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2. 29. 18:55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야금야금 육신을 갉아먹는 병마(病魔)

끝내 어머니는 아픔을 호소할 기력마저 상실하셨습니다. 

한동안 의연히 싸워오신 어머니도

언젠가부터 병마의 서슬에 풀이 꺾이신 듯.  

잦아드는 어머니를 뵈며 저는

병마의 무자비함에 대한 한탄이나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고 난 뒤에야

편안해지신 어머니의 표정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병마와의 투쟁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육신의 굴레!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의 극적인 종말이 죽음인 것을,

어머니 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고 계셨음을,

나 혼자만 몰랐던 것일까요.

그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저는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는 죽음을 두려워하신 게 아니라

정말로 '뭣 같은 고통'을 뛰어넘고 싶어 하셨을 뿐이라는 사실을.

 

넝마 같은 육신을 벗기 위해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가

바로 고통과의 투쟁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최고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아닌가요. 

찌질한 증오들, 숱한 이해타산들, 다양한 꼼수들을

일거에 무력화 시키는 전설의 마검(魔劒)이 바로 죽음 아닌가요.

모든 것들이 걸어가야 할 공도(公道)가 바로 죽음인 것을...

 

***

 

어머니(文姬)19281217() 충청남도 원북면 방갈리 학암포에서 외조부(문채문)와 외조모(창녕 조씨) 사이의 5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나셨습니다. 외조모는 역병(疫病)에 신음하던 동네 사람들을 구완하시다가 이른 연세에 돌아가셨고, 그 일로 어머니는 10대 초반 소학교를 중도에 폐하고 가사를 돌보게 되셨습니다. 열여섯 나던 해 10여리 떨어진 이웃 마을의 창녕 조씨 집안으로 출가, 모진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여 적지 않은 전장(田莊)을 마련하고 슬하에 41녀를 두셨습니다. 손끝으로 땅을 파셨고, 흘리는 피땀으로 그 땅을 걸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기상하여 다시 새벽 가까운 시각에 몸을 누이시는 고행을 통해 한 뼘 두 뼘 땅을 늘리셨고, 그 사이사이 적지 않은 자식들을 낳아 건사하셨습니다.

 

세상 이치에 밝으시고 지혜로우시어 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 약하고 눈물 많은 남편과 어린 자녀들 때문이었을까요? 시종일관 곧은 아내이자 엄한 어머니이셨습니다. 누구보다 자기 확신이 강하셨고, 자식들의 어리석음이나 주변 사람들의 불의를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자식들로 하여금 일생 화툿장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고, 담배를 입에 대지도 못하게 하시는 등 어머니의 엄한 훈육이 몇 수레의 황금보다 얼마나 더 보배로운 유산이었는지, 지금 비로소 깨닫습니다.

 

명망 있는 의사로 키워 놓으신 막내아들의 보살핌 속에 만년을 보내시고, 그의 따스한 손길 아래 눈을 감으신 어머니먼저 가신 아버지 곁으로 따라가셨으니, 이제부턴 젊은 시절의 추상같으시던원칙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으시고, 두 분이서 오순도순 옛 이야기 나누시며 명계(冥界)의 청복(淸福)을 마음껏 누리소서.

 

 

 

2016. 2. 25. 030.

 

 

불효자 백규 울면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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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5. 9. 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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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5. 8. 29. 21:28

 


한국을 떠나기 전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

 

 


한여름날의 백규서옥에서 게리(Gary Younger), 백규, 세바스티안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의 지도교수 키이스 하워드(Keith Howard) 교수와 함께

 

 


한 겨울의 숭실 교정에서 세바스티안과 키이스 교수

 

 


 한국의 전통악기들과 탈들이 진열된 키이스 교수 자택 거실 모습

 

 


키이스 교수의 한국음악 관련 디지털 자료들

 

 

 

며칠 전 일본의 교토에서 세바스티안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국내에 있는 줄 알고 전화했다가 해외로밍으로 연결되자 다급하게 문자를 보낸 것. ‘연수기간이 끝나 831일 런던으로 돌아가는데, 한 번 뵙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점심약속으로 간신히 잡아놓은 2712시 정각에 독일 술 한 병을 든 그가 찾아왔다. 그간 머물렀던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다시 돌아가 짐 싸는 일을 마무리해야 하므로 점심 식사의 여유가 없다는 그를 잡아놓고, 겨우 30여 분 간 석별의 대화를 나누었다.

