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1. 19. 16:24

 

  나이타령

-정치인들에게-

 

 

 

 


세종대왕

 

 

 

세종 18(1436) 326일의 일이다. 당시 판중추원사를 지내던 허조(許稠)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중추원은 왕명의 출납(出納)이나 병기(兵器)군정(軍政)숙위(宿衛) 등 임금 주변에서 군무나 경비를 담당하던 핵심 부서였고, 판중추원사는 정2품의 고위직이었다. 조선조 18개 품계 가운데 정1, 1품 다음의 세 번째로 높은, 오늘날로 치면 장차관이나 도지사급에 해당하는 직급이었으니, 권세 또한 막강했을 것이다.(그는 좌보궐로 조선조의 벼슬을 시작하여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이르기까지 문무의 요직들을 두루 역임했다.)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그는 조선조에 들어와 국방은 물론 조선조 예악정치(禮樂政治)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태종 때는 명나라 사행 길에 서장관으로도 참여하여 국제적인 안목까지 갖추게 되었으니, 핵심 요직에서 조선왕조의 토대를 굳건히 하고 중세적 질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었다. 조선조 건국과 함께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해 오다가, 연부역강(年富力强)마흔아홉에 세종의 치세를 맞이한 그의 기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세종 조에 들어와 20년 가까이 활약한 뒤 67세에 이르자 왕에게 치사(致仕)를 요청한 것이다. 그 시대로 보면 고령이었고, 세종은 39세의 팔팔한 청춘이었다. 그가 요청한 사직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종척(宗戚)도 아니고, 훈벌(勳閥)도 아니며, 공의(公議) 또한 호의적이지 않다.

2. 평소의 질병으로 근력은 쇠약하고 피곤하여 걷기가 힘들 뿐 아니라, 정신이 없어져서 앞뒤를 기억하지 못한다.

 

육체적정신적 노화현상을 밝힌 2는 지극히 평범하여 누구나 수긍할 만 하다. 그러나 임금의 친척도 아니고 공신의 후예도 아니라는 점과 함께 공의가 호의적이지 않다1의 이유는 요즘에 비추어 보아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임금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그가 밝힌 사의를 반려한다.

 

1. 나이는 높으나, 눈과 귀는 밝고 자세하며 근력은 아직 편안하고 튼튼하다.

2. 만년(晩年)을 온전하게 하여 공명(功名)을 보전하고자 하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3. 그러나 좋은 계책을 내고 큰일을 결정할 때 임금인 내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4. 몸을 보전하고자 하는 것과 나라의 임무를 맡는 것 중 무엇이 더 중한가?

5. 그래서 사직을 윤허할 수 없다.

 

그로부터 3년 후인 70에 사망한 것을 보면, 실제로 그는 그 때쯤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겪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허조가 사직의 결정적 이유로 제시한 1은 무엇이었을까. 원문(“猶竊殊寵, 私自未安, 公議何如?”)‘(임금의)특별한 사랑을 독차지함이 스스로 편안치 않은데, 사람들의 뒷말은 어떻겠습니까?’로 풀어도 좋으리라. 말하자면 나이를 먹어서까지 임금의 총애를 독점하는 그에 대한 뒷담화들이 많았던 모양이고, 사실 그로서는 육체적인 질병보다 그것들이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67세에 사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학문이나 경륜의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그를 물러나게 할 수 없었다. 39세의 왕이 보기에 67세의 원훈대신(元勳大臣)은 나라의 믿을만한 기둥이었으리라. 패기 하나 믿고 경륜의 노년을 업신여기는 젊은 친구들이 미덥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극구 떠나가려는 허조를 붙들어 앉힌 것이나 아닐까.

 

***

 

이와 관련, 요즘 벌어지는 선출직 65세 정년론(停年論)’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개운치 않다. 그 문제를 제기한 표창원 의원은 현재 51세이니, 14~5년 후인 그의 65세에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으나, ‘친문으로 분류되고 있는 그가 반기문 전 유엔총장을 견제하고 문재인 전 의원을 돕기 위해 이런 논의를 제기했다고 보는 항간의 풍문도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도우려는 문재인 전 의원이 올해로 64세임을 감안하면, 그런 항간의 의혹이 정확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그가 언급한 65세가 은퇴하기에 적절한 나이임에는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표 의원의 전직이 대학교수임을 감안하면, 아마도 대학교원들의 정년을 쉽게 떠올렸을 것이다. 나 역시 65세가 되면 미련 없이 강호로 들어가 조월경운(釣月耕雲)’하며 남은 삶을 엮어가려 한다.

 

그런데,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이른바 ‘100세 시대. 가끔 동네 사우나에서 70대 어른을 한 분 만난다. 구릿빛 몸매와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며 나보고 근육운동을 권하시는 분이다. 근육질의 70대와 선병질(腺病質)20대가 공존하며 경쟁하는 것이 오늘날의 특징이다. ‘가스통으로 불리는 부정적 노인들도 있지만, 지혜와 경륜을 갖춘 어른들도 적지 않다. 단순히 육체 나이를 들이대며 은퇴를 강요하는 것은 구시대의 사고방식이다. 바람직한 희망과 목표를 갖고 노력하는 경우에만젊음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다. 아무런 공부나 대책도 없이 성질 부룩거리고, 막말이나 해대는 것을 젊음의 특권이라 여긴다면, 그건 나라와 민족에게 재앙이다. 그런 젊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최근 저잣거리에 나와서 표를 구걸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라. 괜찮아 보이는 인물들은 잘 알려지지 않아 당선의 가능성이 없고, 제법 지지율이 높은 인물들은 대부분 경륜이나 식견이 매우 모자라 믿음을 주지 않으며, 심지어 인간성이 개차반으로 보이는경우까지 있어 걱정이다. 거기에다 나이의 잣대를 들이대어 그나마 잘라 버린다면, 도대체 경륜 있는 지도자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공자

