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 1. 27. 21:23

 

 

     좋은 영화 <말모이>

의무감으로 찾았다가 감동 받고 돌아오다!

                                                                                                                                                        

                                                                                                                                                               조규익

 

 

얼마 전부터 말모이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말모이라는 영화가 등장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모이? ‘국어사전이란 뜻인데? 한일합방 전후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우리말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사들이 쓰기 시작한 말인데...

 

그렇다. ‘조선말 큰 사전편찬까지의 우여곡절을 사건의 축으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겪은 수난(조선어학회 사건)을 그려낸 영화였다. 사실 처음엔 볼까 말까 고민했다. 수없이 읽고 들어, 익히 안다고 자부하던 사건이었다. 2019년 들어오며 겹치기로 찾아온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비참한 역사를 반추하며 우울증을 심화시킬 이유는 더더욱 없었던 것. 모른 척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나를 움직인 것은 중국 조선족 대학원생의 말이었다.

 

교수님, <말모이>란 영화 보셨어요? 최근에 본 영화 중 최고였어요. 할아버지 나라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그런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첨 알았어요. 감동이었어요. 꼭 보세요!”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중국에서 온 너도 그런 말을 하는데. 명색이 한국어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한다는 내가 너만도 못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나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지원할 때만 해도 우리말과 글을 가르쳐 훌륭한 한국인들을 기르겠다.’는 것이 내 꿈이었다. 애국의 순정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세월의 격랑 속에 가슴 속의 정열은 모두 식어버려, 그냥 국어국문학 선생으로습관화된 삶을 지탱해오고 있었구나!

 

따분한 역사 이야기와 상투적인 메시지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일자무식 소매치기 김판수(유해진)와 조선어학회 핵심요원 류정환(윤계상)의 조우, 판수의 조선어학회 합류, 자녀들(덕진과 순희)을 통한 판수 가족의 생활고, 경성제일중 이사장 류완택(송영창)과 아들 류정환의 갈등, 치밀하고 집요한 일본 경찰과 그들을 통해 고발하는 일제의 야욕 및 만행, 막바지에 무산되는 공청회와 말모이의 원고를 두고 일본 경찰과 벌이는 추격전, 김판수의 장렬한 죽음, 해방 후 천행으로 되찾은 원고, 그 원고로 만들어진 <<조선말 큰 사전>>...그와 함께 사건들의 치밀한 배치와 주도면밀한 서사전략이 돋보이는 영화예술의 격을 맛보게 된 건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비율이나 배합이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겐 중요했겠지만, 이 영화의 경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말과 글이 민족의 정신이자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축, ‘어느 순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의(大義)에 동참하여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축, ‘일본이 우리를 정신까지 집어먹기 위해 얼마나 잔혹하게 굴었는가를 보여주는 제3의 축이 동아줄 꼬이듯 엮여 나간 것이 이 영화의 서사였다. 사실 한 사람의 열 발자국보다 열 사람의 한 발자국이 더 큰 것이고 그것들이 모여 비로소 조선의 독립을 이룬다는 말이 감동적이긴 하나 예술성을 흠집 낼 상투적 요소로 저평가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관객들이 그 말을 들으며 전율했다면, 이 영화의 흠을 더 이상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시경 선생

 

이극로 선생

 

조선어학회 사건에 고초를 겪은 인물들

 

조선말 큰 사전 원고

 

조선말 큰 사전 원고

 

 

 

 

또 하나. 일본이 동해상에서 초계기 장난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 영화의 타이밍이 절묘하다. 일본인들이 이 영화를 볼 이유도 없고, 본다 한들 자신들의 야만적 잔인성을 인정할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식민지의 문자와 글을 뿌리 뽑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것을 강압적으로 심으려는 시도를 인류사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에서나 약간 찾아 볼 수 있을까. 일상생활에서까지 자신들의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한 만행의 주체로 일본 같은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

 

시간과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영화가 돌아가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영화 속의 저들은 대체 왜 말도 안 되는탄압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단 말인가. 잠시 잊고 있던 역사적 진실이 가슴 속에 감동으로 되살아났다. 예술적 팩션(faction)으로 감동을 선사해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11. 8. 23:33

 

 

 

 

 

종합편성채널들에게 한 마디

-출연자들의 어법을 제대로 모니터링하라-

 

 

 

 

 

 