 

198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의 약관이었다. 함부르크 출생의 독일인. 이른 나이임에도 많은 학교들과 많은 나라들을 거쳐 온 점이 놀라웠다. 1997~2006년까지 미션계 김나지움에서 공부했고, 그 사이의 1(2003~2004) 동안은 교환학생으로 남미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을 다녀오기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2007~2012년 함부르크 대학에서 조직음악학[혹은 과학음악학: systematic musicology]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Excellent grade)’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그 기간 중 터키 이스탄불의 빌기대학교(Bilgi University)에서 1년간(2008~2009), 서울대학교에서 1년간(2010~2011) 교환학생으로 머물기도 했다. 2012~2013년에는 런던대학교의 동양아프리카학 대학(SOAS: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민족음악학(ethnomusicology) 석사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2013년부터 같은 대학에서 민족음악학의 권위자 키이스 교수(Dr. Keith Howard)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중인데, 작년부터 지금까지 1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 시조에 관한 현장연구를 수행하다가 이번에 체류기간 만료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철이 들면서 파라과이터키한국영국 등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수재였다. 그 과정에서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영어스페인어터키어프랑스어라틴어 등을 유창하거나 능숙하게 구사했고, 한국어 실력 또한 어떤 외국인들보다 월등했다. 기필코 최단기간인 내년에 박사학위를 받겠노라는 그의 결심이야말로 모험에 가까운 그동안의 해외 편력으로부터 길러진 용기의 소산이리라.

 

그는 우리의 시조에 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쓰려고 하는 박사논문 또한 시조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시조의 음악적 본질이나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관하여 한국의 누구보다도 폭 넓고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국에서 전통가곡이나 시조의 명창들을 만나 창법과 이론을 익히려고 애쓰면서 얻게 된 개인적 자산이기도 했다. 그의 지도교수인 키이스 교수 역시 우리 음악에 관한 몇 안 되는 외국인 전문가였다. 사실 세바스티안이 오래 전부터 나를 알게 된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경희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로 정년을 한 케빈 오록(Kevin O’Rouke) 교수는 탁월한 감성으로 한국문학을 꾸준히 서양에 소개해 왔는데, 키이스 교수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케빈 오록 교수가 13년 전 펴낸 자신의 저서 The Book of Korean Shijo(Harvard-Ewha Series o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2)의 첫머리에 내 견해를 인용함으로써 키이스 교수도 나를 알게 되었고, 다시 그가 세바스티안에게 이 책을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함으로써 세바스티안 또한 나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한국 오는 기회에 나를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케빈 오록 교수의 시조 관련 저서

 

 


케빈 오록 교수 저서의 서론 부분

 

 

***

 

최근 나는 일본에서 호주 출신의 토키타 박사(Dr. Alison Tokita)로부터 일본음악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내용도 중요했지만, 일본음악이나 일본문화에 대하여 영어권 전문가로서의 토키타 박사가 갖는 사회적 위치나 의미가 각별함을 깨닫게 되었다. 토키타 박사 같은 자발적 외국 학자들 아니면 누가 세계에 일본음악이나 문화를 선전하고 유포시킬 것인가. 서양인이 영어로 외국의 수요자들을 상대로 한국음악이나 문화를 강의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세바스티안을 보며 무릎을 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한국어도 발전할 것이고, 한국음악이나 문화에 대한 조예 또한 깊어질 것이니, 그는 우리에게 일본의 토키타 박사 못지않은 소중한 존재다.

