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7. 06:44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거쳐 뉴멕시코로 연결되는 I-40을 비롯한 각종 도로들

 

 


오클라호마의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목장과 유전이 어우러진 모습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로 들어가는 입구

 

 


텍사스의 도로

 

 

뉴멕시코의 남성미, 오클라호마의 여성미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걸출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며 인기있는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저서 <<미의 역사>> 머리말에서 강조한 미학의 원리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에코 뿐 아니라 현대 미학자들 가운데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름다움에 관해 겨우 아마추어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백규에게조차 미의 상대성론은 부담감 없는 상식이다.

 

***

 

오클라호마 체류 기간 끝 부분에 뉴멕시코를 다녀오기로 했다. 머나먼 길을 운전하여 텍사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곳이라서 더 매력적이었다. 오클라호마 인디언들을 대충 만나 보았으니, 그곳에 옛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는 푸에블로(Pueblo) 인디언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나마 세 개 주의 인상(印象)을 비교해보고 싶은 것이 내심의 욕구였다. 무엇보다 역마살을 사랑하는 내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을 마다할 리 없으니, 그야말로 일타삼피(一打三被), 일석삼조(一石三鳥), 혹은 One Serve, Triple Purposes’의 쾌거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중심을 서남쪽으로 뚫고, 텍사스의 팬 핸들(Panhandle)을 가로질러, 앨버커키(Albuquerque)와 산타페(Santa Fe), 반들리어(Bandlier), 타오(Taos) 등 뉴멕시코의 북부 일대를 돌아오는, 총연장 2천 마일에 가까운 장도(壯途)였다. 오클라호마 주는 우리나라[남한] 면적의 두 배인 181,195, 텍사스 주는 7.8배인 696,241, 뉴멕시코 주는 3.5배인 315.194이니, ‘눈물겹도록광활한 땅 아닌가. 비록 그 면적의 작은 부분들만을 거치는 노정이었으나, 그 장대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2014. 1. 19. 오전 8시 스틸워터 출발. 타고 가던 35번 하이웨이를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40번으로 갈아타면서 쾌속의 질주를 계속했다. 르노(El Reno), 엘크(Elk), 세이어(Sayre) 등 오클라호마 구간을 지나자 풍광이 바뀌면서 I-40은 텍사스로 접어들었다. 주 경계를 넘어 텍사스 경내의 전망대 겸 휴게소에 들어서니 사방에 돌투성이의 언덕들과 까마득하게 늘어선 야산들이 보였으나, 그로부터 빠져나와 잠시 달리자 이내 오클라호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텍사스의 벌판이 펼쳐졌다. 그렇게 텍사스의 팬 핸들 지역을 몇 시간 동안 달리자 66번 도로(Historic Route 66)’ 상의 핵심도시 아마리요(Amarillo)’가 나오고, 그로부터 두어 시간 더 달려 뉴멕시코에 들어섰다.

 

매혹의 땅 뉴 멕시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New Mexico, Land of Enchantment]’라고 도로를 가로질러 세운 경계표지가 인상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확연히 달라진 풍광이었다.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까지 끝없이 펼쳐지던 벌판들, 비옥해 보이진 않았으나 온갖 식물들을 키워내던 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척박한 돌투성이의 땅에 깔리듯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막식물들의 삶터가 무한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변별(辨別)하는 표지야말로 경계표지가 아니라 이런 경관의 변화였다.

 

경계표지를 지나자마자 만난 글렌리오 뉴멕시코 관광 비지터 센터[Glenrio Visitor Center NMDOT]’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늘 그렇게 해왔다는 듯, 우리의 인사에 응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지도를 펼치면서 묻지도 않는 관광명소들을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관광 비수기이긴 했으나, 우리가 보고자 한 포인트들은 가까스로 겨울철 폐장을 하루 이틀 앞두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곳이 바로 시간 변경대인 듯 직원은 우리 시계의 시침을 한 시간 뒤인 3시로 되돌리라고 했다.

 

미국에는 동부 시간[Eastern Time], 중부 시간[Central Time], 산악 시간[Mountain Time], 태평양 시간[Pacific Time] 등 네 개의 시간대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출발한 오클라호마는 텍사스와 함께 중부 시간대에 속해 있었고 뉴 멕시코는 산악 시간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 먼 곳을 가는 길에 한 시간 벌었구나! 쾌재를 불렀으나, 태양은 이미 저 멀리 지평선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한 시간을 벌긴 했으나, 앨버커키까지 세 시간이 넘어 걸린다는 비지터 센터의 직원 말에 오후 4시쯤 도착하여 느긋하게 숙소를 정하리라 생각한 우리의 계획이 멋지게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고, 가끔씩 속도제한[Speed Limit] 상한선 75마일을 넘기며 달려 나갔다.

