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 3. 31. 17:00

 

그간 북한에 대하여 어렴풋하나마 갖고 있던 내 나름의 감(感)을 논리화시킬 만한 지식도 정보도 없어 애만 태워오던 중이었다.  오늘 비로소 가슴이 뻥 뚫리는 설명을 접했다. 현 집권세력이 '몽상가들임'은 상식처럼 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이처럼 명쾌하게 짚어준 논객이 없었다. 제대로 된 전문가를 비로소 만난 기쁨,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30/2018033001775.html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3. 29. 18:40

 


 


흘러가는 물을 보며

 

 


부모님 묘소에서

 

 

많은 죽음들을 기억하며

 

 

                                                                                                                                조규익

 

 

두 해 전에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올해 가까운 친구 김성원이 떠났고, 며칠 전엔 대학원 시절 함께 공부하던 정명기도 떠났으며, 최근 들어 이런 저런 이유로 비명(非命)’에 떠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그간 죽음에 대한 고민이나 사색을 통해 나름대로 의미부여의 방법을 터득했다고 자신하기 때문일까. 이젠 어떤 죽음도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사(自然死), 병사(病死), 사고사(事故死) 모두 항거할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또한 개인적사회적 이유로 인한 최근의 자살들 역시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반듯하게챙겨 갖고 있지 않다면, 견디기 어려운 광경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는 요즈음이다. 사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자살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고, 그동안 지탱해오던 사회적 자아를 유지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자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엘케골의 말도 바로 그런 점을 지적했으리라.

 

가차 없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인간은 종교에 귀의한다고 한다. 사실 죽음이 매우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삶을 예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지금도 사람들을 교회로, 성당으로, 사찰로 이끄는지 모른다. 돈독한 논리체계로 사후 세계를 치밀하게 설계해 온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으라고 권유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세계의 주재자인 신을 받들고 있을 것이다. 그 믿음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경감되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의 내면에 남아 있는 한 종교는 계속 번창할 것이라고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자연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참으로 짧고, 그 가운데 가치 창조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더욱 덧없다. 하기야 한갓 미물로서 무슨 가치를 창조하겠노라뜻을 세우는 것 자체가 오만하고 가당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던져진 존재라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겸손한 자세로 생명의 장()’인 세상에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다 사라지련만. 대부분은 주어진 생애 동안 기고만장하여 같은 공간의 동지들과 멱살잡이로 날밤을 지새우기 마련이다. 소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지만, 대부분은 삶에 대한 헛된 집착으로 그런 깨달음조차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경구(警句). 아침저녁 열심히 가꾸어 오던, 꽃 같은 얼굴이 한 줌 재로 바뀌어 풀밭에 뿌려질 때, 풍채 좋던 친구가 주검 옷에 둘둘 말려 석자 깊이의 무덤으로 내려 갈 때, 그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내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을 보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자연법칙에서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 그 자리에서 시신으로 바뀐 그들과 나의 자리바꿈을 통해 비로소 삶과 죽음의 우주적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 순간부터 죽음은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죽어야 할까? 하나, 둘 떠나는 이웃들을 보며, 그 순번이 내게 돌아올 때까지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그 순간을 맞아야 할지,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메멘토 모리!!!

 

 


등걸에서 새싹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3. 14. 14:45

최근 광주의 찻집에서

 

 

 

 

친구를 보내며

 

 

                                                                                                               백규

 

 

다정하던 친구 김성원이 이승을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 온 다음 날부터

그는 급격히 혼돈에 빠져들었고,

드디어 12일 새벽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오늘 아침 이른 시각

너무나 짧은 발인식을 마치고

그는 뜨거운 불의 정화(淨化) 의식을 거쳐 저승으로,

나는 현실의 원리가 작동하는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눈을 감기 나흘 전

병원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나를 보고 싶어했고

나 역시 그가 몹시 궁금했다.

서로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우리는 힘주어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밝은 웃음이 모처럼 그의 얼굴에 번졌다.