 

민족문화를 세계에 선양한답시고 엉뚱한 사람들을 수억원씩 주며 불러다가 1회성 돈 잔치나 벌이는 우리나라 문화 담당부서는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다. 앞으로 세바스티안 같은 외국의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우리 음악과 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게 한다면큰 돈 들이지 않고도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민족음악학 전공자들을 불러모아 한국음악과 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어로 설명하게 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세계화를 앞당기도록 하는 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꽉 막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왜 외국인에게 귀한 교수자리를 안겨주며, 왜 한국어를 놔두고 영어로 외국인들에게 강의를 해야 하느냐고. 그런 류의 답답한 사고방식 때문에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나 예술은 비좁은 이 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세계인들이 배우고 익히며 재창조재생산을 해야 그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암담하다. 우리 스스로가 민족의 전통문화이나 예술을 외면하는 현실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제라도 우리 전통음악이나 문화의 외국인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깜짝 놀랄 만큼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세바스티안 같은 젊은 인재를 한국 전통음악과 문화의 전문가로 키운다면, 우리 전통음악과 문화의 세계화는 그 시점부터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국가와 민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시들게 할 수는 없다. 문호를 개방하고 보편적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줄 때 우리 문화는 세계인들의 공유물이 되고,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 세바스티안은 그런 점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우리의 보배로운 인재다.

 

 


문현 선생의 노래 발표회가 끝나고. 국립국악원에서

 

 


선무 치료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에서의 파티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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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5. 8. 5. 17:01

 


아, 옛날이여!

 

 


아, 옛날이여!

 

 

 

또 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삶과 죽음이 한 끗 차이’라고 말들 하지만,
다리를 건너는 입장에서야 어찌 한 끗에 불과했으랴?

 

유쾌함보다는 불쾌함이
개운함보다는 찝찝함이
더 많은 세월이었으리라.
지지고 볶으며 짜오던
한 자락 삶을
베틀 째 팽개치고
이리도 홀홀히 떠나는 게
인생인 것을.

 

“90 평생이 한 나절의 꿈같았노라!”고
깨달음의 말씀을 남기시며 돌아가신
어느 어른의 마지막 순간을
지금 막 떠올려본다.

 

한 발 한 발
가벼운 걸음으로
떠나야 하리.
모질게 움켜 쥔
영욕의 짐 보따리들
하나하나 떨구며
상쾌한 맘으로 가야 하리.

 

하직인사도 없이
떠난 그 분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니...

 

 

2015. 8. 5.

백규, 한 잔 술로 그 분의 명복을 빌며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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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5. 6. 26. 15:49

 

 

안수산 선생

 

 

노스리지(Northridge) 선생의 자택에서
선생 모자와 백규 가족

 

 

 


자택에서 책을 중심으로 환담하는
선생과 백규 가족

 

 

 


자택에서 환담하는 선생 모자와 백규 가족

 

 

 

 

, 안수산(Susan Ahn Cuddy) 선생님!

 

 

1991116. 1월이 캘리포니아에 비가 잦은 계절이긴 하지만, 그 날은 약간 햇볕이 들었었지요. 귀국을 며칠 앞 둔 시점에 우리 가족은 미리 약속했던 대로 안수산 선생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지요. 우리가 머물고 있던 UCLA의 대학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소도시 노스리지(Northridge). 가로수 잎이 참하게 깔린 한적한 동네 한복판의 깔끔하고 나지막한 단층집이었지요. 반색을 하며 맞아주시는 선생님과 외아들 필립(Philip Ahn Cuddy)의 표정이 정겹게 다가오더군요. 미리 연락을 하셨는지, 잠시 후 인근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는 지성적 마스크의 따님 크리스틴(Christine Ahn Cuddy)도 도착했고요.

 

도산 선생의 유품들을 일일이 보여주시고 설명해 주시는 열정을 통해 도산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을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가족 단위로 방문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였을까요? 유독 우리 아이들을 귀여워해주시더군요. 도산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 도산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던 당시 어른들을 추억하시며 눈시울을 적시곤 하셨지요. 감동이었습니다.

