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7. 8. 14:04
정치인들도 교육에 동참하라!

이른바 ‘잠룡(潛龍)’들이 뛰어나와 하나밖에 없는 승천(昇天)의 티켓을 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금. 온갖 술수가 난무하여 혼란스러운 ‘2007년 6월의 공간’을 뜻 있는 사람들은 난세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정치’를 탓한다. 정치만 있고, 양식(良識)에 바탕을 둔 도덕이나 인간미가 상실되었다 한다. 제대로 된 정치나 정치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한비자(韓非子)는 말했다. 인정이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또는 생각’이 인지상정이다.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은 ‘나만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고집스런 편견을 대전제로 한다. 그래서 제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흠집만 캐내어 세상에 광고하기 바쁘다. 남의 흠은 작은 것이라도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것은 감추면서 남을 깎아내리려 한다. 이 대열에 후보들은 물론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원 등 이른바 정치인들이 뒤질세라 끼어들고 있다.

정치적 권위가 형성되는 핵심은 정책 결정자 또는 기관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치집단이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사회의 일반적 윤리를 바탕으로 정치집단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관념이 국민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설명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윤리를 외면하고 술수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현실은 비극이요 재앙이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는 모습, 비록 적이라도 장점을 칭찬해주는 금도(襟度)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오물 같은 증오의 언사들이야말로 그들의 적만 듣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의 걱정을 털어놓아보자. 우리의 교육이 걱정이다. 어른들보다 훨씬 영악하게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이 땅의 2세들이다. 그들은 발달된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다. 강단의 선생들이 내뱉는 고답적인 말보다 전투적이고 상스러운 정치인들의 말을 훨씬 빨리 받아들인다.

지금의 선생들은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 선생의 가르침보다 매스 미디어의 총아들이 보여주는 언행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까발리고 부풀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인들에게도 자식들은 있을 것이다.

한 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검증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검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을 검증하려면 철저한 자기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기검증만 제대로 한다면 굳이 남을 검증할 필요 없고, 그에 따라 ‘네거티브 전략’이란 저급한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우리 사회의 신뢰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결과는 교육의 황폐화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그저 폐쇄된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과서만 읽는 로봇들이 아니다. 어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복사하듯’ 배운다. 무슨 거창한 교육정책을 세워주길 기대할 만큼 정치인들의 자질을 믿는 우리도 아니다. 다만 평균적인 윤리의식이나 양식 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되, 자신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식들의 교과서로 수용된다는 사실만이라도 명심해달라는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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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5. 20. 00:33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

 -아, 제주 여성의 운명이여!-


아주 어릴 적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읽었다. 오래 전의 일이라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으나,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가슴에 오롯이 남아있다. 사랑하는 왕자님의 배를 따라가던 인어공주. 그 왕자님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다. 마법의 힘으로 꼬리는 뗐지만 말을 못하게 된 인어공주였다.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간세상으로 환생했으나, 말을 잃어 사랑의 성취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인어공주로 돌아가려면 왕자의 가슴을 찌르고 그 피를 자신의 다리에 발라야 했다. 가까스로 왕자의 침실에 들어갔으나 결국 그 일을 포기하고 물에 몸을 내던져 포말로 사라졌다는 인어공주의 슬픈 이야기였다. 처절한 자기희생을 통해 결국 ‘영원한 사랑’을 성취한 것일까. 그게 바로 인어공주의 운명이었다. 고귀한 것을 위해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은 이처럼 비장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


미끈하게 심해를 유영(遊泳)해 들어가는 해녀들의 모습에서 인어공주와의 유사성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듣기에 따라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이라 할 만큼 둘 사이의 유사성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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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의 모습(해녀박물관)

그러나 상상의 공간이든 현실의 공간이든 양자 모두 바다를 무대로 한다는 점. 억척스레 자신의 꿈을 가꾸지만, 운명을 거역하기보다 순응한다는 점 등이 해녀와 인어공주에 대한 내 생각을 결정한 요인이리라. 어려서부터 물질로 세월을 보내 바닷물과 해풍에 주름이 깊어진, 나이 든 해녀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환상과 낭만의 서정이 아니라 현실과 투쟁의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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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딸 때 사용하는 빗창

 추우나 더우나 365일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제주 해녀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삶의 엄혹(嚴酷)함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의 공간을 밥 먹듯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 깊은 바다를 자맥질하는 수십 초의 짧은 순간. 가쁜 숨비소리와 함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한 알의 전복이 전부이지만, 죽음의 허무보다는 삶의 뿌듯함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존재가 해녀들이다.