언젠가 그에게 처음으로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학교 졸업 후 지금껏 나는 인천 방향으론 소변도 보지 않았노라!”.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겪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듬뿍 실려 있었다.

그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그동안 나의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음을

병상 머리맡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폰을 집어 들더니

어느 부분엔가 저장해 놓은 사진 한 장을 찾아 더듬거렸다.

마지막 순간 내게 보여주려고 잘 갈무리해 두었겠지만,

정신이 혼미해진 탓인지 결국 사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어릴 적 동생을 안고 있는 사진이라는데,

무뎌진 손끝과 흐려진 정신으론 끄집어 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엉망이 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통해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려는속 깊은 마음씀이었으리라.

 

그 뿐 아니다.

모든 면에서 참 사려 깊은 그였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친구들 일이라면 빠진 적 없었고,

함께 어울리기 좋아한 그였다.

자신이 정한 원칙은 한 치도 어김없이 지키려 했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해주길 원하다 보니,

그들 역시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으리라.

그래도 늘 넉넉한 웃음으로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만,

삶과 이승에 대한 애정이 유독 도타운 친구였다.

그래서인가.

이렇게나 빨리 홀로 먼 길 나선 그가 안쓰러울 뿐이다.

붙잡는 이승의 손길을 지긋이 뿌리친 채,

그는 떠났다.

삭막한 세상을 함께 할 친구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이 상실감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채 절망으로 연결된다면,

그 때문에 나 또한 세상을 뜨게 되리라.

허무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나 또한 이승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리라.

 

오늘

햇살은 이리도 좋은데,

그대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길가에 주막 한 채라도 있거든

병마 탓에 그동안 끊었던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사 마시며

얼큰 취한 목소리로 <희망가> 한 자락이라도 불러 보시게나,

사랑하는 친구여!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2018. 3. 14.

 

 성원을  보내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2. 28. 14:33

 

 

 소설인가? 생태학 보고서인가?

-‘늑대토템(狼圖騰)’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조규익(국어국문학과 교수)

 

 

 

토템은 아버지를 대치한 최초의 형식이었을 것이고, 신은 아버지가 인간의 모습을 되찾은 후대의 형식이다. 모든 종교 형성의 뿌리인 아버지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신 관념이라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이유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관계, 그리고 아마 동물에 대한 관계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S. 프로이트, 󰡔토템과 타부󰡕에서-

 

 

 

수만 년 거센 바람이 빗질하여 키워낸 목초로 수많은 초식동물들을 키워내던 몽골 초원. 인간의 짧은 안목과 인색한 이기주의를 한 치도 허용치 않던 원초의 공간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 자연이 허락한 먹이사슬의 꼭짓점에 지금은 인간이 앉아 있으나, 늑대가 그 공간을 지배하며 인간에게 생존경쟁의 원리를 생생하게 가르쳐 주던 한때가 있었다. 생존의 원리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뺏기지 않으려는 늑대와 한사코 빼앗으려는 인간 사이에 피 터지는갈등과 싸움이 벌어지던 초원. 그곳에서의 싸움은 인간과 늑대 전사들 간의 명백한 게릴라전이었다.

신이 허여한발톱과 이빨, 그리고 전략을 보유한 늑대는 초원의 챔피언이었고, 그 왕좌는 자연과 세계를 위해 아니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해 유지되는 것이 옳았다. 늑대와 달리 이렇다 할 발톱도 이빨도 없이 강자에 대한 대책 없는 복수심과 교활한 욕심만 그득한 것이 인간의 내면이다. 그런 늑대와 인간이 초원이란 한 공간에서 주도권 싸움을 벌여온 것이다. 싸움의 룰이 대체로 공정했던 초반과 달리, 갈수록 늘어나는 인간 욕망의 부피에 그 공정성은 훼손되고 말았다. 주도면밀하다는 점에서 늑대와 인간은 비슷하지만, 늑대는 본능인 반면 인간은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어쨌든 생태계란 한때 잘 때려먹고 살다가없어져도 괜찮은 허약한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에, 늑대와 인간은 최선을 다해 싸워야 했다. 인간의 짧은 안목으로 볼 때, 늑대와 인간은 서로를 죽여야 살아남는 제로섬 게임의 경쟁자들이다. 불행하게도 상대방을 절멸(絶滅)시킬 경우 스스로의 삶도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늑대와 인간의 공존은 당위이자 존재의 원리다. 늑대와 인간이 불안하게 공존하는 초원은 먹이사슬의 꼭짓점을 차지하기 위해 양자가 결전을 벌이는 최종 공간인가. 아니면, 최강의 경쟁자들끼리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궁극적인 화해에 도달하게 될 최후의 공동체인가. 챔피언 결정전에 나선 두 선수들의 피나는 싸움을 관찰하여 기록한 것이 이 글, 소설 아닌 생태 관찰 보고서로서의 󰡔늑대토템󰡕이다.

