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10. 15:47


‘작년에 왔던 각설이’마냥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5월. 달력을 본다. ‘5월 15일’, 붉은 색이 선명하다. 아, 살았다! 선홍색 카네이션 한 송이 받아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스승의 은혜>를 들어야 하는 고문을 면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도 없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건만, 놀랍게도 스승의 날만큼은 챙겨야 한다는 믿음(?)들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나마 스승의 날이라도 있어서 ‘선생 할 맛이 난다’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대접 받아도 좋을 만큼 제대로 교육을 시킨다고 자부하는 분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교육의 현장에 있으면서 ‘스승 노릇’ 하기 쉽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없는’ 기자들은 고등학교에서 내신이 강화된다는 신문기사를 쓰면서, 극성스런 ‘치맛바람’이 걱정된다고, 없어도 그만일 사족을 꼭 끼워 넣는다. 치맛바람이란 무엇인가. 그 속엔 ‘제 자식에 대한 불합리한 편애의 강요’와 촌지문화가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학기가 시작될 즈음이나 스승의 날 전후, 촌지의 지저분한 소식들이 언론매체들을 장식하기 시작하면 내 일이 아니면서도 곤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촌지 교사의 집을 급습하여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싸여있는 각종 명품들을 TV 화면에 비춰댈 땐 같은 선생으로서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진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첫 발령을 받은 시골 고등학교에서의 일이다. 말썽꾸러기 영수(가명)의 어머니가 찾아온 날이었다. 까맣게 탄 얼굴로 시종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나 또한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작별 인사차 밖으로 나간 내게 그 어머니는 계단 밑에 숨겨둔 콜라 두 병을 건네곤 도망치듯 내빼는 것이었다. 그 콜라는 유독 달고 맛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촌지’였다.
 
그러나 대학에는 학부모가 찾아 올 일도, 학부모를 부를 일도 없다. 그래서 촌지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대학이기도 하다. 그 대신 곤혹스런 일이 하나 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교수들을 세워놓고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곤 한다. 그런데 부르는 학생들도 듣는 교수들도 참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물론 노래를 통해 당위나 이상을 표현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노래에 표현된 ‘스승’과 나 자신을 비교해보면서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은 것은 왜일까?
 
오늘날의 대학이 ‘완성된 인간’을 기르는 수양의 공간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기능적 일꾼들’을 길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 시대의 대학교수들이 스승을 자처하기란 좀 계면쩍은 일일 수밖에 없다. ‘의식(衣食)이 족한 뒤에야 예절을 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다. 더욱이 물질이 정신을 확실하게 지배한다고 믿는 요즈음, 정신적 양식만으로 현실적인 허기를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학이란 직업 양성소가 아니라고 제 아무리 ‘고담준론’을 펴 보아도, 현실을 외면할 도리는 없다. 스승의 날을 목전에 둔 지금, 4년간 기른 제자들이 학교 울타리 밖에서 할 일 없이 서성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대부분의 교수들은 ‘좌불안석’이다. 죄인이 따로 없다. 그러니 무슨 기분으로 <스승의 은혜>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요일인 5월 15일’이 고맙고도 고마울 뿐이다. <200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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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5:43
우리 인구의 상위 1%가 전국 사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상위 100명이 여의도 면적의 절반 수준인 평균 115만평씩을 갖고 있다 한다. 행정자치부의 이 발표는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사회적 함의(含意)를 지닌다.

이성계(李成桂)와 신흥사대부들에게 체제전복의 명분을 부여하여 고려의 명줄을 결정적으로 끊은 것은 토지제도의 문란이었다. 어림짐작으로 100명도 안 되는 여말(麗末)의 권문세족들이 점탈(占奪)·겸병(兼倂) 등 온갖 탈법적 만행으로 대토지를 소유하여 국가의 재정을 파탄내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림으로써 혁명세력에게 좋은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불과 6-7세기 전의 일이다.

