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1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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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말이지만 땅 좁고 부존자원 없는 우리가 기댈 곳은 두뇌뿐이고, 두뇌 육성의 주체는 교육이다.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후 우리는 학교 교육에 목매달아 왔지만 아직도 교육현장은 문제투성이다. 지금 나라를 흔들고 있는 주택문제의 바탕에도 교육문제는 도사리고 있다.
최근 터져 나온 중·고교 교사들의 거액 리베이트 수수사건은 그래서 우리를 참담하게 한다. 출판사와 해당 교사들은 돈을 주고받기 위해 수요자들인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바가지를 씌웠다. 리베이트를 챙기느라 불량 자재를 써서 부실 공사를 하는 토목공사 현장과 똑같은 부조리다. 리베이트만큼 건설비용은 올라갈 것이고, 교사들이 받는 ‘검은 돈’만큼 책값이 비싸질 것이다. 불량 자재를 쓴 만큼 건축물의 질은 떨어질 것이고, 부실한 교재를 쓴 만큼 교육이 저급해질 것은 당연하다. 억울한 건축주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의 수요자인 학생이나 국민은 이중의 피해를 입어 왔다. 공교육을 신뢰하지 못하여 사교육시장으로 달려 가는 일도, 툭하면 급식 당번이나 교실 청소 등으로 학부모를 호출하는 일도, 환경 미화에 기부금을 내는 일도 국가가 교육의 불가피성이나 절실함에 편승하여 학부모나 학생들을 ‘착취’하는 행태 그 자체다. 수시로 교육과정을 개편함으로써 교과서나 참고서 등을 사게 하는 것도 ‘착취’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몇 년 전 미국에서 경험한 일이다. 처음으로 학교에 간 아이들이 교과서라고 받아 온 책을 보니 상당 기간 선·후배 간에 물려 내려온 너덜너덜한 것들이었다. 한심한 생각이 들어 책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들어 있어야 할 내용은 빠짐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런 구닥다리 교과서를 가지고 홱홱 변하는 세상의 이치를 배워낼 수가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학기가 진행되면서 나의 의문과 걱정은 저절로 해결이 되었다. 중학생들의 교과서를 몇 년 단위로 바꾸어야 할 만큼 세상의 지식은 변하는 게 아니며, 설사 새로운 것들이 추가된다 해도 교사가 그때마다 보충자료를 통해서 충분히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살 필요가 없었고, 배부된 교과서에는 절대로 낙서를 못하게 했다. 그 책을 학교에 보관했다가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교사들은 추가할 내용을 복사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도서관 등에서 필요한 참고자료를 찾아보도록 과제를 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통하여 학생들은 책을 아낄 줄도 알게 되었다. 책에 스며있는 정신적 자산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교사들은 교육을 위하여 늘 ! П맨瞞 했다. 돈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좋은 교육을 시키려는 부자 나라 미국의 마음 씀씀이와 합리성이 놀라웠다.

우리는 해방 후 미군정기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교육개혁’을 실시해 왔다. 그러나 그간 시행된 개혁들은 상당 부분 어설픈 실험의 연속이었고, 그 실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더욱이 우리는 몇 년마다 한 번씩 교과과정을 개편하고 교재를 새로 만든다. 학생들은 이것들이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정가대로 사야 한다. 참고서와 교사용 지도서 등 교과서 한 종류에 따르는 부수적 이익도 대단하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학생들, 말 없는 고객들이 있는 한 그 책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시장은 무궁무진하다. 교사들만 잡으면 소비자들을 모조리 휘어잡을 수 있는데 ‘검은 돈’을 안 쓸 수 없을 것이다. ‘초·중등학교 개혁의 핵심은 교사개혁, 대학개혁의 핵심은 교수개혁’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이제 ‘국민 착취형 교육체제’를 확 바꿔야 할 때다. 그것이 교육개혁의 핵심이다. <2006.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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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3:23
영어강의와 지식사회의 철학


최근 몇몇 대학들의 영어강좌 비율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어이없게도 그것은 ‘글로벌화’의 척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영어강의가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영어강의를 해야 하는지, 목표하는 바가 모호하다. 영어강의의 수강을 원하는 학생들은 주로 ‘유학 준비’나 ‘영어 실력 향상’에 목표를 둔다. 그러나 교수의 입장에선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만 목표를 둘 수 없다.