 

 

비지터 센터를 나온 우리는 목적지인 앨버커키(Albuquerque)까지 3~4백 마일을 더 달려야 했다. 엔디(Endee), 바드(Bard), 투쿰카리(Tucumcari) 등 연도의 대소 도시들을 지나고 앨버커키에 도착하기까지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표현할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황량함이란 말 은 사전에 나오겠지만, 그 말도 결국 우리 인식의 한계만 드러낼 뿐이었다. 약간씩 오르내리는 구릉들을 제외하고 산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지평선에 아련히 보이는 것이 바로 버날리요(Bernalillo) 카운티와 샌도발(Sandoval) 카운티에 걸친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일 것인데, 그마저 저녁 어스름과 아련히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앨버커키에 들어서기 위해 넘을 때에야 그 산맥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을 포함하여 뉴멕시코 전역의 평균 높이가 해발 1710m이고, 가장 낮은 지역도 852.6m에 달하니 뉴멕시코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내내 1천 미터가 훨씬 넘는 산길을 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넓은 땅을 덮고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돌들, 그 사이에 모습을 내민 블랙 그래머(Black Grama), 아리스티다 퍼푸리아(Aristida Purpurea), 크레오소트 부쉬(Creosote Bush) 등 사막식물들 뿐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 깃들만한 교목은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기껏 쥐나 프레이리독 같은 작은 짐승들이나 몸을 숨길만한 식물들이 듬성듬성 성장을 멈춘 채 사막의 맨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뉴멕시코로 들어가는 입구

 


끝없이 펼쳐진 뉴멕시코의 평원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Rio Grande 강과 George Bridge 주변에 펼쳐진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과 앨버커키(Albuquerque) 사이의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앨버커키 시가지

 

 


앨버커키 인근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황량한 평원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어도비 건축양식의 천주교 성당

 

 


성당 옆쪽에 마련된 성모상

 

 


애코마(Acoma) 푸에블로(Pueblo) 스카이시티에서 내려다 본 관광안내소

 

 


뉴멕시코를 달리며 찍은 황량한 모습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

 

 


뉴멕시코의 끝없는 지평선 너머로 아련한 여운을 남기면서 해가 지고 있다.

 

 

해발 1,619.1 m의 고지대에 위치한 앨버커키에 도착하자 붕 뜬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그만큼 기압이 낮은 때문일 것이다. 1박을 한 다음날 찾은 곳은 스카이 시티(Sky City). 예의 그 광활한 평원 한 복판에 잔구 형태의 돌덩어리들과 엄청난 규모의 돌산이 서 있고, 그 위에 만들어진 애코마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의 공동체가 바로 그곳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돌 주거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곳에서 상상되는 그들의 삶 역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 날 만난 아름다운 산타 페(Santa Fe) 역시 2,134 m 의 고도(高度)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앨버커키보다 기압이 더 낮은 때문일까, 자동차에 넣어 갖고 온 과자 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산타페 산맥에 안겨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도시. 이곳 역시 뉴멕시코의 주 건축양식인 어도비(Adobe) 일색의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앨버커키도, 스카이시티도, 산타페도, 타오(Taos), 그 도시들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주택들도 대부분 어도비 양식이었다. 어도비란 모래, 진흙, , 막대기, , 동물의 배설물 등 섬유질이나 유기질 재료 등을 섞어서 벽돌을 만들고 햇볕에 말리는 공법으로 짓는 건축양식이다. 볼그레한 땅 색깔과 어울리게 지은 어도비 건축물들이야말로 자연에 맞추어 살려는 이 지역 주민들의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직선과 기하학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곡선과 흙빛의 따사로움을 갖춘 이 건축양식이 첨엔 좀 생소했지만, 눈에 익을수록 미학이란 결국 자연과의 위대한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의 깨달음으로 연결되었고, 결국엔 정겨움을 느끼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비록 일부분이나마 뉴멕시코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나서야 그곳에 차원 높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듯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돌투성이의 사막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수만 년 웅웅거리며 쓸어오는 바람결 외에 움직임 하나 없는 이 벌판을 전통 미학의 기준으론 추하다고 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이 벌판을 달리면서 감동과 함께 울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나는 이미 오클라호마 북부의 오세이지(Osage) 인디언 구역에서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을 만나 연암 박지원의 호곡장(好哭場)’을 떠올린 바 있다. 광대한 요동 들판을 걸어가던 박지원은 그곳을 가히 울어볼 만한 곳이라 말하고, 인간 7(七情)의 발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초원 앞에 선 나도 연암선생이 느꼈던 그 심정을 이곳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이 극에 달해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 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것이니, 북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다를 게 뭐겠는가.”라는 연암 선생의 논리야말로 뉴멕시코의 대평원 앞에 선 내 감정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감정적 여과를 거치고 나서야, 뉴멕시코 대자연의 추함은 결국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극도의 추함이 아름다움과 합치될 수도 있다는 미학의 상대성이야말로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터득하게 되는 진리 아닌가.

