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 2. 12. 19:45

압존법(壓尊法)혼란 시대

 

 

 

                                                                                                 조규익

 

 

 

우리 과의 어느 학생.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예쁜 여학생이다.

그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학교 전체 졸업식이 끝난 뒤 있게 될 학과 졸업식 관련 연락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참 듣다가 나도 모르게 꾸지람을 내뱉고 말았다. 압존법이 심히 부정확했다. 사실 이 학생만 압존법을 모르는 건 아니고, 또 대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다. 일선 관청을 방문할 때도, 집안의 조카나 며느리들과 대화를 할 때도 늘 그놈의 압존법때문에 당황하기 일쑤다. 심지어는 TV 토론을 진행하는 앵커의 말에서도 흐트러진 압존법을 발견하게 된다! 대학에서 평생을 지내온 나는 대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가장 참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압존법의 혼란이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압존법을 모르거나 무시한다. 아무나 무조건 높이는 게 장땡인 줄 안다.

 

발언자 말 속의 주체가 발언자보다는 높지만, 듣는 사람보다는 낮을 때, 말 속의 주체를 높이지 않는 어법이 압존법이다. 전화 속의 그와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학생: 학과 졸업식에 참석하실 수 있으세요?

: 학과 졸업식에 누구누구 참석하나?

학생: 졸업생, 학생회 집행부 임원들 합쳐 40여분이 참석하세요.

: 그 밖엔?

학생: 2학년 학생분들 가운데 시간 나시는 분들도 참석하실 거예요. 그런데 아직 방학 중이시라서 몇 분이나 나오실 수 있으실지 알 수 없어요.

: 혹시 1학년생들은 참석 안하나?

학생: , 1학년 분들은 아직 등록을 안 하신 상태이셔서 참석 못하실 거에요.

: , 너 압존법을 배웠니? 못 배웠니? 네가 나한테 얘기하면서 꼬박꼬박 학생들을 높이면 나는 도대체 뭐니? 누구보다도 국문과 학생이라면 정확한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압존법에 맞는다고 생각하니?

학생

 

그 학생이 무슨 죄이랴? 잘 가르치지 못한 내가 잘못이지. 학창시절 나는 압존법이란 말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 대학생들을 포함하여 젊은 세대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웅변학원에 보내어 사자후를 토하는 방법만 가르쳤고, 데모의 현장에서 격한 어조로 선동하는 방법만 배웠을 뿐, 제대로 된 대화법을 가르치거나 배운 적이 없다. 선생님들도 모르는 압존법을 어찌 학생들이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도대체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압존법을 사용하는가를 알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국립국어원홈페이지에 사례로 게재된 문답은 다음과 같았다. 

 

[질문]

직장 상사를 그보다 높은 윗사람에게 말할 때는 높여 말합니까, 높이지 않습니까?

[답변]

부장에게 과장에 대하여 말할 때 "과장님 외출하셨습니다." 하는 것이 옳은지, "과장님 외출했습니다." 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부장을 화나게 할 수도 있고, 또 과장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사원들이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외출하......" 하고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윗사람에 관해서 말할 때는 듣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를 넣어 말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즉 평사원이 과장을 사장에게 말할 때라도 "사장님, 김 과장님 거래처에 가셨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윗사람에 대하여 말할 때 '--'를 넣어 말하는 것은 회사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다른 회사 사람에게 말할 때도 상대방의 직급에 관계없이 '--'를 넣어 말합니다. 즉 평사원이 자기 회사 과장을 다른 회사 부장에게 말할 때도 "김 과장님 은행에 가셔서 안 계십니다."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윗사람에 대한 경어법에 '--'만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존칭조사 '께서'를 사용해야 하는지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장에게 과장을 말할 때 "과장님께서 외출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할지 "과장님이 외출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그러나 구어체에서 존칭조사 '께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과장님께서'보다는 '과장님이'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장님, 과장님이 외출하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혼란의 근원은 국립국어원에 있었다! 평사원이 과장을 사장에게 말할 때 사장님, 김 과장은 거래처에 갔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 ‘사장님, 김 과장님 거래처에 가셨습니다.’라는 말과 1학년 분들은 아직 등록을 안 하신 상태이셔서 참석 못하실 거에요.’라는 2학년 여학생의 말은 압존법이 엉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압존법을 인정하면서 압존법을 솔선하여 깨고 있는 국립국어원의 판단은 매우 사려 깊지 못하다.