늑대도 인간도 생태계를 유지해가는, 동등한 위치의 구성원일 뿐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학문이 생태학이라는 상식은 인간의 존재를 너무 크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어쩌면 오류일지도 모른다. 근원적으로 인간 역시 자연의 한 요소에 불과하므로 자신들을 자연과 분리된 특권적 존재로 생각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자연스럽게 바라보거나 유지시키는 학문이 생태학이라면, 인간을 예외적인 존재로 단정해 놓고 자연과 분리시킬 필요도 분리시켜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지식청년 출신의 장룽(姜戎)30여년을 올론 초원 늑대들의 생태를 관찰하여 완성시킨 󰡔늑대토템󰡕늑대를 통한 인간의 생태학적 보고서인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책은 늑대와 인간이 공존해야 한다는 생태계의 당위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이기적 행태에 대한 고발과 늑대토템사상의 차원 높은 합리성을 강조한 인문학적 보고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몽골늑대

 


몽골초원

 

작가 장룽은 21살의 지식청년 천전으로 바뀌어 무대인 몽골 초원에 등장한다. 내몽골 변경 올론 초원의 인민공사 목축대대에 자원하여 배속된 실제 지식청년 장룽은 그곳에 11년간 머물면서 자신을 매료시킨 늑대의 생태와 정신을 체험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초원에서 늑대와 함께 자라고 늙어온 빌게노인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늑대의 정신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 또한 절감했다.

실제로 그는 늑대를 만나면서 두 가지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늑대는 초원의 혼을 주도했고, 그것이 강인한 생명력과 전투력을 가능케 한 유목정신으로 승화되었다는 것. 즉 유목 생활 내부의 냉혹한 생존경쟁은 강한 늑대와 군마, 강한 무사들을 지속적으로 키워 왔으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낙후되었던 유럽의 로마문명이나 중세의 봉건제도를 무너뜨림으로써 세계사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첫 번 째 깨달음이었다.

그 반대로, 냉혹하고 강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형편없이 나약해졌고, 그 나약성으로 인해 비약적인 발전을 기할 수 없는 농경문명의 한계가 중국의 치명적인 결함이라는 것이 그 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따라서 식량 생산의 면에서 비효율적인 초원을 농토로 바꾸어 곡물생산을 늘이고 목축의 방법을 바꾸려는 국가의 시책이야말로 무한한 발전의 원동력을 꺾는 일임을 주인공은 강하게 주장하지만, 개발 시대의 조류를 혼자서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빌게노인을 비롯한 초원의 주민들로부터 배우고, 실제 늑대들의 생태로부터 체득한 것은 초원에 내재되어 오랜 세월 지속해온 생태적 공존의 원칙이었다.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초원을 보호하고 초원은 목축을 통해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상호 공존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늑대 또한 초원을 정복하고 인간과 경쟁을 벌이는 존재이긴 하지만, 초원을 해치는 동물들의 개체수를 조절함으로써 목축업을 보호하고 궁극적으로 인간과 이해관계를 함께 한다는 측면에서 3(초원-인간-늑대)는 공존의 당사자들이기도 했다.