 

***

 

잠시 오클라호마에 체류하면서 평원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텍사스를 보고 나서 그 아름다움의 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멕시코의 사막 벌판을 만나면서 새로운 미학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의 평원에는 나무가 많고, 돌보다는 기름 진 흙이 많다. 기름 진 흙으로 나무를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여성성(女性性)’의 본질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대지를 달리다 보면 식물을 키우고 인간을 길러내는 지모신(地母神)’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이와 달리 돌투성이의 사막, 뉴멕시코의 대지에서는 쩌렁쩌렁 울리는 거친 남성의 포효를 들었다. 뉴멕시코를 달리면서 눈물 나는 감동으로 긴장하다가 오클라호마에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숭고와 비장의 남성 미학적 공간에서 부드럽고 우아한 모성 미학의 공간으로 입사[入社, initiation]했기 때문이리라. 다른 시간대 즉 Mountain Time에서 Central Time으로 넘어가면서 미학적 차이까지 경험하게 된 내 가슴에 희열이 넘치는 순간이다.

 

 


애코마 푸에블로 인디언 스카이시티의 광장에서
(기우 제의에 쓰이는 사다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상부의 가로막대는 구름을 각각 상징한다 함.
비가 부족한 이곳의 상황을 보여주는 물건임) 

 


스카이시티에 있는 성당[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앨버커키의 푸에블로 문화센터(Indian Pueblo Cultural Center)에서
공연을 마친 푸에블로 남성 무용수와 함께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에 들어가는 중. 멀리 보이는 것이 산타페 산맥이며
그 앞에 널리 퍼진 것이 산타페 시가지임.

 

 


산타페 시내의 산 미구엘(San Miguel) 성당. 미국 최초의 어도비 양식 성당임.

 

 


어도비 양식의 호텔 산타 페 


 


타오(Taos) 시내 어도비 양식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타오 시내의 '랜처 장로교회[Rancho's Presbyterian Church)

 


타오 시 외곽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 가옥

 


푸에블로 인디언의 전통가옥. 앞에 있는 둥근 것이 빵을 굽는 화덕임.


타오(Taos)로부터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의 농장 입구

 


타오(Taos)에서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에서 만난 사슴떼.
환상 속의 한 장면 같지요?

 


뉴멕시코의 카운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14. 12:05

 

 

 


코만치의 수도 로턴을 중심으로 이어진 각 도시들

 

 


1848년의 미국 지도

 

 


코만치 네이션의 깃발

 

 


코만치 민족대학[Comanche Nation College]의 상징 

 

 


티피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코만치 가족 3대

 

 


대평원의 티피

 

 


티피를 재현해 놓은 모습

 

 


옛날 코만치족 티피의 모습

 

 


멀리서 들려오는 신호음을 듣고 있는 인디언 전사들

 

 


불 붙인 풀을 화살에 붙여 쏘아 버팔로들을 언덕 위로 몰고 있는 인디언들

 

 


가재도구를 끌고 말을 탄 채 이동하는 인디언 가족

 

 

카이오와(Kiowa), 아파치(Apache), 코만치(Comanche), 그리고 대평원[Great Plains]의 서사시(4)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1)

 

 

포트실을 떠나 5분쯤 달렸을까. 코만치의 수도 로턴(Lawton)에 진입했다. 서부영화에서 접한 코만치 전사들의 무시무시함이 기억에 남아서였을까, 운전대를 잡고서도 무의식적으로 시내 좌우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어느 골목으로부터 말을 타고 예의 그 화살을 겨누며 쫓아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가지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깨끗하며 조용했다. 여느 도시들 못지않게 주택들엔 윤기가 흘렀다. 펄펄 살아 날뛰던 코만치의 정기는 이미 죽었는지, 아니면 어느 구석에 잠복해 있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외부인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들은 수렵과 채취를 업으로 삼고 기마술 같은 특유의 말 문화[horse culture]’를 보유한 부족이었다. 그들의 인구는 18세기 후반이 되자 이미 45,000 명 이상으로 늘어 있었다. 그들은 이곳 남부 대평원을 지배하던 부족으로서 가끔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포로들을 잡아다가 스페인 사람들이나 멕시코 정착민들에게 노예로 팔아먹기도 하던 무서운사람들이었다. 그 뿐 아니다. 수천 명의 스페인 사람들, 멕시코 사람들, 심지어 미국 정착민들까지도 포로로 잡아다가 국경지역에 묶어 두고 백인인 그들과의 강제결혼을 통해 혼혈의 후손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메스티조(Mestizo) 혼혈인들이다. 코만치가 그 메스티조의 확장과 전개에 큰 공헌을 한 셈이고, 그것은 결국 인종의 개량이라는 긍정적 결과를 낳게 된 셈이었다. 이처럼 40년 이상 미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질겁하게 만든 아파치보다도 오히려 무서운 것이 코만치였다.

