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30. 15:47
 

아버지의 정


                                                                       조규익


‘동물’의 생태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미국에 잠시 체류할 때 ‘애니멀 플래닛(Animal Planet)'이란 채널을 즐겨 보았다. 가끔 채널 다툼(?)이 생겨나곤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원리나 방법이 인간의 그것과 별 차이 없다는 것이 내가 동물의 세계를 즐겨 보는 이유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 첫째는 약육강식 등 힘의 논리에 대한 승복이고, 둘째는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이다.


약자를 지배하는 유일한 근거는 힘이다. 그 면에서 적어도 동물계의 불확실성은 없다. 윤리나 양심 등 약간의 예외를 빼면 인간 세계의 원리 역시 약육강식이다. 사실 윤리나 양심 등도 약육강식의 잔인성을 포장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 늘 그것들이 인간행동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그것은 가식으로 비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동물보다 불순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동물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삶을 훔쳐보기를 좋아한다. 한국판 애니멀 플래닛의 출범만을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물의 애틋한 자식사랑도 인간과 마찬가지이고,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헌신적인 점도 인간과 마찬가지다. 부모 모두 자식 기르는 데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동물도 있긴 하다. 그러나 대충 수컷들은 육아에 무책임하다. 어떻게든 암놈을 차지하여 ‘씨를 뿌리는 데’만 혈안이다. 일단 씨를 뿌리고 나면 낳고 키우는 건 암놈의 몫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대충이라도 알기 어려운 것이 초원에 펼쳐진 동물들의 세계다.


인간도 그렇다. ‘깊은 정은 부정(父情)’이라지만, 그건 모정에 비해 하나도 애틋하지 않은 부정의 실상에 대한 수사(修辭)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가. 아들들은 대충 아버지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입장을 깨닫고 가까이 하려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정함’을 다 늦어서야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


 국내 굴지의 재벌 H그룹의 모 회장이 술집에서 얻어맞고 온 아들의 복수를 위해 끔찍한 활극을 벌였다. 아들의 나이가 스물셋이니, 일찍 장가들었다면 아들이라도 보았을 나이다. 이제 육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다 큰 녀석 아닌가. 그럼에도 밖에서 얻어맞고 들어온 아들이 그리도 애처로웠을까. 회장의 나이를 잘은 모르지만, 아마 ‘지천명(知天命)’이나 ‘이순(耳順)’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을 텐데. 이제 세상 물정 알 만큼 알고, 철이 들었을 만큼 들었을 그가 다 큰 아들이 얻어맞고 들어왔다고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직접 응징에 나섰다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옛날 내 인척 가운데 한 분도 자식 사랑이 끔찍했었다. 그러나 같은 경우의 대처방법은 회장과 달랐다. 애가 밖에서 맞고 들어왔을 때, 자초지종을 물어 억울하게 맞았으면 아들을 다시 보내 스스로 복수하고 사과까지 받아오게 했다. 만약 아들이 잘못이었다면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그런 교육을 받은 그는 책임감 강한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애들이 밖에서 놀다 보면 사소한 다툼이 있을 수 있고, 툭탁거리며 싸우기 일쑤다. 회장의 아들은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곱고 귀하게 자랐을 것이다. 애들과 티격태격하다가 한 대 얻어맞으면 또르르 달려와 부모에게 일러바치고, 부모 또한 참을성 없이 달려가 주먹다짐을 하곤 했으리라. 그러니 스물셋이란 나이를 먹고도 몇 대 밖에서 얻어맞았다고 싸움판에 부모를 끌어들이지 않았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그 회장이 경찰 등 나라의 공권력을 우습게 만든 점은 따로 따져야겠으나, 필자 같은 일개 필부의 눈으로도 그 부자의 행실이야말로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다. 초원에서 늘상 보는 ‘무책임한 수컷’의 범주는 벗어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4. 30.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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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28. 18:26
학회 유감

바야흐로 학회의 계절이다. 주말은 말할 것 없고, 주중에도 심심치 않게 학회들이 열린다. 그러나 여기에 동창회나 결혼식 같은 여타의 행사들이 겹치기라도 하면 학회는 뒷전으로 밀린다. 더구나 꽃놀이하기 좋은 계절 아닌가. 이런 때 컴컴한 방에 모여 ‘재미없는’ 논문 발표나 들으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고문이다.
 
