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 6. 18. 12:53

내 공부를 어떻게 '땡처리'할 것인가

 

                                             

                                                                                조규익

 

 

연구실에 앉아 자료 해독 · 해석으로 부심(腐心)하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갓 20이나 되었을까. 앳된 여성의 목소리였다.

 

“혹시 ‘부녀자취업알선센터’인가요?”

 

약간 긴장한 탓일까. 가느다란 목소리는 더욱 기어들어가듯 가늘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전화 잘못 거셨어요!”라고 건조하게 응답한 뒤 끊었다.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는데, 문득 세 가지 의문들이 내 작업을 방해했다.

 

“전화를 잘 못 건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왜 ‘부녀자취업알선센터’에 전화를 걸었을까?”

“그런데 그녀의 음성은 어쩌면 그렇게 내 귀에 익숙할까?”

 

세 물음들이 오후 내내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내가 언제부터 잘못 걸려온 전화에 이렇게 민감하게 되었지?’ 라고 반문하며, 마음속으로는 부질없을지도 모르는 분석 작업을 계속했다.

오후 늦어서야 아래와 같은 추론하나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화기 자판을 잘못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하필 내 전화번호였을까. 어쩌면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내 번호가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녀의 음성은 어쩌면 그렇게도 내 귀에 익숙할까. 흡사 학부 3학년이나 4학년 때 내가 지도교수로 있던 어떤 여학생의 음성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갓 졸업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부녀자취업알선센터’에 연락하고자 했다면, 지금까지 직장을 얻지 못한 상태란 말인가. 옷도 사야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커피도 마셔야 하며, 화장품도 사야 할 텐데. 때마다 부모님께 손을 내밀기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돌아다니다 다니다 못해 이젠 (실제로 있는 기관인지는 모르나) ‘부녀자취업알선센터’의 문까지 두드린 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웠다. 호주머니에 돈이 없던 내 청춘시절이 떠오르면서 눈물도 찔끔 나오려 했다. 그래도 그 땐 ‘적빈(赤貧)’이었으나, ‘무일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길바닥에 나서는 순간부터 호주머니의 돈이 나가는 시대 아닌가. 이 시대에 ‘항산(恒産/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이 없다면, 아니 '능력은 있으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 발짝인들 운신(運身)할 수 있단 말인가.

 

학기 초 어느 날. 이메일에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떴다. 열어보니 신입생이었다. 자퇴를 하려는 면담 신청이었다. 다음 날 오후 그 여학생은 연구실로 나를 찾아왔다. 사유를 물었다.

 

「나: 왜 자퇴하려고?

학생: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는 게 제 꿈인데요. 한두 달 국문과 공부를 해보니, 그것과 거리가 멀어서요. 더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어려운 과목들뿐인데, 그런 걸 하다 보면 제 꿈과 더 멀어질 것 같아서 지금 단계에서 그만 두려고요.

나: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려고 해도, 대학 시절 폭 넓은 공부를 해둬야 ‘더 멀리 더 높이’ 날 수 있지 않겠니? 카피 라이팅 기법만 배울 목적이라면, 굳이 대학 공부를 할 필요 없겠지? 기술만 배우려면, 학원이나 개인 교습을 받으면 몇 개월 만에도 가능하겠지. 부모님들께 말씀은 드려 보았니?

학생: 네. 부모님도 제 말씀에 동의하셨어요. 취업을 할 수 없는 공부라면 지금 당장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셔요.

나: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르지만, 너와 네 부모님께서 생각이 같다니, 내 생각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겠네.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하건 좀 폭 넓고 진중하며 끈기 있게 최선을 다해 주렴. 그리고 잠시라도 우리가 ‘국문인’으로 맺었던 인연을 잊지는 말아다오.」

 

1학년 초반에 자퇴하려는 학생은 처음 만나는 터여서, 내심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무거워지려는 마음을 누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대는 바뀌고 톡톡 튀는 감성의 ‘새 세대’가 부모가 되고 사회의 중견그룹이 되어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새삼 책상 위에 무질서하게 쌓인 고전 텍스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을 읽고 분석하여 글로 써내고 말로 풀어내는 것이 젊은 영혼들의 삶에 무슨 도움을 준단 말인가. 이들이 이런 어려운 말이나 들으려고 답답한 강의실에 고문 받듯 앉아서 내 말을 경청하고 있단 말인가. 이들에게 한 그릇의 밥도 마련해주지 못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참, 국문과 고전분야의 ‘교수질’이 어렵다는 걸 느끼기는 난생 처음이다. 첫 번 째 경우도 결국 그렇게 귀착되고, 두 번 째 학생은 더욱 그렇다. 국문학을 배워서, 아니 고전문학을 배워서 ‘밥 문제’가 해결되는가? 시대는 이제 이것만을 집요하게 묻는다.