 

현재 코만치 네이션에 등록된 인구는 15,000여 명이고, 그 중 7,700여 명이 로턴포트실과 그 주변지역 등 오클라호마 주 남서부 지역에, 나머지는 전국에 각각 흩어져 살고 있다 한다. 그러나 매년 6월 중순, 오클라호마 주 월터스(Walters) 시티에서 열리는 홈커밍 파우와우(Homecoming Powwow)’ 행사에는 대부분의 코만치 인들이 모인다고 한다. ‘파우와우는 병의 회복이나 사냥의 성공 등을 비는 집단의식이다.

 

코만치 네이션의 본부는 로턴에 있는데, 카도(Caddo)코만치(Comanche)카튼(Cotton)그래디(Grady)제퍼슨(Jefferson)카이오와(Kiowa)스티븐스(Stephens)틸만(Tillman) 카운티 등이 그들의 사법권이 미치는 지역이다. 8분의 1 즉 대략 13% 정도의 코만치 피를 갖고 있으면 부족원의 자격이 있다고 하니, 증조부모 가운데 한 사람만 코만치 인이면 네이션에 등록할 수 있는 것이다. 코만치족은 대평원의 인디언 부족으로서 그들이 차지한 영역은 뉴멕시코 동부, 콜로라도 남동부, 캔자스 남서부, 오클라호마 서부, 텍사스 북서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 정부가 인정한 코만치 네이션의 본부는 현재 로턴에 있다.

코만치가 뚜렷한 부족으로 떠오른 것은 1,700년 직전 즉 그들이 쇼쇼니(Shoshone) 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때였다. 당시 쇼쇼니 부족은 와이오밍 주 플랫 강(Platte River) 상류를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코만치족은 말[]을 얻음으로써 큰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다. 1680년 푸에블로(Pueblo) 족이 반란을 일으킨 후 푸에블로 인디언들로부터 말을 얻게 되었고, 쇼쇼니로부터 분리해 나온 이후 말을 이용함으로써 더 좋은 사냥터를 찾을 수 있는 기동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역사상 교통수단의 발달이 혁명이라 할 정도로 산업을 발전시킨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코만치 문화의 등장과 말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사실 그들이 쇼쇼니와 결별하고 남쪽으로 이동한 목적도 새로운 바이슨 떼를 찾아내기 위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스페인 식민지의 정착자들로부터 새로운 말들을 구하기 위한 데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상당수의 서부영화들에 묘사된 것처럼 코만치 인디언들의 마술(馬術)은 신기(神技)에 가깝다는 평들이 있어왔다. 다시 말하면 코만치족은 말을 그들의 문화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다른 부족들에게 소개한 대평원의 첫 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부 대평원으로 이동하면서 아칸사 강으로부터 텍사스 중부로까지 영역을 넓혔고, 1,700년에는 뉴멕시코와 텍사스 주 상단 즉 오늘날의 오클라호마 주 팬핸들(Panhandle)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결국 1777년 싸움의 상대였던 리판 아파치(Lipan Apache)는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까지, 메스칼레로 아파치(Mescalero Apache)는 코아휠라(Coahuila)까지 각각 퇴각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코만치는 들소인 바이슨의 증식을 통해 식량이나 옷을 확보하게 되었고, 쇼쇼니 이주자들이 유입되었으며, 라이벌 그룹들로부터 포로로 잡아온 여인들과 아이들을 자신의 주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구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그러나 코만치는 단일민족으로 응집하지 못하고, 십여 개의 자치그룹으로 분할되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밴드(band)’라 불렀다. 이 밴드들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좀처럼 서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19세기 중반쯤 프랑스와 미국의 무역업자나 정착자들에게 말을 공급했고, 나중에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쉬에 참여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로드를 따라 자기네 영역을 통과하는 이주자들에게도 말을 공급하게 되었으니, 코만치족이야말로 말을 이용하여 전쟁에도 이기고 부도 이룬 셈이었다. 그 뿐 아니다. 그 때까지 야만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말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공급이 달리자 다른 부족들과 정착자들의 말을 훔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서운 말 도둑이란 악명을 얻게 되었고, 나중에는 가축까지 훔치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나 미국인 정착자들에게서 가축을 자꾸 훔치다가 전쟁이 터지는 수도 있었다.<다음에 계속>

 

 

 


버팔로를 몰아 함께 사냥하는 인디언들

 


풀을 뜯고 있는 대평원의 버팔로

 

 


혼자서 말을 타고 버팔로를 사냥하고 있는 인디언

 

 


가축떼를 몰고 이동시키는 일의 어려움

 

 


가축떼를 몰고 이동하던 통로들

 

 


밀 씨앗을 보관하던 옹기

 

 


밀의 무게를 재던 저울

 

 


대평원 인디언들의 말 문화

 

 


1930년대 캐나다의 평원과 미국의 곡창지대에 큰 피해를 준 먼지 폭풍. 1930년대 내내 심각한
가뭄과 바람에 의해 심한 고통을 겪었음.