그래서 어느 학회에 가 보아도 ‘자발적인 손님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징발된’ 학생들이거나, 안면 상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을 뿐이다. 학회 임원들, 발표자, 토론자 등이 참석자의 거의 전부인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어떤 학회는 발표자 1명당 토론자를 대여섯 명씩 배당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나마 토론자로라도 지정되면 참석하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그 역시 이미 ‘약발 떨어진’ 방법으로 전락해 버렸다. 팸플릿에 토론자로 올려졌다 하여 모두 참석할 만큼 순진하지 않은 게 요즘 사람들이다.
 
국내학회만 이런 것은 아니다. 그럴 듯한 명칭의 ‘국제학회’ 역시 마찬가지다. 시작시간이 다가오면 학회의 임원들은 뜨거운 양철판 위의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한다. 회의장을 들락날락하며 ‘파리 날리는 구멍가게’의 주인처럼 무정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하릴없이 쳐다볼 뿐이다. 저명한 해외의 학자들이라도 불러온 경우의 민망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것이나, 시대의 변화를 그 주범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학회가 학문 공동체인 만큼, 개인의 파편화나 인터넷의 발달 등 공동체의 문화를 파괴하는 현실의 직격탄을 피해갈 수 없다. 학회의 생명은 토론이고, 토론은 ‘다방향 통행’의 현장이다. 구성원들은 토론을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개인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각자의 생각에 매몰되어있다. 남들의 생각에 좀처럼 마음을 열려 하지 않는다.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겉으로는 제법 대화가 살아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인터넷 속의 대화는 ‘일방적’이다. 더구나 익명의 ‘말 던짐’은 독선과 아집, 아니면 지저분한 ‘배설’일 뿐이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배척한다. 왜 다른지, 혹시 내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따라주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적이다. ‘○사모’류의 집단들이 인터넷 안에 뭉쳐있지만, 그들 역시 불순한 동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패거리일 뿐 건전한 공동체는 아니다. 그들은 증오를 주 무기로 하는, 배타적 개체에 불과하다. 개인 간, 집단 간에 존재하는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정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인내심이 없으니 폭력이 앞선다. 이런 공간에서 폭력의 1차적인 수단은 말이다. 독선과 폭력은 ‘반민주’의 표징이다. 학자도 인간인 이상 시대의 변화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가. 이제 남의 논문을 읽지도, 남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골방에 숨어, 제가 쓴 논문들을 저 혼자 읽으면서 만족해하고 잘난 체 한다. 남들이 이미 다 해놓은 말들인데, 자기에게 ‘지적 재산권’이라도 있는 듯이 거들먹거린다. 간혹 추궁을 당할 경우에는 ‘읽어보지 않았다’는 방패를 들고 나선다. 이런 상황에서 학회가 잘 될 리 없다. 학회가 죽고 학문도 죽었으니, 지금이 바로 암흑시대일 수밖에 없다.
                                                              조규익(국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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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28. 17:00
수능성적•석차 공개와 대학 신입생 선발 방법 전환의 시대적 요구


논란의 가능성은 있지만, 수능성적과 석차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은 이 시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가 대학의 서열화를 막을 수 있다고 보거나 심지어 운전면허시험에 비유하여 수능성적•석차의 공개가 무의미하다는 견해를 밝힌 논자도 있지만, 이번 판결이야말로 대학입시에 대한 열린 논의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본다.

과연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가 대학들의 서열화를 성공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수십년전에 형성된 서열이 지금도 不動인 상태로 힘을 발휘하게 만든 주범이 바로 그것이다. 세칭 일류에 속하지 않는 대학들이 안간힘을 써서 근래 몇 분야에 성공했다해도, 잠시 사람들의 입에만 오르내릴 뿐 막상 대학을 선택할 시점에는 그 사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사실 개별 대학이나 대학교육의 내실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대학의 서열화를 혐오하는 것이지, ‘참된’ 대학의 서열화는 지향해야 할 대학의 이상이다. 능력과 무관하게, 졸업한 대학에 따라 사회적으로 이익과 손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기득권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속성상, 비정상적인 대학 서열화를 깰 수 있는 묘책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는 대학 서열화를 완화시키거나 깨지도 못하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수험생과 국민들을 ‘오류와 요행 추구’의 함정에 빠뜨리는 잘못까지 범하는 꼴이다.

