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1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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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검증에 간판 중시 ‘지식범죄의 온상’ 돼버려

최근 며칠째 가짜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은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지식사회의 아름답지 못한 이면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일종의 ‘테러’다. 피터 드러커의 설명처럼 지식 노동자가 권력을 갖는 사회가 지식사회라면 이 땅의 총체적 부패는 지식인들로부터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추악한 테러의 무대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넘어 러시아와 필리핀까지 번졌으니 다시 어느 나라가 이 행각의 새로운 현장으로 연루될지 자못 불안하기만 하다. 한국판 지식 범죄의 국제화라고나 할까. 얼마 전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우리 학자들의 표절사건, 온 국민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황우석 사건’ 등과 함께 이번의 가짜박사 사건으로 우리의 지식사회는 결정적인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국가 발전을 선도해야 할 지식사회의 휘청거림과 무관치 않다.
지금 우리는 가짜박사 학위를 남발한 외국의 대학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그런 대학들에서 사온 가짜 학위로 학술진흥재단에 학위등록을 하고, 어엿한 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올랐으니 문제의 근원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 옳다. 가짜박사를 교수로 채용할 정도로 진짜와 가짜도 걸러내지 못한 수준이 우리 대학들의 한심한 실태다.
 
이런 현상은 지식사회의 마비된 양식, 국가의 학문정책 부재, 대학개혁의 실패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은 개혁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치장에만 주력할 뿐 정작 개혁해야 할 본질적 대상은 초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의 목적은 대학정신의 정립에 두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의 신설이나 보완이 그 구체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박사학위 보유자 비율로 선두권에 서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없거나 부실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필연적으로 저질박사들의 온상 혹은 가짜박사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보여주는 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식정보가 널려 있고 표절행위 또한 여전한데, 오히려 논문의 심사단계는 전보다 간소화되고 있다. 적으면 한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의 심사가 박사논문 검증의 전부다. 박사 학위의 양산체제에 온정주의까지 가세하여, 저질논문을 걸러내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 기업들은 대학의 박사학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관들은 반드시 박사학위를 요구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연구업적이 뛰어나도 박사학위가 없으면 아예 서류조차 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채용 과정에서는 가짜박사를 걸러내지 못한다.

구태의연한 검증 시스템과 지식사회의 낮은 윤리의식, 실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인력 수요자들의 무감각이 지속되는 한 가짜박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짜박사들은 죽은 지식사회에 기생하기 마련이다. 지식사회의 핵심인 교수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과 성실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발표된 서울대의 교수윤리헌장은 늦었지만 적절하다. 지식사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진리다. <2006. 3. 2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34
 대학은 국가와 사회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곳이다. 지도자란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앞서서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경륜과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존재가 되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그 출발점은 대학 교육에 두어야 한다.
 
사실 지금은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말하자면 대학 교육의 대중화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학교육이 대중화 되었다지만, 여전히 대학에 사회 지도자 육성의 책임과 사명을 떠맡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책임을 떠맡겼으면 그에 걸맞은 자율을 보장해야함에도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대학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정권이 돈이나 각종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대학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온 점에서 대학정신의 퇴보는 당연한 업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창립 1세기를 넘는 대학들도 여럿 있으나, 본격적인 대학사의 시작은 반세기 정도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대학을 제대로 발전시켰다면 기간으로 보아 지금쯤 제 구실을 하는 상당수의 대학이 등장할 때가 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학들이 늘 파행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그동안 정권으로부터 지나친 간섭과 통제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학 경영의 독자적인 철학을 가질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정부가 시키는 대로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육만 시켜오다 보니 대학들은 홀로서기를 할 필요도, 할 이유도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정권의 위탁을 받아 타율적인 교육을 해온 게 그간의 현실이었다. 정권의 지시를 외면할 경우 받아야 할 유형무형의 압력과 재정적 손실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대학이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 상당기간 없을 것이다. 입시 면접 문항의 내용까지 세밀히 따지는 등 학생 선발부터 졸업까지 현미경을 들이대고 감시하는 상황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운위할 수는 없다.
 
