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1. 11. 8. 21:25

딸과 함께 에코팜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시며

 

 

 

“그래, 이곳 정안이 그렇게도 좋던감?

돌아 다니다 다니다 이곳으로 들어오게?”

 

--빙모(聘母)님을 보내드리며--

 

 

 

“어머님의 맥박이 점점 느려지신대요.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큰 처남댁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라온병원'으로 달려가는 길. 안개 자욱한 도로 위, 핸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착해서 2층으로 뛰어 올라가니, 방금 잠에 빠지신 듯 빙모님의 표정은 거짓말처럼 고요하고 평온하셨다. 아직 손에도 볼에도 가슴에도 온기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뿐. 이미 받으신 선고를 되물릴 수는 없었다. 다시 기동을 하시면, 에코팜에 모셔와 멋진 파티라도 한 번 열어 드려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무색했다. 빙모님은 총총히 먼 길을 떠나셨고, 우리는 허탈했다.

 

어수선함 속에 도착한 공주시의료원 장례식장은 시골 장날 새벽녘인 듯 조용함 속에 붐비기 시작했다. 먼 길 보내드리는 의식이 번잡하기만 했다. 차라리 문상 온 지인들과 함께 빙모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픈 충동이 일기도 했다. 함께 목청을 돋우어 “이제 일어나세요!”라고 외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실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빙모님의 다정하신 음성과 환한 미소는 벌써부터 저 멀리 공중에 맴돌고 계셨다. 남은 건 차가운 육신 뿐. 그래서 더욱 허탈했다.

 

그런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이틀을 보내고 난 사흘째. 우리는 빙모님을 모시고 느릿느릿 '나래원'으로 향했다. 시원한 녹색과 따스한 주황색이 섞인 계곡 한 가운데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장모님의 육신은 단정한 상자 속 한 그릇의 재로 돌아와 우리의 가슴에 안겼다. 단 두 시간 만에! ㅠㅠ

 

그 상자를 안고 ‘대전공원묘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멀리 계룡산의 연봉이 건네다 보이는 산 중턱 양지바른 곳. 빙부(聘父)께서는 이미 그곳에 누워 계셨다. 그 옆자리에 빙모님의 유골함을 묻고 나니, 마음의 짐을 함께 내려 묻은 듯 약간 가벼워짐을 느꼈다. ‘금슬 좋으시던 두 분이 15년 만에 만나셨으니 얼마나 반가우실까’ 생각하며, 합장(合葬)의 취지가 ‘산 자들의 위안’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다정하시던 두 분이 오랜만에 다시 만나시리라 우리는 굳게 믿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게 빙모님은 이승을 하직하셨다.

 

1926년 11월 4일(음) 공주에서 태어나시고, 2021년 10월 1일(음) 공주에서 돌아가셨으니, 한 달 모자라는 향년 96세. 공주여자사범 부속학교 2회 졸업,  1938년-1943년 도립여자사범학교 에서 수학, 부모님의 고향인 평양의 여러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심. 

 

***

 