   ***


정방폭포 앞 해변에서 좌판을 벌이고 갓 따온 해물들을 팔고 있는 늙은 해녀와 제주 민속촌박물관, 해녀박물관 등에서 ‘박제된 해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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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아래 쪽 해변에서 해산물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해녀들

모두 시간을 초월하여 ‘삶에 봉사하는’ 제주해녀들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삶을 통해 ‘억척스러운 제주의 여성성’을 형성해왔지만, 결코 자신들의 삶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가끔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기도 했으리라. 특히나 제주도에 태어난 것을.

 사방을 둘러봐야 시퍼런 바다. 그 장벽이 가로막고 있으니, 그들은 그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주 해녀의 바다 개척은 그런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과 투지 의 소산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라는 속담을 만들어냈다.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낳지’라는 뜻이다. 운명에 순응하면서 살길을 개척하는 제주 해녀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속담이다. 가족을 살리고, 제주를 살려온 해녀들의 삶. 그 정신을 다시 살려내고,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


제주 해녀 만세!!!

                                      <2007. 5. 19. 아침, 제주도 한경면 청수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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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5. 20. 00:20
 

노학자와 서귀포의 밤


                                                                         조규익



 제주 민속 혹은 문학기행에 나선 숭실 국문인 135명. 에머럴드빛 바닷물 넘실대는 서귀포 해안에 올려 지은 제주대학 연수원은 고요하고 청수(淸秀)했다. 쉼 없이 울려대는 파도소리와 솔잎을 비벼대는 바람소리만 빼곤 적막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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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중인 현용준 선생

 우리가 제주에 온 것은 공부를 위해서였다. 첫날 저녁 제주 민속연구의 대부이신 현용준 선생을 모셔 이른바 ‘제주학’강의를 들었다. 금년 76세의 무거운 연세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건강에도 육지에서 찾아온 우리를 위해 서귀포까지 한 시간 여의 거리를 달려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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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 연수원 뒷편 해안의 바위들

 형형하신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선생은 자리에 앉자마자 제주의 풍토, 제주인의 삶, 그리고 민속을 천천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미 제주시에서 탐라국의 단초를 보여주는 삼성혈(三姓穴)을 보았고, 삼사석(三射石)도 만났다. 어느 씨족이나 민족을 막론하고 조상들의 출자(出自)는 신성하고 경이로운 법. 제주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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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 유적의 정문

 선생의 말씀대로 본토의 시조들이 대부분 하늘에서 내려온 반면, 삼성의 시조들은 땅에서 용출(湧出)된 점이 다를 뿐이었다. 땅에서 솟은 세 젊은이가 벽랑국에서 건너온 세 처녀와 결혼하여 탐라국을 건설했다는 삼성신화. 그것은 제주도에 편재해 있는 당신화(堂神話)의 모티프와 연결되어 있다고 노학자는 강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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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이 박힌 세 개의 돌덩이를 보관하고 있는 삼사석지

선생은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로 나뉘어 있는 제주 가옥의 이중구조와 혼성(混姓)의 마을구조, ‘이레잔치’로 표현되는 혼속(婚俗), ‘해녀 노 젓는 소리’를 비롯한 민요 등을 중심으로 제주 민속의 특징과 제주의 역사, 그리고 제주인들의 의식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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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보는 두거리 집(제주 민속촌)

 두 시간 가까운 강의 말미에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노학자는 하나의 화제를 갖고도 많은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와 함께 자라고, 제주를 연구해온 노학자의 저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

제주의 ‘맛집’들을 탐사하여 신문에 소개해온 허남춘 교수(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장)의 안내로 찾아간 ‘쌍둥이식당’(서귀포시 서귀동 274-3/064-762-0478). 앞 바다의 섶섬을 바라보는 그곳에 제주의 미각은 꿈틀대며 살아 있었다. 음식 상 앞에서도 현선생은 당신의 학구시절을 회상하셨고, 우리는 말씀들의 갈피마다 숨어있는 노학자의 학계에 대한 ‘노파심’을 읽을 수 있었다. 세대를 초월한 학자들의 정담은 끝없이 이어지고, 그렇게 서귀포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2007.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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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5. 10. 15:08
눈 내린 산길을 달리며 생각난 기쁨이 아버지