목축대대의 대표 바오순궤이를 설득하는 올론 초원 울지 노인의 말은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목초지를 보호하는 일이고, 이것이야말로 목축업의 근본이지요. 중요한 건 한정된 목초지 안에서 가축 수를 엄격히 통제하는 것이고()목초지를 보호하는 관건은 늑대를 지나치게 많이 잡아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초원에는 풀을 망치는 야생동물이 너무 많아요. 그 중에서도 쥐, 산토끼, 마르모트, 가젤이 가장 심한데, 이런 동물들은 목초지를 파괴하는 큰 화근이 되지요. 늑대가 없으면 쥐나 산토끼가 몇 년 안에 초원을 전부 뒤엎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늑대가 바로 그것들의 천적인지라, 늑대가 있어야 그것들이 활개를 펼 수 없게 되지요. 목초지가 잘 보호되면 목장의 재해 대처 능력 또한 커지게 된답니다.()목초지가 좋아서 수분과 토양도 유실되지 않고, 샘이나 작은 강도 물이 마르지 않으니 큰 가뭄을 만나도 마실 물이 부족할 일이 없지요. 풀이 좋으니 자연히 소와 양들도 건강해서 몇 년 간 목장에 병해가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고요. 목장의 생산량이 올라가면 기계 설비를 추가할 능력도 생기니, 우물을 파거나 우리를 지어 재해 대처 능력 또한 덩달아 증강시킬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사실 목초지를 보호하여 많은 동물들을 기르고 재해에 대비하자는 것이 울지 노인의 말인 것 같지만, 초점은 말의 이면에 숨어 있다. 늑대를 보호해야 목초지가 보호되고, 목초지가 보호되어야 사람들도 살 수 있다는 생태적 순환성을 말했고, 그 논리적 연쇄의 출발점에 늑대가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오순궤이는 하지만 아직도 늑대에게 의존해 목초지를 보호한다는 말에는 그리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늑대가 그렇게 큰 역할을 해낼 수가 있단 말인가요?”라고 여전히 늑대의 존재나 능력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초원에서 태어났거나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원의 생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는 존재가 바오순궤이다. 빌게나 울지 노인은 초원 늑대의 생태를 자신들의 몸처럼 꿰고 있는 사람들이고, 천전은 대도시 출신의 지식청년이지만, 초원 늑대의 생태를 관찰하고 경험한 덕에 바오순궤이와 빌게울지의 사이에서 양자를 통합하면서도 양자를 뛰어넘을 수 있는 통찰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늑대의 생태적 특성은 무엇일까. 늑대는 늙거나 약하거나 병든 동족에게 먹을 것을 남겨 주려 애쓴다는 것. 즉 호랑이나 표범보다 결속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먹을 것이 생기면 무리 전체를 생각한다는 것이 늑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보다도 오히려 가족을 끔찍하게 챙기고, 심지어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야 하는 암 늑대까지 챙기는 것이 늑대의 생태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리들의 결속력이 강하여 우두머리 늑대가 한 번 울면 100여 마리의 늑대들이 몰려들어 함께 싸우기 때문에 초원에 살던 호랑이도 늑대 무리에게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물론 늑대가 방목중인 양떼나 소, 말 등을 공격한다는 점은 초원에 사는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다. 그러나 반대로 가젤이나 마르모트 같은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음으로써 초원을 보호유지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크게 도움 되는 점이다. 사실 이런 먹이사슬은 자연 환경을 바람직하게 유지하는 최고의 생태 시스템이다. 초원을 망가뜨리는 야생 초식동물들의 개체수를 유지하여 초원을 보호하고, 그 덕에 양들은 자라고, 양떼 덕에 인간의 삶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 점이 바로 생태환경의 유지나 산업발전의 면에서 초원의 늑대가 갖는 장점이다.