 

내 공부를 과연 어떻게 '땡처리'할 것인가.ㅠㅠ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5. 22. 11:41

 

 

학술답사 혹은 보물찾기

 

                                                                                                                           조규익

 

내 어린 시절 소풍날의 가장 가슴 뛰는 행사는 ‘보물찾기’였다. 파릇파릇 돋아난 나물더미 속이나, 하찮아 보이는 돌덩이 밑에 감쪽같이 숨겨진 쪽지를 찾아내곤 환호성을 지르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쪽지 하나 찾아 봐야 연필 두어 자루, 공책 두어 권 주어지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 시절엔 보물을 찾아낸 아이들이 왜 그리도 부럽고 샘이 나던지. 쪽지 한 장 찾지 못한 채 소풍이 끝날 무렵이면, 늘 아쉽고 허전했다. 그 뒤부터 이날까지 내 삶은 대부분 ‘실패한 보물찾기’의 연속이다.

 

철이 들면서 국문학에 뜻을 두었고, 학부와 대학원 시절의 답사에서 얻는 설화나 민요, 귀한 자료들이 보물임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촌로들로부터 약간 이색적인 설화 한 편이라도 얻어 듣는 날엔 가슴이 뛰었다. 비슷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천하에 없는 이본(異本)이라도 얻은 듯 흡족함을 느꼈으니, 그게 보물 아니고 무엇이랴. 그 뿐인가. 가끔 ‘고서답사(古書踏査)’를 떠났다가 희귀본 소설 자료나 노래 자료라도 얻을라치면, 가슴이 설레어 여러 날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니 그것들은 분명 보물이었다.

 

나이를 먹고 삶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현장에서 만나는 보물들은 보다 깊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채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14년 전 ‘기독교 확산과 중세문명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6개월 간 유럽의 20개국 120개 도시들을 자동차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모여 있으나 동유럽을 제외하곤 국경이 따로 없는 그 지역을 돌며, EU의 현존재가 갖는 역사적 필연성이 기독교로부터 나왔음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전공 공부는 잠시 뒤로 미룬 채, 곰브리치의 <<세계사 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유럽 중심의 세계사 저술들을 샅샅이 뒤져 읽으며 ‘보물찾기’의 도구로 갖춘 것은 물론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유럽에서 만난 보물들은 내 협소한 세계인식의 폭을 거의 무한대로 넓혀 주었다.

 

몇 년 전 미국의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 6개월 정도 머무를 때였다. 미국에 인디언들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오클라호마 주에 39개의 인디언 부족과 그들의 보호구역이 있다는 사실은 그곳에 가서야 알게 되었고, 틈 날 때마다 그들을 찾아 다녔다. ‘인디언 종족・역사・문화 답사’에 나섰던 것이다. 드넓은 대초원과 계곡 속에 숨은 듯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면서 문득 옛날의 ‘보물찾기’가 떠올랐다. 현장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을 통해 미국 역사의 그늘을 발견했고, 세상살이의 한 단면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답사여행이 대학시절 학술답사체험에서 길러진 내 습벽(習癖)의 발현이었음은 물론이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 자체야말로 답사로부터 체득한 결과라 할 수 있으리라.

 

강의실이나 연구실은 삶의 현장을 최소화시킨 공간이고, 교과서나 참고서는 삶의 현장에 널린 자료들을 모아 가공하거나 조리한 음식 같은 것이다.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잘 만들어진 텍스트를 보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부에도 가끔은 야성(野性)이 필요하다. 엄마 젖을 뗀 뒤 얼마동안 이유식을 먹다가 이빨이 솟기 시작하면서 ‘날 것 그대로’를 씹어 먹고 싶어 하는 아가들을 보라. 학생들이 강의실 아닌 현장에서 ‘거칠지만 날 것 그대로의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성장의 원리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전통 마을들을 찾아, 그 정신적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은 잦을수록 좋다. 강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준화된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찾아 현장에 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남들과 달리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큰 공부다.

 

***

 

우리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숨 쉬는 ‘카오스의 시공’ 공주와 부여를 찾았다. 학생들로 하여금 그곳에 사는 백제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들의 언어와 문학, 역사를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들의 어떤 것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었는지 그들 스스로 느껴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부여에 도착하여 궁남지에서 서동(薯童)을 만나 건강한 생명력을,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소름 끼치는 망국의 한을 확인했다. 그 뿐 아니다. 얼마 전까지 민중의 저항의식을 거침없이 시로 뱉어내던 신동엽(1930~1969)을 만났다. 지금도 그는 고즈넉한 부여의 한 모퉁이에 앉아 ‘껍데기는 가라!’고 쉼 없이 외치는 중이었다. 옛날의 껍데기를 밀어내고 등장한 새로운 껍데기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을 젊은이들이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보물이었다. 어둘 녘 동학군의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우금치’를 넘어 공주의 숙소에 도착했다. ‘웅진 백제→사비 백제’를 역으로 밟아온 것이다. 계룡산 산록에 자리 잡은 숙소, 그 앞엔 작은 호수가 거울처럼 앉아 흘러가는 시간과 역사를 정화시키는 중이었다. 신동엽의 ‘금강’이 거세게 흐르는 민중의 삶을 그려내려 했다면, 이곳 호수는 조용조용 ‘껍데기들’을 갈앉히는 중이었다.