 


Dust Bowl의 다른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8. 17:26

 

 

 

 


영화 <아파치 요새>의 포스터

 

 


영화 <론 레인저>의 포스터

 

 

 
<아파치 요새>에서 좌측이 헨리 폰다(Henry Fonda), 우측이 죤 웨인(John Wayne)

 

 


<아파치 요새>의 한 장면

 

 

 
영화<론 레인저>의 한 장면. 왼쪽이 쟈니 뎁(Johnny Depp), 오른쪽이 아미 해머(Armie Hammer)

 

 


<론 레인저>의 한 장면

 

 

 

 

 

서부지역 인디언들과 대평원[The Great Plains]

 

 

 

 

하이틴 시절부터 이 나이까지 영화를 그리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들은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서부영화들이다.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내용들이었으나, 관통하는 서사구조는 단 하나 선악의 대결이었고 주제는 미국 판 권선징악이었다. 선을 대표하는 백인들은 늘 당당하고 정의로우며 멋있었던 반면, 악을 대표하던 인디언들은 늘 무지(無知)무명(無明)무뢰(無賴)의 저급한 무리들이었다.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세계인의 편견과 무지는 이처럼 대부분 서부영화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넓고 아름다운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어느 날 웬놈들이 밖에서 뛰어 들어와 채찍을 휘두르며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천추만대 원한에 사무칠 일인데, 전 세계의 코흘리개들도 다 보는 영화에 가해자인 백인들은 정의의 사도로, 피해자인 자신들은 몹쓸 불한당(不汗黨)으로 그려냈으니, 그 통탄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 기억으로는 20055월에서야 미국의 상원은 인디언 6천만 학살에 대한 사과를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의 죄가 어찌 사람 죽인 일뿐일까. 당시로서는 몹쓸 땅에 그들을 짐승처럼 몰아넣은 점까지 계산하면, 그 죄가 하늘에 닿고도 남을 백인들이었다. 나찌 독일이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왜인들이 전쟁터로 광산으로 징발하거나 허물을 뒤집어 씌워 죽인 우리 민족의 숫자도 엄청나지만, 당시 총인구 5천만~1억을 헤아리던 인디언들 가운데 살해된 비율이 80~90%라니,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했다 한들 미국 백인들의 끔찍한 죄악을 어떻게 계산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런 사건으로부터 무려 2백년이나 지나서야 이제 사과나 해볼까?’하고 궁시렁 거리며 나섰고,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더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르렀으니, 만시지탄(晩時之歎)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워싱턴 D.C. 의회 묘지에서, 체로키촉토무스코기포니시스턴와페톤오야테 등 5개 부족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캔자스 출신의 공화당 상원 샘 브라운백 의원이 사과결의문을 낭독함으로써 의회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 전 해 11월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564개 부족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디언들에 대한 그동안의 횡포와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사과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정부로부터 무수한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이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인디언들로서는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진작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고, 사과를 늦게 한 데 대하여 문제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억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인디언들을 눈곱만큼이라도 배려했다면,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그들의 이미지라도 진실에 가깝게 만들거나 긍정적으로 묘사했어야 하건만, 서부영화 같은 매체들에서 보듯이 그들의 모습은 스테레오 타입이라 할 정도로 왜곡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 점이 제삼자인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나바호(Navajo), 체로키, (Sioux) 등 규모가 큰 종족들을 포함, 564개 종족에 3백만 이상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소수부족으로서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한 종족이 아파치(Apache)와 코만치(Comanche).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은 <아파치 요새(Fort Apach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1948년 죤 포드(John Ford) 감독이 만들었고, 죤 웨인(John Wayne) 및 헨리 폰다(Henry Fonda) 등 명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인데, 인디언에 대하여 비교적 따스한 관점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서부영화들과 구별된다고 한다. 감독은 주인공인 요크 중령[죤 웨인]을 통해 아메리카 인디언 특히 아파치 족에 대한 인간적 관점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종래 사납고 공격적이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아파치를 동정적포용적 관점에서 바라 본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교적 긍정적인데,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영화를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미국으로 떠나오기 직전인 작년 7월 하순 경, 한국에서는 론 레인저(The Lone Ranger)’란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쟈니 뎁(Johnny Depp)이 열연한 주인공 톤토(Tonto)는 바로 코만치 인디언이었고, 영화의 배경은 캘리포니아유타콜로라도 애리조나뉴멕시코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콜로라도와 뉴멕시코는 그레이트 플레인즈에 포함되는 공간이었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지닌 톤토는 죽기 직전의 외로운 레인저존 레이드(John Reid)를 살려냄으로써 결국 그들은 환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거칠 것 없는 드넓은 황야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액션들은 코만치 인디언인 톤토와 백인 레인저 존 사이에 교감되는 우정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백인들과 인디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코만치 추장 빅베어(Big Bear)의 말[‘우리 시대는 사라졌네. 백인들은 그걸 발전이라 부르는 모양이네만.’]이 추가되면서 그간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된 백인과 인디언의 이미지 혹은 양자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반성이나 의식 또한 새롭게 제기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리라.