그런데, 늑대의 자산이 그것뿐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당면하게 먹고 사는 문제 이상의 매력적인 생태적 특질을 늑대들은 갖고 있다. 튼튼한 이빨, 발톱, 근육,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발휘되는 힘, 그 힘을 몇 배로 키워주는 생태적 특성으로서의 모성애와 가족애, 집단생활 등은 늑대를 단순한 초원의 야수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늑대 무리는 그들 나름의 규율에 의해 움직이고 지탱되어 나가는데, 그건 일종의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늑대로부터 어떤 신성성을 발견했다. 신의 정령(精靈)이 늑대로 화()했고, 그 늑대는 인간을 텡그리(tengri)’로 데려다 주는 역할을 한다고 초원 사람들은 믿는다. 말하자면 그들의 내세관이나 신앙에까지 끼어들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 즉 토템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주인공 천전에게 늑대의 출중한 장점을 역설하는 목동 장지웬의 말도 몽골민족이 오래도록 토템으로 섬겨 온 늑대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몽골초원의 늑대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큰 인내력과 끈기를 가진 몽골말은 물론이고, 세계를 뒤흔든 흉노, 돌궐, 몽골의 강인한 기병들까지도 길러낸 주역이었다.”거나 몽골초원의 늑대들은 초원 사람들에게 강인한 정신력과 탁월한 전투능력, 그리고 가장 출중한 군마를 공급해 주었고, 이 세 가지가 바로 몽골초원 사람들이 세계를 뒤흔들 수 있었던 이유이자 비결이라는 이들의 대화에는 몽골초원의 늑대에 의해 사실상 조련된 몽골 군마를 소유함으로써 몽골의 기병이 더욱 강인해졌다는 믿음이 들어 있다. 그 뿐 아니라, 늑대 토템 정신의 강점은 중국인들의 유가사상(儒家思想)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고, 천연의 연속성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가사상의 체계는 이미 쇠락했지만, 늑대토템의 정신은 서구 선진 민족들의 귀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몽골민족에게 늑대는 인간과 텡그리를 이어주는 중개자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올론 초원의 장례식이 그 증거였다. 목축민이 죽으면 옷을 벗기고 펠트로 말아 묶거나 입은 옷 그대로 달구지에 싣고 나이 든 두 명의 남자가 달구지를 끄는 말에 올라 채찍을 가한다. 달구지가 덜컹거리면서 시체는 땅에 떨어지는데, 그곳이 바로 죽은 이의 영혼이 텡그리로 돌아가는 장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 남자들이 죽은 이의 펠트를 벗기고 시신을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눕히면 장례의식은 끝나는 것이다. 늑대들이 깨끗하게 육탈(肉脫)시킨 시신으로부터 나온 영혼이 올라가 텡크리의 품에 안기게 된다는 믿음. 그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텡그리의 연회에 참석하여 성스러운 물로 세례를 받고 새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것이 초원의 몽골민족이 진정으로 믿고 있는 늑대토템 사상의 핵심이었다.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다양한 생물들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생태계의 원리다. 몽골초원 생태계의 정점에 있는 늑대는 자신들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동물들의 개체수를 조절함으로써 초원의 황폐화를 막아주고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늑대는 인간의 적이 아니라 우호적인 협력자인 셈이다. 그 뿐 아니라 그의 강인하고 지혜로운 생태적 습성을 본받은 종족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우세한 삶을 이루어 왔음을 역사는 입증해 주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늑대를 멸종시키지 않고 적정한 선에서 유지하기 위해 늑대토템의 신앙을 지속시켜 온 초원민족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초원에서 열심히 살다가 죽은 인간의 시신이 초원늑대에 의해 해체되고, 남은 영혼이 텡그리로 올라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믿음의 체계야말로 또한 얼마나 합리적인가.

생물학자 헤켈(E. Haeckel)의 말대로 진화론자 다윈이 제시한 생존경쟁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복합적인 상관관계들을 연구하는 학문이 생태학이라면, 초원에서 형성된 늑대 등 다양한 동물들과 인간의 복합적인 상관관계, 혹은 조화로운 공존이야말로 세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유지해야 할 생태적 메커니즘이 아닌가.