우리말로 하는 경우에도 교수-학생 간의 소통이 어려운 전공분야. 영어로 할 경우라면 그런 문제 뿐 아니라 놓치는 것들 또한 비일비재할 것이다. 다양한 전공분야의 교수들이 영어구사나 교수법에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런 영어가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 그리 큰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전공 내용마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위험성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들마다 영어강의를 확대시키려고 애쓴다. ‘대학 마케팅’에 효과적인 상품 중의 하나가 바로 영어강의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영어로 이루어지는 강좌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수입학문들’이다. 우리와 세계인들의 상호소통을 통해 공감영역을 넓히는 일이 ‘세계화’라고 본다면, 영어강의의 무조건적 확대는 지금껏 우리가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서양학문에의 예속’을 새로운 세대에게 강요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무슨 과목이든 대학의 영어강의는 필요하고 권장되어야 하지만,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실 장기적으로 영어강의가 보다 ‘잘 준비되어야 하고 절실한 분야’는 바로 외국에 보급해야 할 우리의 자생 혹은 자립학문들이다. 우선적으로 영어강의는 우리의 자립학문을 국제학문의 규격에 맞게 ‘표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해외의 인재들이 우리나라 대학들을 찾는다. 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세계화된 학문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배울 수 있는 학문들이다.

우리의 어문학, 사학, 철학 등을 영어로 배울 수 있게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의 첫걸음이다. 앞으로 폭증하게 될 수요에 대비하여 이들 분야에 관한 영어강의 잠재력을 배양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의 학생들이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대학들에서 그런 강의를 들을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학문의 자립국이나 수출국이 될 수 없다. 우리의 학문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말을 익혀오라고 그들에게 배짱을 내밀 단계도 아니다. 합당한 분야의 영어강의를 점차 늘여감으로써 수출 가능한 우리의 자립학문을 세계시장에 상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자립학문을 영어 등 세계어로 체계화 시키고 강의할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거나 교수로 영입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지(福澤諭吉)가 대표하던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사회는 서양학문의 도입을 통해 일본사회와 일본학문 근대화를 실천적으로 주도했다. 그들은 우리와 방법이 달랐고, 무엇보다 ‘수입상’의 단계를 적절한 시기에 벗어났으므로 자립의 단계까지 뛰어오를 수 있었다. 식민시대를 포함하여 해방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 우리의 지식사회는 학문의 초라한 수입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수입학문의 영어강의만을 ‘글로벌화의 척도’로 인식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학문의 주체적 생산자가 될 수 없다. 영어강좌는 우리 학문의 수출에 긴요한 도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영어강의에 대한 지식사회의 철학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2007. 1. 22.)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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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의미

이번 설날엔 두어 가지 일로 제주에 오게 되었고, 한라산엘 올랐다. 비교적 평탄한 성판악 코스를 산책하듯 오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수목대(樹木帶). 그 사이에서 내 눈을 끈 것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나무들이었다. 삶의 윤기를 잃어버린 채 나신(裸身)으로 서 있는 것들, 줄기에 큰 구멍이 뚫려 껍데기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것들, 뿌리와 연결된 밑동이 부러져 가로 누운 것들, 다 썩어 문드러져 몽당연필처럼 외로이 서 있는 것들, 중동이 꺾여 옆의 생생한 나무에 기대고 죽은 것들...무수한 나무의 시신들이 그렇게 넉넉한 산을 그득 채우고 있었다.
물론 간간이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으면서도 당당한 자태로 서 있는 나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이미 밑동부터 중간까지는 ‘주검의 빛’이 이미 침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삶에 대한 강한 집념과 오기로 버틴다는 인상을 줄 뿐이었다.
버썩 마른 겨울이기 때문일까? 산은 온통 나무들의 시신들로 채워진 것 같고, 간간이 진녹색의 침엽수들이 그 사이에서 외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죽어가거나 죽은 나무들은 그런 녹색의 젊음이 사랑스러운 듯 그를 옹위하고 서 있거나 벌렁 누워 있기도 했다. 어떤 나무는 슬그머니 젊은 그에게 기대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 갖가지 자태의 노사목(老死木)들은 그들이 그런 상태로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을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오늘 내가 오를 수 있었던 곳까지 7km의 거리를 왕복하면서 그들이 들려주는 ‘추억의 서사시’를 실컷 들을 수 있어서 감동적이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이 있다. 나무들의 세계도 그러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왜 그런 모습으로 누워 있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자진하여 그들이 겪은 삶의 신산(辛酸)함을 제게 토로하는 것이었다. 갖가지 사연들이 너무도 진솔하고 서러워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한 가지. ‘내 곁에 있는 저 녹색의 젊음을 보시오. 나는 저 친구가 저리도 당당한 모습으로 내 꿈을 나대신 실현시켜 주는 것이 너무도 좋소. 그러니 내가 죽어 저 젊은 친구의 거름이 되는 거야 영광 아니겠소?’ 라고들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간 한라산을 여러 차례 오르면서도 만나지 못한 감동을 드디어 올해 설날 만나게 된 것이었다.