 

 

공자는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이라 했다. "후생이 두렵나니 어떻게 미래의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만 못할 줄로 알겠는가? 사오십 세가 되어도 명성이 없다면 이 역시 두려워할 게 못 된다."고 번역되는 이 말에는 크게 두 가지의 뜻이 들어 있다. ‘나이 먹었다고 젊은이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 그 하나요, ‘40, 50이 되어 제대로 된 명성을 얻지 못하면 그 젊음도 별 볼 일 없다는 것이 그 둘일 것이다.

 

첫 번째는 당연함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두 번째는 요즈음의 현상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갖는다. 40이나 50이 되어, 아니 그 이전에라도 뜨는인사들은 부지기수다. 그런데, ‘무엇으로뜨느냐가 문제다. 막말로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여(그들을 속여서) 뜨는 것도 공자의 이른바 명성[]’이라 할 수 있는가. 교묘한 심리적 사술(邪術), 이른바 포퓰리즘으로 유권자들을 속여서 뜨는 것도 그 명성의 범주에 속하는가. 자기편에 선 사람들을 조종하여 상대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갖도록 함으로써 뜨는 것도 그 명성의 범주에 속하는가. 공자가 말씀하는 문()이란 군자로서의 소문이고, 군자란 도와 덕에 바탕한 훌륭한 인간상이라면, 무엇으로 떠야 하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살 넘은 자들은 물러서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이제 ‘50대가 깃발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발언들은  대부분 육체나 물질의 허상에 잡혀 있는 자들의 텅빈 구호일 뿐이다. 세상을 경영할만한 덕과 방책을 갖추고 있기만 하다면, 지금 그들이 몰아내고자 하는 연령대의 인물들을 지도자로 뽑는 데 무슨 문제가 있으며, 20대나 30대인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설마 표 의원이 자신의 나이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그런 말 자체가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 것은 오늘날 지식사회의 의식이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른바 정치인들이여, 쓸데없는 말로 가뜩이나 경조부박(輕佻浮薄)한 이 사회를 흔들지 마라! 한 마디 말이라도 아끼고 좋은 일들을 더 많이 실천함으로써, 방황하는 젊음들을 제대로 이끄는 삶의 푯대가 되어 달라! ‘나이 타령같은 요설(妖說) 말고, 제대로 된 담론(談論)으로 우리 사회의 품위를 한 단계 높여달라!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15. 1. 7. 15:22

 

 

 

 

 

 

 

 

세종대왕이 만든 조선조 최고의 악무  봉래의를 복원ㆍ해석  

봉래의에 대한 음악ㆍ문학ㆍ무용의 융합 연구결과를

<<세종대왕의 봉래의, 그 복원과 해석>>으로 출간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저는 을미년 벽두에 문숙희 박사(전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손선숙 박사(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 등과 함께 <<세종대왕의 봉래의(鳳來儀), 그 복원과 해석>>(민속원)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7’로 출간했습니다.

 

지난 3년간 3회에 걸쳐 봉래의 복원 공연을 국립국악원의 무대에 올렸고, 그 결과를 DVD로 담아 이 책에 붙여 놓기도 했습니다. 문학 분야인 악장의 연구를 제가 맡았고, 음악을 문숙희 박사가, 무용을 손선숙 박사가 각각 맡았습니다. 제 분야인 악장이야 그다지 보실 만한 건 없으나 음악이나 무용 분야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봉래의를 복원한 점은 무엇보다 내놓고 자랑할 만합니다. 이 책을 찬찬이 읽어 보시면 세종대왕이 그리던 새 왕조 조선의 미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번 연구 작업을 통해 왕조의 미래에 대한 꿈을 엄청난 규모의 예술로 승화시켜 놓은 세종대왕의 능력과 통찰에 새삼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대강의 내용을 추려 아래에 붙여 놓습니다.

 

***

 

‘2014년 한국연구재단 우수 연구 성과로 선정된 바 있는 이 책은 문학음악무용 분야를 전공한 세 저자들이 융합적 시각에서 세종대왕이 지은 조선조 최대 악무(樂舞) 봉래의를 복원하고 해석한 결과물이다. 1443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그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제작하게 했으며, <용비어천가>를 노랫말로 올린 가악의 종합예술체인 봉래의를 몸소 만들었다. 1445(세종 27) 왕명으로 지어올린 <용비어천가>의 일부 가사를 악곡에 올리고 무악(舞樂)으로 구성하여 조선조 후기까지 연행(演行), 조선조 최대의 창작 악무가 바로 봉래의인 것이다.