더구나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일부 사설 입시기관들의 신뢰할 수 없는 자료와 수험생들의 자가판단에 의해 교육의 본질만 왜곡시킬 뿐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수험생이나 학부모들로 하여금 ‘도박하는 심정’으로 대학을 선택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력이 인재 검증의 유일한 수단으로 통할 만큼 우리 사회가 충분히 투명해지고, 국민들의 의식이 안일한 기득권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얼마간 ‘왜곡된’ 대학의 서열화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로 무작정 막는다고 문제가 해결될 만큼 우리 사회의 구조가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들이 없지는 않겠으나, 신입생 선발을 대학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 正道이자 王道이다. 지금의 현상을 액면 그대로 표현하자면, ‘수십만의 수험생들을 한 날 한 시에 똑 같은 문항으로 서열화시키는 주범이 국가’인 셈이다.

지금처럼 국가가 대학의 행정을 통제하고 학생 모집까지 규제한다면, 사실상 이 나라에 대학은 없는 셈이다. 대학 나름의 이상과 목표에 걸 맞는 방법으로 학생들을 선발하게 한다면, 정작 정부가 전국의 수험생들을 똑 같은 문항으로 서열화시켜 놓고서 그 결과를 ‘공개합네 안 합네’하는 자기 모순적 논란에 빠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과 선발 과정에서의 부조리 추방 등이 대학들의 신입생 자율선발을 막아온 정부의 논리였다. 그러나 국가가 신입생 선발까지 도맡아오는 동안 이런 문제들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간의 세월은 대학에 자율선발권을 주었을 때 빚어질 수 있는 과도기적 부조리들이 청산될만한 기간이었다. 그렇다면, 대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국가는 그동안 귀한 시간만 낭비한 꼴이 아닌가. 정부가 미적거릴수록 대학의 신입생 자율선발에 따르는 과도기적 문제나 비용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수능성적•석차의 공개는 대학의 자율권 확보 논의의 첫 단추가 되어야 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22. 13:54
육안(肉眼)을 넘어 심안(心眼)으로


조규익(숭실대 교수)

서화담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어버린 채 길가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화담선생에게 "저는 나이 다섯에 눈이 멀어 지금 20년이나 되었는데요. 오늘 아침에는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환히 보이기에 기뻐 어쩔 줄 몰랐지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길은 여러 갈래이고 대문들이 서로 비슷비슷하여 제 집을 분별할 수가 없군요."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도로 눈을 감으시오. 그러면 곧 당신의 집이 있을 것이오."하고 집 찾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 맹인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곧장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한다.


조선조 영조 때 연암 박지원선생이 인간의 본분을 그르치는 망상의 위험을 깨우치기 위해 끌어온 서화담의 일화가 바로 이 이야기다. 외부에 드러나는 색깔과 형상에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고 슬픔과 기쁨에 마음이 쓰여서 망상이 되기 때문에 차라리 맹인으로 돌아가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걷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본분을 지키는 도리임을 깨우치기 위한 비유의 목적으로 연암선생은 이 일화를 인용했겠으나, 어쩜 화담선생의 일화에 나오는 스토리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번에 불현듯 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할까? 우리가 만나야 하고, 소유해야 하는 것들 가운데 보이는 것은 과연 몇 %나 되는가?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형상과 '제 귀에 들려오는' 달콤한 말들에만 집착한다. 젊음은 덧없는 시간에 밀려 머지않아 주름이 지고 소멸의 나락에 떨어지련만, 우리 모두는 흡사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착각하고 산다. 달콤한 말이 바람결에 흘러가버리면 배신과 회한의 암종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을.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움켜잡아야 할' 구원의 노끈으로 착각한다. 세상의 모든 반목과 대립, 욕망과 집착이 바로 '육체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으로부터 연유된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네 삶이 이토록 각박하고 힘겹진 않으리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보다 '심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이나 세계가 훨씬 넓고 가치 있다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네 삶터가 이토록 삭막하진 않으리라.

