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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1. 3. 8. 11:09

 

*인문단상*

 

 

 원 웨이 티켓(One-Way Ticket)

 

 

                                                                                                                 조규익[국문과 교수]

 

 

‘에코팜(Eco-Farm)’이라 스스로 이름 지은 전원에 ‘노마드 텐트’의 말뚝을 박았다. 마지막이라는 다짐 속에 완벽한 ‘정착’을 기원하며 치른 의례이지만, 저 창밖에 펼쳐지는 사계(四季)의 변화는 내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장담할 수 없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믿음으로 쉼 없이 달려온 길. 발길을 되돌릴 수 없는 그 길의 어디쯤에 나는 서 있을까. ‘지나간 일 소용 없음을 깨달았지만, 앞으로의 일도 따를 수 없음을 알고 있다’고 고백한 도연명(陶淵明)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작비금시[昨非今是/지난날은 잘못되었고 지금은 옳다!]’의 슬픈 각성을 남기지 않았던가.

 

20대 후반에 대학의 전임이 되면서 설익은 자의식을 바탕으로 ‘학자 혹은 교수로서의 정체성’을 주조(鑄造)하기 바빴고,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에는 그 일관성을 유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불 밝힌 연구실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아냈으나, 세상은 그것들에 큰 관심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책이나 논문들은 시간의 여울목에서 그때그때 추구했어야 하는 ‘소중한 것들’의 희생물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독서와 집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연구실 문을 안으로 닫아 걸지 말고, 외로운 가족과 이웃들을 불러들여 다독이는 ‘큰 공부’를 왜 하지 못했을까. 잔인한 세월의 격랑 속에 자식들은 품을 떠나고 친구들은 저만치 흩어져 거리를 두고 있지 아니한가. 외로운 어부 산티아고 노인에겐 ‘청새치 뼈다귀’라도 남았지만, 내겐 무엇이 남아 있는가.

 

금쪽같은 연구년들에 유럽의 30여개 나라들과 미국의 대도시 및 인디언 보호구역들을 답사했고, 틈틈이 중국・일본・러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이스라엘 등을 돌아보았다. 그 나라들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역사와 문화의 텍스트였다. 선학들의 눈과 마음을 거쳐 가공된 지식들보다 훨씬 생생한 기록들이 현장에는 널려 있었다. 일직선으로 뻗어온 시간은 엄청난 삶의 잔해들을 남겼고, 그 속엔 공동체의 사유와 행위들이 화석으로 남아 있었다. 몸체가 빠져나간 허물들은 훌륭한 타임머신이었다. 그걸 타고 시간여행을 즐기며 내면의 변화를 시도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결국 그 찌꺼기들은 오히려 내 본체를 가두는 새로운 껍데기로 환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화석화시켜 간 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변화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을까. ‘그 때 그 자리’에서 나로 하여금 시간여행을 가능케 했던 그 껍데기들은 내 자의식을 더욱 굳힐 뿐, 잠시 동안의 만남들로 내 생각이나 삶의 굳은살은 쉽사리 유연해지지 않았다. 특별한 경험들의 충격으로도 내 생각은 크게 넓어지거나 깊어지지 않았음을 아프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

 

그렇다. 지금 내 몸을 실은 열차는 쉼 없이 내달린다. 다음 간이역에서 내려 열 정거장 쯤 돌아가려고 차장에게 물었더니, ‘이 열차는 앞으로만 가는 열차이며 당신은 외길 여행객’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리고 싶다면 내려드리겠지만, 그 역이 바로 ‘당신의 종착역’이라는 잔인한 말까지 덧붙이는 게 아닌가. 비명을 지르며 주머니를 뒤져 차표를 꺼내보니, ‘원 웨이 티켓’이란 글자들이 선명하게 쓰여 있지 아니한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외길 여행객’이라? 그동안 나는 내가 갖고 있는 티켓이 Round-Trip Ticket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도 이웃도 친구도 미루어둔 채 ‘다음번에!’만 외쳐왔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책과 논문을 쓴답시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다음번에!’의 공수표만 남발해온 것이다. 나는 그간 내 지갑 속의 티켓에서 ‘유효기간이 없다’는 글자들만 보았을 뿐, ‘One-Way’라는 단서를 간과하고 있었다. 더구나 ‘유효기간이 없다’는 말이 바로 지금 종착역에 도달했으니 내려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철없고 찬란했던 교수시절은 저물고 있으나, 지나온 간이역들에 뿌려놓은 내 ‘헛된 약속’의 깃발들은 빛이 바랜 채 오늘도 ‘One-Way Ticket’을 지닌 ‘외길 여행객’ 백규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펄럭이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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