 

영어에는 압존법이 없다. 물론 어조(語調)에서 높이고 낮춤을 분간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말은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우리는 말 속에 많은 장치들을 두고 있지만, 의미와 감정의 전달에서 매우 합리적이다. “사장님, 김 과장은 거래처에 갔습니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대화의 상대인 사장을 높이는 효과, 군더더기 존칭소를 생략함으로써 전달내용의 명료화를 기하는 효과 등이 어느 외국 말보다 우수하지 않은가. 어려서부터 압존법을 제대로만 가르치면 단순명료하면서도 품위 있는 국어생활을 할 수 있는데, 생활언어의 교육을 소홀히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만원 되시겠습니다' 같은 엉뚱한 말, '다른틀린으로 틀리게 말하기 일쑤인 무감각, 범죄자들에게까지 깍듯한 존칭을 일삼는 TV방송 앵커들의 몰상식이 횡행하는 사례들 모두 생활언어 교육의 부재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제라도 교육현장에서 제대로 된 생활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자격 없는 앵커들과 교사들을 재교육시켜야 한다.

 

이건 틀딱의 고집스럽고 시대착오적인 투정이 결코 아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2. 1. 15:41

 

 

 

연명의료 거부를 신청하며

 

 

                                                                                                                   조규익

 

 

작년, 존경하고 따르던 박정신 교수의 빈소에 갔었다. 예를 차린 뒤 이곳엔 교수님의 유체가 안 계세요. 장기 기증을 위해 의료실에 계십니다.”라는 사모님의 말씀을 듣고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교회사를 전공으로 택하였으며, 기독교학과의 교수로 종신한 분이었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육신까지 아직 살아 있는 생명들에게 나누어주고 떠나는 그 분의 모습이 숭고했다. 빈소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며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삶이란 무엇이며 육신이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삶과 죽음의 교체 과정에서 육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의미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까. 아니면 종국에 한갓 먼지나 쓰레기로 사라질 허망한 물질에 불과한 것일까. 많은 욕망을 만들어내고 투쟁을 추동하는 악의 실체일까. 갖가지 상념들이 내 마음에 난무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의 영정을 마주하고 한참 서 있었다. 영정 속엔 쭈그러진 육신 아닌 해맑은 웃음과 정신이 어려 있었다. 두어 해 전 병원에서 신음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눈을 감으시던 순간은 슬프도록 짧았고, 그 다음의 모습은 평화롭고 잔잔하셨다. 육신의 괴로움을 벗어난 편안함이었다. ‘격정에서 고요로의 넘어감, 바로 그것이 죽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 나는 왜 한사코 죽음을 거부하고 육신만 고집하는 것일까. 육신은 고통이고 구속인데, 왜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일까.

 

세상의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육신이 절대적이다. 그 세상의 의미란 무엇인가.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세상에는 쓰임새가 있다. 잘난 사람만 있는 세상, 못난 사람만 있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플라톤은 철인(哲人)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이상국가라 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이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바보들만 통치하는 나라도 있을 수 없다. 정치인들 중 정상적인 인간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은, 정치인들 모두가 바보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공존과 조화가 우주의 원리이고, 그 원리가 구현되는 곳이 인간 세상이다. 육신을 지닌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공간이 세상이고, 그 세상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 육신의 아픔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기한이 다한 기계가 고장 나고 망가지듯 인간의 육신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죽어가면서 쓸 만한 부속품이 있다면, 젊은 영혼에게 물려주고 가는 것도 스스로의 정신적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 아니겠는가.

 

옛날 어떤 현인은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집에 천만금이 있어  家有千萬貫

평생 남에게 바라는 게 없었도다 一世不求人

죽기 전엔 未歸三尺土

일생 몸 보존하기 어렵고 難保一生身

죽은 후엔 旣歸三尺土

백년 무덤 보존 어렵다네 難保百年墳

 

그렇다. 인간이 세상에서 말짱한 제 정신으로살아갈 수 있는 시한이 그 몇 년이랴? ‘삼척토(三尺土/무덤)’로 돌아가기 전 입에 풀칠하며 자존심 유지하기 쉽지 않고, 죽은 뒤 100년 보존되는 무덤이 흔치 않다. ‘인생 백년은 예나 지금이나 꿈일 뿐이고, 그나마 반백년이라도 맑은 정신 속에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존재가 바로 가련한 인생인 것이다.