철학 없는 신자유주의의 맹신이 대학교육의 황폐화를 가속시키는 현실이나 그 연장선에서 획일적인 잣대로 전국의 학과들을 서열화하겠다는 발상 등을 보라. 이제 대학은 스스로의 진로조차 잡기 어려워진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실 대학은 일종의 ‘성역’이어야 한다. 무한의 책임이 전제된 자유가 자율이다. 자율이 신장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파행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성숙의 과정에서 겪어야 할 성장통일 뿐이다. 대학은 자율 속에 커야 한다. <숭실대신문 921호,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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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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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도야마 대학의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가 일본 내 한국 고서 5만여 권의 목록을 집대성하여 펴냈다. 우리는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우리를 강점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우리의 문화재와 서적 등 정신적 자산들을 수없이 빼내갔다. 완전한 지배를 목적으로 그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철저히 조사했고, 당장 필요 없는 것들일지라도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은 닥치는 대로 긁어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서적들을 약탈당했는지 정확한 통계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부나 학계가 그간 약탈당한 고문서의 현황 파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거의 ‘무감각’ 수준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국의 고문서 동호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금도 이른바 ‘나까마(중간상)’들에 의해 수집된 고문서들 상당량이 일본으로 반출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 정부나 학계가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는 귀중한 고문서를 벽지로 쓰고 물건의 포장지로 써왔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우리는 그런 무지몽매의 세월을 살아왔다. 엿가락 몇 개와 바꾼 고문서들은 그간 물건 포장지로, 종이공예의 재료로 팔려 나갔고, 일본과 연결되는 수집상의 손으로 끊임없이 넘어간 것이다. 일본은 약탈해간 우리의 고문서들을 각종 컬렉션의 이름 아래 공공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에 묶어 두고 우리에겐 열람조차 제한하고 있다. 그들이 소장한 우리의 고문서 한 건을 복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절차와 세심한 안전장치들을 경험해보면 그들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차게 된다. ‘우리의 것’이면서도 일본의 재산이 되어 그들의 귀중본 서고에 보관된 고문서들을 보며 통분해 하는 우리의 학자들. 우리의 문화적 천박함이 초래한 업보쯤으로 여기며 그 억울함을 씹어 넘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우리 정부에서는 국가 차원의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을 일괄적으로 반환해오는 것이 최선일 것이나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자료들의 소장처를 조사한다거나 복사라도 해다가 한 곳에 비치하여 학자들의 수요에 응해야 할 것 아닌가. 학자들 개개인이 연구년을 이용하거나 특정 연구 과제를 수행하며 미국이나 일본 등지를 방문하여 필요한 자료들을 조사, 복사해오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그런 작업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복사해오는 자료들이 중복되는 폐단 또한 적지 않다. 국력의 낭비가 방치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해외에 소장된 우리 고문서 정보의 관리가 시급히 일원화 되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장서각이나 규장각 등 우리가 갖고 있는 고문서들을 정리하는 일도 급하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해외에 널려있는 우리의 서적들이나 고문서들의 현황을 파악하는 작업은 더 시급하다.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우리 고문서의 약탈 행위는 1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음지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혼을 담은 고문서의 상당 부분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몇 푼의 돈에 눈이 멀어 그런 일을 돕는 세력이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현실은 비극이다.