 

시간을 거스르느라 피곤한 몸을 맑은 공기와 바람으로 정화시킨 다음 날, 공주대학교를 찾았다. 잘 만들어진 국제회의장에서 국어교육과 송재일 교수로부터 ‘공주-부여의 문학과 역사’ 특강을 들었다. 조근조근 짚어가며 공주와 부여의 역사를 깔고 그 위에 문학으로 수를 놓는 송 교수의 말씀. 소문대로 명 강의였다. 강의 전 학생들에게 송 교수를 소개하며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19학번 새내기들 사이에서 45년 전 74학번으로 초라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그레한 19학번 새내기들과 당시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금강 물처럼 흘러간’ 45년 세월이 허무해서였을까. 갑자기 목이 메었던 것이다. 45년 전의 그곳은 논밭뿐이었고, 지금 이 학교의 한쪽 구석에 간신히 남아있는 돌 건물 한 채와 체육관, 연구동(지금은 박물관)이 전부였다. 지금은 종합대학이지만, 당시는 단설(單設) ‘공주사범대학’이었다. 읍내의 자취방에서 진창길을 걸어와 강의실에 자리를 잡으면, 한숨이 새어나오곤 했다. 점심 걱정, 강의 뒤 금강 백사장에서의 막걸리 파티 걱정, 과제 걱정, 저녁 걱정 등등. 지금 같았으면 목가적이었을 당시, 작은 몸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그런 추억의 찌꺼기들이 한 번에 몰려들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으리라.

 

특강 후 그곳 교수들(송재일, 권대광, 송홍규, 정형근)과 학생들이 함께 단체 촬영을 했다. 두 학교 학생・교수의 멋진 만남의 자리였고, 공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들이 베풀어준 감동적인 호의의 현장이었다. 그곳 교수들과의 식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분과별 답사의 현장으로 흩어졌다. 고전・민속분과는 곰나루 전설의 현장과 박동진판소리전수관으로, 현대분과는 나태주문학관 및 공산성으로, 언어학분과는 방언채록을 위해 정안면 월산2리 마을회관으로... 저녁 무렵, 숙소에 돌아온 학생들은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운 뒤에 경험한 흡족함이 그들의 표정에 역연했다. 그 뿐 아니었다. 이구동성으로 가는 곳마다 만난 공주 사람들의 ‘너그럽고 고운 심성’에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 공주라는 지역에 정이 간다고 했다. 사실 그건 덤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선물이었다. 가슴 속에 보이지 않는 선물을 듬뿍 안고 숙소로 돌아온 학생들은 모닥불 타오르는 광장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는 풍물소리로 피로를 풀었다. 아마도 그들은 꿈속에서 낮 동안 마을회관에서 만났던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을 다시 만났을 것이다. 미진했던 대화를 다시 이어가며 그 분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다시 새겼을 것이다. 지워지지 않을 추억 속의 영상으로...

 

***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임을 갈파한 카아(E.H.Carr)처럼 부여와 공주에서 백제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분주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학술답사를 통해 현재에 숨어있는 과거를 찾아내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복원하며, 미래를 창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시 강조하건대, 인생은 ‘보물찾기’의 역정이다. 그 보물들은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 ‘과거’라는 시간의 탈을 쓴 채 숨어있음을 그들은 깨달았으리라. 그래서 과거는 버려진 폐기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는 바탕 아니겠는가. 숭실동산에서 출발한 버스는 그들을 과거의 시공으로 이입시킨 타임머신이고, 그들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합하는 ‘시간여행’을 잘 마친 뒤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들’인 것이다.

 

멋진 젊음들에게 내 사랑을 보내며...

 

2019. 5. 22.

