에 자극을 주어 사람들의 불안을 증폭시켜온 것이 사실이다. 사람은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말할 수 있지만, 그 어법들의 근원은 단 하나,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 자체다.

대중의 불안 심리를 단계적으로 고조시켜 온 점에 미네르바 어법의 교묘함이 숨어 있다. 그는 어쩌면 전문가들조차 자신의 말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그들 역시 불안한 대중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중심성성 중구삭금(衆心成城 衆口鑠金)’이나 ‘삼인성호(三人成虎)’란 옛말들이 있다. 뭇사람들의 마음은 다른 생각이 침투할 수 없게 하는 성채가 되고 뭇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는 것이 전자요, 한 두 사람이 하는 거짓말에는 속아 넘어가지 않지만, 세 사람이 짜면 거리에 범이 나왔다는 거짓말도 꾸밀 수 있다는 것이 후자다. 근거가 미약한 미네르바 개인의 말은 단순한 개인의 말로 그치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의 암귀(暗鬼)에 휩싸여 지내던 대중들에게 그의 현란한 수사는 제대로 먹혀들었고, 대중은 자신의 불안을 그의 수사에 맞추어 재해석하는데 길들여지게 된 것이다. 한때나마 미네르바의 말은 집단의 말로 전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휩쓸렸거나 경도(傾倒)되었으며, 그에 따라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정책 당국자의 공신력 있는 말보다 얼굴을 숨긴 채 휘둘러댄 사설(私說)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그것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전형적인 사례로 읽힐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터넷의 울타리에 갇힌 현대 언어병리 현상의 단적인 예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경제문제로 우왕좌왕하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금의 문제만도 아니다. 말 때문에 좌불안석을 경험한 적이 많은 우리다.

최고위층부터 장관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변설(辯舌)들을 쏟아내 국민들이 맘 편히 지내보지 못한 것이 바로 지난 정권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점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말 한 마디는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지만, 의도가 불순한 말은 ‘재앙의 문이고 몸을 찍는 도끼’일 수 있다는 속언들이 언제나 진리임을 몸으로 보여준 점에 미네르바 사태의 교훈은 있는 것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