         ***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올해 따라 유난히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내 가슴에 와 닿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푸름의 천지인 산 속에서 참으로 절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나도 그런 이치를 이해할 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이리라.
오늘 내가 만난 노사목들의 공통점은 욕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터득한 진실(사실은 진리이겠지요)이라면 ‘나이 들면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몇 해 전인가? 어느 정치가가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우리에게 던진 적이 있다. 그가 진정으로 마음을 비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이야말로 속이 텅 빈 채 죽어있는 노사목들이 내게 들려준 삶의 서사시, 그 핵심적 주제였다. 탐욕에 가까운 욕심을 부리다가 추한 모습으로 스러져가는 주변의 선배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역설의 가르침 역시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법정스님의 말씀대로 ‘무소유(無所有)’의 단순명료한 철리(哲理)를 깨치는 것도 그 한 방법일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생겨난 재물, 지위, 명예 등이 모두 우리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이니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워지자는 것 아닐까?
그러나 나 같은 필부필부들이야 목숨이 붙어있는 한 거추장스런 육신을 건사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것들로부터 아주 떠날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베푸는 일과 물러서는 일’ 정도이리라.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일, 후배들의 말을 들어줄 뿐 가급적 입을 열지 않는 일, 알량한 이해관계를 놓고 후배들과 다투지 않는 일, 노후를 대비하여 꼼수를 부리지 않는 일, 후배들을 믿고 모든 걸 맡기며 넌지시 도와주는 일 등등.
회갑이 되어서도, 칠순 팔순이 되어서도 세속적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경우가 또 있을까?  

         ***

나는 언젠가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때는 나무들의 푸르름만 눈에 들어왔었다. ‘거침없는 힘’과 무지갯빛 희망에 들썩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 노사목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추해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연습에 돌입할 때가 된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이며 시간을 끌지 말라’는 한라산 노사목들의 다그침이 이 깊은 밤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정해년 정월 초하룻날 밤
제주 애월읍 바닷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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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9
우리시대의 위기와 인문학