대학 시절의 은사 유당 림헌도 선생은 내 빙부이시고 최순보 님은 내 빙모이시다. 엄격하기만 하시던 빙부와 달리 빙모님은 자애로우셨다. 훤칠한 키에 시원한 미모와 따사한 미소가 어우러져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돋보이는 분이셨다. 학창시절엔 공주시내에서 행사들이 더러 있었는데, 어쩌다 빙부・빙모님이 동반으로 참석하시는 경우가 있었다. 화사한 한복을 입고 착석하신 모습을 뵐 때마다 ‘참으로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한 토막의 일화가 있다. 나이 듬뿍 든 딸[임미숙]이 어떤 촌놈에게 시집가겠노라 하니, 걱정에 싸인 엄마가 그 녀석의 고향집을 보러 먼 길을 나선 것. 버스도 들어가기 전이니, 고초가 오죽하셨을까. 태안읍에서 택시로 자갈길 100리를 달려 시골구석의 작은 초가집을 찾아가신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 한 마리와 닭 몇 마리가 손님을 맞았던 모양이다.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당장 돌아와 ‘딸년’을 꿇어앉히고 종아리를 쳤을 것이다. ‘정신 나간 것아! 그 놈 집에 가본 적이나 있니?’라고 소리소리 쳐댔을 것 아닌가. 그러나 빙모님은 ‘그런 곳에서 대처로 학교를 보낼 정도면, 사람 만나 보지 않아도 됨됨을 알 수 있다’고 오히려 딸을 안심시키셨던 모양이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내 변변찮음을 들며 혼사를 극구 말렸다는 사실을 그 후 알고 나서 나 스스로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차라리 그 때 깨어졌더라면, 나야말로 더 멋진 짝을 만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빙모님은 이른바 여장부 혹은 대인배(大人輩)이셨다. 늘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셨다. 걱정에 휩싸인 주변사람들에게 늘 위안과 자신감을 주시던 분이었다. 결혼식 전날 밤,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진해에서 예식장이 있던 서울로 올라온 나는 크게 걱정되어 빙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랬더니, “이 사람아, 걱정 말게. 하늘도 둘의 결혼을 축복하느라고 그러는 걸세!”라고 명랑하게 대답하시는 게 아닌가. 다음 날 하늘은 거짓말처럼 청명하게 개었고, 나는 빙모님의 담대하심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최근 기억력을 잃으시면서 한동안 말수도 크게 줄으셨다. 그렇게 말씀 나누시길 좋아하시던 빙모님이 안타까워 일부러 새로운 화제들로 대화를 이어나가곤 했다. 그러나 대화는 늘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똑 같이 마무리되곤 했다.

 

“그래, 이곳 정안이 그렇게도 좋던감? 돌아 다니다 다니다 이곳으로 들어오게?”

 

“그럼요. 돌아 다니다 다니다 보니 이곳이 최고였어요. 무엇보다 빙모님이 가까이 계시고, 형제들도 모두 근처에 살고 있잖아요? 외롭지 않아서 좋지요. 그러니 빙모님께서도 저희 집에서 오래 오래 머무시며 옛날의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세요. 진지도 많이 드시고요.”

 

“놀고먹는 할매 밥 많이 먹어서 뭐하게?”

 

“진지 많이 드시고 걷기 운동도 많이 하셔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셔야지요. 오래 사셔야 손주들이 자라서 제 앞가림 하는 것도 보시고, 좋은 세상 많이많이 즐기실 수 있지요.”

 

“그래. 말은 고맙네만. 늙은이 그저 걸치적거리기만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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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빙모님의 영전에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두 분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영계(靈界)의 청복(淸福)을 많이많이 누리소서.

 

 

2021. 11. 7.

 

 

사위 규익 엎드려 절하고 올립니다

 

초코를 데리고 사위와 함께 에코팜을 산책하시는 빙모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9. 30. 20:59

터 파기 공사 중 나온 돌에 옥호(屋號)를 새기고...

 

 

  잡답(雜沓)의 메트로폴리스 서울에서 정밀(靜謐)의 공간 에코팜으로!

  드디어 삶의 터전을 옮겼다. 2020년 9월 2일엔 당진의 막내 동생 병원에 10년 가까이 보관해 두었던 책 짐을, 5일엔 서울 아파트의 책들과 살림살이들을, 12일엔 학교 연구실의 책 짐을 각각 실어 나름으로써 세 차례에 걸친 이사의 대장정을 마쳤다. 이제 내 생애 노마드의 천막을 걷어 나귀 등에 싣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에코팜에 뿌리를 내려 살다가 때가 되면 그 옛날의 은자(隱者)들처럼 자취 없이 땅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올해로 서울 살이 장장 33년째. 서울 안에서 두 번째 이사 후 정착한 1992년으로부터는 28년 만에 서울을 뒤로 하게 된 것이다.