 

봉래의는 여민락치화평취풍형으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악무다. <<서경>> <익직(益稷)>으로부터 나온 봉래의란 말은 잘 다스려진 상황을 비유한 표현인데,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봉황래의(鳳凰來儀)’라는 명칭을 붙인 후대의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여민락(與民樂)’여민동락(與民同樂)’ 혹은 여민해락(與民偕樂)’과 같은 뜻으로 <<맹자>> <양혜왕 장구 하>에 등장하는 여민동락에서 나온 말이다. 임금이 덕을 지닌 경우 징발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임금을 위해 정원을 만들고 그 정원에서 임금이 즐기는 모습을 기뻐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바로 여민동락의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봉래의 악무의 첫 정재를 여민락으로 잡은 세종의 뜻은 하늘의 뜻으로 세운 왕조에서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는 첫 조건이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라는 점에 있다. <용비어천가>1~4장과 졸장 등 다섯 개의 장을 뽑아서 구성해 놓은 것이 바로 여민락이다.

 

치화평(致和平)’<<주역>> <하경> ‘택산함괘에 대한 정자(程子)의 설명에 등장하는 말로서 천지와 인심의 감통(感通)에 바탕을 둔 조화가 천하태평의 요체임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정자의 설명 가운데 핵심은 천지가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하는 이치와 성인이 인심을 감동시켜 화평을 이루는 도를 관찰하면 천지만물의 정을 가히 볼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인심을 감동시켜 화평을 이루는 도그것이 바로 치화평이다. 치화평에서는 <용비어천가> 1~16장과 125장의 국한문 가사들을 악장으로 끌어다 사용했다.

 

취풍형은 <<시경>> <주송> ‘집경13구인 기취기포(旣醉旣飽)’<<주역>> <하경> ‘뇌화풍(雷火豐)’괘에서 따온 개념이다. 취풍형이란 말 속에는 군신이 배불리 취해도 예에 어그러짐이 없음/풍형에도 절제가 있어야 함이란 두 가지의 뜻이 들어 있다. 즉 군신이 태평세월을 구가하고 즐기면서도 예에 어그러지지 않는 절도를 지켜야 하며,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에 지나치게 도취하여 절제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용비어천가> 1~9장 및 125장의 국한문 가사를 악장으로 끌어다 쓴 것이 취풍형의 악장이다.

 

이처럼 봉래의 악무에 들어 있는 세 정재[여민락, 취화평, 취풍형]들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용비어천가>의 주제로 제시된 경천근민[敬天勤民: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위해 부지런해야 함]’의 행동강령을 공유한다. 말하자면 백성들과 함께 하거나 신하들과 함께 하며, 백성신하와 함께 해도 공통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후왕들이 경천근민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처럼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을 종합한 봉래의 악무에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상대로 조선왕조 건국의 의의와 육조(六祖)의 시련을 깨우쳐 주고, 후왕들이 나라를 잘 보수(保守)함으로써 왕조가 영속될 수 있도록 하라는 세종의 뜻이 주제의식으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봉래의 다섯 곡은 전인자 3소박 8박자여민락 2소박 8박자치화평 3소박 4박자취풍형 323 혼소박 6박자후인자 3소박 8박자의 리듬으로 진행된다. 음악의 템포는 노래와 무용 모두를 좌우하기 때문에 가악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궁중 정재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또 가사의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템포가 타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봉래의를 구성하는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의 본체는 만()()()으로 구분되었고, 여민락과 치화평의 템포는 메트로놈 상으로 유사했고, 취풍형은 이 둘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나타났다. 여민락은 2소박이고 치화평은 3소박이기 때문에 여민락이 치화평보다 조금 더 느리다고 할 수 있다.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은 각각 길고 복잡한 장단으로 되어 있으나, 이번 복원 공연에서는 긴 장단 속에 세분되어 있는 리듬 단위로 장단을 짧게 단순화하여 연주했다. 그 결과 장고가 음악과 무용을 이끌기에 용이했고 또 액센트가 짧은 주기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음악과 무용에 생동감을 주었다.

 

무용의 경우 확실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난점이 있었다. 즉 문헌에는 무기(舞妓)들의 대형 형태, 이동과정, 춤사위 등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어느 시점에 어떤 발로 어떤 속도로 어떤 방향으로 돌아 어느 위치로 이동해야 하는지 등 실연(實演)에 필요한 내용들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봉래의의 무용을 복원함에 있어서 이런 부분들은 <<악학궤범>>에 수록된 여러 정재들과 정재의 무도(舞圖)들을 통합비교하여 음악과 노래, 무기들의 위치 및 이동 공간 등의 상호 관계를 통해 찾아냈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춤사위는 봉래의 춤 전체의 진행 구조를 통해 찾아냄으로써 봉래의 춤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음악이나 무용도 악장 내용의 전개와 함께 함을 확인했는데, 이렇게 가악으로 임금에게 교훈적인 말을 전달하고자 한 제작 의도는 가악의 융합정신이 봉래의라는 종합예술 속에서 충분히 구현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이상과 같이 세 연구자는 음악이 기보되어 있는 <<세종실록악보>>, 춤 순서 및 노래 가사가 기록되어 있는 <<악학궤범>>을 통해 봉래의를 융합적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악에 관련된 여러 전제조건들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봉래의의 종합예술체적 성격을 완벽에 가깝도록 복원한 점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고, 그것은 세 차례의 공연을 통해서도 입증된 바 있다.