 

***

 

인디언을 찾아다니기 몇 달 만에 대평원의 주인공 아파치와 코만치, 그리고 카이오와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대평원의 주인들이었다. 오클라호마 동북쪽에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이 있다면, 서남쪽에는 '대평원[The Great Plains]'이 있다. 그렇다면 대평원은 어떤 공간인가. 알버타(Alberta), 새스캐치원(Saskatchewan), 매니토바(Manitoba) 등 캐나다 남부를 포함, 몬태나(Montana)노쓰 다코타(North Dakota)사우쓰 다코타(South Dakota)와이오밍(Wyoming)네브라스카(Nebraska)콜로라도(Colorado)캔자스(Kansas)뉴멕시코(New Mexico)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 , 로키산맥(Rocky Mountains)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사이의 미국 땅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남북 간 길이는 3,200 km, 동서의 폭은 800 km, 면적은 1,300,000 이니, 남한 면적[99,538 ]13배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오클라호마의 경우 대평원은 주 전체 면적의 60%나 차지할 만큼 거대하다. 그 안에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다음에 계속>

 

 


워싱턴 D.C.의 미 의회 묘지 

 


캐나다에서 미국 남부까지 걸치는 대평원(The Great Plains)

 

 


대평원의 한 부분

 

 


대평원 한 가운데를 달리는 하이웨이

 

 


대평원의 바이슨 무리

 

 


대평원의 한 부분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의 집단 거주지를 찾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8. 13:18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2: 엘크 시티(Elk City)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를 보고-

 

 

 

 

손 형,

 

2,400마일에 달하는 66번 길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까지 8개 주[일리노이(Illinois)-미주리(Missouri)-캔자스(Kansas)-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뉴멕시코(New Mexico)-애리조나(Arizona)-캘리포니아(California)]에 걸쳐 있고 시간대도 세 개나 들어 있으니, 이 도로의 길이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길이 주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미국의 간선도로[Main Street of America]’, ‘미국 도로의 어머니[Mother Road of America]’ 라는 별명들까지 얻게 되었지요.

 

 


66번 도로가 통과하는 8개 주

 

 

이 길은 숱한 질곡의 역사를 겪기도 한 것 같습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전국 규모의 추진 기구를 만들어 각 주의 동의를 얻고, 길을 뚫고 포장을 하고, 각종 부대시설을 만드는 등 지난(至難)하고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 이 길은 태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하이웨이가 뚫리고, 그것이 각 방면의 다른 길들과 연결되면서, 기존의 66번 도로는 버려지게 되었고, 그 도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도시들과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겠지요.

 


남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바로 남쪽 옛 철교와 길의
황폐화된 모습 


황폐화된 66번 도로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건물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식당 간판

 

 

그러나 언제부턴가 버려진 채로 죽어가던 66번 도로의 가치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지요. 자연스럽게 그 길은 새로운 모습으로 회생하게 되었고, 주변의 도시들 역시 쇠락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들은 매우 극적이었겠지요?

 


국립 66번 도로박물관의 네온사인

 

 

66번 도로가 지나는 곳곳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여러 권의 책과 팜플렛,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런 사연들이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애버리[Cyrus S. Avery]라는 사람이 AASHO[the American Association of State Highway Officials]의 회장이 되어 66번 도로를 완공했다 하여 그를 ‘66번 도로의 아버지[the Father of Route 66]’라 부르는 모양인데, 그가 오클라호마 주 털사 출신이라는 점은 66번 도로를 공유하는 다른 주들과 달리 오클라호마 주의 한 복판을 대각선으로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실과 흥미로운 연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군요.

 


66번 도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버리(Cyrus S. Avery)

 

 

사실 이 도로가 오클라호마 주와 일리노이 주만 중앙을 관통하고 있을 뿐, 나머지 주들의 경우 형식적으로 걸쳐 지났다는 것이 저 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네요. 미주리 주에서는 하단을 지났고, 캔자스 주에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지났으며, 텍사스 주에서는 북부의 일부를 통과한 정도지요. 그나마 뉴멕시코와 애리조나가 북쪽으로 약간 치우치기는 했으나 관통한 경우로 볼 수 있고, 캘리포니아는 남쪽을 통과하여 산타모니카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군요. 더구나 주도(州都)인 오클라호마시티를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지요. 그는 어쩜 이 도로야말로 미래의 역사적 공간으로 영속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고향인 오클라호마 주에 긴 부분을 할당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덟개의 주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오클라호마 주 안에 배당된 66번 도로의 길이도 시기마다 약간씩 달라지는데요. 1926년의 추정 거리는 415.4 마일이었는데, 1936년에는 383.7 마일, 1944년에는 381.7 마일, 1951년에는 368 마일로 점점 줄어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길을 고치거나 포장을 새로 하면서 굽은 길을 펴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면서 그렇게 된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총 연장 2,400 마일의 8개 주 산술평균이 300 마일인데, 400마일 가까이 차지했다는 것은 이 도로의 큰 몫을 오클라호마 주가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네요.