 

***

 

오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장기기증신청을 등록하기 위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들렀다. 그런데, ‘연명의료거부신청서는 적어냈으나 장기기증신청은 관할이 달라서 못하고 말았다. 평소 연명의료 거부와 장기기증은 함께 따르는 문제라고 생각해온 내겐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장기 기증의 의향을 가진 경우가 꽤 많을 것이다. 연명의료를 거부한다는 건 곧 숨을 거둔다는 뜻인데, 관할이 다를 경우 적시에 장기를 적출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식할 여유시간이 있겠는가. 연명의료거부와 장기기증신청을 한 기관에서 신속하게 처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 문제 역시 기관 간의 이해가 달라서 생겼을 것이다이 자리에서까지 더 이상 무책임하고 미련한 정치인들이나 정부를 힘들여 욕하고 싶지 않다. 더 큰 욕 먹지 않으려면, 빨리 정신 좀 차리고 두 사안을 하나로 연계시켜 함께 처리해 주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1. 27. 21:23

 

 

     좋은 영화 <말모이>

의무감으로 찾았다가 감동 받고 돌아오다!

                                                                                                                                                        

                                                                                                                                                               조규익

 

 

얼마 전부터 말모이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말모이라는 영화가 등장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모이? ‘국어사전이란 뜻인데? 한일합방 전후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우리말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사들이 쓰기 시작한 말인데...

 

그렇다. ‘조선말 큰 사전편찬까지의 우여곡절을 사건의 축으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겪은 수난(조선어학회 사건)을 그려낸 영화였다. 사실 처음엔 볼까 말까 고민했다. 수없이 읽고 들어, 익히 안다고 자부하던 사건이었다. 2019년 들어오며 겹치기로 찾아온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비참한 역사를 반추하며 우울증을 심화시킬 이유는 더더욱 없었던 것. 모른 척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나를 움직인 것은 중국 조선족 대학원생의 말이었다.

 

교수님, <말모이>란 영화 보셨어요? 최근에 본 영화 중 최고였어요. 할아버지 나라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그런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첨 알았어요. 감동이었어요. 꼭 보세요!”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중국에서 온 너도 그런 말을 하는데. 명색이 한국어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한다는 내가 너만도 못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나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지원할 때만 해도 우리말과 글을 가르쳐 훌륭한 한국인들을 기르겠다.’는 것이 내 꿈이었다. 애국의 순정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세월의 격랑 속에 가슴 속의 정열은 모두 식어버려, 그냥 국어국문학 선생으로습관화된 삶을 지탱해오고 있었구나!

 

따분한 역사 이야기와 상투적인 메시지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일자무식 소매치기 김판수(유해진)와 조선어학회 핵심요원 류정환(윤계상)의 조우, 판수의 조선어학회 합류, 자녀들(덕진과 순희)을 통한 판수 가족의 생활고, 경성제일중 이사장 류완택(송영창)과 아들 류정환의 갈등, 치밀하고 집요한 일본 경찰과 그들을 통해 고발하는 일제의 야욕 및 만행, 막바지에 무산되는 공청회와 말모이의 원고를 두고 일본 경찰과 벌이는 추격전, 김판수의 장렬한 죽음, 해방 후 천행으로 되찾은 원고, 그 원고로 만들어진 <<조선말 큰 사전>>...그와 함께 사건들의 치밀한 배치와 주도면밀한 서사전략이 돋보이는 영화예술의 격을 맛보게 된 건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비율이나 배합이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겐 중요했겠지만, 이 영화의 경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말과 글이 민족의 정신이자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축, ‘어느 순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의(大義)에 동참하여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축, ‘일본이 우리를 정신까지 집어먹기 위해 얼마나 잔혹하게 굴었는가를 보여주는 제3의 축이 동아줄 꼬이듯 엮여 나간 것이 이 영화의 서사였다. 사실 한 사람의 열 발자국보다 열 사람의 한 발자국이 더 큰 것이고 그것들이 모여 비로소 조선의 독립을 이룬다는 말이 감동적이긴 하나 예술성을 흠집 낼 상투적 요소로 저평가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관객들이 그 말을 들으며 전율했다면, 이 영화의 흠을 더 이상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시경 선생