 

 


공연 팸플릿

 

 


세종실록

 

 


세종대왕

 

 


공연에서 세종으로 분장한 배우 정훈씨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 06:06

 

 

 

체로키어 ‘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1128일 아침 스틸워터를 출발, 털사를 거쳐 오후 3시쯤 체로키 네이션(Cherokee Nation)의 수도 탈레콰(Tahlequah)에 도착했다. 도시로 진입하자 전체적으로 약간 이색적인 기풍이 느껴지는 점만 제외하면 미국의 여느 지역 도시들과 다를 바 없었다. 중국식 표현으로 말하면 미국 판 만족(蠻族) 이라고나 할까. 간판의 영문글자 위에 작은 글씨로 체로키 글자들이 병기되어 있는 것만 다를 뿐 교통체계, 건물 양식,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여타 지역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미국 땅이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깃발


체로키 네이션의 문장(紋章)


stop 사인 위쪽의 글자는 같은 뜻의 체로키 글자

 

미국 백인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거나 말거나 이곳에서는 체로키인들 나름의 생활을 볼 수 있길 바랐으나, 그건 내 순진한 소망이었을 뿐. 호텔과 월마트, 주유소 및 맥도날드 몇 군데만 열려 있을 뿐 모든 곳이 꽁꽁 닫혀 있었다. 일단은 실망이었다.


 


체로키 네이션 안에서 유일하다는 체로키 고유 음식점. 명절날 점심에 잠깐 열었다가
닫은 모양이다.

 

***

 

인디언으로 보이는 호텔 프런트 아가씨들의 설명을 듣고 체로키 네이션 본부와 헤리티지 센터 및 뮤지엄을 찾아갔으나, 사람 없는 곳에 청설모들과 사슴들만 분주하게 그들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베테란 센터


체로키 네이션의 정부 청사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입구


헤리티지 입구에서 만난 사슴(노루?)들

 

하릴없이 돌아오면서 월마트에 들렀다. 다른 곳과 달리 그곳엔 사람들이 미어질 정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품 매대(賣臺)마다 금줄이 둘러져 사람들의 손을 막고 있었고, 그 앞과 옆으로 카트를 밀고 있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점원들은 그들의 주위를 오가며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 이제 6시만 되면 일제히 달려들어 자신들이 점찍어둔 물건들을 카트에 실을 태세들이었다. 이른바 몇 시간 앞당겨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였다.

 


이 날 월마트(Walmart)는 블랙프라이데이 때문에 붐볐다.

 

미국 전역에서 Thanksgiving Day가 끝나자마자 모든 상점들은 엄청난 할인 가격으로 재고물량을 소진시키는 행사들을 갖곤 하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가전제품 등 고가의 물품들이 그 주된 대상일 텐데, 비디오 코너나 어린이 용품 코너에도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모든 품목이 다 해당되는 듯 했다. 인디언 문화를 보고자 여러 시간을 소비하며 찾아왔으나, 정작 인디언들은 보지 못한 채 멀미나게 목격해온 미국의 물질문화, 소비문화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릴없이 하룻밤을 호텔 방에서 묵고 다음 날 찾은 뮤지엄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체로키 사람들이었고, 명절 연휴라서인지 관람객은 한 두 가족에 불과했다. 뮤지엄에서는 체로키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찍은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으로 불리는 강제 이동의 역사적 사건을 사진으로, 그림으로, 기록으로, 모형으로 세밀히 보여주고 있었다.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자그마한 집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정복당한 민족의 운명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컬렉션을 설명해주던 큐레이터에게 한국과 체로키 문화의 동질성에 관한 내 의견을 말하며, 일례로 그들의 인사말인 ‘Osiyo[welcome의 뜻]’가 우리말의 오세요/어서 오세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자[물론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나의 희망적인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인사말보다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디아스포라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이 박물관의 핵심 테마인 눈물의 여정에 기막히게 오버랩 되어 있었고, 정작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사진 전시회의 포스터


'눈물의 여정' 설명판 


국립 체로키 뮤지엄


Andrew Hartley Payne의 달리는 모습. 그는 1928년 열린 '미 대륙횡단 도보 경연대회'
[1928년 3월 4일 LA를 출발하여 같은 해 5월 26일 뉴욕에 골인]의 우승자로서
체로키 인디언의 후예다.


체로키 레스토랑의 출입문에 쓰여진 'Osiyo'


체로키 네이션에서는 어딜 가나 'Osiyo'가 보인다.

 

건물 밖에도 그들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정착 당시의 일반 가정들과 학교, 교회, 상점, 대장간, 마굿간, 닭장까지, ‘눈물의 여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기증으로 그곳에 재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체로키의 관습을 몸으로 보여주는 체로키 남성 가이드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젊은 가이드는 체로키 의식(儀式)’에서 불리던 노래와 춤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체로키 인들은 유일신을 숭배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와 함께 그는 작은 돌들을 집어넣은 소형 거북이 껍질들을 여러 개 묶어 만든 그들만의 타악기를 보여 주었다. 발에 전대처럼 차고 처륵처륵소리를 내며 많은 사람들이 군무(群舞)를 추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봄철이면 많은 거북이들이 땅 위로 출몰한다고 했다.

 


정착 초기에 살던 집


집 앞에 서 있던 음식 저장고


새 희망 교회[New Hope Church]


가정집에서 부인이 사용하던 직물 기계. 우리의 베틀과 비슷한 원리를 갖고 있다.


농가


농가의 내부


집 바깥에 걸어둔 등


학교 건물


교실. 영어 알파벳과 체로키 문자가 함께 적힌 칠판이 보인다.


