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21. 1. 17. 18:31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21. 1. 1. 16:14

*며칠 전의 일. 한문학을 전공하는 가까운 친구가 글 한 편을 보내왔다. 열어본즉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패러디한 글이었다. 천재로 꼽히던 해동 3최[최언위최승우최치원]. 그 가운데 일인인 신라[제49대 왕 헌강왕 때]의 최치원이 중국 당나라에서 벼슬하던 중 황소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토벌총사령관 고변()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황소()를 치기 위해 지은 격문()이 바로 '토황소격문'이다. 내가 '문추(文酋)'가 누구냐고 묻자, 즉시 '그대는 바보인가?'라는 대답이 친구로부터 돌아왔다. 짐작은 가나, '그'가 내가 알고 있는 그인지 아리송했다. 아, 시골 구석에 살다보니 그간 '문추'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시사(時事)에 어두운 나를 자책하며 다시 전문을 읽어보니, 참으로 보기 드문 가편(佳篇)이다. 어리석기 한량없는 '그'야 알아볼 리 없을 것이고, 국가 권력기관 또한 이 글을 탈잡아 무슨 행패를 부릴 일이야 있으랴. 풍자란 그래서 좋은 것인가. 그냥 버리기 아까워 이곳에 그 글을 실어둔다. 다만 요즈음 도처에 출몰한다는 '문추 홍위병'들의 등쌀에 내 친구가 다칠까 염려되어 지은이의 이름은 이곳에 밝히지 않는다.   

 

 

 

경자(庚子)년 섣달 28일, 초의한사(草衣寒士) 아무개는 문추(文酋)에게 고하노라.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한 것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올바른 방법으로 변통할 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하느니라.

 

지혜로운 이는 때의 적실함을 따름으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무도(無道)함으로 패하게 되는 것이 우주의 이치. 비록 우리의 일생이 하늘의 명에 달려 있어 생사를 기약할 수는 없으나, 만사의 성패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므로,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할 수가 있느니라.

 

지금 나는 한미한 일개 백성으로서 경고하러 온 것이지 싸움하러 온 것이 아니요, 백성의 마음은 대도(大道)와 상식(常識)을 앞세울 뿐 무도하게 몰아냄을 능사로 삼지는 않느니, 앞으로 대의를 회복하고 큰 신의를 펴서 조심스런 마음으로 백성의 마음을 살펴 대도를 걷도록 촉구하고자 할 뿐이니라.

 

그대는 본시 먼 시골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지배자가 되면서, 갑작스런 시세(時勢)를 타고 감히 대의를 어지럽히고 있지 아니한가. 결국 무도한 마음으로 자신의 몸에 닥치는 징벌을 피하고자 국정의 상도(常道)를 어지럽혔으니, 이미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극에 달하여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도다.

 

아, 단군왕검 이래 오랑캐와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나라를 훔치고자 대의에 복종치 않은 적이 허다하였으니, 양심 없는 무뢰한 무리와 의롭지 않고 무도한 그대 같은 무리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먼 옛날 궁예와 견훤이 삼한의 패권을 노렸고, 가까이는 공산도배들이 반도의 평화를 깨부수려 발호하였느니라. 사술(邪術)과 무력으로 세상을 흔들어 암흑으로 만들고, 선량한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는가. 그러나 잠깐 동안 못된 짓을 자행타가 결국 더러운 무리들은 섬멸되었느니라. 하늘에 태양이 활짝 떠오르매 어찌 요망한 기운이 지속되겠으며, 하늘의 그물이 높이 베풀어져 있으니 무도한 집단이 어찌 길게 갈 수 있었겠는가.

 