 

   가슴이 후련했고 발걸음은 날 듯이 가벼웠다. 30년을 넘게 살아도 서울은 ‘늘 타향’이었다. 내 집에 살면서도 잠시 세 들어 사는 것처럼 낯설고 불편했다. 문만 열면 가게들과 병원들, 교통수단들이 손에 잡힐 만한 거리에 늘어서 있으니, ‘서울 생활이 불편하다’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는 표현이리라. 그런 차원의 불편이 아니다. 먼 길을 가던 중 잠시 쉬어가려 짐을 내려놓았다가 인파에 휩쓸려 어정세월 30년을 넘긴 지금, 정신을 차려보니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지 않은가. 사람들에 부대끼며 익힌 처세술이나 생존방식 자체의 바탕이 바로 불편 아닌가. 내겐 자성(自性)을 관조(觀照)하지 못한 채 희희낙락 유물론적 편안함에 안주하는, 그 자체가 불편이었다. 그래서 20여 년 전부터 내 나름의 ‘가거지(可居地)’를 물색해 왔다. 그러던 중 8년 전 에코팜을 발견했고, 그간 농사를 지어오다가 드디어 올해 집을 짓게 된 것이다.

   정년 전 한 차례 ‘1년의 연구년’이 남아 있었는데, 그 기회가 바로 올해 주어졌다. 사실은 연구년의 호기(好機)에 일본의 모 대학으로 건너가 그간 진행해 오던 연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려 했으나, 코로나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착수한 것이 바로 ‘에코팜에 집짓기’였고, 불안과 초조 속에 6개월 만인 지난 7월 말 완공했으며, 50여일의 장마와 태풍이 휩쓸고 간 이달 초・중순에 이사를 단행하게 된 것이다.

 

   지난 8년간은 이곳의 풍토와 문화에 적응해온 기간이었다. 주민들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야 했고, 농촌 친화적인 사고방식도 갖추어야 했다. 잡초를 뽑거나 작은 나무들을 심고 큰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하면서 생산의 의미를 체득하게 된 것은 물론, 내가 익혀 온 도회적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땅이 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이 공간에서 통용되는 삶의 양식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 동 트기 전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안천변을 산책하며 온갖 새들과 고라니들을 만나고, 갈대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나의 내면을 정비하기 위한 필수적인 일과였다. 동네 어른들을 만나 농사일을 묻는 것은 이 지역의 풍토를 호흡하여 내 육신의 자양분으로 삼기 위한 수양이자 공부였다. 농사일에 관한 대화는 토착민들과의 소통에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체온이 전달되고,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

 

   언젠가 연못을 만들었다. 습기가 많아 늘 물이 질척이는 곳을 파고, 그 곁으로 우회도로를 뚫었으며, 연못 맞은편에 채소밭을 만들었다. 관성지(觀性池)라 명명한 연못을 틈틈이 돌며 내면을 관조하노라면, 복잡하던 마음은 한결 차분해진다. 만들고 보니,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따로 없다! 미꾸라지 1kg과 손바닥 크기의 보리붕어 다섯 마리를 풀어 놓으니 관성지에 아연 생기가 돌고, 맹꽁이도 개구리들도 덩달아 몰려들어 자리를 잡았다. 잠자리는 알을 뿌리느라 꼬리를 물에 내리기 일쑤이고, 이 동네 길냥이들도 목을 축이며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곤 한다. 조만간 이 고을의 진객 백로도 날아 올 것이다. 관성지를 한 바퀴 돌면 채소밭이라, 배추와 무를 바라보며 농부로서의 내 정체성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채소밭 옆으로 펼쳐진 풀밭에는 3년 전에 심은 30 그루의 소나무가 제법 꼴을 갖추어 가는 중이다. 소나무의 거침없는 기상을 바라보며 에코팜에 들어온 것이 내 생애의 ‘첫 성공사례’임을 실감한다.

 

***

   이해관계의 메커니즘 속에서 늘 불편하던 공간이 서울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니, 에코팜이라고 어찌 이해관계와 무관하랴. 다만 자연에 몸을 의탁한 이상, 인위(人爲)의 이악스러움을 훨씬 자주 순화시켜갈 수는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을 관성지에 비춰보며 자꾸만 흠을 닦아내다 보면, 저 후덕한 무성산의 능선을 닮아가지 않겠는가.

  30년 묵은 짐들의 정리를 가까스로 마무리한 오늘. 조만간 ‘에코팜 찬가’가 나오길 기대하며, 나 자신과 강호의 벗님들께 ‘무성산 에코팜의 약속’을 조용히 상기시키고자 할 따름이다.

 

 

2020. 9. 30.

 

백규

 

 

 

 

관성지(觀性池)
잠시 쉬는 틈에 영빈이와 대화를...