 

1915116일 생. 선생님은 1942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미 해군 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로 1946년까지 복무하셨지요. 전역 후 미 의회 도서관과 연방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비밀정보 암호분석가로 활약하셨고, 1959NSA에서 은퇴할 때까지 워싱턴 D.C.에서 300여명의 학자들에게 동서 냉전관련지식과 정보를 교육하는 일을 맡기도 하셨지요. 은퇴 후엔 노스리지로 돌아와 가족이 운영하던 중국 식당 필립 안의 문게이트(Phil Ahn's Moongate)'1990년까지 도우셨답니다. 우리가 만난 때는 그 일로부터 벗어나서 쉬고 있는 중이셨고요.

 

우리가 찾아간 그 날이 바로 선생님의 84세 생신이시더군요. 전화를 드렸을 때 이 날 만나자고 말씀하신 것도 당신의 생신날이기 때문이었음을 그 자리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요. 우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저녁 무렵이 되자 파티에 함께 가자고 하시면서 우리를 동네의 한 레스토랑으로 인도하셨어요. 이미 그곳엔 많은 친척들과 지인들이 모여 좌정해 있데요. 우리 가족에 대한 소개가 끝나고 우리는 따뜻한 환영의 박수를 받았지요. 특히 선생님의 남동생이신 필립 선생은 파티 내내 우리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정을 표시하기도 하셨어요.

 

파티가 끝난 한밤중 재회를 약속하며 헤어졌으나, 몇 년 뒤 재외동포재단 사무원의 실수로 서울에 오신 선생님을 뵙지 못했고, 결국 오늘 선생님의 부음을 접하게 되었네요. 그 분의 외 아드님 필립은 몇 년 전 우리 집을 방문해 식사를 나누며 선생님과의 추억을 되새기도 했으나, 어찌 선생님을 친히 뵌 것만 하리오?

 

천만리나 떨어진 미국 땅에서 조국 사랑을 실천하시다 돌아가신 선생님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2015. 6. 26.

 

조규익 절

 

 

 


1999년 84세 생신연에서 게잌을
자르시는 선생님

 

 

 

 


하객들과 함께 한 생신연

 

 

 


생신연에서 선생님의 남동생과 백규 & 경현

 

 

 


선생님의 아드님 필립과 백규

 

 

 


젊은 시절의 선생님과 남자 형제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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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8. 26. 10:53

 


부머 호수 조성 기념비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부머의 서정

 

 

 

 


늦가을과 초겨울의 어름에서

 

 

 

 


부머의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부머의 나무들은 물에서도 뿌리를 내리는구나

 

 

 

 

 

 

부머(Boomer)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잠시 머물다 떠나온 스틸워터는 말 그대로 낙원 같은 곳이었다. 앞의 글 어디에선가 스틸워터의 어원을 밝힌 바 있지만, 말 그대로 고요한 물그 자체였다. 맑은 공기, 녹색 풀과 나무, 알록달록한 꽃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갖가지 새들, 기분 좋은 촉감으로 끊임없이 스쳐가는 바람,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 차량 대수에 비해 아주 넓은 도로, 나지막하고 예쁜 집들... 집의 출입문을 닫으면 심심산골의 절간이요, 문을 열고나서면 한적한 시골 마을의 확대판이었다.

 

특히 우리를 매료시킨 두 가지가 이곳에 있었다. 첫째는 숙소를 나와 도보로 500m만 걸어가면 5km 남짓의 크로스 컨트리 코스(cross country course)가 있는데, OSU가 소유한 공인 경기장이자 주민들의 산책코스였다. 울창한 숲과 목초지, 목장을 뚫고 구불구불 이어진 낭만의 오솔길이었다. 둘째는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부머 호수. 스틸워터의 북쪽 면을 접한 아름다운 호수였다. 여러 나라에서 호수들을 구경했지만, 스위스 베른의 시가지에 거울같이 고여 있던 호수를 제외하곤 아직 부머 만한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것은 인공 호수였다!