 

백규서옥에서 45년 전의 공주사범대학 새내기 백규 씀

 

 

궁남지로 향하는 숭실 국문인들

 

궁남지와 포룡정

 

포룡정의 현액(<서동요>)

 

백제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 학생들

 

고란사 극락보전 앞에서 대학원생들과 교수들

 

고란사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고란사에서(왼쪽부터 임채훈 교수, 백규, 이경재 교수)

 

신동엽 시인 생가

 

신동엽 시인

 

신동엽 시인 생가(시인의 방 앞 현판의 시-부인 인병선 작)

 

신동엽 시인의 방

 

신동엽 시인의 육필

 

신동엽 시인 앞에서

 

숙소 사계절펜션의 뜰(커플상)

 

숙소 앞 호수

 

숙소 앞 호수

 

공주대학교 송재일 교수 특강

 

특강이 끝나고 학생들과 교수들(앞줄 왼쪽 다섯번째부터 공주대 권대광 교수, 정형근 교수, 송홍규 교수, 임채훈 교수, 송재일 교수, 백규, 이경재 교수)

 

고마나루 곰사당

 

고마나루 숲을 걷다가 만난 노송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의 김양숙 관장

 

<사랑가> 학습을 마치고

 

국립공주박물관

 

월산2구 마을회관에서 방언채록 중

 

방언채록을 마치고

 

무령왕 부부가 잠들어 있던 목관(재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신발

 

공주 송정리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청양 본의리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사찰의 대좌

 

청춘의 열기마냥 타오르는 불꽃

 

그 옛날 학창시절의 강의동이자 본부건물이었던 돌건물. 50여년의 세월 속에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궁남지에서 대학원생 이은란, 이다온

 

부여의 식당 앞에서 숭실 국문의 젊은 피(임선우, 이경재 교수,장현태, 이찬희, 라힘, 박일)

 

신동엽문학관의 김형수 상임이사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5. 12. 14:21

 

, 소재영 선생님!

 

 

 

                                                                                                               조규익

 

 

 

책 표지

 

 

소재영 선생님께서 새로 내신 책(<<성오수록(省吾隨錄)>>)을 보내 오셨다. 성오(省吾)는 선생님의 아호(雅號)로서 <<논어>> 「학이」편의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나는 하루에 세 번씩 내 몸을 반성한다)”에서 따오신 호칭이다. 선생님의 설명(“내년이면 미수를 맞는다. 그간 내가 지나온 삶을 어떤 형식으로든 한번 정리하고 뒤돌아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글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출간하는 <<성오수록(省吾隨錄)>>은 일단 내 삶의 모습들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편집된 것이며, 여기에 그간 써온 글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에 따르면, 이 책은 선생님의 일생을 조감한 책이다. 즉 ‘만남과 체험’을 중심으로 일생을 서술하신 셈이니, 자서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소재영 선생님

 

 

나는 책 앞에서 30분 정도 묵상을 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숭실에서의 10년 세월, 그 후 현재까지 마음으로 교유해온 2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선생님은 1999년 정년퇴임하셨으니, 학교를 떠나신지 올해로 21년째. 내년에 미수(米壽)를 맞으신다. 갑자기 가슴 속으로 자책과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늘 곁에 계신 것으로 착각한 채 무심히 지나버린 세월이었다. 그 사이 사모님을 사별하셨고, 혼자 지내오시다가 새로운 친구를 만나시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신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그 분마저 사별하셨음을 지금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느끼는 회한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돌아가실 때의 감정과는 또 다른 그것이었다. 제자는 아니지만 스승으로 존경하며 사숙(私淑)해온 지난 세월. 행복했고 철없었다. 그 세월이 영속되리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그동안 나는 쓸데없는 일들에 매여 살아왔다는 증거일까.

 

추억 속 선생님의 모습은 ‘반듯함과 따뜻함’으로 요약된다. 가깝고 먼 사람을 불문하고 늘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그러면서도 지켜야할 거리는 늘 지키셨다. 선생님의 곁에 끊이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는,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무엇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지키고자 하신 철학은 선생님의 최대 장점이셨다. 세대의 차이를 넘어 일본과 중국의 대단한 학자들은 대부분 선생님의 팬들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만나는 학자들은 모두 선생님의 안부를 여쭙고, 선생님과의 인연을 자랑한다.

 

사실 외국 학자들과의 인연을 지속시키기가 어려운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나다. 성격이나 취향의 종족적 차이가 현격하고, 각자가 속한 문화의 차이가 두드러지며, 각자의 학문적 지향 또한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차이들을 갈아 없앨 만큼 자주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학문적 실력은 물론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의 투자에 큰 인내와 끈기 또한 겸해야 해외 학자들과 만날 수 있고, 설혹 그런 것들을 갖추고 있다 해도 온유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그들을 친구로 만드는 일이다. 해외의 유수 학자들을 보시는 눈이 범상치 않고, 한 번 연을 맺은 사람들과는 끝까지 좋은 관계로 지내시는 온유함과 끈기를 갖추셨기에 유수 해외 학자들이 선생님을 지기(知己)로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리라.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시면서 중국의 학자들과 그런 관계를 유지해 오신 것은 대단한 일이다.