 

이극로 선생

 

조선어학회 사건에 고초를 겪은 인물들

 

조선말 큰 사전 원고

 

조선말 큰 사전 원고

 

 

 

 

또 하나. 일본이 동해상에서 초계기 장난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 영화의 타이밍이 절묘하다. 일본인들이 이 영화를 볼 이유도 없고, 본다 한들 자신들의 야만적 잔인성을 인정할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식민지의 문자와 글을 뿌리 뽑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것을 강압적으로 심으려는 시도를 인류사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에서나 약간 찾아 볼 수 있을까. 일상생활에서까지 자신들의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한 만행의 주체로 일본 같은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

 

시간과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영화가 돌아가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영화 속의 저들은 대체 왜 말도 안 되는탄압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단 말인가. 잠시 잊고 있던 역사적 진실이 가슴 속에 감동으로 되살아났다. 예술적 팩션(faction)으로 감동을 선사해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2. 28. 11:33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

 

 

 

그 옛날의 우물터

 

현대식 관정

 

 

 

 

 

                                                                                                                                    조규익

 

 

노후 전원생활의 꿈을 심고 있는 에코 팜에 얼마 전 우물을 뚫었다. 둥글거나 네모난 형태의 전통 우물을 판 것이 아니라, 드릴(drill)로 뚫고 내려가 지하수맥을 연결하여 물을 길어 올리는 형태의 관정(管井)이니 뚫었다는 말이 맞다.

 

내 어린 시절엔 곡괭이와 삽으로 물 나올 때까지 한 뼘씩 파 들어가는 것이 샘 파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기껏 여남은 길 파내려 가다가 물이 나오지 않으면 포기하고 메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물 뚫어 대번에 물이 나오거나 맑고 맛있는 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 집의 복이었다. 십 여 군데를 파도 물이 나오지 않거나, 나온다 해도 맑지 않거나 맛이 안 좋은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었다.

 

삽이나 곡괭이만으로 샘을 파는 일이니, 쉽지 않은 건 당연했다. 파 내려가는 땅 속에 암반이 누워있는 경우라면 얼른 포기해야 하고, 자갈이 많은 땅도 쉽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이보다 더 답답한 일은 얼마간 파 내려가도 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였다. 수맥이 어디에나 뻗어 있는 건 아니었다. 간혹 수맥이 얕은 경우도 있겠지만,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웬만큼 파다가 물이 안 나온다 싶으면 옆으로 옮겨 다시 파기 일쑤였다. 물이 안 나와도 진득하게 파 내려가다 보면 대부분 물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성질 급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파게 되고, 그러다가 끝내 우물 파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사실 수맥 잡는 기술이 일반화되고 있는 요즘에도 샘 파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물 팔 땐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일까.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야 성공한다는 뜻인데, 지금도 과연 이 말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사실 나는 한 우물세대다. 어려서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말이 한 우물속담이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것들은 이 말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일에도 이 말은 지켜야 할 금언이었다. 우리 시대까지 남자도 여자도 한 번 결혼했으면 죽을 때까지 그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법이었다. ‘결혼한 뒤 맘에 안 맞으면, 헤어지고 다른 여자(혹은 남자)를 취하라, 전제조건 부대의 가언명법(假言命法)으로 바뀐 것은 겨우 21세기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니 맘에 맞지 않아도 맞춰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불문법(不文法)이었던 것이다.

 

남녀문제만 그런 게 아니었다. 공부도, 직장도 그랬다. 한 번 대학에 들어가 전공으로 택하면 졸업 후 밥 먹고 사는 일도 그 전공 혹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직장도 평생직장이라야 했다. 멀쩡한 직장을 중도에 박차고 나가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고 보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들(일부라고 생각되긴 하지만)에는 해괴한 규정이 있었다. 신임교수를 채용할 때 전공적합도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학부-석사-박사가 일치해야 만점인 30점을 주는 규정이었다. 나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학부에서 영문학, 박사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지원자도 더러 있었고, 학부는 이공계, 박사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지원자도 간혹 있었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가점을 주고 싶었으나, 선배들은 엄격하고 가차 없었다. ‘학문도 한 우물을 파야한다는 통념의 힘이었을 것이다.