그러나 나와 대부분의 내 이웃들은 '육안'만을 지닌 채 그렇게 살아왔고,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육안 만으로 그렇게들' 살아갈 것이다. '육안'으로 확인한 사실만 모든 것의 표준으로 착각하면서 세상의 이익을 송두리째 삼키기 위해 '혈안(血眼)'들이 되어 날뛸 것이다. '혈안'은 '분노와 흥분으로 핏발이 선 눈'이다. 인간의 욕망과 배신, 갈등으로 점철된 '육체의 눈'이다. 그 검붉게 충혈된 '육안', '혈안'을 가지고 우리가 '심안 만을 가진 우리의 이웃들'을 만났던 것이다. 우리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그래서 가끔 이야기 속에서나 볼 수 있었고 더욱더 띄엄띄엄 아득한 뉴스 속에서나 보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육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네들 위주로 꾸려나가는 공간이다. 이 세상의 주인이라 착각하는, '육안 뿐인' 우리들은 자신들이 진짜 '시각 장애인'인 줄을 모른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더냐고. 안타까운 일이다. '육안 만을 지닌 우리'가 '심안 만을 지닌' 우리네 이웃들을 도와준답시고 '육안 만을 지닌' 사람들이 가급적 적게 오고 가리라 생각되는(그들에게 방해를 덜 주겠다는 배려인가?) 문경 새재를 함께 넘었다. 그리고 풋풋한 솔바람 속에서 그들의 밝고 건강한 의지를 배우게 되었다. 아, 나야말로 그동안 영락없는 '시각 장애인'이었던 것이다! 함께 팔짱을 끼고 새재를 넘은 서른다섯의 최양도, 쉰셋의 김씨 아저씨도 모두 내 선생님들일 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 안에서 부글거리곤 하는 불평과 불만, 좌절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익힌다던 최양, 의료정책이나 세상의 부조리 등을 당당하게 성토하던 침구사 김씨, 아들 딸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내고 손자들의 재롱 속에서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는 주부 김씨 등등. 그들은 '육안 뿐인' 우리보다 더 깊고 넓은 세계, 더 높고 많은 것들을 보고 있었다. 서화담이 만난 그 맹인은 '육안'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걸어갈 길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육안'은 우리 자신의 내면과 본질을 그르치는 욕망과 탐욕의 창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심안'은 우리의 내면을 진리가 숨 쉬는 평화로운 초원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일 가능성이 더 많다. '육안 없는 자들이 무얼 볼 수 있으랴?'라는 편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터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면을 '백안(白眼)시' 해왔다. 그 일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육안 만의 우리'는 영원한 불구자들일 수밖에 없다. 무섭고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이들의 벗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가족들의 표정에서 '육안'과 다른 '심안'이 비로소 열리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제가 상당히 오래 전에 써서 어딘가에 발표한 글인데, 누가 자신의 까페(cafe.daum.net/cateurl)에 옮겨 놓았군요. 그 분께 감사하며 제 블로그의 손님들을 위해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21. 08:44
*이 글은 조선일보(2007. 4. 21.) 시론으로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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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대학교육은 상품이 아닙니다”