                                                        

서재 안의 연구실
서재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8. 25. 14:09

 

 

에코팜 농막의 마무리 작업, 풀과의 전쟁, 한없이 밀리고 있는 집필 작업 등으로 심신이 피로한 나날이다. 그것뿐인가. 코로나가 잦아들기는 고사하고 근래 들어 부쩍 치성(熾盛)해지는 양상을 보여주니, 안팎으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게으름 부릴 수는 없는 일.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신착 이메일을 검색하려니 낯익은 이름 하나가 뜨는 게 아닌가. 홍정현! 아, 오래 전에 졸업한 제자가 보내 온 소식이었다. 잽싸게 메일을 열고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옆에 있는 아내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니, 그녀도 감동한 듯 울먹거린다.

 

98학번이라? 우리가 미국에 있던 해에 국어국문학과의 새내기로 들어온 그녀였다. 2002년도에 졸업, 올해로 벌써 18년 세월의 강이 흘러내린 것이다. 졸업 후 편입한 춘천교대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40 가까운 나이에 한국교원대에서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바로 어제 교육학박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내어머니교사로서의 현실적인 삶을 꾸려 나가며 절치부심 공부에 매진해온 그녀의 쉽지 않았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공부하면서 ‘힘들고 외로웠다’는 말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리라. 아직도 이 땅의 젊은이들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의 후진적 편견과 싸워야 한다. 프리미엄 없는 자들이 유형무형의 유산을 갖고 있는 자들과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고통스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홍정현 박사. 이제 어엿한 국어교육학박사로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한 사람의 삶에서 매 순간은 늘 새로운 출발선’이라는 점. 그건 내 스스로 삶의 경험에서 깨달은 진리다. 다만 어떻게 출발할 것이며 다시 어떤 출발선에 서게 될 것인지는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인간승리의 모범적 사례를 내 제자에게서 확인한 오늘. 그간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으니, ‘제자만 못한 선생’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어야 할 것이다. 홍 박사 만세!^^

 

*첨부: 홍정현이 보내온 메일

 

 

교수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저 98학번 홍정현입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교수님께서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2002년에 졸업했으니 벌써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졸업 후에 제가 춘천교대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춘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세은이와 함께 찾아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에 처음으로 연락을 드립니다.

뵙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그 흔한 전화 한 번을 못 드리고

백규서옥에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그리워하기만 하며 지냈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저는 춘천에서 3년을 근무하고,

천안에 직장이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 하면서 천안으로 근무지와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연년생 남매를 낳아 키우다가

40이 가까운 나이에 청주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8월 24일자로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논문을 쓰는 인고의 과정 내내

논문이 완성되면 꼭 교수님께 논문 들고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버텼습니다.

비록 상황이 좋지 않아 당장 찾아뵙지는 못하겠지만, 졸업하는 날 교수님께 메일로라도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언젠가 제게,

공부란 할 수 있을 때 다부지게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멋지게 해냈어야 했는데.... 다부지게 공부할 수 있는 시기를 모두 지나 보내고

부끄럽지만 아이들을 노모께 전적으로 부탁드리고 뒤늦은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어떤 분야를 공부했는지 말씀을 안 드렸네요.

비록 초등교사이지만 문법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교원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에서 문법을 전공했습니다.

 

사범대에 속한 대학원이다보니 중등교사들이 많고,

초등교사라는 제 직업이 주는 편견의 굴레가 제게 늘 씌워져있어 서러움도 있었습니다.

저의 열등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등교사이니 국어의 제반 분야를 제대로 알지 못할 거라는 편견이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도, 또 일부 교수님들께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시선들에 부딪혀 아플 때마다

"나는 숭실대 국문학과 출신이야."를 마음 속으로 새기며,

또 한편으로는 교수님께서 학문에 쏟으셨던 열정적인 모습과 학문을 대하시던 진지한 자세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교수님,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저의 사표(師表)가 되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 뵙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힘든 시기가 좀 지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먼저 드려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연구실로 불쑥 전화를 드리기가 겸연쩍어 메일을 먼저 올립니다.

