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학술문2011. 11. 5. 01:25

  <물질에 나서는 해녀들>

  <물질을 마치고 뭍에 오르는 해녀들>


토론문(2011. 11. 2.)



제주학의 글로컬化(glocalization), 그 모범적 선례의 수립을 지향하며

                                                                             조규익(숭실대학교 교수)


지역학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학문들이 참여하여 현대학문의 전향적 흐름인 통섭(統攝)이나 융합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학문적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분야입니다. 제주학연구센터의 신설을 통해 제주지역학을 진작(振作)하려는 제주발전연구원의 미래지향적 도전에 경의를 표합니다. 주강현 교수님, 조동오 교수님의 발표와 「제주학연구센터 운영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을 잘 읽었습니다. 주 교수님과 조 교수님의 발표는 「제주학연구센터 운영 기본계획」을 크게 보완해주시는 내용으로 생각되며, 저는 두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따라서 저는 두 분의 발표와 「기본계획」을 읽은 소감 정도의 소박한 견해를 표명하는 선에서 토론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자 합니다.

***

제주학연구센터를 포함하여 우리나라 각 지역에는 지역학을 연구하는 기관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학연구소의 철학이나 비전이 시대정신에 맞게 제시되어야 하고, 활동의 방향성 또한 그에 맞추어 고안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주는 한국 속의 제주이기도 하고 세계 속의 제주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제주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한국 혹은 세계 안의 한 부분이라는 보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문화적으로 본토 및 세계와의 적절한 관계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제주의 정체성은 살아날 수 있고, 세계화와 지방화라는 일견 상충되는 방향성 또한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제주의 특수성만을 강조할 경우 제주학은 결코 멀리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특수성을 몰각(沒却)한 채 보편성만 추구한다면, 제주도의 정체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상반되는 두 방향성을 발전적으로 통합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길이 제주학연구센터의 성패를 가름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기본계획」의 모두(冒頭)에 밝힌 ‘계획수립의 배경’에서 저는 현실적인 고민을 발견했습니다. 제주지역이 풍부한 문화자원을 갖고 있지만, ‘세계화의 흐름과 국제자유도시 지향 속에 제주인의 문화적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 ‘제주인들이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제주학의 대중화 실현이 요구’된다는 점 등이 해당 내용의 핵심입니다. 이런 현실인식은 뒤쪽에 제시된 제주학연구센터 설립의 비전[“지역을 넘어 세계로 향하는 제주학 정립” : 「기본계획」, 64쪽]과는 약간 어긋난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제주인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당위와 ‘세계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는 현실의 상충을 「기본계획」의 첫머리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계획」의 도처에서 제주학연구센터의 차별화를 모토로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역 뿌리를 찾는 작업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지역주민에게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여 궁극적으로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기본계획」 67쪽]을 해야 한다거나, ‘제주지역을 대상으로 제주지역의 내재적 발전을 위한 실천적 활동을 지향하며, 제주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를 추구해야 한다’는 등 대상과 활동의 범주를 제주로 국한하는 논조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간적 범위를 한반도, 일본, 동남아, 몽골, 중국, 대만, 연해주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와 전 지구로 확대해야 한다는 점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기본계획」, 70쪽] 이처럼 「기본계획」에서 발견되는 약간의 어긋남은 역설적으로 새롭게 출범하는 제주학연구센터가 유지해야 할 방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제를 다음과 같이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제주학의 중심은 제주이고, 한반도와 세계는 그 변방이다.

제주학의 특수성은 한반도와 세계 지역학의 보편성과 긴장의 관계를 갖는다.