‘대학교육은 상품이 아닙니다!’ ‘등록금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어느 대학을 가 봐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수막의 문구다. 대학 교육이 결코 ‘시장에서 이익을 전제로 교환되는 유형·무형의 재화’가 아니라는 교육 소비자들의 절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대학만큼 철저한 시장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곳도 없다. 그 원조(元祖)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있다지만 그들을 따라가는 국내 대학들의 행태가 심히 걱정스러울 정도다.최근 교육계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는 대학의 공익적 성격을 상당 부분 훼손시키고 있다. 이윤 창출에 초점을 맞추는 ‘기업 마인드’로 대학을 운영한다든가 필사적으로 기업에서 기부금을 받아내려고 하는 풍조가 일반화되고 있다. 지금 대학은 기업의 지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돈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부익부 빈익빈으로 대학을 양극화시키고 있는 국가의 지원금이나 기업의 기부금은 대학의 부정적 현실을 오히려 심화시킨다. 비용의 상승을 등록금에 즉각 반영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 대학들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다.일부 합리주의자들은 ‘등록금이 인상되는 만큼 서비스의 질 향상을 요구하라’는 말로 투쟁에 나선 학생들을 꾸짖는다. 그러나 그런 합리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어떤 규모로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으며, 우리 대학들에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철학은 갖추어져 있는지’를 물으면 침묵하기 일쑤다. 사실 우리의 교육 당국이나 대학 경영진에 시대의 흐름이나 현실을 읽어 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 수 있다. 미래의 대학 교육이 시행착오의 외길을 걸어온 현재와 다를 바 없을 거라고 비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비관은 나라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대학들, 입학생들은 줄어드는데 자꾸만 늘어나는 해외 유학생들, 교육의 질에 대한 국민들의 팽창하는 욕구,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재원, 학교 규모를 줄인다거나 통·폐합 등에 과감히 착수하지 못하는 학교 이기주의, 교육을 통제하려는 중앙 정부의 욕구 등 현실적인 문제들과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들 모두 우리의 대학을 압박하는 부정적 요인들이다. 이 와중에서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 배워 온 것이 마케팅 기법이다. 몇몇 뛰어난 교수들을 고액 연봉을 내세워 영입하거나 소수의 우수 학생들이나 출세한 동문들을 활용해 학교 이름을 드날려 보려는 이른바 ‘스타 마케팅’이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다. 양질의 교육으로 우수한 졸업생을 배출하기보다는 점수가 뛰어난 학생들을 데려다가 고만고만한 재목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들어도 대학인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일부 스타들이 만들어낼 환상이 이런 비난을 중화시켜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부정적인 점에서 우리나라 대학들은 일류나 이류를 막론하고 ‘표준화’가 되어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부류는 ‘묵묵히 진실된’ 연구를 하는 교수들과 대다수의 성실한 학생들이다. 이들이 내는 등록금의 상당 부분이 이른바 ‘스타 마케팅’에 쓰이는 데도 의도에 비해 결과가 시원치 않다면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 이제 문제는 본질에 대한 성찰이다. 케케묵은 말 같지만 하루 빨리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루아침의 ‘반짝 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교육은 아니다. 대학 교육이 20년 만에 때려 부수고 재건축을 해대는 아파트만도 못하다면 이제 우리는 대학의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9. 16:58
퇴임사 수필 칼럼

2007/02/23 12:49

http://blog.naver.com/jack2816/100034595852

 

퇴임사


2007년 2월 23일

이재관

39년 근속한 교수직을 떠나며,



  바쁘신 중에 오셔서 인자한 말씀으로 축사를 해주신 존경하는 이효계 총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순서를 맡아주신 교무처장, 교목실장, 경영학부장, 그리고 유한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축도 순서를 맡아주신 김기태 목사님 감사합니다. 김목사님은 과거에 육군사관학교 교회 담임목사와 국방부 군종실장을 하실 때 저의 신앙생활을 가까이 지켜주셨던 은인이십니다. 웨스트민스터 합창단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시낭송을 해주신 김종천, 송광석군 감사합니다. 저는 숭실에서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가까운 곳에서 항상 도와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신 숭실대 교직원 선생님들께 최고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믿고 따라준 재학생, 졸업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더 잘 가르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 동안 16명의 박사후보가 저의 지도를 받았는데 14명만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떠나버린 2명의 얼굴이 요즘 자꾸 어른거려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멀리서 오신 김용준 교수, 김병우 교수, 권오탁 교수, 강성안 박사, 가까이서 행사를 준비해주신 윤재한 교수, 박유동, 정청식, 홍성의, 김선희 박사께 특히 감사드립니다.

 

  긴 세월 한 울타리에서 형제보다 가깝게 우정을 나누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우리 경영학부와 경상대학 교수님들께 어떻게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연구실인 경상관 505호는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별세하신 고 이길영 교수님이 쓰시던 방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505호실로 짐을 들여놓으면서 그 분의 못 다하신 일까지 더블로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요일, 공휴일 가리지 않고 주당 근 80시간씩 연구실을 지켰습니다. 밤을 새운 날까지 합치면 아마 20년에 해당하는 지난 10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10년을 더했다면 75세 은퇴를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정년은퇴가 천만다행이고 즐거운 은퇴입니다.