 

뵙는 날까지 부디 평안하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0년 8월 24일

 

제자 홍정현 올림.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20. 1. 1. 12:09

 

 

Daum 이미지에서

                                                                                                                                                                                                                              백규

 

 

기해년이 뒷산으로 넘어가고 경자년이 앞산에서 넘어왔다. 돼지해가 가고 쥐해가 된 것이다. 돼지도 풍요와 다산(多産)의 동물이지만, 쥐는 거기에 ‘근면성’까지 더하는 동물이다.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쥐에 관련되는 경험과 일화들을 적지 않게 갖고 있다. 우리는 1년 내내 쥐와의 신경전을 벌였다. 추수가 끝나는 늦가을부터 곡식을 두고 그들과 전쟁을 벌였고, 이른 봄에는 소중한 씨앗들을 지키기 위해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종자를 심고 나서도 쥐와 새는 우리의 변함없는 주적(主敵)이었다. 그토록 미운 존재가 쥐였지만, 관점을 약간 바꾸면 그들은 우리가 배워야 할 ‘선생’이었다. 바로 근면성과 민첩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항상 가족단위로 움직이며 부지런히 먹이를 훔쳐내는 ‘기술 좋은 꾼들’이었다. 다산의 동물이니, 많은 자식들을 먹이려면 몸이 부서져라 ‘도둑질’에 나설 수밖에 없는 그들이다. 부성애와 모성애가 출중하고 삶에 대한 집착과 적응력이 누구보다 강한 그들이다. 쉴 새 없이 갉아대고 물어뜯으며 먹을 것을 찾는 그들을 보라. 쥐의 군단이 달려들어 갉아대면 철옹성이라도 단번에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만큼 강한 어금니와 전투력을 갖고 있는 그들이다.

 

지금 나는 쥐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쥐의 ‘다산성과 근면성’에 기대어 올 한 해 나 스스로를 고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처지이기 때문이다. 올해 나는 재직 중인 대학으로부터 생애 마지막 연구년을 얻었다. 대부분의 대학 교수들은 별 문제만 없으면 6년에 1년씩은 연구년을 받을 수 있지만, ‘말년 병장’인 나로서는 참으로 긴요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대를 앞두고 이것저것 할 일도 많다. 옛날 같았으면, ‘당근!’ 이 귀한 연구년을 해외로 나가 연구활동에 몰두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제대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놓칠 수 없는’ 기회. 내 삶터를 잠시도 떠날 수 없다. 문득 지난 세 번의 연구년을 생각해본다. 첫 연구년엔 LG연암재단으로부터 ‘해외연구교수’ 프로젝트의 '따뜻한' 연구비를 받아 미국 UCLA에서 스스로 개안(開眼)하며 '비교문학'의 진수를 익힐 수 있었고, 두 번째 연구년엔 동서유럽 20여 개 나라들을 돌며 ‘유럽문명의 보편성’을 답사∙체험했으며, 세 번째 연구년엔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으로 미국 OSU에서 자아를 확장∙심화시키며 '미국내 소수민족의 문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 연구년. 겸허하고 조신한 자세로 치밀하게 지난날들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멋진 농막’을 완성하는 일이다. 그간 잡초 무성하게 방치해 두었던 에코팜에 작지만 의미 있는 내 ‘마지막 집’을, 정말로 튼튼하고 순조롭게 완성해야 한다. 2월 20일 착공하여 6월 10일 완공할 수 있으려면, 계획과 다짐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리라. 두 번째는 그동안 진행해오던 ‘한중일 악장문학 비교연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문학사 집필’을 현역 마지막 과업으로 삼아 진행해오다가, 5~6년 전 문학사 집필을 뒤로 미루고 앞당긴 과업이 바로 이것. 제대와 더불어 깨끗이 정리하려던 내 연구실을 에코팜으로 고스란히 옮기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 내 시대의 마지막 문학사를 풀 향기와 흙 내음 섞어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가 남다르지 않겠는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향리로 돌아간 도연명과는 처지가 다르겠지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패기나 철학이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고, 그 준비를 제법 ‘옹골차게’^^ 해보려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아, 사람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야 부귀빈천(富貴貧賤)을 가리지 않고 동일할 것이나, 그것들을 ‘내 것’으로 재창조하는 일만큼은 천만 가지로 다를 것이다. 공자는 삼계(三計)를 설명하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고, 일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 일생의 계획은 근면함에 있다’[一日之計在晨 一年之計在春 一生之計在勤]고 했으며, 송나라 학자 주신중(朱辛中)은 인생오계(人生五計)로 ‘생계(生界)∙신계(身計)∙가계(家計)∙노계(老計)∙후계(後計)’를 들었다.[<<독서기수략(讀書記數略)>> 권 24] 지금의 나는 이 가운데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공자의 이른바 ‘근면’을 좇아야 하고, 주신중의 이른바 ‘후계’를 좇아야 하리라. 공자 말씀대로 근면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삶을 마쳐야 후손들에게 남기는 것이 있고, 죽을 때까지 건강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주신중 선생의 말씀대로 ‘후계(後計)’[“60 이상 된 사람이면 안으로 마음을 살펴 추호라도 부끄럼이 없게 해야 한다”]에 따라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다.