하물며 하향(遐鄕)의 한사(寒士)로 태어난 그대는 인권(人權)의 율사(律士)를 자처하며 세상에 나타났고, 어리석은 무리들의 헛된 꿈을 민의(民意)와 대의(大義)로 참칭하는 무도를 자행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그대는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를 지어 온 것이다. 선량한 백성들이 그 죄를 용서해 주려 해도 그 거짓이 너무 끔찍하여 치를 떨기에 이른 것 아닌가. 그래서 천하 백성이 모두 그대를 징치하려 절치부심(切齒腐心)할 뿐 아니라, 땅 속에 있는 귀신까지도 몰래 그대를 몰아내려 의논함을 보지 않는가. 잠깐 동안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벌써 정신은 죽었고, 넋 또한 빠져나간 것 아닌가. 무릇 사람이라면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자신을 알면 사람이고 자신을 모르면 짐승이기 때문이니라.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모름지기 새겨들을지어다. 그간 선량한 백성들은 많은 덕을 베풀어 더러운 것도 받아들이고, 두터운 은혜를 내려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모르는 체 하며 지나쳐 온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대를 추장으로 임명하고 전권을 몰아 준 것 아닌가. 그런데 그대는 국기(國基)의 붕괴를 요설(妖說)로 분칠하고 합리화하려 했다. 무능과 과욕으로 나라의 근본을 흔들었고, 그 과정에서 죄를 벗어나고자 법률체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려 나라는 형언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버린 것이다.

 

반드시 쫓겨날 날이 멀지 않았음에도,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이런 처지에 어찌 구중궁궐을 그대의 영원한 안식처로 생각하여 무도한 꼼수를 접지 않는 것이냐?

앞으로 그대는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노자가 <<도덕경>>에서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침을 가지 못하는 것이요, 소낙비는 하루 동안을 내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늘의 일도 오래 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의 일이겠는가? 또 듣지 못하였는가? "하늘이 잠깐 나쁜 자를 도와주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흉악함을 쌓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라는 <<춘추>>의 지엄한 훈계를.

 

정상적인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온갖 간사한 꾀를 부려 악이 쌓이고 재앙이 가득함에도, 목전에 드러난 거짓과 간사(奸邪)를 스스로 편하게 여기고 미혹하여 뉘우칠 줄 모르니, 대체 그대를 어찌 해야 옳단 말이냐.

 

위태롭기가 '제비가 바람에 날리는 장막 위에 둥지를 틀어놓고 마음 놓고 날아드는 것 같고, 물고기가 끓는 솥 속에서 노니는 것 같다'는 옛말도 있느니라. 이제 웅장한 전략을 가지고 군대를 모은 강호의 지사들이 구름같이 날아들고 지혜로운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모으고 있음을 그대는 정녕 모르는가.

 

높고 큰 깃발이 초나라 요새의 바람을 에워싸고, 튼튼한 군함이 오 나라 강의 물결을 막아 끊었듯, 연대(連帶)에 나선 백성들의 힘이 그대의 아성(牙城)을 부수겠노라 이를 가는 소리를 그대만 듣지 못하는 것인가. 그 대열 속에 진나라 도태위 같은 장수가 있어 적을 부수는데 날래고, 수나라 양소 같은 병법가가 있어 법을 엄숙하게 시행하여 신이라 일컬어짐을 듣는가, 못 듣는가.

 

이들은 널리 팔방을 돌아보고 거침없이 만 리를 오가는 안목을 지니고 있느니라. 그대 무리들을 무찌르는 것은 맹렬한 불이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고, 태산을 높이 들어 참새알을 눌러 깨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조만간 정의의 바람이 불고 새벽이슬이 내려 바야흐로 말라가는 풀을 살려 내고서야 그 힘을 알겠는가?

 

파도도 일지 않고 도로도 통하였으니, 석두성에서 뱃줄을 풀매 손권이 뒤에서 호위하고, 현산에 돛을 내리니 두예가 앞장 선 일을 아지 못하는가. 열흘이나 한달이면 반드시 권부(權府)의 핵심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다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임을 싫어하는 것은 하늘의 깊으신 인자함이요, 법을 굽혀서라도 은혜를 펴려는 지사들의 선의를 아직도 그대에 대한 복종으로 착각하는가.

 

나라의 도적떼를 토벌하려는 이들은 사사로운 분함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어둔 길에 헤매는 자를 일깨우기 위해 진실로 바른 말을 해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이 글 몇 자로 그대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다급함을 풀어 주고자 하는 것이니, 부디 고집을 버리고 이 나라 백성의 어진 마음과 일의 선후를 잘 판단하여 올바른 계책을 통해 잘못된 일을 그대 스스로 고치는 것이 최상의 방책 아니겠나.