 

숭실에 오면서 나는 선생님의 학문적 자세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대학원 시절 누구로부터도 배우지 못한 학자적 자세를 선생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선 근학(勤學)의 자세다. 선생님은 늘 자료를 모으시고, 논문을 쓰셨으며, 학회 활동에 열중하셨다. 그 때까지 나는 논문 한 편 간신히 쓰거나 발표해놓곤 ‘이제 한동안 쉬어도 된다’고 드러눕기 일쑤였다. 그런데, 선생님을 엿보면서 나는 깜짝 놀라 기준을 바꾸게 되었다. 논문은 쉼 없이 쓰는 것, 논문 쓰기 위해서는 자료를 열심히 모으고 읽어야 한다는 것, 남의 글과 말을 열심히 읽고 들어야 한다는 것 등등, 나름대로의 수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선생님을 추월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유일한 방안이 ‘논문 쓰는 작업장을 두 군데로 늘이는 일’이었다. 연구실과 집에서 각각 다른 논문들을 동시에 진행해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적지 않게 있으니, 작업을 두 곳에서 진행하면 생산성이 훨씬 높아지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실행해보았으나, 내 스스로 지쳐서 결국 선생님을 따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겸허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발걸음 흉내나 내보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이젠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나보나 훌륭한 사람을 따라가거나 추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게 안 되면, 무조건 존경하라!”고.

 

***

 

선생님의 의연하신 학자적 자세와 후학에 대한 사랑 덕분에 나는 이때까지 나를 다잡아 올 수 있었다.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하며, 학자의 행동거지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생님으로부터 ‘확실히’ 배웠는데, 감사의 말씀을 드릴 기회가 없었다. 고백의 타이밍을 놓친 다음 복잡한 세상사에 휘말려 여기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무엇이 소중헌디?’라고 묻는다면, 나는 정말로 대답이 궁해진다. 그 때는 ‘중하다’고, ‘내 자존심을 손상시킬 수 없다’고 강변하며 고집을 세웠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이다. 학자로서의 걸음마와 옹알이를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셈인데, 그 은혜를 깡그리 잊고 지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내 인생도 석양으로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성오수록>>이 매서운 회초리로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선생님을 본받아 나도 <<백규수록(白圭隨錄)>>을 쓸 수 있을까. 얼얼한 종아리를 매만지며, 새삼 부끄러운 내 지나간 시간대를 반추해본다.

 

성오 선생님,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ㅠㅠ

 

2019. 5. 12.

 

선생님을 사숙(私淑)해온 후학

 

조규익 절하고 올림

 

 

추기(追記)

 

선생님의 글귀 가운데 눈물을 훔치며 읽은 부분을 아래에 적어본다.

 

“언젠가 전도서에서 보았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세상이 지나고 다른 세상이 오도다.’ 사랑하는 내 아내 김숙희, 다시 사랑했던 김미혜자 약사, 부디 천국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 누리기 바랍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3. 7. 08:49

 

 

                                                                                                           

 

책을 잘 버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조규익

 

책과 돈은 한 군데 고여 있으면 썩는다. 한 나라의 경제가 잘 되려면 돈이 재빨리 활발하게돌아야 하고, 한 나라의 학계가 잘 되려면 책이 많이 만들어져 왕성하게 유통되어야 한다. 내 서재에서 잠자고 있는 책들이 언젠간 후학 누구에겐가 전해져 새로운 지식의 원료로 쓰인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겐가 증정한 내 책이 자취생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다가 애완견의 똥받이나 시골집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사라지는 것보다는 중고서점 진열대에라도 올라 새로운 수요자에게 선택받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이리라.

 

그러나 시계추처럼 당위와 현실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책을 쓰지도 말고, 증정하지도 말라!’는 내 글이 바로 그런 경우다. 내가 누구에겐가 친필 헌사를 써서 증정한 책이 중고서점의 서가에 진열되어 있었고, 그 책들을 산 후배가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책들이 훌륭한 내 후배의 손에 들어갔으니,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했고, ‘책들은 돌고 돈다아니 책들은 돌고 돌아야 한다는 당위를 확인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왜 나는 이리 섭섭하고 슬퍼질까.