탈식민의 시대인 지금, 그리움과 선망의 대상일지언정 제주를 변방으로 보는 본토인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토를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제주인들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서울⋅부산⋅인천 등을 제외한 어느 지역도 제주만큼 타 지역이나 타국과 교류가 많았던 곳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제주인들 만큼 제주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를 느끼는 지역민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불변(不變)과 고착(固着)’에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질적인 것들의 섞임과 변화를 통해 ‘내 것’을 좀 더 선명하게 구분해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체성입니다. 본토나 세계 문화와의 교류를 기피할 이유가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기존의 지역 연구소들이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업의 대상이나 범위를 자신들의 영역만으로 한정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계획」의 ‘비전’은 대단히 도전적이면서도 타당합니다. 그런데, 핵심 분야나 구체적인 사업으로 들어가면 비전의 내용은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습니다. 핵심 분야[「기본계획」, 64쪽]에 ‘본토 및 세계와의 연계사업’이 들어가야 하고, 세부사업 추진계획[「기본계획」, 78쪽]에 ‘본토와의 비교연구/다른 나라들과의 비교연구’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제주도는 인구의 유입을 통한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제주에서 출생한 사람’ 뿐 아니라 주제로 이주해온 사람은 당연히 제주인으로 넣어야 하고, 타지에 살면서 제주를 연구하는 등 제주에 일정부분 기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넓은 범위의 제주인’으로 넣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점은 연구팀 구성원을 제주도 내 인력에 국한하지 말고 본토나 외국인도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연구 주체의 존재에 대하여 ‘대학-외부 연구주체, 대학-사회’라는 맥락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는데, 제주 내의 연구자나 제주 외의 연구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제주도 및 제주대 출신이거나 그와 연관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학문적 기반이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큰 문제입니다. 그런 한계를 뛰어넘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와 함께 ‘연구자체 사업’[「기본계획」, 86쪽]의 ‘제주도민 대상 제주학 교육사업 실시’에서 대상범위를 제주도민으로 한정한 것은 단견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제주도 밖의 주민들까지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제주학 교육사업’[「기본계획」, 79쪽]은 아카데미즘(academism) 일변도를 지양해야 합니다. ‘해녀학교/제주 민요학교/제주 민속놀이학교’ 등 놀이와 일이 통합된 체험적 교육만이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제주 해양문화 연구’[「기본계획」, 80쪽]에도 ‘제주 거주 작자의 창작문학 연구’ 혹은 ‘제주를 소재나 공간으로 한 문학 연구’ 등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점들이 보완되면, ‘제주학연구센터의 단계별 발전과정’[「기본계획」, 76쪽]은 ‘제주학연구센터 독립기(2017)’에 ‘제주학연구센터 확장기(2020)’까지 추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학의 대상지역을 제주만으로 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토론자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본토의 해안이나 오사카 등지에는 출가(出稼) 물질 후 눌러 살게 된 해녀들이나 그 후예들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의 해안에도 북한의 해안에도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도 제주 해녀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단순히 물질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민속문화의 매개자로서 노 젓는 노래, 물질하는 노래, 각종 설화 등 많은 문화적 콘텐츠를 그런 지역들에 유포시킨 공로자들입니다. 제주학의 아카이브 구축 사업은 이런 현장조사를 병행하면서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주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아카이브 확충의 방법들은 반드시 실천에 옮겨져야 할 것입니다. 아카이브를 소홀하게 생각해온 것이 우리나라 지역학회나 연구소들의 공통된 폐단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제주학연구센터는 그런 문제점의 해결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삼아야 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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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교수님께서도 이미 언급하셨지만, 제주인에게 ‘변방의식의 극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중심적 영역의 확보를 통한 정체성의 확립은 제주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제주를 특별자치도로 설정한 것은 제주도민들의 변방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는 첫 기회라고 봅니다. 진정한 ‘탈식민’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행정조치와 함께 제주도민의 자생적 의식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방언, 민속 문화, 고유한 생활양식 등 제주의 문화를 살리고, 그것들을 통해 제주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이야말로 제주인들에게는 정신적 홀로서기의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학연구센터는 그 확실한 이론적⋅실제적 바탕일 수 있습니다. 센터를 중심으로 시대의 보편적 요구인 융복합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본토나 해외의 경험 있는 학자들이나 컨설팅 분야의 인력들을 초치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외국으로부터 섬 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이룩한 선례들을 활발하게 도입할 수만 있다면, 제주학연구센터의 발전 단계는 훨씬 앞당길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등을 고려할 때 정부로부터 큰돈을 끌어오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제주 연구자들의 인력풀을 확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주를 주제로 하는 프로젝트의 개발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것도 간접적인 투자방식으로는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제주를 주제로 하는 프로젝트 팀을 꾸릴 경우 연구센터의 연구원이 공동연구자로 적극 참여하거나 소정의 절차를 거쳐 연구센터의 자료를 서비스하는 등 현실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제주학연구센터가 출범한 이상 제주 지역 내 기존의 학회나 연구소, 대학 등과의 역할 중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발전적인 제휴를 맺고, 장기적으로는 통합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제주학연구센터는 빠른 시간 안에 지역학의 글로컬化를 이룩한 모범적 선례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8. 15. 23:42
역사, 이젠 제대로 가르치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CIS(독립국가연합) 등에서 만나는 해외동포 3~4세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말을 모르니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없고, 우리의 역사를 모르니 그들과 함께 민족 정체성을 공유할 수가 없다. 다민족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고국의 말과 역사조차 모르는 처지에 고국에서 온 동포를 ‘동포 아닌 제3국인’ 혹은 그들과 공존하는 ‘타민족’ 정도로 인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원래 이민지와 고국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계인’으로 머물러 온 그들이 이제는 그런 중간자적 인식마저 상실하고 대책 없는 미아(迷兒)로 떠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해외의 동포들에게서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세대들이 겪는 ‘민족 정체성의 위기’는 더욱 우려스럽게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 없는 기성세대나 나라를 경영한다는 지도층이 무사려(無思慮)하게 지향해온 ‘세계화’의 비극적 소산이다. 든든한 경제나 국방만이 세계의 복판에서 한 나라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발판은 아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한갓 ‘경제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의 우리처럼 어려서부터 영어에만 몰입하게 하고 역사나 민족문화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새로운 세대들은 스스로 ‘세계시민’의 착각 속에 빠져들고 만다. 각자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바람직한 세계시민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때 늦은 감은 있으나,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독도 교육을 강화하는 내용의 교육과정’을 발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독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 이유나 역사적 당위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조만간 우리는 제 땅마저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민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억지를 역사 교과서에 반영하여 가르쳐 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동북공정’이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역사의 날조에 동참했다. ‘날조된 역사’를 당당하게 교육시키는 그들의 심리 저변에는 그것이 자라나는 세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경우 미래는 그 방향으로 되어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긴 시간이 지나 날조된 역사가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었으면’ 하는 헛된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날조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지만, 제대로 된 역사마저 가르치지 않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명한 직무유기이니 그것 또한 죄악이다.