 

법에 따라 그동안 지은 죄업을 씻고 삼척신(三尺身)이나마 보존하려면, 그대의 토벌에 나선 민병(民兵)들에게 백배사죄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게 대장부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 아니겠나. 그러니 절대로 이 말을 의심하지 말고 회답할지어다. 나의 명령은 천하 공도(公道)를 바탕으로 발(發)한 것이라, 원망만 깊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라. 만일 미쳐 날뛰는 무리들에 이끌려 미몽(迷夢)과 미망(迷妄)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항거하듯 한다면, 그때는 곰을 잡고 표범을 잡는 정의의 힘으로 한꺼번에 없애 버릴 것이니, 까마귀처럼 모여 솔개 같이 덤비던 너의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갈 것이니라.

 

몸은 날카로운 도의(道義)의 검(劍)에 산산조각 날 것이요, 뼈는 가루가 되어 백성들의 발밑에 깔리게 될 것이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그대는 인류사 최대의 웃음꺼리가 됨을 면치 못하리라.

 

그대는 모름지기 나아갈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를 잘 헤아리고, 잘된 일인가 못 된 일인가 분별하라. 이 말을 거역하여 멸망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귀순하여 극형을 면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러면 최소한 고종명(考終命)은 이룰 것이며, 개과천선한 소시민의 삶도 얼마간 더 누릴 수는 있을 것이니, 부디 어리석은 생각으로 의심하지 말지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12. 21. 17:45

 

 

  이제 더 이상 사람이 낫을 들고 벼 수확을 하는 시대가 아니지요. 콤바인을 몰고 다 익은 벼논에 들어가 곡물을 베고, 탈곡하고, 선별하고, 포대에 담는 등 여러 단계의 일들을 일관 작업으로 수행하는 시대이지요. 콤바인 작업이 끝나는 대로 거둔 벼를 트럭에 실어 건조장으로 보내면 일단 주인 손에서 떠납니다. 건조된 벼는 수매장으로 넘겨 정부의 비축미로 팔고, 남는 것 중 일부를 쌀로 찧어 가족들의 한 해 식량으로 삼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콤바인 작업을 하고난 논바닥에는 낟알 털린 볏짚들이 줄줄이 누워 있게 됩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고 그 볏짚들을 모아 유산균을 섞은 다음 단단히 포장한 것이 바로 곤포 사일리지입니다. 그 속에서 맛있게 발효된 볏짚들은 다음 해 목초가 나올 때까지 소들의 먹이로 요긴하게 쓰이지요.

 

  이십여 년 전 미국 체류 중에,  십 수 년 전 유럽 여행 중에,  저는 곤포 사일리지들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전원 혹은 농토 위에 구르는 하얀 색 곤포 사일리지들을, 농촌의 부를 상징하는 일종의 기호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것들은 몇 년 전부터 가을・겨울에 걸쳐 우리나라 농촌에서도 흔한 풍경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제 우리나라 농촌도 제가 그려온 ‘부농(富農)’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곤포 사일리지를 볼 때마다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 십 년 전의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하곤 합니다. 제 어린 시절 농촌에서는 농지 다음으로 소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집이나 소 한 마리씩은 데리고 살았지요. 소 없이 논밭 일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이른 봄부터 소와 함께 논밭에 나가 땅을 가는 것이 농민들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를 먹이는 것은 사람이 먹고 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들판에 풀이 그득하니 그것들을 베어다 먹이거나 풀밭에 끌고 나가 매어놓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울부터 봄철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소의 배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집집마다 약간씩 달랐지만, 우리 집의 경우를 말씀드리지요. 당시 방앗간에 가서 보리방아와 쌀 방아를 찧으면 겨가 나오지요. 아주 고운 보릿겨는 송두리째 지고 와야 할 만큼 가장 긴요한 물건이었지요. 벼의 경우 1차로 나오는 왕겨는 모두 방앗간에 버리고, 두 번째 나오는 속겨는 한 주먹도 버리지 않고 실어 와야 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소 먹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지요. 그리고 추석 4~5일 전쯤 소가 좋아하는 길고 부드러운 풀들을 중심으로 관리해오던 산판에서 ‘새 꼴’을 베었습니다. 왜 새 꼴이라 불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새 꼴’은 ‘새+꼴’로 만들어진 복합어인 것 같습니다. ‘새’와 ‘꼴’이란 말들을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군요. 먼저 ‘새’.

 

“1. 볏과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띠, 억새 따위가 있다.