 

아, 이제 막 새로운 도전의 경자년이 시작되었다!

‘공자의 말씀대로 근면하게, 주신중 선생의 말씀대로 후계(後計)를 철저하게’ 준비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2. 28. 11:33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

 

 

 

그 옛날의 우물터

 

현대식 관정

 

 

 

 

 

                                                                                                                                    조규익

 

 

노후 전원생활의 꿈을 심고 있는 에코 팜에 얼마 전 우물을 뚫었다. 둥글거나 네모난 형태의 전통 우물을 판 것이 아니라, 드릴(drill)로 뚫고 내려가 지하수맥을 연결하여 물을 길어 올리는 형태의 관정(管井)이니 뚫었다는 말이 맞다.

 

내 어린 시절엔 곡괭이와 삽으로 물 나올 때까지 한 뼘씩 파 들어가는 것이 샘 파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기껏 여남은 길 파내려 가다가 물이 나오지 않으면 포기하고 메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물 뚫어 대번에 물이 나오거나 맑고 맛있는 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 집의 복이었다. 십 여 군데를 파도 물이 나오지 않거나, 나온다 해도 맑지 않거나 맛이 안 좋은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었다.

 

삽이나 곡괭이만으로 샘을 파는 일이니, 쉽지 않은 건 당연했다. 파 내려가는 땅 속에 암반이 누워있는 경우라면 얼른 포기해야 하고, 자갈이 많은 땅도 쉽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이보다 더 답답한 일은 얼마간 파 내려가도 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였다. 수맥이 어디에나 뻗어 있는 건 아니었다. 간혹 수맥이 얕은 경우도 있겠지만,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웬만큼 파다가 물이 안 나온다 싶으면 옆으로 옮겨 다시 파기 일쑤였다. 물이 안 나와도 진득하게 파 내려가다 보면 대부분 물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성질 급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파게 되고, 그러다가 끝내 우물 파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사실 수맥 잡는 기술이 일반화되고 있는 요즘에도 샘 파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물 팔 땐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일까.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야 성공한다는 뜻인데, 지금도 과연 이 말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사실 나는 한 우물세대다. 어려서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말이 한 우물속담이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것들은 이 말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일에도 이 말은 지켜야 할 금언이었다. 우리 시대까지 남자도 여자도 한 번 결혼했으면 죽을 때까지 그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법이었다. ‘결혼한 뒤 맘에 안 맞으면, 헤어지고 다른 여자(혹은 남자)를 취하라, 전제조건 부대의 가언명법(假言命法)으로 바뀐 것은 겨우 21세기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니 맘에 맞지 않아도 맞춰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불문법(不文法)이었던 것이다.

 

남녀문제만 그런 게 아니었다. 공부도, 직장도 그랬다. 한 번 대학에 들어가 전공으로 택하면 졸업 후 밥 먹고 사는 일도 그 전공 혹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직장도 평생직장이라야 했다. 멀쩡한 직장을 중도에 박차고 나가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고 보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들(일부라고 생각되긴 하지만)에는 해괴한 규정이 있었다. 신임교수를 채용할 때 전공적합도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학부-석사-박사가 일치해야 만점인 30점을 주는 규정이었다. 나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학부에서 영문학, 박사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지원자도 더러 있었고, 학부는 이공계, 박사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지원자도 간혹 있었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가점을 주고 싶었으나, 선배들은 엄격하고 가차 없었다. ‘학문도 한 우물을 파야한다는 통념의 힘이었을 것이다.