                                                                            조규익

전통 왕조시대의 종말과 함께 식민 상황에 접어들었고, 식민 상황의 종말과 함께 분단 상황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대사는 크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준다. 비정상적인 역사의 흐름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요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느 나라이든 역사적·사회적 변화에는 가치관이나 인식의 변화가 수반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전통의 계승이 순조롭고, 지속적인 발전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 대대로 같은 공간에서 삶을 이어온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나치게 혁신적이거나 이질적인 규범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조선왕조에서 근대국민국가로 이행되었어야 할 시점에 식민 상황을 맞이했고, 식민 상황에 이어 분단 상황을 맞이함으로써 정상적인 가치관은 형성될 겨를이 없었다. 특히 6·25 전쟁 후 반세기 동안 농경에서 산업화의 단계로, 산업화에서 정보화의 단계로, 정보화에서 고도 정보화의 단계로 숨차게 달려온 우리 사회다. 한 사회의 가치관이 바람직하려면, 그것이 개인적 욕구를 자제하고 공동체의 이상 실현을 위해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야 한다.
세대의 차이, 빈부의 차이, 사회적 지위의 차이, 남녀 간의 차이 등을 넘어 사회의 질서를 잡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념이고, 바람직한 가치관 또한 그로부터 생겨난다. 전통 가치관을 고수하려는 기성세대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신세대 간의 갈등, 부와 권력을 독점하면서도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특권층과 박탈감에 고통 받는 서민층 간의 갈등, 가정과 사회의 억압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남녀 간의 갈등 등, 현재 우리는 다양한 갈등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을 해소시킬 만한 이념이나 가치관 또한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혼란과 위기는 여기서 빚어진다.
양과 질에서 남보다 우세한 정보만이 경제적·사회적 성공의 유일한 열쇠라고 믿는 시대정신은 고도 정보화 사회의 부정적 소산이다.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그런 경쟁이 가속화 될수록 인간의 정신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좋은 책을 읽고 저자의 생각을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본질이라면, 이미 형성된 인터넷 만능의 현실은 인문학의 존립에 가히 재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숙이나 완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던 대학교육은 이제 재화 창출만을 지향하는 직업교육으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당장 돈벌이에 소용되지 않는 지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직업교육에 가까운 각종 응용학문들이 대학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전통적으로 중시되어오던 기초학문이나 인문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기성세대, 젊은 세대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인문학을 기피한다. 인문학이 ‘당장 재화를 안겨주지 않는다’는 근시안적 시각 때문에 우리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인문학은 홀대받고 무시된다. 인간의 정신이나 문화 등을 주 대상으로 연구·분석하기 때문에, 인문학은 정신과학이자 인간과학이다.
인간의 본질과 사상을 전반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쇠퇴야말로 ‘인간의 소외’를 초래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인간의 소외는 공동체를 물질 지상(至上)의 비인간적 공간으로 전락시킨다. 이구동성으로 인간의 소외나 인간성의 말살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인문학을 죽이는 일에 앞 장 서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행태다. 시대의 병리현상을 절감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대학에서 직업교육을 철저히 받았음에도 사오십 대만 되면 현장에서 축출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사오십 대를 상품가치가 없다고 축출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비인간화의 대표적 사례다. 인문학을 홀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빚어낸 부정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폭 넓은 가능태로 만드는 학문이다. 처음부터 직업교육만을 받을 경우, 그 효용가치가 다하는 날 인간도 폐기될 수 있다. 그러나 가능태의 인간은 창조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쇄신과 수련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몸값을 높여나갈 수 있다. 대학이 폭 넓은 인간을 길러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의 고유 영역은 인정되어야 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느 분야의 학문이든 인문학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시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바야흐로 죽어가는 인문학을 되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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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4
모꼬지와 젊음, 그리고 간현의 추억


                                                                           

언제부턴가 간현엘 가고 싶었다. 병풍 같은 돌벼랑으로 둘러싸인 계곡, 구석구석 간질이며 휘돌아 내빼는 섬강. 깔끔한 정밀(靜謐)을 시샘하며 가끔씩 계곡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열차의 굉음이 장난스러운 곳. 고라니와 산토끼가 우두두 뛰쳐나올 듯, 잡목 숲이 음흉스레 펼쳐진 곳. 80여명의 젊음들과 함께 한 간현의 하룻밤이 드디어 잠자던 내 감성을 깨우고야 말았다.

모꼬지! 그래 비로소 우린 엠티(MT) 대신 모꼬지의 추억을 사랑하게 되었다. 말끔한 제복과 구호가 각을 세우는 느낌. 그런 엠티보다야 자지러지는 꽹과리의 파열음 속에 막걸리 질펀히 흐르는 느낌의 모꼬지가 제격이지. 어차피 새내기들을 품에 받아들이는 입사의례(入社儀禮)가 축제 판이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너와 나, 그들과 우리들의 ‘하나 되는’ 잔치판은 모꼬지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랬는가.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의 열기에 익어가며 우리의 삶을 몸으로 느낀 그 놀이판은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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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현의 젊음들



젊음이 싱그럽게 요동치는 모꼬지 판. ‘몸이 얼마나 버텨낼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는’ 존재가 젊음이라고, 이 시대의 감성 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일찌감치 한계를 설정한다면, 그건 젊음이 아니다. 젊음은 ‘무한의 가능태’일 뿐이다. 그렇게 무모한(?) 젊음들 속에 묻혀 날뛰던 ‘나’는 참으로 낯선 존재였다. 시인 이재관도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일까.

          MT(멤버십 트레이닝)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신드롬과
         영원한 고수가 되고 싶은
         사울 왕 신드롬이
         뒤섞이는 밤을 밝혀
         즐기고 호령한다.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엠티에서는
         노인도 소년도 아닌
         영원한 청년이어라.

         꾸라쥬(Courage)!!

그랬다. 노인도 소년도 아닌 어정쩡한 중늙은이 하나가 젊음의 열기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장면이 60년대 활동사진의 화면마냥 밤의 열기 속에 흔들렸다. 이제 갓 울타리를 벗어났다고, 노랑노랑한 병아리들이라고. 폐계(廢鷄)가 다 된 중늙은이는 제법 노파심을 발휘하려 애써 보지만, 거친 부리를 갈아 아무리 세게 쪼아도 이미 폐계에게 세계는 닫힌 대상일 뿐. 그러니 종국엔 여린 부리의 그대들이 열어 갈 것이다, 새 세계를!