  마지막 1년을 시 쓰기에 몰두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문 한두 편 더 쓰는 것도 좋겠지만, 마지막 1년이 색다르게 장식되었으니 참 좋습니다. 시를 쓰면 머리가 맑아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과학은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를 종종 우울하게 만듭니다.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사회과학도는 이 세상을 한심한 나락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저의 전공인 품질경영 Total Quality Management와 커뮤니티는 한국에서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인증제가 도입되고 대학들도 인증을 얻기 위해 힘쓰고 있지만, 인증제는 TQM과 커뮤니티의 초보단계에 불과합니다. 아, 언제 봄이 올 것인가. 그런 갈등 심리가 저의 시, ‘나의 봄’, ‘색상반전’, ‘신화’ 등에 부분적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에 시에 집중하면서 훨씬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인터넷 자료를 프린트한 수 만 페이지와 전공서적 수백 권을 연구실에 쌓아놓고 살았습니다. 대학원생들과 씨름을 하다보면 언젠가 또 필요할지 모른다는 마음에 자료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연구실을 비우면서 일부는 도서관과 단대 도서실에 기증했고, 나머지 절반은 집으로, 절반은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기분이 한결 좋습니다. 물방울 품은 꽃잎처럼, 잠시만 내 곁에 머물러줘도 감사할 일입니다. 노트와 수만 장의 뭉치를 던져버리는 내가 마치 낙엽을 떨구는 가로수 같다 생각하고 휘파람 불면서 방 청소를 끝냈습니다.  


  시집을 계획한 것은 작년 봄부터입니다. 저는 HTML 태그를 배운 다음 자작시에 사진과 음악을 붙여서 인터넷에 올리곤 했습니다. 중소기업대학원 35기 졸업생 오일균씨가 저의 게시물을 보고 도와주셔서 편집과 출판이 모두 원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오일균씨는 프로 사진작가입니다. 자기가 직접 촬영한 사진 수백장을 꺼내어 일일이 검토하고 주옥같은 70편을 무료로 기증해주셨습니다. 시의 내용과 사진작품이 잘 조화되도록 여러 차례 편집을 수정했고 또 출판비용까지 저렴하게 해주신 점, 너무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AMP 35기 여러분이 응원차 왕림하셨습니다. 임수경 35기 회장(미니골드 대표), 김선희 35기 총무, 김강삼 트레인즈 사장, 김기상 박물관 디자인 가나이넥스 대표, 이점옥 마이더스 대표, 여러분 감사합니다. 시집에 나오는 인물 모델은 대부분 AMP 35기 원우님들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를 아무나 쓰느냐, 어떻게 검증을 받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하다가 영어영문학과 심방자 교수님께 애로사항을 호소했더니 김영호 교수님을 찾아가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누님 같으신 심교수님 조언은 정확했습니다. 김영호 교수님은 저의 습작수준의 시를 일일이 다 읽어주시고 준엄하게 그러나 자상하게 시정신과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시면서 국어국문학과 조규익 교수님을 찾아가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멋쟁이 학자로서의 삶의 모델을 보여주시는 백규 조규익 선생님, 존경합니다. 문예창작학과 김인섭 교수님의 오늘 말씀은 인문대학 교수님들이 저에게 베푸신 마지막 코스 확실한 피니시블로의 충격이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습작생활을 해보라는 충고로 접수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학문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무작정 달려드는 저의 무례를 참아주시고 오히려 감싸안아주신 인문대 교수님들의 협력과 인간미에 저는 홀딱 반했습니다. 이걸 모르고 그냥 목에 힘이나 주고 눈살 찌푸리며 캠퍼스를 떠나게 되지 않은 것은 망외의 행운입니다. 자기 전공만 최고인 줄로 알고 살았는데, 이번에, 학문영역 간 상호이해와 교류가 살아있는 전인교육의 숭실 캠퍼스를 흠씬 맛보고 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이제 끝으로, 제 곁에서 묵묵히 그러나 걱정의 눈길로 긴 세월 응원해준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내 조정자는 제가 육사 졸업반 때 전국대학생 학술토론대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한국농촌문제에 관한 발표를 아주 당당하게 했고 저는 그 때 사회를 맡았었습니다. 당시 대회위원장을 맡았던 안병호 시인이 이번 저의 시집에 축시를 써주셨습니다. 보배 같은 친구의 시를 마음에 간직하겠습니다.


  이 모든 감사의 조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숭실에 오게 된 것도, 여기서 근 30년이나 즐기며 마음껏 연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마지막 1년까지 참 사랑을 배우면서 떠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차고 넘치는 축복임을 느낍니다.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저를 지켜 인도하신 주님께서 또한 좋은 것으로 이미 예비하신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7년 2월 23일   이재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