  2. 볏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30~120cm이며, 잎은 흔히 뿌리에서 나고 선 모양이다. 여   름에서 가을까지 연한 녹색의 작은 이삭으로 된 꽃이 원추(圓錐) 화서로 피고 목초로 쓰인다. 볕이 잘 드는 초원이나 황무지에서 자라는데, 한국・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그리고 ‘꼴’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풀어 놓았군요.

 

“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아, 그 ‘새 꼴’이란 바로 억새 등의 볏과 식물과 기타 잡초 등 소가 잘 먹던 풀들을 통틀어 부르던 명칭이었던 것 같네요. 그러니 당시 우리 고향의 어른들은 매우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고 계셨던 겁니다. 어쨌든 일꾼들 4~5명이 들러붙어 하루 종일 낫으로 천여 평 가까운 풀을 베어 산 바닥에 깔아놓습니다. 추석이 지나고 한 일주 쯤 지날 때쯤 파란 풀들이 기분 좋은 풀 향기를 풍기며 대충 마르게 되고, 그 상태를 살펴서 괜찮다는 판단이 들 경우 걷어서 낟가리 모양으로 누려놓습니다. 그 다음 벼 타작이 끝나고 나오는 볏짚 또한 한 올도 버리지 않고 누려놓습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면 볏짚과 새 꼴 등 작은 동산 모양의 두 종류 낟가리가 집집마다 마당 한 구석에 올록볼록 솟아올라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날씨가 추워져서 소를 외양간으로 옮겨 맨 다음부터는 볏짚과 새 꼴을 7:3으로 배합하여 작두로 썰어낸 여물이 주식으로 소에게 제공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신 아버지는 부엌의 가마솥에 여물과 겨[쌀겨・보릿겨], 채소 이파리 등을 ‘조리 후에 나오는 영양분 섞인 구정물’로 버무려 ‘소죽’을 끓이셨습니다. 저는 그 구수한 소죽 냄새를 맡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새벽 5시대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시고, 저는 6시 대에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가마솥 소댕이 덜컹거리며 푹푹 김이 오르면 소죽이 익었다는 신호이고, 다 익은 소죽이 그득 담긴 양동이를 달랑달랑 들고 4~5차례 왕복하면서 외양간의 구유로 날라 주는 일은 제 담당이었지요. 쬐끄만 녀석이 달랑거리며 소죽 양동이를 들고 오는 모습을 큰 눈으로 바라보며 침을 흘리던 ‘뿔 찌그러진 암소’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소죽을 다 먹고 나면 볏짚과 새 꼴을 섞어 썰어낸 여물을 구유 가득 채워 주는 것이지요. 소가 소죽을 다 먹지 않는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이유를 분석하곤 하셨습니다. 여물에 문제는 없었는지, 겨에 문제는 없었는지, 구정물에 문제는 없었는지 등등. 저는 두 분 사이에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마구 흘러갔습니다. 이제 돌아온 전원에는 볏짚이나 새 꼴 동산 대신 곤포 사일리지가 구르고 있네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 어른들을 잡고 물어도 새 꼴이나 소죽의 추억을 갖고 계신 분들은 안 계셔요. 콤바인으로 추수가 끝나면 농부들은 볏짚을 팔아버리지요. 저는 이곳 어른들에게 값을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추수 후 볏짚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었던 내 고향의 추억 때문입니다. 가족 같은 소가 먹을 겨울 동안의 양식인데, ‘판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동네 어른들에게 그 값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의 농부들이 곤포 사일리지를 팔아서 주머니는 두둑해졌을지 몰라도, 그 볏짚과 새 꼴을 섞어 작두로 썰어내던 ‘여물’의 추억은 아마 누구의 마음속에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감히 ‘농경시대를 헛 살아오셨네요!’라고 그 분들을 조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 꼴과 볏짚을 섞어 썰어낸 여물의 추억’이 제겐 소중한 ‘빈티지 보물’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버리고 싶은 시간의 땟자국’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언제쯤 ‘라떼’적 삶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젊은 영혼들을 유혹할 수 있을까요?ㅠㅠ

 

 

 

Posted by kicho
알림2020. 11. 26. 22:49

 

앞 뒤 표지

 

 

김난주 시인의 약력

 

 

 

 

난주 시인의 소망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