발랄과 자유분방이 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새 역사를 꾸려나간다는 진실을 오늘 드디어 깨닫곤 침묵하기로 한다. 마른 잎사귀를 밀어내고 연록의 새 이파리가 눈을 트는 이른 봄의 간현을 느끼며 헛된 말이 필요 없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똬리를 틀고 앉은 마른 등걸의 탐욕으로 태양을 향해 뻗어 오르는 녹색의 생명을 규율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보라, 활활 펼쳐 보이는 그대들의 꿈이 바야흐로 익어가고 있지 않는가. 별이 반짝이고 바람 싱그러운 간현의 밤이다. 이 틈에 나도 한 번 외쳐보자, ‘꾸라쥬’!!!
                                                                          (2007.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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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08:46
대학평가와 일부 메이저 대학들의 행태

           
언제부턴가 대교협의 평가에서 주요대학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평가척도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좀 떳떳치 못한 내면구조가 있는 듯 하다.

가장 큰 것이 '결과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세평(世評;세상의 평판)에 의지하여 그 대학들 나름의 레벨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문 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던가? 막상 까발려 놓았을 때 기대 이하일 확률이 높은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실상에 비해 지나치게 '고평가(高評價)'되어온 것이 그간의 실정이었다. 그런 점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평가 대상이 되는 걸 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예 평가를 받지 않음으로써 그런 위험부담을 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솔직한 내막일 것이다. "우린 아예 평가를 신청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런 평가의 결과를 신뢰하지 말아다오!" 대충 이런 것이 이른바 'SKY'로 대표되는 메이저 대학들의 공통적인 심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도 후발대학들이나 마이너 대학들이 하는 식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반드시 좋은 평가를 받을 건 분명하다. 워낙 가진 것이 많고 조건이 좋은 대학들이니 조금만 힘을 들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행태로 미루어 학교 당국이나 학과교수들 사이에 그런 일을 밀고 나갈 리더십이 있을 턱이 없다. 표현이 좀 뭣하긴 하지만, 모두들 '대가연(大家然)'하고 있는 그들이, 최고의 학자로 자부하고 있는 그들이 '좀스럽게' 대교협의 점수기준이나 따지고 앉아있을 리가 없다. 평가를 잘 받아서 좋은 결과가 나와봐야 '본전치기'에 불과한 것도 그런 행태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우스운 건 후발대학들이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준비하고 대비하여 좋은 점수를 따놓아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1부리그 선수들이 모조리 불참한 가운데, 2, 3부 리그 선수들만 참여하여 1등 아니라 특등을 해도 어떤 반대급부가 주어진다거나 얼마간의 이득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문제다. 그렇다고 교육부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지원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메이저 대학들이 다 빠진 평가결과인데 언론매체인들 중요하게 다루어줄 이유가 없다. 이런 사실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국민들이다. 대교협의 평가결과 1등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대학 내팽개치고 그 학교로 자녀들을 보낼 이유가 없다.

따지고 보면 허망한 일이다. 후발대학이나 소규모 대학들이 아무리 노력한들 무슨 보람이 있을 리 없다. 고속도로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는 대학 홍보문구가 있다. "**대학, 무슨무슨 평가에서 최우수대학으로 선정!"이라는 대문짝만한 현수막들이 펄럭이고 있지만, 대부분은 지명도가 없는 대학들이다. 국민들이나 수험생들이 그런 정도의 현수막에 감동되어 자발적으로 그런 대학들에 지원할 이유가 없으니, 비극 아닌가.  

현재 상황에서 대교협의 평가 결과에 일희일비하거나 모든 것을 걸 필요나 이유가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더구나 그 결과를 학교 홍보에 이용한댔자 잘못하면 웃음꺼리가 될 공산만 크다. 그러니 그런 평가를 위해 오랜 기간 고생하는 요원들이나 많은 돈을 들이는 학교 당국으로서는 참으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평가를 준비하면서 대학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는 있고, 그것이 평가의 잇점이라면 잇점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얻는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너무 많다는 점을 우리는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교육부나 대교협, 그리고 각 대학들은 정체된 현상황을 타개할 만한 지혜를 새로 짜 내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FTA 상황 하에서 모두 공멸(共滅)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다.

2007. 4. 9.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