 

학부에 들어가 외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나 이공계를 전공한 사람이 석박사에서 국문학으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 아닌가. 사실 당시에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에게는 국문학으로 바꾸어도 승산이 있다’, ‘바꾸는 게 절대로 유리하다’, ‘바꾸고 싶다는 등의 판단과 절박한 욕망이 있었거나 바꾸어도 괜찮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기에 바꾸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발발 떨며 올라와 국문학을 택한 내 처지에 전공을 바꾸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시골에서 옛날 하던 식으로한 우물을 파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융합이 대세이니, 대학에서도 옛날의 관행이나 규정은 더 이상 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박을 국문학으로 하신석학 조동일 선생을 이채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아직도 말끔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예의 한 우물인습이 갖는 힘이리라.

 

오늘 작은 아이가 직장을 바꾸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연봉으로도 안정성으로도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최 상위 대기업의 사원인 그였다! 공교롭게도 전직(轉職)을 결정하는 날,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까지 한 터였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시공사(施工社)의 관리직으로 평생을 보내기보다는 좀 더 역동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투자금융사의 경력직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그의 선언에 격려말고는 달리 대꾸할 말이 궁했다. 회사를 위해 젊음을 바쳐도 나이가 들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대기업의 냉혹함을 미리 깨달았던 것일까. 아직 30대 초반의 팽팽한 그의 입장에서 새로운 성공의 가능성을 포착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로선 가슴 떨리는신선함과 두려움의 단안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시대가 바뀌었음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니, 분명 내 의식의 밑바닥에는 한 직장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착각이 아직도 똬리를 틀고 있음이 분명하렷다?

 

***

 

한 우물을 파면서도 용케 패자로 전락하지 않고 살아온 내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본다. 이제 한 우물만 파다가는 목도 축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인식과 의식의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그렇다면 내가 파온 한 우물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문득 그 옛날 시골의 나간 집 우물을 떠올려 본다. 우물은 쓰지 않으면 반드시 퇴락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괜히 빈 집의 우물에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고 떠난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날아들고, 큰물에 자갈들이 밀려들기도 한다. 낮으로 밤으로 우물 밑바닥에는 흙이 솔솔 들어찬다. 그러다가 한 십년 지나면 언제 그곳이 우물이었던가 싶게 평평해진다. 우물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삶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열심히, 죽을 때까지 새롭게 파거나 보수하지 않으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게 우리네 우물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곡괭이를 메고 그간 매달려 온 '한 우물'을 더 파기 위해 집을 나선다.

 

 

 

드릴로 관정 뚫는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2. 26. 12:00

인생 후르츠를 에코팜에서...

 

 

                                                                                                          조규익 

 

 

 

 

 

 

아내의 손에 이끌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본 다큐영화 인생 후르츠를 보러 가는 길.

 

일본영화, 그것도 다큐라는 점이 매력을 반감시켰으나, 전원에서 삶을 마감해가는 노부부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에코팜 주인인 내 흥미를 끌었다.

잡답(雜沓)의 도회에서 적막강산 에코팜으로, 에코팜에서 다시 알 수 없는 저세상으로 입사(入社/initiation)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사실 적절한 참고서가 필요하던 차였다.

 

 

 

 

 

원제로 보이는 ‘Life is Fruity'.

인생은 감미로워라혹은 '인생 결실' 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리라.

진세이 흐루--’ 라고 느릿느릿 나직이 깔리는 일본인 여성 내레이터(키키 키린)의 음성도 노인들의 호흡에 맞춘 것일까. Slow Life를 손에 잡을 듯이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아이치현(愛知県) 가스아이시(春日井市)의 고조지(高蔵寺) 뉴타운. 45,000의 인구가 모여사는 이 도시의 변두리에 그들의 집은 그림인  듯 온갖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 숲에 70여 종의 채소들, 50여종의 과수들이 모여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슈이치가  존경하던 선배 건축가 안토닌 레이몬드의 집을 본떠 지은, 40년 된 작은 집이다.