야외 마굿간에서 만난 '명상에 잠긴 말'

 


가이드 나탄의 노래를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세요.

 


마른 거북에 돌들을 넣어 만든 악기를 들고 의식의 실제를 보여주는
젊은 가이드 나탄(Mr. Nathan Wolfe)


젊은 가이드의 또 다른 포즈

 

다른 두 명의 중년 가이드들은 각각 전통 사냥법과 활 전문가였다. 한 사람은 대나무에 침(針)을 넣고 입으로 불어 토끼 등 작은 동물들을 잡는 시범을 보여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돌을 갈아 살촉을 만들고, 강하고 큰 활에 그 화살을 메겨 적에게 쏘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설명을 통해 총으로 무장한 백인 침입자들의 출현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당시 체로키 인들의 비참한 상황과 역사의 아이러니가 눈앞에 떠올랐다.

 


대롱에 넣은 침을 입으로 불어 작은 동물을 잡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돌 화살촉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헤리티지 뮤지엄을 떠난 우리는 탈레콰 다운타운으로 진출했다. 조용하고 널찍한 도로 양 옆으로 건물들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1자형 간선도로가 끝나는 곳, 도시의 핵심이자 다운타운을 내려다보는 위치 양지바른 곳에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0명 규모의 작은 대학이지만, 아주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학교 중앙에 세쿠오야(Sequoyah)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대학은 이곳 체로키 네이션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듯 했다.

 


탈레콰 다운타운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멋진 캠퍼스

 

체로키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쿠오야는 문화의 기록과 전승을 가능케 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원래 그는 은 세공장이었는데, 1821년 독자적인 체로키어 음절표를 만들어냄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지적 활동에 큰 혁명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글자 없던 사람들에게 효율적인 쓰기 체계를 만들어 준 일보다 더 큰 공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이 음절표를 만들어 내자마자 그것은 체로키 네이션에서 급속히 번지게 되었고, 1825년에는 네이션에서 공식 채택됨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문자 해독률은 주변의 백인 정착자들을 뛰어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체로키인들에게 세쿠오야는 우리민족에게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이곳 체로키 네이션 어딜 가나 세쿠오야의 사진이나 동상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세쿠오야의 동상

 

NSU에서 나온 우리는 체로키 국립 대법원 박물관[The Cherokee National Supreme Court Museum]’체로키 국립 감옥 박물관[Cherokee National Prison Museum]’ 등에 들렀다. 탈레콰 타운 광장의 남동쪽에 위치한 대법원 박물관은 1844년 피어스(James S. Pierce)가 세웠으며, 체로키 네이션의 대법원 청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또한 체로키 네이션의 공식 간행물이자 오클라호마 주 최초의 신문인 체로키 애드버킷’[Cherokee Advocate, 1844년부터 1906년까지 간행]의 첫 인쇄 행사가 열린 곳도 바로 이 건물이다.

 


상공회의소 겸 관광안내소


탈레콰 시청


국립 체로키 대법원 뮤지엄 표지판


국립 체로키 감옥 박물관


1880년대 사용되던 수갑을 본떠 다시 만든 것


죄명에 따른 당시의 판결. 살인범은 교수형에 처했다. 계획살인에 단 3~5년형을 부과해놓고도
'중형'이라 너스레를 떠는 우리나라의 법관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법 정신이다.


당시 감옥의 주방


당시 감옥의 모습

 

체로키 애드버킷은 문화민족 체로키 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간행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1844926일 창간호에 실린 우리의 권리,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란 그들의 모토야말로 오늘날 우리도 수시로 외치는 구호가 아닌가? 당시 이 신문은 체로키 인들에게 미국과 미국인들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체로키어와 영어로 매주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당시 미국 내의 유일한 민족 신문이었으며, 이 신문의 발간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850년엔 촉토 인텔리젠서(Choctaw Intelligencer)’, 1854년엔 치카사 인텔리젠서(Chickasaw Intelligencer)’가 각각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하여 잘못 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도 누구 못지않은 지능과 식견을 갖고 있음을 그들의 박물관들에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Cherokee Advocate> Vol. 30, No. 3.[1906년 3월 3일자]

 

***

 

체로키 네이션을 방문한 것은 아직도 광활한 미국 땅에 온존하고 있는 식민주의의 잔재와 그 근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다수자들의 통치논리에 순응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을 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 위한 글자체계를 만들었고, 신문까지 발행했으며, 합리적인 사법 시스템까지 운영했던 그들의 지능과 문화를 과연 지배자로서의 백인들은 제대로 인식해온 것일까. 물론 과거의 역사를, 복수를 위한 근거자료 만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완전히 잊어버릴 경우, 삶의 바탕인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주 아름답고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는 박물관들에 그 증거물들은 시퍼렇게 눈을 뜬 채 살아 있었다.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빌리지에서 가이드와 함께 한 백규


빌리지 가옥 앞에서 Melani


북동부 주립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오세이지족 인디언 소년 Joshua군과 함께.
부자간으로 보이지요?^^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1. 11. 01:51


“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서울 시장의 홈피[원순닷컴]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찌르는 말 한 마디를 발견했습니다.