조규익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그 가운데 좀더 중요한 것은 ‘좋은 시작’이다. 물론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서양 속담을 맹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작이 안 좋은데 끝이 좋기란 쉽지 않다.
여행도 마찬가지. 여행의 시작이 좋으려면 치밀한 계획과 풍부한 정보, 그리고 실력 있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첫발부터 길을 제대로, 잘 잡아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란 우리 속담도 여행에서 그 모티프를 잡았음에 틀림없다.
출발점이나 길이 갈라지는 곳을 생각해보자. 출발점에서는 동·서·남·북이 공존한다. 갈림길도 마찬가지. 그래서 처음엔 ‘길을 좀 잘못 잡아들기로서니 무슨 큰 문제이랴?’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들의 차이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벌어지기 시작한다.
유럽의 도로체계 가운데 ‘라운드어바웃round-about’이란 게 있다. 여러 갈래의 갈림길이 필요할 경우 환상(環狀)의 도로를 돌면서 표시된 출구를 찾아 나가도록 설계된 구조. 지름이 작은 것은 4-5m, 크다고 해야 10여m에 불과한 원형의 도로들이다. 출발점인 여기선 모든 방향이 손바닥 안에 있는 셈. 그러나 방향을 잡기에 따라선 ‘지척이 천리’가 된다. 방향을 모를 경우 라운드어바웃을 여러 바퀴 돌기도 한다. 돌면서 올바른 길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 경우 먼 길을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하는 등 고생이 만만치 않다. 만일 좋은 정보와 길잡이만 있었다면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

우리 여행의 시작은 파리. 파리에서도 유명한 ‘기쁨이네 집’(하단의 연락처 참조)이었다. 유럽, 특히 파리에 딱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우리가 기댈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었다. 광활한 유럽 땅을 공략(?)하겠다고 나섰으면서도 길잡이 하나 변변히 없는 셈이었다. 탁상의 정보가 아무리 그득해도 현장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일. 아내가 인터넷 등을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파리의 기쁨이네를 알아냈다. 건축학을 공부하는 기쁨이 아버지가 자동차 여행에 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결정적 요건이었다.
파리는 우리 여행의 첫걸음인 셈. 빠리 공략이 실패할 경우 그 영향은 여행기간 내내 우리를 괴롭힐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파리에 가서 기쁨이네를 찾았다.
기쁨이 아버지의 실력은 과연 듣던 대로였다. 시원시원하고 해박한 실력의 ‘나이스 굿 맨’이었다. 파리의 답사 대상을 일정별로 나눈 것도 그의 제안이었다. 그 뿐인가. 유럽 여행길에서의 주의사항, 독도법(讀圖法), 심지어 숙소 찾는 법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교육을 받았다. 빠리 시가지로부터 돌아와 저녁상을 물리면 그 때부터 시작되는 기쁨이 아버지의 교육. 건축학 전문가답게 각종 건물양식에 대한 설명도 자상했다.
첫판부터 이상한 곳, 예컨대 이번 폭동의 발원지인 생드니 같은 곳으로 들어가 헤맸다거나 심지어 ‘강도까지 당했다’는 일부 한국 여행자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기쁨이네를 선택한 우리가 얼마나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유익한 여행의 첫 단추를 끼었는가를 절감하곤 한다.

***

지금 우리는 폴란드의 눈 내린 산길을 달려 슬로바키아로 넘어간다. 부다페스트를 향해. 설경이 환상적인 산길을 달리며 새삼 기쁨이 아버지를 생각한 이유가 있다. 운전자와 내비게이터navigator의 마음이 ‘절대로’ 맞아야 한다는 것, 운전자는 운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어느 경우라도 내비게이터는 지도를 철저히 연구하여 노정을 꿰고 있어야 하며, 설사 틀렸다고 생각해도 운전자는 내비게이터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 어느 방향으로 달리다가 표지판 둘을 지나도록 가고자 하는 도시명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방향이 잘못된 것이니 차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 유럽에서는 눈이 아무리 많이 와도 도로만은 문제없으니 당황하지 말 것 등등.

***

그가 가르쳐 준 것이 어찌 이 뿐이랴. 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려 했고, 우리 역시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을 귀에 담아두었다. 지금 우리가 눈 내린 산간지방을 지나며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출발점에서 좋은 길잡이를 만난 덕분이다. 새삼 폴란드 국경 주변의 아름다운 설경과 기쁨이 아버지의 어글어글한 표정이 오버랩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2005. 11. 19. 쟈코펜의 산악지대를 지나며


**기쁨이네 연락처
전화번호 33-01-49-56-11-72, 33-06-64-51-66-68(박세혁)

**이 글의 출처는 백규서옥(http://kicho.pe.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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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5. 7. 13:08
 

교수들은 담론 생산의 주체로 거듭 나야 한다


                                                                                             조규익

제1회 숭실 인문학 포럼의 성공을 보면서 대학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 진부한 말이지만,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고 그 핵심에 교수들이 있다.


