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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2. 12. 22:18

말레이 곰 ‘꼬마’의 유쾌한(?) 탈주극

 

서울대공원을 탈출하여 청계산에 숨어든 수컷 곰 ‘꼬마’가 일주일 째 포획팀을 놀리고 있는 중이다. 곰 때문에 등산객이 줄어 생계에 지장을 받는 산 입구의 상인들에겐 참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내게는 참으로 ‘오랜만의 재미있는’ 뉴스가 아닐 수 없다. 혼자 운전을 하면서, 혼자 조용한 길을 걸으면서 ‘그 놈’을 생각할 때마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금할 수 없다. 과연 그는 지금 가슴 뛰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까? 아니면 낯설고 물 선 ‘타국’의 산하를 헤매고 다니며 배고픔과 공포에 떨고 있을까?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이 터졌을 무렵 신문을 통해서 동물원의 한 관계자가 내린 기막힌 분석을 접하게 되었다. 동물원에서는 이 말레이곰 ‘꼬마’를 ‘씨곰’으로 들여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동물원에 있던 씨받이 암콤은 이 꼬마에겐 ‘할머니뻘’쯤 되는 나이라나? 그러니 그 녀석이 스트레스를 받고 탈출을 감행했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나는 이 분석을 접하곤 몰래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분석이 잘못 되어서 웃은 게 아니라, ‘어쩌면 그리도 재미있게 정곡을 짚어냈을까’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시라! 외국에 팔려서 장가라고 와봤는데, 신방에 들어가니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신부차림을 하고 있으니, 신랑의 입장에서 혼비백산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기분으로 어떻게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며, 어떻게 신부의 옷을 벗길 수 있겠는가?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해도 그렇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만하는 인간이 참으로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냥 할머니 곰은 그대로 살다가 자연사하게 놔두고, 차라리 ‘꼬마’의 나이에 걸맞은 젊은 암콤으로 짝을 맞추어 들여왔으면 오죽 좋았으랴! 그렇게 했다면, 문을 열어놓고 밖으로 나가라고 한들 그 ‘꼬마’ 녀석이 도망갔겠는가?

 

필자는 지금 집에서 작은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데, 이 녀석이 말만 못 했다 뿐 생각만큼은 멀쩡하다. 제 의사표현에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한사코 따라 다니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만다. 그것이 인간에겐 정으로 읽히는 것이다. 동물에게 마음이 없다고? 천만에! 순수하고 곡진하다는 점에서 같은 인간들보다 훨씬 도타운 정을 느끼게 된다. 희로애락이나 사랑과 증오의 가장 격렬하고 단순한 감정을 그들도 인간 못지않게 갖고 있음을 나는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반응이 시원치 않을 경우 그들 역시 실망하고 또 다른 양식의 시도를 감행한다는 점도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네 발 달린’ 동물이라고 깔볼 수 있단 말인가.

 

20대 청년인 ‘꼬마’에게 60대 할머니를 신부로 붙여준 인간들은 반성해야 마땅하다. 어쩌면 그는 사방에 둘러쳐진 철제 울타리 안에서 쪼글쪼글 주름투성이의 신부를 보며 ‘언제 어디서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라고 강요하는 인간들의 메시지를 읽어냈을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도망갈 곳 없는 철제 울타리 안에서 그는 잠시 절망에 잠겨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 문이 열렸고, 문 밖으로 검은 숲이 보였겠지? 비록 그 숲 속에 무수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해도 ‘이 절망보다야 더하겠느냐?’라는 생각으로 냅다 튀어나갔을 것이다. 어쩜 그는 지금 이른바 ‘페로몬’이라는 호르몬으로 서울 대공원 철책 안으로 통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드가 맞지 않는 늙은 암콤으로서야 어찌 ‘꼬마’에게 응답을 보낼 수 있으랴. ‘꼬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 그러니, 인간들이여! 제발 ‘꼬마’를 포획하기 전에 외국에서 ‘매력적인 젊은 암콤’ 한 마리를 급히 수입해다가 신방에 앉혀놓기 바란다. 그러면 이 추운 날 애꿎은 젊은 경찰들 고생시키지 않아도 아마 그 녀석은 제 발로 걸어 들어 올 것이다.

 

2010. 12. 12.

백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