정치가 어수선하고 사회가 혼란스럽다 보니,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으로 약칭)에 출연하여 궁금증을 풀어주는 각계의 전문가들이 반가울 때가 많다. 어쩌면 그렇게 내 생각과 같은지 신기할 때도 있고, 비판의 언성을 높일 때면 속이 후련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매일 똑같은 얼굴들이 등장하여 별스럽지 않은 말들을 반복한다고 불만인 아내와 종종 채널 다툼을 벌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점에서 종편 출연 전문가들의 식견과 말솜씨는 탁월하다. 그러나 가끔 귀에 거슬리는 점도 없지 않다. 최근 방송에 출연하는 변호사들이 부쩍 늘었다. 공부를 많이 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들이니만큼 논리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다. 그러나 호칭을 비롯하여 몇몇 말투는 몹시 귀에 거슬린다. 그런 실수들을 반복할 때마다 그들에 대한 신뢰감은 저하된다. 예컨대 어떤 여성 변호사는 존대어법을 남발한다. 분명한 범죄인을 언급하면서도 꼬박꼬박 존대어를 붙이는 그의 어투와 어법이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다.(심지어 서술어에까지 존칭어를 남용하는 통에 '과공(過恭)'의 무리를 지나치게 자주 범하곤 한다.)  법정에서 의뢰인인 범죄인을 변호하면서 반복해오던 습관 때문일까. 물론 범죄인에게 대해서라고 경칭을 사용해서 안 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제3의 장소, 객관적 인용의 경우에서까지 범죄인에게 존칭어를 남발해야 하는지, 참으로 거북살스럽다.

 

또 다른 여자 변호사도 비슷한 경우다. 오늘 방송에서도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 혹은 부인을 언급하면서 아내 분이라 했고, 남편을 언급하면서 남편 분이라 했다. ‘이란 사람을 높여 부르거나, 높이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는 의존명사다. ‘저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라거나 국회의원 세 분이 오셨다등은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정확한 어법이다. 그러나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김○○ 씨의 아내 분이 그런 행동을 했다거나 방송에 출연한 이○○ 씨의 남편 분이 그런 말을 했다고 말한다면 무언가 어색하다. 그냥 아내 혹은 남편이라 해도 무방하나, 굳이 높여줄 요량이라면, ‘부인이나 부군이란 말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 ‘아내()+()’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편이 자신의 각시를 존중해서 부르는 뜻이라고 설명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대부분의 국어사전에서 이 말은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로 설명되어 있으니, 객관적 입장에서 언급하는 특정 남성의 각시를 의미할 경우는 그냥 아내로 호칭하는 것이 옳다. 그래도 굳이 경칭을 써야겠다면, ‘부인이란 말을 쓰는 것이 아내 분보다는 정확하고 듣기에도 좋다. 사실 요즈음에는 '제 아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처럼 상대 웃사람에게 자신의 각시를 가리키기 위한 객관적 호칭으로 쓰는 경향이 일반적이라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젊은 남자 변호사 한 사람은 다르다라고 해야 할 경우에 자꾸만 틀리다/틀린다/틀렸다고 말한다. 가끔 그가 출연하는 프로를 보곤 하는데, ‘다르다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평소에도 다른 것틀린 것으로 말하고 있음에 분명한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다르다라고 써야 할 곳에 시종일관 틀리다/틀린다/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르다를 써야 할 곳에 가끔은 다르다라고 맞게 말해야, 그가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 방송에서만 실수를 하는 것이라고 봐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의 직업이 변호사임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작은 실수가 아니다. 그가 변론을 하면서 다르다라고 해야 할 때 틀리다/틀린다/틀렸다라고 한다면, 변론이 의도한 대로 정확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 말 때문에 소송의 상대편으로부터 되잡힐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 말이 참으로 귀에 거슬리고, 가끔은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신문사에는 교열부라는 곳이 있다. 기자들이 써낸 기사를 편집하고 나면(혹은 편집 이전에?) 전문 기자들이 꼼꼼히 읽고 잘못을 고치는 전담부서다. 그러나 방송국에도 그런 부서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모니터링이라는 작업을 하긴 하는 모양이다. 비록 생방송이라 해도 제대로 모니터링이 된다면, 그런 실수들이 다음 방송에서는 반복되지 않을 것 아닌가. 그 변호사들이 방송에 등장한 지 꽤 오래 된 점으로 미루어, 시청자들의 인기는 높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런 말투나 말실수는 제대로 교정되지 않고 있다. 방송사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방송사가 어쩜 그런 말들을 표준어()의 하나로 추인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들을 개인적인 언어습관으로 가볍게 생각하여 용인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방송은 파급력이 신문에 비해 훨씬 크고, 교육적인 영향력 또한 막대하다. 향후 대중들이 다르다틀리다가 같은 말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건 지금 사회적문화적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는 종편들 때문일 것이다. 부디 종편들이 방송 언어의 정확성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주기 바란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