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어문대학장인 유재원 교수가 박 시장에게 보낸 메일의 제목이었습니다. 유 학장의 호소 속에는 언어학자의 프로의식과 함께 말기에 접어든 우리의 병통을 호소하는 지식인의 절규가 들어 있었습니다. 우선 유 학장의 메일 내용을 읽어 본 다음 제 생각을 덧붙이겠습니다.

***

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위치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부터 영국의 대학 평가 회사인 QS(Quacquarelli Symonds)와 공동으로 실시하는 “아시아 대학 평가”에는 한국어 논문에 대한 점수가 아예 고려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 QS라는 회사는 2003년부터 영국의 The Times와 세계대학평가를 실시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The Sunday Times와 US News and World Report를 통해 세계 대학평가를 시행할 예정이라 한다.

조선일보의 대학평가 기준은 ▶연구능력(60%) ▶교육수준(20%) ▶졸업생 평판도(10%) ▶국제화(10%) 등 4개 분야를 점수화해 순위를 매기는 것으로 연구 능력과 국제화가 모두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을 전제로 평가되기 때문에 결국 영어 논문 비중이 70%나 반영되게 짜여 있다. 또 평가의 총괄 책임자도 벤 소터라는 영국 사람이 맡고 있다.

QS의 대학 교수 연구 능력 평가는 ‘스코퍼스(
http://www.scopus.com’)라는 네덜란드 회사가 만든 데이터 베이스와 검색 엔진을 이용하여 각 대학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과 논문 당 인용수를 검색하여 교원 수로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서의 스코퍼스 관리는 ‘엘즈비어 코리아’에서 하고 있음.) ‘스코퍼스’사는 세계 약 25,000여 개의 학술지를 국제 저명 학술지로 등록하고 있는데, 이 학술지들은 모두 영어로 쓰여 있다. 이 기준을 따르면 한국어로 쓴 논문은 ‘0’점으로 처리되게 마련이다.

이런 평가 기준에 대한 각 대학의 반응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모든 대학은 국제 저명 학술지 게재율을 높이기 위하여 상당한 특혜를 베풀고 있다. 보기로 부산대학에서는 SCI나 SSCI, A&HCI 1 편당 현재 1 억을 지급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경희대는 국제 저명 학술지 논문 1 편당 600 점을 부여한다.

이와 같이 한국어로 논문을 쓰면 ‘0’점을 받고 영어로 논문을 써서 국제 저명 학술지에 실리면 거금의 포상금을 받는 현실에서 한국 대학 교수들이 한국어로 논문을 쓰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어로 논문을 쓰는 교수는 ‘패배자[looser]’임을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만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우리말 한국어는 이 땅에서 학문어로서의 지위를 영원히 잃고 저급한 2류 언어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이것은 예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대학 개혁이 성공할 경우,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나 인도, 필리핀과 같은 나라의 위치로 전락할 것이다. 이들 나라의 지식인을 비롯한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모국어로는 학문도 철학도 할 수 없어 영어로 모든 고급 문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최대 지성이자 사회의 지도 계층인 대학 교수들을 비롯한 한국 학자들이 더 이상 한국어로 논문을 쓰지 않을 때, 한국어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학문과 문학을 창조하지 못하는 언어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지극히 간단한 이치다. ‘청(淸)’을 세운 만주족과 ‘원(元)’을 세게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던 몽골족도 한자와 중국어에 문화 주도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인류 최초의 학문과 사상, 문학을 꽃피웠던 수메르어와 산스크리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라진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지금의 유럽 문명의 모태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아직도 서양 여러 나라의 언어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모든 고급문화 생활이 영어로 이루어지게 되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문맹’에 빠지게 된다. 지금 영어를 문화어로 내세워 한국어를 말살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일반 국민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언어 차별은 인종 차별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땅에서 영어를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인종 차별을 받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한국어 천대 현상이 계속되는 한, ‘영어를 하는 한국인’과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으로 나뉘어 차별을 받게 될 날도 멀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무도 나서서 저항하지 않으면 말이다.

***

유 학장의 글을 읽어보신 소감들이 어떠신지요? 참, 절박한데도 그동안 여러분이나 저는 전혀 그 절박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요? ‘말 없는 삶’을 상상해 보셨나요? ‘말을 잃으면 정신을 잃는다’는 격언도 들어서 알고들 계시겠지요? 우리에겐 우리말을 빼앗긴 채 살아본 세월이 있었습니다. 또 우리말을 표기할만한 글자를 갖지 못하고 살아온 긴 세월이 있었지요. 최근 어떤 방송에서 한글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 세종대왕의 삶을 스토리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된 바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내용이 사실인지 허구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민족사[혹은 민족 정신사]의 방향을 바꾸게 된 세종대왕의 깨달음이나 결단이 어디서 나왔으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작가 나름의 ‘상상력’이 얼마나 핍진(逼眞)하게 마음에 와 닿는지 우리 모두 공감하지 않았던가요?

독일의 애국자이자 철학자인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를 잘 아실 겁니다. 그의 유명한 글 <독일국민에게 고함>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독일’ 대신 다른 어느 국가나 민족의 이름을 넣어도 통할만한 보편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글 가운데 오늘날의 우리 현실과 관련하여 큰 깨달음을 주는 문제가 바로 ‘언어’의 존재와 의미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언어를 매개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은 국어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 언어는 한 민족의 특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 즉 한국인[피히테가 말한 ‘독일인’을 제가 한국인으로 바꾸었습니다]은 한국어라는 살아 있는 특수한 언어를 통해서만 무한히 한국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 살아 있는 한국어를 말하는 한국인은 ‘신적 본질’을 지향하여 드높여질 수 있다는 것[고양(高揚)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가 주장한 민족어의 중요성이지요.