‘이 책이 일본의 정신문화를 연구하는 데도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후지모토교수의 말 속에 ‘한국을 지배하려면 한국의 정신문화를 연구해야 한다’는 식민시대의 논리가 살아 있음을 우리만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조선일보 2006. 5. 15. >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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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교육부 장관 관련 사건들과 이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이 갈수록 가관이다. 해명은 의혹만 증폭시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번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둔사(遁辭)’의 덫이란 것. ‘둔사 즉 도피하는 말은 논리가 궁하고 결국 정사(政事)에 해를 끼친다’는 맹자의 말씀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장관 하마평이 나돌면서 자녀의 외고 편입에 관한 여러 말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교육문제에 관해 전문가 뺨칠 정도의 소양을 갖고 있는 국민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만큼 그의 답변은 시원치 못했다. 그러다가 제자논문 표절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우리의 지식사회를 감염시킨 표절사건들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 사건의 노출로 학계는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당사자는 ‘전혀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학계와 국민들은 할 말을 잊었다. 곧바로 ‘BK21 논문 중복 게재 사건’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던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실무자의 착오’라는 전제를 달아둠으로써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표절사건만 해도 그렇다. 제자인 신모씨의 논문이 통과된 것보다 자신의 논문 발표가 앞섰으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장관의 논리다. 제자에게 설문조사나 데이터 작성을 시킨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해괴한 것은 같은 데이터로 제자는 학위논문을, 자신은 일반논문을 작성했는데, 제목도 논조도 결론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시기를 따지면 장관의 논문 발표보다 학위논문 통과가 두어 달 뒤진다. 그러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모씨는 장관의 논문이 발간되고 나서야 학위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백보를 양보하여 그런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박사학위논문에는 최소한 서너 번의 심사과정이 있다. 심사위원인 자신의 논문이 도용당했음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 만능시대, 표절의 전성시대, ‘표절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학위논문 심사의 핵심’이라는 교수들의 한탄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은 요즈음이다. 하물며 직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이 제자의 학위논문에 도용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장관이 한 마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이게 어찌 정상이란 말인가.
 
BK21 논문사건은 표절보다 더 큰 문제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위한 고등인력 양성’이란 기치 아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쓴 잔을 마신 필자를 포함하여 전국의 많은 교수들이 몇 개월간 날밤을 새워가며 BK21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으나 선정된 인원은 소수다.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을 만들어 보겠노라는 국가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한때 고무되었던 우리다.
 
장관은 논문을 중복 투고했으면서도 연구비는 그대로 챙겼으리라. 그렇게 귀한 국가예산을 ‘눈먼 돈’ 쯤으로 여겼단 말인가. 그런 입장으로  어떻게 ‘표절하지 말라, 연구비 집행을 투명하게 하라, 학위논문의 부실을 막기 위해 철저히 심사하라,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편법을 쓰지 말라’는 영(令)을 내릴 수 있는가. 장관직 수행에 행정능력이나 기술이 중시된다지만, ‘교육인적자원부’만은 달라야 한다.