 

 

이 도로가 지나는 오클라호마 주의 큰 도시들만 헤아려 보아도 열 개가 넘어요. 아래 텍사스 주 쪽부터 꼽는다면, 에릭(Erick)-세이어(Sayre)-엘크(Elk)-클린턴(Clinton)-웨더포드(Weatherford)-엘 르노(El Reno)-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City)-아카디아(Arcadia)-챈들러(Chandler)-스트라우드(Stroud)-새펄파(Sapulpa)-털사(Tulsa)-클레어모어(Claremore)-빈타(Vinta)-마이애미(Miami) 등으로 연결되지요. 물론 이 도시들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이 도로에 연결된 도시들은 무수하지요.

 

 


오클라호마 주 내의 66번 도로

 

 

 

글쎄요. 우리는 이들 가운데 몇 군데나 둘러보았을까요? 맨 처음 오클라호마시티와 아카디아를 들렀고, 그 다음이 털사와 유콘, 그리고 최근 엘크 시티와 클린턴을 들렀네요. 사실 오클라호마시티를 다녀오는 길이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66번 도로를 탔다가 177번을 만나 스틸워터로 방향을 틀곤 했으니, 66번 도로는 우리에게 꽤 낯이 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몇 군데도 못 돌아 본 주제에 무슨 66번 도로를 말하려 하느냐?’고 책망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어디 한 솥의 국물을 다 마셔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된 겁니다.

 

 


오클라호마주의 66번 도로 지도

 

 

저는 이미 아카디아의 라운드 반[Arcadia Round Barn], 털사(Tulsa)의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 유콘(Yukon City)의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등을 둘러보고 그 공간들이 갖는 의미나 느낌들을 적어 이곳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앞쪽에 올린 미국통신 10, 12, 27을 참조해 주세요].

 


66번 도로 가에 있는 아카디아(Arcadia)의 라운드 반(Round Barn)

 

 

엊그제 우리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66번 도로를 통과하게 되었지요. 달라스로부터 포트워쓰(FortWorth)를 경유하여 오클라호마 주 66번 도로 상의 엘크 시티에서 1박을 하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클린턴 시티를 둘러본 다음 이곳 스틸워터로 귀환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엘크와 클린턴의 뮤지엄 방문기를 중심으로 66번 길에 관한 인상을 남기려 하는 겁니다.

 

달라스 가는 길도 엄청나게 멀었지만, 달라스를 탈출하여 엘크로 돌아오는 길도 그에 못지않더군요. 달라스를 빠져나오는 데만도 스무 번 가까이 길을 바꿔 탔으며, 완전히 빠져 나온 후에도 십여 개나 다른 길을 거쳤으니, 미국의 길들이 넓고 곧으며 길게 뻗어 있긴 하지만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한참 고생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쨌든 달라스의 숙소로부터 계산하여 5시간 가까이 걸려 엘크시에 들어왔습니다.

 

고층빌딩들 중심의 다운타운을 갖고 있는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의 어느 도시나 그렇습니다만. 이곳도 평탄한 들판에 넓은 중앙로와 주변도로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서 시가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다만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거리에 따라 약간씩 고풍이 느껴지는 곳들도 있고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나 상업지구들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을 갖고 있는 점은 아주 좋았어요.

 


엘크 시에 들어오며

 

 

엘크 시티가 언제 출발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154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코로나도(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가 이 지역을 통과한 첫 유럽인이긴 했으나, 실제로 엘크 시티의 역사는 오클라호마 서부 지역에 셰이옌-아라파호족 (Cheyenne-Arapaho)의 보호구역이 문을 연 1892419일을 출발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군요. 이 때는 첫 백인 정착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 도시 역시 아메리칸 인디언과 인연이 깊은 곳임은 말할 것도 없어요.

차를 몰고 시내에 진입하자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깔린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걷고 싶은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갈 길이 바빠 먼저 박물관을 찾기로 한 우리는 잠시 달려 신시가지 끝부분에 넓게 조성된 박물관을 만났지요. 그곳엔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하나의 부지 안에 세워져 큰 단지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이 도시의 작은 규모에 비하여 꽤 큰 박물관 단지라고나 할까요? 여기서는 이 단지 이름을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oute 66 Museum Complex]’라고 부릅디다. 이 안에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National Route 66 & Transportation Museum]’,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등이 들어 있었어요.