 

학부에 들어가 외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나 이공계를 전공한 사람이 석박사에서 국문학으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 아닌가. 사실 당시에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에게는 국문학으로 바꾸어도 승산이 있다’, ‘바꾸는 게 절대로 유리하다’, ‘바꾸고 싶다는 등의 판단과 절박한 욕망이 있었거나 바꾸어도 괜찮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기에 바꾸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발발 떨며 올라와 국문학을 택한 내 처지에 전공을 바꾸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시골에서 옛날 하던 식으로한 우물을 파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융합이 대세이니, 대학에서도 옛날의 관행이나 규정은 더 이상 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박을 국문학으로 하신석학 조동일 선생을 이채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아직도 말끔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예의 한 우물인습이 갖는 힘이리라.

 

오늘 작은 아이가 직장을 바꾸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연봉으로도 안정성으로도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최 상위 대기업의 사원인 그였다! 공교롭게도 전직(轉職)을 결정하는 날,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까지 한 터였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시공사(施工社)의 관리직으로 평생을 보내기보다는 좀 더 역동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투자금융사의 경력직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그의 선언에 격려말고는 달리 대꾸할 말이 궁했다. 회사를 위해 젊음을 바쳐도 나이가 들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대기업의 냉혹함을 미리 깨달았던 것일까. 아직 30대 초반의 팽팽한 그의 입장에서 새로운 성공의 가능성을 포착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로선 가슴 떨리는신선함과 두려움의 단안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시대가 바뀌었음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니, 분명 내 의식의 밑바닥에는 한 직장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착각이 아직도 똬리를 틀고 있음이 분명하렷다?

 

***

 

한 우물을 파면서도 용케 패자로 전락하지 않고 살아온 내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본다. 이제 한 우물만 파다가는 목도 축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인식과 의식의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그렇다면 내가 파온 한 우물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문득 그 옛날 시골의 나간 집 우물을 떠올려 본다. 우물은 쓰지 않으면 반드시 퇴락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괜히 빈 집의 우물에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고 떠난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날아들고, 큰물에 자갈들이 밀려들기도 한다. 낮으로 밤으로 우물 밑바닥에는 흙이 솔솔 들어찬다. 그러다가 한 십년 지나면 언제 그곳이 우물이었던가 싶게 평평해진다. 우물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삶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열심히, 죽을 때까지 새롭게 파거나 보수하지 않으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게 우리네 우물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곡괭이를 메고 그간 매달려 온 '한 우물'을 더 파기 위해 집을 나선다.

 

 

 

드릴로 관정 뚫는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2. 26. 12:00

인생 후르츠를 에코팜에서...

 

 

                                                                                                          조규익 

 

 

 

 

 

 

아내의 손에 이끌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본 다큐영화 인생 후르츠를 보러 가는 길.

 

일본영화, 그것도 다큐라는 점이 매력을 반감시켰으나, 전원에서 삶을 마감해가는 노부부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에코팜 주인인 내 흥미를 끌었다.

잡답(雜沓)의 도회에서 적막강산 에코팜으로, 에코팜에서 다시 알 수 없는 저세상으로 입사(入社/initiation)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사실 적절한 참고서가 필요하던 차였다.

 

 

 

 

 

원제로 보이는 ‘Life is Fruity'.

인생은 감미로워라혹은 '인생 결실' 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리라.

진세이 흐루--’ 라고 느릿느릿 나직이 깔리는 일본인 여성 내레이터(키키 키린)의 음성도 노인들의 호흡에 맞춘 것일까. Slow Life를 손에 잡을 듯이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아이치현(愛知県) 가스아이시(春日井市)의 고조지(高蔵寺) 뉴타운. 45,000의 인구가 모여사는 이 도시의 변두리에 그들의 집은 그림인  듯 온갖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 숲에 70여 종의 채소들, 50여종의 과수들이 모여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슈이치가  존경하던 선배 건축가 안토닌 레이몬드의 집을 본떠 지은, 40년 된 작은 집이다.