우리의 편견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지금’만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과거나 미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거기서 역사나 민족문화에 대한 몰각(沒覺)은 비롯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재는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역사 철학자 E.H.카아는 역설했다. 과거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현대사회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원인은 과거에 있으며, 미래의 원인은 현재에 있다. 주변의 타민족, 타 국가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적 관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려면 원인으로서의 과거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무엇보다 긴요하다. 사실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이 독도만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문학, 역사, 철학 등 전통인문학의 핵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신세대를 국제 미아로 만들고 있는 점은 기성세대들이 직시해야 할 문제적 현실이다. 경제와 군사, 문화면으로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일본이나 중국이 이 시점에 왜 ‘역사의 날조’와 ‘날조된 역사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들에 비해 한참 늦었지만, 우리도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멀지만 확실한’ 길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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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3:23
영어강의와 지식사회의 철학


최근 몇몇 대학들의 영어강좌 비율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어이없게도 그것은 ‘글로벌화’의 척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영어강의가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영어강의를 해야 하는지, 목표하는 바가 모호하다. 영어강의의 수강을 원하는 학생들은 주로 ‘유학 준비’나 ‘영어 실력 향상’에 목표를 둔다. 그러나 교수의 입장에선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만 목표를 둘 수 없다.

우리말로 하는 경우에도 교수-학생 간의 소통이 어려운 전공분야. 영어로 할 경우라면 그런 문제 뿐 아니라 놓치는 것들 또한 비일비재할 것이다. 다양한 전공분야의 교수들이 영어구사나 교수법에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런 영어가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 그리 큰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전공 내용마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위험성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들마다 영어강의를 확대시키려고 애쓴다. ‘대학 마케팅’에 효과적인 상품 중의 하나가 바로 영어강의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영어로 이루어지는 강좌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수입학문들’이다. 우리와 세계인들의 상호소통을 통해 공감영역을 넓히는 일이 ‘세계화’라고 본다면, 영어강의의 무조건적 확대는 지금껏 우리가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서양학문에의 예속’을 새로운 세대에게 강요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무슨 과목이든 대학의 영어강의는 필요하고 권장되어야 하지만,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실 장기적으로 영어강의가 보다 ‘잘 준비되어야 하고 절실한 분야’는 바로 외국에 보급해야 할 우리의 자생 혹은 자립학문들이다. 우선적으로 영어강의는 우리의 자립학문을 국제학문의 규격에 맞게 ‘표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해외의 인재들이 우리나라 대학들을 찾는다. 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세계화된 학문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배울 수 있는 학문들이다.

우리의 어문학, 사학, 철학 등을 영어로 배울 수 있게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의 첫걸음이다. 앞으로 폭증하게 될 수요에 대비하여 이들 분야에 관한 영어강의 잠재력을 배양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의 학생들이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대학들에서 그런 강의를 들을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학문의 자립국이나 수출국이 될 수 없다. 우리의 학문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말을 익혀오라고 그들에게 배짱을 내밀 단계도 아니다. 합당한 분야의 영어강의를 점차 늘여감으로써 수출 가능한 우리의 자립학문을 세계시장에 상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자립학문을 영어 등 세계어로 체계화 시키고 강의할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거나 교수로 영입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지(福澤諭吉)가 대표하던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사회는 서양학문의 도입을 통해 일본사회와 일본학문 근대화를 실천적으로 주도했다. 그들은 우리와 방법이 달랐고, 무엇보다 ‘수입상’의 단계를 적절한 시기에 벗어났으므로 자립의 단계까지 뛰어오를 수 있었다. 식민시대를 포함하여 해방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 우리의 지식사회는 학문의 초라한 수입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수입학문의 영어강의만을 ‘글로벌화의 척도’로 인식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학문의 주체적 생산자가 될 수 없다. 영어강좌는 우리 학문의 수출에 긴요한 도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영어강의에 대한 지식사회의 철학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2007. 1. 22.)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