 


엘크시 '옛 동네 박물관'의 건물과 입간판

 

 

우선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에 들어갔지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가 우리를 안내하여 가정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코너와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둘러 보았지요. 초기 오클라호마 주 개척자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어요. 1층에는 초기 개척자의 삶, 성조기들, 아메리칸 인디언 갤러리,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수잔(Susan Powell)의 사진과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초기 카우보이와 로데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사실 2층에 전시된 많은 것들은 유명한 로데오 증권 도입자인 뷰틀러(Beutler) 형제들이 기증한 것들이라네요. 참 대단합디다.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거실 및 식당)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아이들 방)


옛날 생활용품들


당시 피아노


엘크시티의 역사를 보여주는 휘장


생활사 자료실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엘크시티 춣신의 수잔(Susan Powell)


로데오로 유명한 뷰틀러(Beutler) 형제들


로데오 회사 지분 일부를 뷰틀러의 아들에게 결혼선물로
양도한다는 증서


로데오 관련 포스터와 의상 및 소품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 및 랜드런을 소재로 한 그림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당시 카우보이를 묘사한 그림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이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이었어요. 그곳에 들어서자 길 가는 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길 주변에 흔히 있던 것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습디다. 옛날 풍의 차들, 주막, 레스토랑, 자동차 번호판 등과 미국 하이웨이의 서사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들로 전시장 안이 가득 차 있었어요. 특히 1955년도에 만들어진 핑크색 캐딜락, 자동차 영화관에서 고전적인 쉐보레의 임팔라(Impala)를 타고 앉아 감상하던 흑백영화 등이 압권이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전시된 각종 자동차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눈길을 잡아 두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 했어요.

 


매점 등이 들어 있는 건물


66번 도로 표지판들


66번 도로 표지판 도안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차량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자동차와 도로 상황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인디언 가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생활사 자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차량 번호판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1940년 셰보레에서 출시한
당시 최고급 자동차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화물적재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주유소와 군용 지프

 

 

거기서 나와 길을 건너니 붉은 색의 창고 형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데요. 오른쪽이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왼쪽이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만 보기로 했지요. 박물관에 들어서자 그곳을 지키시는 노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대뜸 물으시는 거예요.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신이 21살 때(1954) 부산에 미군으로 주둔해 있었다고 하시네요. 그 후 원주, 강릉 등으로 주둔지가 바뀌었던 모양인데, 고령으로 말씀은 어눌하셔도 우리나라에 대한 기억들을 분명히 갖고 계셔서 아주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 박물관에는 서부 오클라호마주 초기 농업과 축산업자들의 생활에 쓰인 도구들이 광범하게 수집, 전시되어 있었어요. 대장간의 실제 모습, 각종 풍차 콜렉션, 트랙터의 각종 시트, 각종 수수 탈곡기, 가시철망 콜렉션 등이 이채로웠어요.

 


왼쪽은 '대장간 박물관', 오른쪽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에서 만난 80대의 노인 관리자[21세 되던 1954년
한국에 파병되어 부산, 강릉, 원주 등지에서 근무했다 함)


박물관에 전시된 풍차


트랙터


농기구 전시장


밭을 갈던 트랙터의 일종


당시 주유기


당시 전화기들과 전화선 수리공의 모습


각종 농기구들의 전시장


당시의 각종 공구


당시의 각종 공구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는 미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풍차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농업에 바람을 이용한 이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지요. 지금도 이런 모습의 풍차들은 들녘에 많이들 서 있었어요. 말하자면 삶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모습이었지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자 철로와 역사(驛舍)가 재현되어 있고, 당시 사용되던 엄청난 증기기관도 생생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어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 전시된 각종 풍차들


엘크역에 근무하던 역장의 모습


당시 열차의 증기기관


재현해 놓은 당시의 오페라 하우스

 

 

***

 

텍사스 주를 기점으로 할 경우 66번 도로상에서 엘크는 에릭(Erick), 세이어(Sayre)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거점도시인 셈인데, 우리가 둘러본 박물관 역시 규모나 내용상 그에 걸맞은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특히 박물관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지요.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대부분 1980년대 말에서 1920~1930년대의 것들이었는데, 특히 자동차와 농업기계들에서 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시기 우리는 어땠나요? 사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농촌에서는 꼬박꼬박 지게로 짐을 져 나르고, 괭이와 쟁기로 논밭을 갈아 왔거든요. 그 경험을 저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목화밭에 나가 한 송이 두 송이 여린 손으로 목화를 따 앞자락에 담던 기억들이 왜 그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지요? 그런데 이들은 당시에 모든 일들을 기계로 해내고 있었어요. 목화 따는 일은 물론 목화로부터 솜을 뽑아내는 일까지 일관작업으로 해내는 기계를 이 박물관에서 목격하고 말았답니다. 하기야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수적이었겠지만, 우리와 너무도 대비되는 이들의 풍요로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 말대로 이들과는 잽도 안 되는우리가 이제 기술이나 무역의 면에서 이들과 경쟁을 벌이는 위치로까지 올라섰으니, 장하지 않아요? 가끔은 우리 스스로 자랑도 하고 살아봅시다. 어쨌든 다음 날 클린턴(Clinton)을 거쳐야 하는 우리는 조용히 깊어가는 엘크의 밤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지요.<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


당시의 우물


농기구 전시장에서 


오클라호마 지역의 가축 우리 모습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