 

1950년 도쿄대학 요트부원이었던 슈이치와의 만남, 1955년의 결혼 등으로 시작되는 두 사람의 스토리는 1945년 패전, 1960년 나고야 교외의 뉴타운 설계, 1970년 고조지 뉴타운 집합주택 입주 등으로 이어지면서 약간의 서사성이 가미된다. 그러나 최근까지 이어지던 그들의 서정적 삶은 1975년 뉴타운 안의 300평 토지를 구입하면서부터다. 숲을 남기고 바람 길을 만드는 꿈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던 슈이치의 마스터 플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박한 꿈이 실용주의에 밀려 상자를 모아놓은 것 같은 신도시의 모습으로 바뀌고 마는 현실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슈이치는 고조지의 뉴타운에 50년째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슈이치가 90세 되던 해 사가현 이마리의 정신과 병원에서 사람이 찾아온다. 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고자 슈이치에게 조언을 구한 것. 사례금과 설계료 등을 일체 받지 않은 그는 멋진 설계도를 건넨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꾸준히,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라는 충고와 함께. 생전에 그 건물을 보고 싶어했지만, 결국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8개월 되던 시점부터 이마리에는 슈이치의 설계대로 건축이 시작되었고, 완공 후 그 시설을 히데코가 방문하게 되었다. 가슴에는 슈이치의 사진을 안고...

 

90세의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87세의 이쁘고착한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 ‘둘이 합쳐 177이란 멘트가 자주 들려왔다. 177살을 살면 신선이 될 만한 나이인데, 그들은 과연 신선일까. 신선이 별 것이던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면 신선이 된다. 애면글면 삶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신선이다! 불로장수(不老長壽)의 해탈 경에 든 두 노인이 신선처럼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느릿느릿 살아가고 있는 삶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한 폭의 수채화나 감미로운 서정시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가 떨어진다

이파리가 떨어지면 흙이 비옥해진다

흙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맺는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내레이터는 간헐적으로 시 구절같은 이 말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뭔가 허전했다. 생각해보니 생략의 미학이 구사되고 있었음을 영화가 끝난 뒤에야 깨달았다. 장난삼아 다음의 말을 덧붙여 본다.

 

열매가 떨어지면 싹이 튼다

싹이 자라면 나무가 된다

나무에 이파리가 달리면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가 떨어진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 생략된 부분을 채워 넣으니 윤회(輪廻)’의 한 고리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함께 죽은 뒤 육신을 태워 남태평양에 뿌렸으면 좋겠다하얗게 웃는 히데코 할머니의 얼굴이 빛난다.

육신의 재가 태평양에 뿌려진 뒤 다시 무슨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노부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을 감싸고 돌아가는 자연의 모습만 되뇔 뿐이었다.

그 이상의 일은 자신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초탈(超脫)의 경지랄까.

 

두 노인의 삶에서 복잡다단한 것들을 모두 약분하면 남는 건 성실과 무욕두 가지였다.

일생을 건축가로 지내온 할아버지 슈이치는 자연과 어우러진 주거공간을 성실히 만들고자 했다.

자신의 철학과 미학을 듬뿍 담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는, 일이 본 궤도에 오르면 슬쩍 빠지곤 했다.

열매를 탐하지 않겠노라는 무욕의 자세이리라.

등이 굽은 히데코 할머니는 일생 텃밭을 가꾸고 할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만들며 살아왔다.

텃밭의 딸기를 수확하여 굽는 케이크도 슈이치를 위한 것이었다.

할머니가 만든 음식, 할머니가 내놓는 아이디어에 언제나 좋아!’로 대응하는 할아버지 슈이치.

에덴동산에 내려 보낸 천상의 배필이다!

 

에코팜의 주인인 나는 종말에 인생 후르츠!’를 외칠 수 있을까.

정원에 가득한 모과나무, 감나무, 도토리나무들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삶의 이치를 깨닫고

성실과 무욕 속에 자적할 수 있을까.

잡초를 뽑고 나서 잠들었다가 잠든 모습 그대로 저세상에 입사(initiation)한 슈이치처럼 윤회의 한 도막을 추하지 않게마감할 수 있을까.

 

***삼가 슈이치 할아버지의 명복과 히데코 할머니의 행복을 빕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12. 16. 01:37

국가부도의 아수라장을 뒤돌아보며

 

 

                                                                                                         조규익

 

 

                         

 

 

 

음울하고 처참했던 1997년의 겨울.