 

후배로부터 그 책 사진들을 받아든 순간, 내 책을 받았을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섯 사람 모두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듯 생생했다. 서운한 순서로 말하면 제자, 대학 후배, 몇 년 전 정년퇴임한 교수(*그는 현재 목사로 활동 중이다!),  문학평론가로 활동중인 다른 대학 교수 등으로 나열된다. 갓 펴낸 전공 책에 박학다사(博學多思)’란 소망 섞인 헌사를 써서 제자에게 건넸으니, 당시 나는 그를 얼마나 아꼈던 것일까. 그 다음이 대학 후배. 1년 후배였으나, 학창 시절에는 사적인 만남이 거의 없었던 존재였다. 시내 모 대학에 재직하던 그는 언젠가부터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했고, 학위를 받은 후에는 가끔 강의를 나오기도 했다. 강의가 끝나면 종종 연구실로 찾아왔고, 함께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곧잘 나누던 사이였다. 시원치는 않으나 첫 수필집을 소람(笑覽)’이란 헌사를 써서 그에게 증정했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수필집을 낸 사실이 겸연쩍었던 것일까. ‘웃으면서 보아 달라는 주문을 담은 헌사였다. 그 다음이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모 외국어문학과에 있다가 몇 년 전 퇴임하여 목회를 하고 있는 교수. 그에겐 내 단평집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읽기>>를 건넸다. 그 다음은 전공 책 <<세종대왕의 봉래의, 그 복원과 해석>>에 신년인사를 헌사로 적어 증정한 모 언론사의 기자다. 아마 보도 좀 해달라는 속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인 모 대학 교수다. 똑똑하고 실력 있는 현대문학 분야 전공자인데, 내가 무슨 연유로 이 책(<<로터스 버드와 홍길동 이야기>>)을 증정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처음 후배로부터 전화연락을 받을 당시에는 밀려드는 서운함과 후회를 누르기 어려웠다. 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 후배가 보내 준 그 책들에서 단 한 페이지를 넘겨 본 흔적이라도 발견했다면 덜 서운했을 것이다.(*페이스북에 그 글을 포스팅한 다음 날 후배는 퀵서비스로 그 책들을 내게 보내왔다.) 내게서 받은 그대로 어딘가 던져 놓았다가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음을 그 책들은 내게 속속들이 일러바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로서는 금쪽같은' 그 책들을 정성스레 포장하여 증정했다는 사실이 땅을 칠 정도로 후회스러운 것이다.  늘 책 욕심에 찌들어 살아온 나인지라, 책을(더구나 증정 받은 책을) 버리는 행위는 일종의 죄악이었다. 누군가들로부터 받은 책들에는 그들의 얼굴과 정신이 박혀 있었고, 그것들은 늘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를 다잡아 온 셈이다. 내가 남에게 책을 줄 때도 마찬가지 마음이다. 감사와 호의, 그리고 충고가 듬뿍 담긴 마음이다. 선배들에게는 감사의 뜻을 담는다. 힘들여 만든 책을 드릴 수 있는 선배가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마음이 그것이다. 친구들에게는 우정의 뜻을 담는다. ‘너와 나는 친구, 앞으로도 변치 말고 살아가자는 뜻을 내 분신인 책에 담아 전하는 것이다. 선택된 제자들에게는 충고의 뜻을 담는다. ‘학해양양(學海洋洋)/마부위침(磨斧爲針)/박학다사(博學多思)’ 등을 포함, 대상에 따라 그 수와 내용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런 마음을 담아 건넸으므로, 가급적 그 책이 오래 간수되길 바라는 것이 내 소망이었다. 그러나 이번 해프닝을 통해 깨달았다. 책은 무언가를 끄적거린 종이뭉치일 뿐 삶의 공간이나 잡아먹는 물건이어서,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책을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무거운 책을 지고 다니며 소중한 삶을 방해받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그저 우연히 내 눈에까지 들어온 것들일 뿐, 내가 헌사를 써서 증정한 책들이 버려진 경우가 어찌 이것들뿐이랴. 분명 그들은 아파트 혹은 동네 어귀의 쓰레기통에 이 책들을 버렸으리라. 간혹 눈썰미 있는 쓰레기 처리업자나 폐지 수거자가 저울에 달아 종이 값으로 중간상에게 넘겼을 것이고, 그 단계에서 일부가 살아남아 중고서점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냐? 노숙자들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다가 지나가는 껄렁패들의 발길질에 너덜거리며 굴러다니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면, 나는 아마 5분 정도는 족히 기절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증정본을 그나마 중고서점의 진열대에 오르도록 해준 이 분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기에 중고서점의 점주 눈에 잘 띄는 쓰레기장에 버려 주었는지, 이 분들이 눈앞에 있다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책을 제대로 버려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3. 2. 01:14

친구 신연식을 보내며

 

 

                                                                                                                                 조규익

 

                                                                           

 

 

 

 

 

 

 

친구 신연식이 떠났다. 15년 해직으로 고통 받고, 10년을 병마와 싸우던 그는 결국 병마의 끈질긴 공격으로 이승에의 집착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의 길을 떠났다. 그의 얼굴은 편안했고, 막바지에 그가 남겼다는 글은 평소 그의 말처럼 담담했다.