해당 분야의 체계적인 지식과 창조적인 능력을 지녀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교수들은 1차적으로 전공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교수들이 전공의 협소한 분야에 갇혀 좀 더 넓은 세계나 현실을 보지 못할 때, 그 지식이나 창조력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상아탑 속의 존재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전공분야에 대한 탐구와 함께 세상과의 소통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수들이 고도의 윤리의식과 해박한 전문가적 식견을 통해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그러나 현재의 교수집단은 다원화 된 현실 속에서 왜소한 지식인 군상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초라한 지식상(知識商)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눈초리는 차갑다. 그들로부터 아무런 비전도, 철학도, 노력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 교수집단에 들어가고 나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이나 보여주기 일쑤인 점은 더욱 한심한 노릇이다.


그러나 교수집단도 기회와 동기만 주어진다면, 사회의 정론(正論)을 생산하고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포럼은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최근 기독교에 대한 김용옥씨의 비판적 주장에 많은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반론이나 비판이 없었던 것은 우리 지식사회에 대한 사망선고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기라성 같은 기독교 대학들이 포진하고 있음에도 어느 대학 하나 나서서 그의 문제적 논리에 반박을 가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공포’를 경험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숭실 인문학 포럼을 통해 김용옥 논리의 시시비비를 가려 줌으로써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올바른 판단의 자료를 제공해 준 것은 당사자 김회권 교수를 포함 숭실의 인문학자들이 향후 적극적인 담론 생산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쾌거였다.


이제부터라도 대학교수들은 전공책의 행간에 현미경이나 들이대는 ‘골방의 샌님’ 신세를 청산하고 사회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전공을 살리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며 대학을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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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30. 20:02

선진국에서 확인한 도서관의 힘

조 규 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책을 소중히 여겨왔다. 그러나 책이 넘쳐나는 오늘날엔 사정이 달라졌다. 그 책들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사를 밥먹듯 하는 요즘 생활에서 처분 대상 영순위가 바로 책이다. 가끔 아파트의 쓰레기장에 수북이 쌓이곤 하는 화려한 장정의 책들을 보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에서도 책을 사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이 책을 사지 않아도 탓하는 국민이 없다. 도서관이 무엇 하는 곳이며 왜 중요한지 아는 정치인도 별반 없다. 이른바 출판대국인 이 나라에서 만드는 책들은 학습참고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니 두고두고 읽으며 의미를 반추한다던가 그럴 목적으로 책을 보존한다는 것은 애당초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일이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그럴 만한 문화의식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초강대국 미국의 힘이 책과 도서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나 부러운 그들 대학의 도서관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꺼내지도 말자. 틈날 때마다 동네의 도서관에 나가서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을 신기한 눈초리로 구경하곤 했다. 도서관의 주 이용객은 주부와 노인,초·중등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이라 해도 우리 나라처럼 시험공부나 하러 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책들을 마음껏 읽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부대행사로 여는 각종 과외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부들과 노인들이었다. 구부정한 노인들이 책을 한아름 들고와 반납하고 서가를 돌며 새로운 책을 찾는 모습. 주부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와서 책을 읽거나 대출하는 모습은 선진국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실감할 수 있게 하는 광경이었다. 점심때 만 되면 널찍한 식당을 점령해 수다로 시간을 죽이는 우리네 주부들을 생각하며, 할 일 없이 공원에 나와 먼 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는 우리네 노인들을 생각하며 나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부와 노인들이 꼬마들 손을 잡고 동네도서관에 나와 독서삼매에 빠질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아마도 우리의 모습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룸살롱, 갈빗집, 다방, 노래방 등이 촘촘히 박힌 수렁 같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건져내려면 단 한 순간이라도 내면을 가꿀 여유가 있어야 한다. 도시마다 구색으로 하나씩 세워놓은 듯한 도서관이란 으레 학생들이 찾아가 노닥거리거나 시험 공부하는 독서실쯤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 후진적 현실을 바꿔야 한다.

과격하고 이기적이며 진지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확바꾸려면' 전국민이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도서관을 확충하고 도서관 이용을 생활화해야 한다. 도서관 이용의 생활화나 독서 열풍은 단기간의 캠페인으로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인들이 손자녀들을 이끌고 도서관을 찾아 자신들의 진지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주부들이 장바구니를 든 채 도서관을 찾는 일이 생활화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경(經)을 읽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진지해지고 독서에 빠져들게 될 것이며 아파트 쓰레기장에 멀쩡한 책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학습참고서 아닌, 제대로 된 책들을 내는 출판사들이 살아날 것이고, 우리 나라도 비로소 선진국의 문턱을 넘게 될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는 날이 바로 우리가 한 차원 높아지는 날이다.

( 출처 : 출판저널 286호, 2000, 9,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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