 

1950년 도쿄대학 요트부원이었던 슈이치와의 만남, 1955년의 결혼 등으로 시작되는 두 사람의 스토리는 1945년 패전, 1960년 나고야 교외의 뉴타운 설계, 1970년 고조지 뉴타운 집합주택 입주 등으로 이어지면서 약간의 서사성이 가미된다. 그러나 최근까지 이어지던 그들의 서정적 삶은 1975년 뉴타운 안의 300평 토지를 구입하면서부터다. 숲을 남기고 바람 길을 만드는 꿈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던 슈이치의 마스터 플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박한 꿈이 실용주의에 밀려 상자를 모아놓은 것 같은 신도시의 모습으로 바뀌고 마는 현실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슈이치는 고조지의 뉴타운에 50년째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슈이치가 90세 되던 해 사가현 이마리의 정신과 병원에서 사람이 찾아온다. 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고자 슈이치에게 조언을 구한 것. 사례금과 설계료 등을 일체 받지 않은 그는 멋진 설계도를 건넨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꾸준히,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라는 충고와 함께. 생전에 그 건물을 보고 싶어했지만, 결국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8개월 되던 시점부터 이마리에는 슈이치의 설계대로 건축이 시작되었고, 완공 후 그 시설을 히데코가 방문하게 되었다. 가슴에는 슈이치의 사진을 안고...

 

90세의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87세의 이쁘고착한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 ‘둘이 합쳐 177이란 멘트가 자주 들려왔다. 177살을 살면 신선이 될 만한 나이인데, 그들은 과연 신선일까. 신선이 별 것이던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면 신선이 된다. 애면글면 삶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신선이다! 불로장수(不老長壽)의 해탈 경에 든 두 노인이 신선처럼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느릿느릿 살아가고 있는 삶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한 폭의 수채화나 감미로운 서정시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가 떨어진다

이파리가 떨어지면 흙이 비옥해진다

흙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맺는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내레이터는 간헐적으로 시 구절같은 이 말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뭔가 허전했다. 생각해보니 생략의 미학이 구사되고 있었음을 영화가 끝난 뒤에야 깨달았다. 장난삼아 다음의 말을 덧붙여 본다.

 

열매가 떨어지면 싹이 튼다

싹이 자라면 나무가 된다

나무에 이파리가 달리면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가 떨어진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 생략된 부분을 채워 넣으니 윤회(輪廻)’의 한 고리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함께 죽은 뒤 육신을 태워 남태평양에 뿌렸으면 좋겠다하얗게 웃는 히데코 할머니의 얼굴이 빛난다.

육신의 재가 태평양에 뿌려진 뒤 다시 무슨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노부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을 감싸고 돌아가는 자연의 모습만 되뇔 뿐이었다.

그 이상의 일은 자신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초탈(超脫)의 경지랄까.

 

두 노인의 삶에서 복잡다단한 것들을 모두 약분하면 남는 건 성실과 무욕두 가지였다.

일생을 건축가로 지내온 할아버지 슈이치는 자연과 어우러진 주거공간을 성실히 만들고자 했다.

자신의 철학과 미학을 듬뿍 담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는, 일이 본 궤도에 오르면 슬쩍 빠지곤 했다.

열매를 탐하지 않겠노라는 무욕의 자세이리라.

등이 굽은 히데코 할머니는 일생 텃밭을 가꾸고 할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만들며 살아왔다.

텃밭의 딸기를 수확하여 굽는 케이크도 슈이치를 위한 것이었다.

할머니가 만든 음식, 할머니가 내놓는 아이디어에 언제나 좋아!’로 대응하는 할아버지 슈이치.

에덴동산에 내려 보낸 천상의 배필이다!

 

에코팜의 주인인 나는 종말에 인생 후르츠!’를 외칠 수 있을까.

정원에 가득한 모과나무, 감나무, 도토리나무들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삶의 이치를 깨닫고

성실과 무욕 속에 자적할 수 있을까.

잡초를 뽑고 나서 잠들었다가 잠든 모습 그대로 저세상에 입사(initiation)한 슈이치처럼 윤회의 한 도막을 추하지 않게마감할 수 있을까.

 

***삼가 슈이치 할아버지의 명복과 히데코 할머니의 행복을 빕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