장례식장에 내걸려 추도객들을 맞이하던 그의 영정은 오늘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의 말로 자신의 속내를 전하고, 다시 긴 침묵에 잠긴 것이다.

 

그와 나는 시골 친구다. 살던 마을도 '국민학교'도 달랐으나, 각자 졸업 후 당시 중학과정을 가르치던 계도농축기술학교에서 만났다. , ‘똘망하고공부 잘하던 그였다. 형과 두 누이들 밑에서 자란 막둥이여서 그랬을까. 시골 아이 답지 않게 준수한 용모에 입성도 깨끗하였다. 졸업 후 그는 서울의 명문고에 들어가 졸업 후 연세대로 진학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유능한 국어교사가 되었다. 몇 년 동안 교사로 봉직하던 그는 교육현장의 부조리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후일 전교조로 확대정착된 참교육 운동은 그를 중심으로 몇몇 열혈 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뜻을 굽히지 않던 그는 그 일로 결국 해직의 독배를 마셨다. 그로부터 15년은 형극(荊棘)의 세월이었다. 생각해보라. 생활인의 입장에서 직장으로부터 쫓겨나 15년을 버티며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는 가족들의 눈망울을 외면하기가 어찌 쉬웠겠는가. 무엇보다 참교육이 사라지고 있는 교육현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그의 정신적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해직의 고통을 극복해야 했고, 교육현장의 부조리들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의 향년은 63. 공자 말대로 30이 입지(立志)의 나이라면, 그 후 불혹(不惑)-지천명(知天命)-이순(耳順)’은 송두리째 투쟁과 고난으로 일관한 시간대였다. 교육현장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이데올로기 대결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회갈등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하기 일쑤였다. '동지'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그 쪽 일꾼들과 민족의 미래를 논의하고 돌아온 일은 훈장처럼 빛나는 그의 이력이었다.

 

그 강고한 투쟁들이 병을 불러 왔으리라. 교단 복직 후 몇 차례의 수술과 투병을 거치면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얻은 것은 물론이다. 정년을 맞은 뒤에도 끈질긴 투병생활을 지속해왔으나, 극성스런 병마는 그의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고, 결국 그는 또렷한 정신 속에 이승을 떠난 것이다.

 

 자그마한 단지 하나에 담긴 그의 유골이 양지 바른 선산의 납골묘에 안치됨으로써, 그와 우리는 유명(幽明)으로 길을 달리 하게 되었다. 그가 잠든 납골묘 밑으로는 어린 시절 드나들던 신작로가 있었고, 그 앞으로 물이 담긴 서너 마지기의 논이 있었다. 논을 보호하고 서 있는 산 너머에는 신두리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 발치를 핥아보려 끊임없이 들고나는 파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

 

내 친구 연식아, 이제 투쟁의 검(劍)을 내려놓아라. 그리고 백사장의 맹꽁이들과 달랑게들, 파도의 하얀 포말들을 벗 삼아, 그간 잊고 지내던 동심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니? 물 드는 시각이면 한 바구니 그득 굴뻑들을 담아 오시던 어머니를 동구 밖에서 맞아 손잡고 돌아오는 삶을 새로이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부디 고통 없는 그곳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또 하나의 영원한 삶'을 누리기 바라며, 네가 없는 허전함을 통곡으로 메워본다!ㅠㅠ

 

2019년 3월 1일

 

 

                 친구 백규, 삼가 통곡하며 씀

 

 

 

*그가 며칠 전 친구들에게 썼다는 고별의 인사말 가운데 한 부분을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이승을 떠날 날이 임박했다는 몸의 신호를 받으며, 여러분께 작별인사 겸 몇 마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병마가 온몸을 갉아먹어 혹 기회를 놓치면 작별의 인사조차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제 몸의 질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암으로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또 한 가지는 폐기종으로 이 또한 현대의학으로는 회복 불가능한 질환이지요. 3주 전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이제 떠날 날이 임박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어요.

제 몸이 갈수록 살아있는 사람들의 짐이 되어 가는 걸 지켜보면서,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음이 슬퍼지는군요. 매 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데, 끝을 향해 가는 몸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고통이군요. 갈수록 가빠지는 호흡과 기침, 움직일 수 없는 현실 또한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할 수 없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삶을 연장해가는 현실은 참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넋두리가 길었군요. 여러분과 함께 한 그동안의 세월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시간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단에 있는 동안 매년 첫 시간 수업은 인연이었습니다. 살면서 부딪치는 인과 연이 내 삶 모두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 벗님들과의 인연은 내 생애의 행운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한 번 크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까지 저를 세워 주신 벗님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욱 애써 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디 행복하십시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2. 26. 07:34

 

새내기 OT에 다녀오며

 

 

 

                                                                                                                        조규익

 

 

 

매년 이맘때(2월의 마지막 주)면 대학 본부가 주최하는 새내기들의 OT 모임이 있다. OT‘ORIENTATION’의 약자일 터인데, 서양의 대학들에서 기원한 Student Orient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새내기들에 대한 환영과 대학생활 안내, 새내기들과 교수 및 선배들의 만남, 새내기들 간의 친목 도모 등 다양한 목적과 내용으로 진행되는 행사다.