국가의 만년 대계를 책임 진 곳이 바로 교육부다.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인격이나 학자로서의 품위에 시비가 따르지 않을만한 인물을 발탁해야 하고, 스스로 ‘적재(適材)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고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강호에 묻건대, 과연 지금이 불거진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장관직을 고수할 상황이란 말인가.<2006. 7. 28.>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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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육부총리로 내정된 김신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부총리에 내정되자마자 평소의 소신과 철학을 내던져 많은 사람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각종 논문과 기고들을 통해 현 정부의 평등주의 교육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는 점에서 그의 변신은 경악할 만하다.
  더구나 그는 4일 열린 교육혁신위원회의 세미나에서 학교를 다양화하고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함으로써 획일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부총리에 내정되면서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리고, 대신 정권의 코드에 스스로를 맞추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학자가 자유로운 상태에서 조건 없이 의견을 말한 것과 구체적인 정책으로 발전시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둔사로 자신의 변신을 합리화하려고까지 했다. 부총리 내정자는 개인이 아니라 공인이다. 막중한 교육정책을 성안하고 집행해야 할 책임자다. 무조건적 평등주의의 이념에 매몰되어있는 현 정부의 교육정책을 앞 장 서서 비판해 오다가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견해를 바꾼다면, 앞으로 그가 추진하는 교육정책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그는 정권의 장고(長考) 끝에 내정되었고, 교육부총리로 무난하다는 것이 초기의 세평이었다.
  무조건적 평준화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교육의 수월성 추구, 대학의 자율성 보장 등 김 교수의 교육철학은 나라의 앞날을 우려하는 국민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교육에 관한 그의 평소 주장은 일생 동안 추구해온 학자의 지론이고 소신이며 철학이다. 일개 필부라 해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면 합당한 계기와 단계가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생각했다면, ‘정권의 이념과 내 철학은 다르지만,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설득하고 대의에 합치되도록 노력해보겠다’고 말했어야 한다.
  한나라 경제(景帝)에게 등용된 선비 원고생(轅固生). 그는 소장 학자 공손홍(公孫弘)에게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혀 이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첨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곡학아세(曲學阿世)는 학자의 부끄러운 행태다.
  나라가 자신을 필요로 할 경우, 그 자리를 한사코 마다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면 통치자에게 먼저 자신의 철학을 각인시키는 게 마땅하다. 학자가 학문적 소신이나 철학을 굽히는 것은 학자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정권이 그로 하여금 소신을 버리고 자신들의 코드에 맞추길 바라는 것은 그들이 학문적 업적을 통해 이룩한 ‘이름’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학문적 소신보다 ‘이름’만 차용하고자 하는 정권에 나설 경우 득보다는 실이 많다. 차라리 학자 아닌 행정가나 코드에 맞는 학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낫다.
  맹자는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겸하여 선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분명 장관이 되는 일은 영달이다. 그러나 영달하고 난 다음 ‘겸선천하(兼善天下)’하기는 쉽지 않다. 궁해도 의를 잃지 않는 것이 선비이고, 선비는 자신의 소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맹자의 말대로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으려면 영달한 뒤에도 소신을 지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해야 하는데, 지금이 과연 그게 가능한 상황인가. 영달의 기회를 앞에 둔 그가 자신의 소신을 굽히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왜 자신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려 하지 않는지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내정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2006. 9. 5.>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15

축제는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캠퍼스 구석구석 남아있는 축제의 뒤끝 때문에 다시 만난 일상이 낯설긴 하지만, 그렇다고 축제의 기분을 마냥 지속시킬 수는 없다. 축제는 카오스의 시공이고, 카오스가 코스모스를 낳는 점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가의 축제를 바라보며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을 갖는 것은 그런 카오스가 바람직한 코스모스를 잉태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마다 약간씩 다르고 내면적으로 다양한 행사들이 있긴 하겠으나, 캠퍼스 가득 벌어지는 주점 행사나 외부 가수의 초청공연 등이 두드러지는 점은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것 모두 대학생들의 낭만을 분출하는 방법의 일환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년 수백 건씩 열리는 일반 사회의 ‘축제 아닌 축제들’과 대학가의 축제는 달라야 한다.
 
대학 축제는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이룬 가운데, 구성원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는 잔치판이어야 한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대학생들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일종의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과 같은 ‘놀이’ 위주의 내용 편성을 탈피해야 한다. 사실 2, 30년 전만 해도 대학들은 대부분 학술제, 예술제, 대동제 등으로 축제의 내용을 다양하게 편성했다. 이슈가 되는 시사문제들을 내건 토론회, 논문 발표회, 문학의 밤, 미술전, 연극제, 각종 전시회, 노래 자랑, 댄스파티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지성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대학가의 축제에서 학술제나 예술제,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동제가 사라지고 일반 사회의 ‘축제 아닌 축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런 축제를 경험한 대학생들이 사회의 중추세력이 되면서 사회의 축제는 더욱 더 본령으로부터 벗어나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이제라도 대학가 축제의 풋풋함과 균형 혹은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진정한 대학가의 축제라면 열심히 공부하는 틈틈이 익히는 재주나, 국가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지성적이고 순수한 열정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익히는 전공 지식만이 대학 공부의 전부는 아니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공부를 통해 젊은이들을 무한한 가능태로 만드는 것이 대학교육의 본질이라면, 대학 축제의 포맷 또한 그런 방향으로 재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숭실대학 신문 932호, 2006. 10. 16.>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