우리나라에도 고금을 통해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선각자들은 많았습니다만. 그 가운데 ‘한문지상주의(漢文至上主義)’ 시대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를 살다 간 최고의 지성 서포 김만중 선생이 그의 글「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펼친 다음과 같은 주장은 오늘날에도 금과옥조로 삼을만한 선언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생각[마음]이 입에서 나온 것을 말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어문(語文)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우니, 가령 십분 서로 비슷해 보여도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길거리의 나무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서로 깔깔거리고 화답하는 말들이 비록 비루(鄙陋)하다 해도 그 진위(眞僞)를 논한다면 정말 학식이 많은 사대부들의 이른바 시부(詩賦)라는 것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

한문으로 쓴 글만이 글로 인정을 받던 시절에 한문의 대가 서포선생은 이런 말로 ‘자국어’와 ‘자국 글자’의 가치를 설파했습니다. 그가 한문의 대가였으면서도 ‘우리말이나 글이 한문에 비할 바 없이 귀하다’고 한 것은 그 분 스스로 말과 글이 인간의 정신적 산물임을 깨닫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외국어문을 잘 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강점입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는 요인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자국어로 사색하고 자국어로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 인문학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인문학 논문을 영어로 써야 한다면, 그것은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쓴 논문[실제 종이 위에 적은 것이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든]을 영어로 번역한 데 불과한 것입니다. 독일어문이 언제 그렇게 훌륭한 학문어가 되고 문학어가 되었나요? 오랜 세월에 걸친 독일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민족자주’를 외칩니다. 일본에게 말과 글을 빼앗겼다가 간신히 찾은 때로부터 지금 몇 년이나 지났나요? 그 혹독한 시련에서 벗어난 지 겨우 60년 남짓 지났을 뿐입니다. 우리의 민족 지사들이 일본의 그런 무자비한 폭압에 맞서 얼마나 가열 찬 투쟁을 벌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말과 글을 빼앗은 일제시대의 민족적 비극과 저항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영어의 쓰나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말과 글을 버리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밤을 밝혀가며 우리말로 사유하고 우리 글로 써 내는 논문들을 평가의 대상에도 넣지 않으려 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니, 아예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민족을 떠들고 세종대왕을 우러러 본다고 하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것을 버리고 우리가 어디에 가서 우리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국제 학문시장에 나가 우리 인문학의 연구결과를 영어로 발표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일 뿐, 전체이거나 본질은 아닙니다. 요즘 들어 왜 우리 사회는 한사코 일의 본말(本末)을 뒤집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없는 정권이 몰고 온 말기적 증상이라 간단히 치부해 버리기엔 무언가 찜찜하고 불안한 구석도 없지 않습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우리가 지금처럼 중심을 잡지 못할 경우 앞으로 민족사의 비극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근래 들어 엄습해 옴을 느끼는 것은 저 혼자만의 기우(杞憂)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2012. 1. 10.>


Posted by kicho
알림2011. 10. 27. 17:09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에서는 아래와 같은 일시와 장소에서 여러분을 모시고
<<노래박물관 특별전>>을 갖고자 합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깊어가는 가을밤의 정취를 우리 전통노래와 함께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1. 일시 : 2011. 11. 10.(목)  오후 7시 30분
   2. 장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3. 주관 :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4. 출연자
             1) 노래 : 문현, 안정아, 김유리
             2) 연주 : 여성국악관현악단 <다스름>
             3) 관현악 편곡 : 김보희, 문신원
             4) 안무 및 무용 : 손선숙
             5) 연출 : 신재훈
             6) 총감독 및 악보복원 : 문숙희

<<노래박물관 특별전>> 행사의 목적 및 취지

『노래박물관 특별전』은 고악보로 전해지고 있는 우리의 옛노래들을 복원하여 들려드리는 음악회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많은 노래들은 ‘정간보’라는 고악보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간보는 세종대왕이 한글과 비슷한 시기에 창제한 것으로서 음과 리듬을 함께 기보할 수 있는 악보입니다. 정간보는 서양의 오선보 못지않은 악보이지만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어서, 그 리듬 해석에 대해서는 학자간 많은 이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리듬해석에 따라 정간보에 담긴 음악의 내용은 달라집니다.

『노래박물관 특별전』에서는 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 문숙희 박사의 리듬해석으로 복원된 음악들을 연주합니다. 문숙희 박사는 최근 몇 년 간 정간보 연구에 매진해왔고, 그 결과로 많은 고악보의 음악들을 복원해왔습니다. 종묘제례악으로 연주되고 있는 정대업과 보태평 전곡을 모두 복원하였고, 이번에는 고려가요 및 조선조 향악과 당악을 복원하여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복원된 이 노래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리듬과 선율로 되어 있고 또 우리말의 어조에도 잘 맞습니다. 그리고 민요와 같이 단순하면서도 궁중에서 오랫동안 애창되었던 명곡들답게 아름다움도 담겨 있습니다. 가사를 프로그램에 첨부하였으니, 여러분들도 이 옛노래들을 음미하시면서 한 두 곡조 정도는 배워보시기 바랍니다.