풀밭 속에서 10여년의 시간을 험한 늑대와 뒹굴고, 그 기간을 포함하여 30여년을 소모하여 늑대 생태의 바이블을 완성해낸 작가 장룽이야말로 생태계의 건강한 유지와 보호가 인간의 지속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전제조건임을 몸으로 보여준 위대한 선각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장룽 지음, 송하진 역, 󰡔늑대토템 12󰡕, 김영사, 2015. 11.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2. 9. 16:26

사랑하는 2014학번 졸업생 여러분!

 

 

학부 졸업생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학창생활을 마무리한 14학번 여러분에게 따뜻한 축하를 보냅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을 잘 길러주시고 대학교육까지 책임 져 주신 학부모님들께 감사드리고,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교수님들, 재학생 여러분에게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어제 밤 저는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와 젊음의 열정으로 빛나던 여러분의 새내기 시절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여울에 밀려 여러분과 이별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혹시 시간의 무상함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인가요? 여기 계신 교수님들 가운데 제가 가장 먼저 쓸쓸한 계절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요? 여러 교수님들을 대표하여 여러분에게 석별의 정을 담아 한 말씀 드려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 것 또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정신없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가치기준이 달라져 있는 오늘을 발견합니다. 내일은 또 어떤 변화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리 모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물인터넷이나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이 그 변화를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이미 개막되었다고 하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준비가 충분한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가 충분치 못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상당 기간 실의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이건 이공계나 인문계 모두 함께 겪는 고통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이 고도지식정보화 단계에서 4차 산업혁명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과도기 혹은 조정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공부한 인문학이 조정기를 거친 미래의 대한민국에 긴요하게 쓰일 시기가 조만간 도래한다고 보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리하여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수준으로라도 인문학의 수요가 늘어나는, 괜찮은 시대가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일자리를 갖고 교문을 나서는 사람이라고 안심해선 안 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실망해서도 안 되는 것은 변화의 바람이 어느 곳을 향할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아 인문학의 창조적 소양과 역량을 갖춘 여러분이야말로 조만간 찾아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기회들을 많이 포착하게 되리라는 것이 우스갯말로 수렵채취시대에 태어나 농경시대, 산업화시대,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정보화시대를 거쳐 오며 변화의 속성을 체험했다고 자부하는’^^ 제 판단입니다. 일단 사회에 나가 크게 변하는 사회의 조류와 용감하게 부딪쳐 보라고 권고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학교가 온실이었다면, 사회는 밀림입니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지금이야말로 여러분 스스로 내면의 혁명적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 분명합니다. 일방적으로 배려를 받아 온 기존의 시간대에서 부모, 형제, 이웃 등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배려해야 하는 시간대로 180도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수들이 지난 4년 간 중점을 두어 가르친 것도 바로 그런 주체적 의무감의 함양이었습니다.

 

과거 여러분의 선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 저는 그들에게 ‘1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먼저 건네곤 했습니다. 저 자신도 그러했지만, 통계적으로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면 대부분 자리를 잡고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능력을 믿습니다. 함께 약속합시다. 앞으로 10년 후인 2027, 저는 멋진 칠순잔치를 열고 그 자리에 여러분을 주빈(主賓)으로 초대하겠습니다. 그 때 멋진 모습으로 저를 찾아 주기 바랍니다.

 

이제 출항의 돛을 높이 달고 용감하게 망망대해로 나가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늠름한 뒷모습에 언제까지라도 파이팅!’을 외치겠습니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러분의 앞날에 신의 보살피심과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2018. 2. 9.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 17. 12:47

작비금시(昨非今是)의 깨달음

 

 

4년 전(2013. 9.~2014. 2.) 미국에 다녀와서 책(<<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11.)을 한 권 낸 바 있다.(백규서옥 블로그 No.119 참조) 당시 그 책을 교수들에게 증정하면서 나름대로의 소회를 적은 서한도 책갈피에 끼워 보냈는데, 책을 받았다는 반응은 10% 정도였고 그 서한에 대한 반응은 거의 zero에 가까웠다.