 

날만 새면 굴지의 기업들이 쓰러졌다는 소식과 일가족 자살 같은 끔찍한 뉴스들이 귓전을 때렸다. 이미 재계 14위 한보는 무너졌고, 진로도 재계 4위인 기아도 무너졌으며, 2위인 대우도 막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보다 규모가 작은 무수한 기업들은 물어 무엇하랴! 가장의 실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족들이 한파에 내몰리는 등 나라 전체가 상갓집 분위기였다. 자살률도 OECD 국가들 중 최고로 치솟았다. 곳곳에 곡성이 울렸고,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자기 한 몸 추스르기에도 버거운 시련의 시절이 계속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층의 리더십은 간 데 없고, 그 많던 사회의 지도 그룹들도 종적을 감추었다. 불쌍한 국민들만 각자도생의 벌판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19981월 미국(UCLA)으로 첫 연구 년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떠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1997년 12월까지 확실한 것은 4인 가족 비행기 표를 사놓은 일 뿐이었다. 가족들에게 차마 말은 못했지만,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혼자서 속을 끓이고 있었다. 고맙게도 19972LG연암재단 해외연구교수프로그램에 선발되었고, 98년 출국을 위해 착착 준비를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연암재단 지원금 25,000불은 큰돈이었다. 4인 왕복 비행기 표와 건강보험료까지 계산하면 3만 불이 훌쩍 넘는 거금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0월 중 연암재단으로부터 선금 12,500불에 해당하는 원화가 입금되어야 했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매일 아침 뉴스에서는 환율 고시가 나왔다. 연초 800원대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서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재단의 오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음성 역시 가라 앉아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환율을 보고 있는데, 환율이 조금이라도 안정되면 송금해주겠노라고 했다. 거기에 대고 독촉할 배짱은 없었다. 평소 LG는 무너질 수 없는 회사라고 믿어왔지만, 대우가 흔들리는 마당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11월이 되면서 1,600~1,700원을 오르내리던 환율은 12월이 되자 1,800원대를 찍기 시작했다. , 나라가 드디어 망하는구나! 123일 깡드쉬 IMF 총재와 임창렬 총리 사이에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되면서, 대한민국은 IMF 치하로 들어갔고, 환율도 1,830~1,850원대를 오르내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재단에서 1,830원대에 12,500불에 해당하는 원화를 송금해주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인천공항에 나갔으나, 개미들처럼 커다란 이민 팩 서너 개를 밀고 일가족이 나타난 건 우리뿐이었다. LAX에 픽업 나온 배광복 선생 부부는 우리가 미국행을 포기한 줄 알았다고 했다. 당시 미국의 대학으로 오는 가족단위 한국인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기 때문이었다만약 LG 연암재단의 배려가 없었다면, 우리도 당연히 미국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 체류 13개월 동안 늘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인터넷으로 전해지는 고국의 소식들은 언제나 끔찍했다.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모르고 방만하게 지내온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반성도 있었지만, 순진한 장삼이사들이야 무슨 수로 세상의 변화를 알아 미리 대처하겠는가.

 

IMF 통치를 받기 시작한 1998년으로부터 만 20년이 지나고 있다.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치욕적인 IMF의 기억을 지금의 상황에 대입하면 상당 부분 들어맞는다. 우리는 지금 그 때와 큰 차이 없는 상황으로 내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엊그제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기본은 튼튼하다고 장담했다. 그 말이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fundamental)은 튼튼하다고 호언하던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말과 어찌 그리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가. 소상공인들이 퍽퍽 나가떨어지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못 잡으며, 대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는 지금의 상황이 어째서 걱정 없는 상태란 말인가. 과연 지금의 대통령은 무슨 신통한 방책이라도 갖고 있는가. 사악한 정치인들의 인기놀음에 멍드는 건 서민들뿐이니, 과연 저들의 말을 믿어도 될 것인가.

 

***

 

오늘 국가부도의 날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것은 내 가슴의 트라우마를 지우고 싶어서였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왜 내 작은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는지 답답할 때가 많다.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나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이젠 좀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유사한 상황이 닥친다면, 당당하고 똑똑하게 사태의 진실을 인식하며 용감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속의 김혜수처럼...

 

어쨌든 이 영화, 참 좋다.

 

<2018. 12. 15.>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