 

3천명 넘는 신입생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없으니, 각 단과대학별로 흩어져 열리게 된다. 올해 인문대학 OT는 포천의 한화리조트에서 있었고, 교수들은 그곳으로 가서 새내기들을 만났다.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부푼 갓 20의 젊음들이 텅 빈 계곡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으며, 나도 새내기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 그들 사이엔 45년 전 새내기였던 내가 들어 있었다!

 

그들을 만나는 순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45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시골 소읍(小邑)에 있던 모교의 OT 장소는 부속고등학교 강당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진행되던 당시의 OT가 내겐 참으로 씁쓸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시골 치고 인심 사나운 곳이었다. 객지에서 겨우 잡은 자취방은 주인집 뒤쪽의 쪽문으로 통하는 곳에 있었고, 주인은 아예 한 번 와보지도 않았다. 방세를 내기 위해 안채를 방문하면 받아 든 돈의 액수만 확인한 뒤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곤 했다. 말을 섞을 필요도 섞으려 하지도 않았다.

자취방의 연탄온돌은 좀처럼 데워지지 않았고, 그 해 마침 연탄파동으로 연탄가게는 늘 텅 비어 있었다. 하루에 한두 덩이씩 연탄을 사서 새끼줄에 꿰어들고 언덕마을 자취방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채 마르지 않은 연탄이었던지라, 부엌에 갖다 놓아도 불을 붙이는 게 쉽지 않았고, 가까스로 불이 붙어도 고약하게 만들어진 구들장 탓으로 방 안엔 온기가 돌지 않았다. 밤새 참새새끼처럼 떨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겨우 식사를 해결한 뒤 찾아가던 OT 장소.

 

‘4년 동안 이렇게 지루한 강의가 진행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겁을 주려는 행사가 OT라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강당을 빽빽하게 채운 410명의 새내기들은 지루하게 짜인 강의들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웅성거리는데, 하루 일정이 끝나고 냉방으로 들어갈 생각에 나 혼자만 우울했었다. 그렇게 대학 새내기 시절의 OT는 내 회색빛 추억의 폴더에 지금까지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있다.

 

으레 회상하고 싶지 않은 회색빛 추억을 소환할 수밖에 없어서일까. OT 때만 되면 가급적 현장에 가지 않으려 꾀를 내곤 한다. 그러나 지난해와 올해는 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달라진 내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미 6학년을 넘어섰고, 강의실 밖에서 요런 젊음들과 가까이 할 날들도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그들에게 꿈을 물었다. 대답은 국어교사, 아나운서, 출판 편집자, PD, 작가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없다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그렇겠지.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나라가 아니니, 애당초 그들 내면의 현주소는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시야는 넓어진다./ 장래에 무슨 일로 입신(立身)할 것인지는 앞으로 결정해도 된다./ 그러나 그런 시야를 갖기 위해 지금 당장 하루-한 달-한 학기-한 해-대학 4-일생에 걸친 자신만의 시간표를 짜야 한다./ 그 시간표는 수시로 수정되겠지만, 어쨌든 그 시간표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예의 내 시간표론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꿈을 갖고 노력하는 일만이 대학생활에 성공하고 인생에 성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올해도 어김없이 역설한 것이다. 그들 가운데 몇이나 내 말을 알아듣고 실천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지둘려보는 수밖에.

 

OT장에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새내기 부모들의 얼굴이 자꾸만 밟혔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대학 공부를 발판으로 험한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서바이벌해주기를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대학에 보내놓고 고관대작이나 재벌이 되어주길 소망하거나 자신하는 부모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저 밥이나 제대로 먹고, 착한 남녀 만나 자식들 낳아 기르며, 소소한 행복이나마 누리며 살게 되는 것. 이른바 소시민의 행복이라도 보장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를 포함한 대다수 부모들의 바람 아니겠는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제자들에게 그걸 안겨주는 일이 왜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자신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촛불 들고 광야에 나서게 함으로써 젊은이들을 혁명의 전사로 만드는 게 정치인의 할 일인가. 고매한 이상이나 그럴 듯한 이념을 추구하기에 앞서 젊은 영혼들에게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게 교육자의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겨울 막바지의 스산한 풍경이 우울한 내 마음에 끝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그나마 이렇게 피곤한 육신을 뉠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마저 내겐 사치스러운 일일까.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