 

그런데, 부머(Boomer)’일까. 오클라호마 사람들은 이주해 온 시기에 따라 수너(Sooners)’부머(Boomers)’로 불린다.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이 1889인디언 세출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지금 오클라호마 지역인 ‘(인디언들에게)할당되지 않은 땅들[Unassigned Lands]’을 (백인)정착민들에게 개방하려 했는데, 대통령의 서명 직전 그 지역들에 들어가고자 시도한 미합중국 남부 정착민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부머들이었고, 그들보다 10년 정도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수너들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인디언들과 함께 그 두 종류의 백인들이 오클라호마 주민을 형성한 것이었다.

스틸워터에 인공 호수를 조성하고 부머 레이크라 호칭한 것은 그들이 아끼는 이 지역의 보물에 자신들의 역사성을 새겨 놓으려는 욕망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스틸워터 사람들은 부머 호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틈나는 대로 호숫가를 걷거나 달리고 자전거 페달도 열심히 밟았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 태공들도 심심찮게 보이고, 물 위를 새까맣게 덮은 새떼를 관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OSU의 아름다운 연못 쎄타 폰드(Theta Pond)에는 캐나다 기러기들(Canadian Geese)과 오리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캐나다 기러기는 철새인데, 쎄타폰드의 녀석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낙원 같은 그곳을 떠날 생각들을 아예 접어버린 듯 했다. 오후쯤엔 가끔씩 휘익 날아올라 대열을 유지한 채 어디론가 날아가곤 했다. 그러나 다음날 쎄타폰드에 나가보면 그 녀석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여전히 풀밭을 뒤지고 있었다. 부머 호수에 가보고 나서야 우리는 녀석들이 어디를 다녀오는지 알게 되었다. 쎄타폰드에서 보던 녀석들을 부머 호수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머 호수는 녀석들의 임시 고향 혹은 새로운 정착지인 셈이었다. 유럽의 백인들이 밀고 들어와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이 땅에 정착했듯이. 그곳에는 호수 인근의 여러 지역에서 날아온 캐나다 기러기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몸집도 크고 생김새도 화려한데, 퍼런 색 똥은 문제였다. 아무데나 갈겨대는 까닭에 포장도로는 퍼렇게 도색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각자의 영역에 나가 먹이활동을 한 다음, 저녁 무렵이면 부머 호수로 돌아와 가족 친지들과 대화를 나누고 밤을 지내는 모양이었다.

 

1925년에 완공된 부머 호수는 지역 발전소에 냉각수를 공급하기도 하고 시민들에게 오락과 휴식 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표면적 251 에이커[307,224 ], 유역면적 8,954 에이커[10,959,696 ], 호숫가의 길이 8.6 마일[13.76 km], 평균 수심 9.7 피트[2.96 m]로 꽤 큰 규모였다. 부머 호수에 살고 있는 주된 어종은 큰 입 배스[largemouth bass]로서 현재 우리나라 내수면에서 토종물고기들을 멸종시키고 있는 몹쓸 존재들이다. 이외에도 얼룩메기, 넓적머리 메기, 크래피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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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흐르는 물도 좋고, 필요하다. 그러나 거울처럼 잔잔하여 마음까지 비춰볼 만한 호수는 더 좋다.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새들을 바라보는 노인들, 땅으로 올라온 오리와 기러기들을 아장거리며 쫓아다니는 아가들, 수면에 비친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고향을 떠올리는 나그네 백규, 희한하게 생긴 탈 것에 몸을 누인 채 호숫가를 질주하는 장애인 남성, 열심히 달리면서 살을 빼고 있는 젊은 여성들... 모두들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부머 호수에 안겨 있는 모습. 스틸워터가 낙원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날 부머 호수에서

 

 

 


시린 물에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을 즐기며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들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캐나다 기러기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일군의 캐나다 기러기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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