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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7. 28. 16:22

효도? 효도!

 

                                                                                                                                                     白面書生 

 

최근 어느 지인(知人)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한 식사자리에 다녀왔다. ‘90, 100까지 장수하는 요즘 세상에 회갑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작은 세리머니를 겸한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나는 그 행사가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고 우리 모두를 위한 반성과 참회의 자리로 마련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모두의 반성을 촉구하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했다는 점에서 그 자리는 으리으리한 세상의 어느 행사보다도 의미가 깊고 컸다. 그들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 행사는 우리의 텅 빈 가슴을 용암같이 뜨거운 감동으로 채워 주었다. 지금까지 아이로만 생각되던 그의 큰 아들이 보여준 감동의 작지 않은 드라마였다. 그는 왜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를 불렀을까. 회갑잔치를 갖는다는 지인들의 소식을 가끔씩 접할 적마다 슬그머니 비소(誹笑)를 짓곤 하던 우리를 그 자리에 초대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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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인은 그간 여러 직종들을 거치면서 단맛보다는 쓴맛을 적잖게 경험해온 사람이었다. 버는 돈에 비해 훨씬 큰 신역(身役)의 고됨을 경험해야 했고, 을의 입장에서 갑의 횡포도 무수히 견뎌야 했던 그였다. 누구에겐들 그런 삶의 고뇌가 없(었)으랴만, 그 분의 지난 시절 고통들이 특별한 것은 자식에게 투사⋅발효된 그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내 가슴에 전달되어 큰 감동과 깨달음의 물결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뜻대로 안 되는 사업’에 고뇌하고 갑의 횡포에 시달림 당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던 어린 아들의 시선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촉촉하게 젖은 채 살아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라고 해야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저학년쯤이었을 것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부모와 기성세대, 사회를 원망하며 비뚤어지기 일쑤인 세태를 보라. 부모가 당하는 경제적⋅사회적 고통을 내면화 시켜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온 그의 심성이 보암직하지 않은가. 대학 졸업 후 가장 빠른 시간에 성공적으로 공직에 진출했고,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어 행복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이 곱고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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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의 일이다. 우연히 내 말 가운데서 레이시즘(racism)적인 요소를 찾아냈는지 정색을 한 채 따지고 드는 한 녀석의 표정을 보며 가슴 철렁하는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불행히도 그놈의 그 모습에서 바로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말씀 가운데 내 깐에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이 될 때마다 ‘바른말’로 따지고 들며 바로잡아 드려야겠다는 사명감이나 갖고 있다는 듯 논쟁을 마다 않던 나였다. 그런데 수십 년 후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내 가슴에 박힐 줄이야! 지난날의 나는 참 ‘나쁜 아들’이었고, 그 순간 그 놈도 참 ‘나쁜 아들’이었다. 박격포의 탄알이 관통한 듯 뚫려버렸을 아버지 가슴의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나도 느낀 것이다. 똑똑한 척하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머리를 내두르는 것이 부모와 자식 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학회의 토론장에서나 오갈 법한 그런 공부의 잣대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을 터. 적과 동지를 구분해야 할 이념의 전장(戰場)에서나 적용될 법한 논리적 근거를 부모와 자식 간에 적용할 수는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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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새삼 오늘 큰 깨달음을 얻는다. ‘부모를 섬기는 데 얼굴빛을 조심하고 부드러운 기색으로 대하라’는 공자님의 가르침처럼 왜 나는 좀 더 부드러운 낯빛으로 그 당시 아버지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드리지 못했을까. 왜 나는 약간 불만스러워도 아버지의 생각에 맞장구를 쳐드리지 못했을까. 설사 조금 틀린 구석이 있다손 쳐도, 그게 무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비록 틀렸다 해도 멀찍이 물러섰다가 틈을 보아 조곤조곤 내 생각을 말씀드리는 여유를 왜 나는 갖지 못했을까. 지난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 나와서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입혀볼 욕망에 사로잡혀 ‘재승박덕(才勝薄德)’의 소름 끼치는 능변(能辯)을 쏘아대고 의기양양해 하던 어떤 여자처럼, 난 어쩜 그리도 바보스러웠을까. 회갑을 맞이한 지인의 큰 아들이 10대 초반에 아버지의 고뇌를 자신의 가슴으로 받아들여 아파하던 그 ‘대견함’을 왜 나는 일찍 체득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 지인이 부러운 것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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