『노래박물관 특별전』에서는 우리의 옛 노래를 들려주면서 또한 공연의 흥미도 높이고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복원된 선율은 단선율로 되어 있어서 성악곡으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복원된 선율을 아름답게 꾸며 관현악으로 반주하게 하였고 또 노래의 앞뒤에는 전주곡과 후주곡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단, 향악화된 16세기의 보허자는 성악곡에서 기악곡으로 변하는 중의 음악이기 때문에, 악보에서 성악곡 부분과 기악곡 부분을 나누어 연주하게 하였습니다. 가장 서정적인 선율로 되어 있는 <사모곡>과 조선조 나례음악인 <대국~별대왕>에는 무용을 넣어 아름다움을 고조시켰습니다. 그리고 꽃미남 박물관 안내원이 나와 재치있는 해설로 여러분들을 재미있게 인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땀흘려 연구한 결실들을 여러분들께 조심스럽게 내어 놓습니다. 앞으로 남은 연구를 완성하기까지는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이 필요합니다. 부족하더라도 훈훈한 마음으로 감상하시고 즐겨주시면 많은 격려가 되겠습니다. 꼭 참석하셔서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2011. 20. 27.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4. 26. 12:38
*이 글은 "2008 국립국악원 정악단 정기연주회 - 노래와 선율이 함께 하는 여민락"(2008. 4. 17.)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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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 공연 팜플렛>

왜 지금 ‘여민락’을 말해야 하는가


                                                                조규익(숭실대 교수)


아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용비어천가> 읊지 말라’고 핏대를 올리는 지식인들이 의외로 많다. 정도 이상으로 대통령을 추어올리는 언론의 논조에도 ‘노비어천가’를 부른다거나 ‘명비어천가’를 읊는다고 비난한다. <용비어천가>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그것을 ‘아부성 발언’으로 폄하하는 데 용감하다. 철학과 경륜을 갖추었던 한 시대의 지성들이 왕도정치와 이상국 건설의 꿈을 담아 만든 <용비어천가>가 500여년 후의 무식한 자손들로부터 이렇게 몹쓸 희롱을 당하는 현실이다.


세종대왕의 주도로 만들어진 향악정재 ‘봉래의’에서 전인자와 진구호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여민락’이고, 그 음악에 올려 부른 가사가 바로 <용비어천가>(1·2·3·4·125장)다.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 그 음악의 취지이고, 그것을 정재의 앞부분에 배치했으니,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만하다. ‘애민(愛民)’이야말로 치자가 명심해야 할 첫 덕목임을 세종대왕은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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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장가사의 여민락 부분>

조선왕조의 근원이 깊고 멀다는 것, 왕 되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나라를 영원히 보전할 수 있다는 것 등이 <용비어천가>의 내용적 줄기다. 물론 6조(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사적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용비어천가>의 핵심인 ‘물망장(勿忘章)’(110~124장)과 ‘졸장(卒章)’(125장)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적 장치일 뿐이다. 초등학생일지라도 그런 내용을 가지고 ‘<용비어천가>=아부성 발언’이라는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주거를 호화롭게 하지 말라, 좋은 음식을 탐하지 말라, 형벌을 마음대로 하지 말라,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말라, 아부하는 간신들을 멀리 하라, 백성들의 언로를 막지 말라,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어 나라의 근본을 다져라, 바른말 하는 신하를 중시하라, 학자들을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


왕조 초반에 최고의 지성들을 모아 이런 금언(金言)을 만들고,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무대에 올려 공연하게 함으로써 ‘군-신-민’이 함께 그 뜻을 새기도록 한 일을 동서고금의 어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한 번이라도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읽어 보면 그것이 임금을 위한 수신 교과서나 지배계층을 겨냥한 정치학 교과서일지언정 아부의 언사가 결코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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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을 연주하는 모습>


         ***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국민을 위한 공복(公僕)임에도 지금껏 그들은 국민 위에 군림해 왔다. 최근 대통령이 공석에서 ‘머슴론’을 통해 땅에 떨어진 이도(吏道)를 질타한 일도 <용비어천가>의 핵심적인 내용과 맥을 함께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요체는 ‘국태민안’이다. 국가를 태평하게 유지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상정치의 알파요 오메가다. 풍족한 의식주와 든든한 국방, 반듯한 사회기강 속에서 백성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권력과 부를 얻고자 아부의 수단으로 만든 것이 <용비어천가>는 아니다.


고금의 역사로부터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을 얻은 지성인들. 그들은 <용비어천가>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가 어떻게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쳐 왔는가를 되새겨보고자 했다. 힘겹게 창업한 조선왕조가 영속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최고 통치자인 왕들이 나태를 벗어나 백성을 위하는 일에 매진해야 왕조는 망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후대의 왕들을 대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금언들을 들어놓음으로써 모든 공직자들까지 깨우친, 이른바 1석2조의 효과를 얻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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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 가사의 짜임>

‘임금이 하늘인 시대’였음에도 그들은 국태민안의 요체가 ‘경천근민(敬天勤民)’ 즉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일임을 감히 왕에게 강조한 그들이었다. 대통령이든 관료이든 민심이 천심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소리(小利)만 취할 때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국민의 공복임을 잊고 있는 관료집단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용비어천가>를 끊임없이 부르고 들어야 하는 시대다. 국립국악원이 ‘여민락’을 창조적으로 재현하고자 한 일이 참으로 시의적절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