 

객쩍은 짓을 했나?’라고 자책하며 한동안 겸연쩍은 시간을 보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지난해 숭실 근속 30을 맞게 되었다. 나름대로 어떻게 기념을 할까 생각하다가 부랴부랴 새 책(<<<거창가> 제대로 읽기>>, 학고방, 2017. 10. 23.)을 내고, 교수들에게 돌렸다.(백규서옥 블로그 No.3 참조) 학자가 시간의 마디마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수단으론 책을 능가할 게 없다는 것이 내 철학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의 응답률은 대략 20%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표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었겠지만, ‘당신과 같은 직장에서 한 솥밥을 먹으며 30년을 근속하고 있노라는 인사는 전해지지 않았을까.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허전한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논문을 쓰다가 책 한 권이 필요하여 책장을 뒤지던 중, 책들 속에 끼여 질식하기 직전의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를 발견했다. 책을 펼치자 이쁘게편집출력된 서한이 접힌 채로 툭 떨어졌다. , 바로 내가 정성스레 작성하여 교수들에게 보낸그 편지였다. 읽어보니, 숫자(3336/3033)만 바꾸면 현재의 내 상황을 정확히 드러낼 만한 내용이었다. 교수직이 얼마나 따분한생활인지, 이 글을 읽고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 편지를 버리기가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숫자만 바꿔 이곳에 올리고, 그 때 그 편지와, 그 글에서 숫자만 바꾼 숭실 근속 30년의 인사장을 늦었지만 이곳에 올린다.

 

                                                       ******

 

        님께

 

 

안녕하신지요?

인문대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조규익입니다.

 

엊그제 여름이었는데, 벌써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늘 그래 왔습니다만, 최근 들어 시간의 덧없음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저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임을 시작한 스물넷부터 36년째, 경남대학교의 전임을 시작한 스물일곱부터 33년째 상아탑을 지키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저보다 앞서 이 길을 걸어가신 선배님들을 뵈며 참으로 끈기 있게 한 길을 걸어오셨구나!’라고 경이로운 눈길을 보내곤 했는데, 저도 이미 그 반열에 들어서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간의 세월을 돌이켜 보면, 그저 잠시 졸다 깨어보니 한낮이 기울어 버린그런 느낌입니다. 이제 비로소 흘려보낸 시간의 덧없음과 함께 맞이하는 시간의 질과 양이 나날이 달라짐을 절감합니다. 명문 <귀거래사(歸去來辭)>를 통해 마음이 육신의 노예가 되어(心爲形役)’ 동분서주하던 과거의 시간대에서 전원으로 돌아온 뒤 어제가 그릇되었고 지금이 옳다(昨非而今是)’고 선언한 도연명(陶淵明)을 떠올립니다. 저도 무명(無明)의 어제에서 깨달음의 오늘로 돌아 왔다고 한다면, 좀 주제넘은 말일까요? 시간의 소중함을 이해하고 좀 더 본질에 충실한 생활로 돌아간() 것을 도연명이 말한 작비금시(昨非今是)’의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꽤 오래 전에 귀한 자료(<거창가>)를 입수한 뒤 책 한 권과 논문 여러 편을 낸 바 있으나, 다른 데 신경을 쓰다가 그 귀한 것을 그만 10년 넘게 망각의 늪에 빠뜨려 놓고 있었습니다. 최근 새로 쓴 글들을 하나로 엮고, 오독(誤讀)오역(誤譯)을 바로잡아 새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우리네 속담이 있던가요? 책이 나온 뒤 가족들과 지인들을 불러다가 소중한 약속을 나누다가, 오랜 세월 한솥밥을 먹어 온 벗님들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욕심은 후회를 남기고, 반성 없는 후회는 파멸을 부른다는 금언을 되새기며, 이 공동체에서 더 머물게 될 몇 년 간 좋은 추억들만쌓고 싶은 소망으로 파편화된 제 학문적 견해들이나마 엮어 올리오니, 부디 소납(笑納)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7. 12. 31.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규익 드림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