‘이쪽 산봉우리에서 저쪽 산봉우리/이 골짝에서 저 골짝’ 으로 표현되던 그들의 땅. 그 규모와 ‘여의도의 절반 크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순과 역리(逆理)의 역사는 이 시점에도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상당수의 권문세족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농민을 폭행하거나 협박하여 토지를 빼앗았다는 기록들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것은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와 체제의 붕괴가 서로 맞물리는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물론 오늘날의 대토지 소유자들이 여말의 권문세족과는 사회적 위치가 다르며, 토지를 소유한 경위나 배경 또한 다르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대대로 권력과 부를 세습하는 가운데 형성된 문벌들이다.

지금의 대토지 소유자들 가운데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부는 투기(投機)와 탈법(脫法)으로 당대에 부를 이룬 경우도 적지 않다. 고위직에 발탁되었다가 여론의 질타에 밀려 낙마한 일부 인사들의 사례는 그런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이 즐겨 사용한 ‘위장전입’, 금융이나 세제상의 각종 탈법·위법 등은 토지를 점탈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 여말의 권문세족들 못지않게 사회정의 상 용납되기 어렵다. 법망을 피한다거나 규정을 왜곡시키려면 작으나 크나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권위와 공권력을 능멸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경제는 나날이 나빠지고 있으며, 국민들 간의 빈부 격차 또한 점점 벌어지고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과 권력을 소유하는 것을 질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우리는 다만 탈법을 통한 부의 편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할 뿐이다. 정당한 룰(rule)을 지키며 얻은 부와 권력은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치부의 과정이 대부분 떳떳치 못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토지 소유자에 대한 조사가 20 여 년 전에 이루어졌으면서도 지금까지 발표되지 못한 점을 새삼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라를 소유한 자는 백성의 재물이 적음보다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고, 가난함보다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했다. 즉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목하면 적게 가진 불만이 없으며 백성들이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난함에서 오는 고통보다 균등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고통이나 불안의 사회적 파장이 훨씬 크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고려 왕조가 무너진 원인은 편법과 탈법에 의한 대토지 소유가 백성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든 데서 찾아져야 한다. 이 땅은 대토지를 소유한 100명만의 나라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200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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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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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검증에 간판 중시 ‘지식범죄의 온상’ 돼버려

최근 며칠째 가짜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은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지식사회의 아름답지 못한 이면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일종의 ‘테러’다. 피터 드러커의 설명처럼 지식 노동자가 권력을 갖는 사회가 지식사회라면 이 땅의 총체적 부패는 지식인들로부터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추악한 테러의 무대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넘어 러시아와 필리핀까지 번졌으니 다시 어느 나라가 이 행각의 새로운 현장으로 연루될지 자못 불안하기만 하다. 한국판 지식 범죄의 국제화라고나 할까. 얼마 전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우리 학자들의 표절사건, 온 국민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황우석 사건’ 등과 함께 이번의 가짜박사 사건으로 우리의 지식사회는 결정적인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국가 발전을 선도해야 할 지식사회의 휘청거림과 무관치 않다.
지금 우리는 가짜박사 학위를 남발한 외국의 대학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그런 대학들에서 사온 가짜 학위로 학술진흥재단에 학위등록을 하고, 어엿한 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올랐으니 문제의 근원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 옳다. 가짜박사를 교수로 채용할 정도로 진짜와 가짜도 걸러내지 못한 수준이 우리 대학들의 한심한 실태다.
 
이런 현상은 지식사회의 마비된 양식, 국가의 학문정책 부재, 대학개혁의 실패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은 개혁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치장에만 주력할 뿐 정작 개혁해야 할 본질적 대상은 초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의 목적은 대학정신의 정립에 두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의 신설이나 보완이 그 구체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박사학위 보유자 비율로 선두권에 서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없거나 부실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필연적으로 저질박사들의 온상 혹은 가짜박사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보여주는 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식정보가 널려 있고 표절행위 또한 여전한데, 오히려 논문의 심사단계는 전보다 간소화되고 있다. 적으면 한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의 심사가 박사논문 검증의 전부다. 박사 학위의 양산체제에 온정주의까지 가세하여, 저질논문을 걸러내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 기업들은 대학의 박사학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관들은 반드시 박사학위를 요구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연구업적이 뛰어나도 박사학위가 없으면 아예 서류조차 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채용 과정에서는 가짜박사를 걸러내지 못한다.

구태의연한 검증 시스템과 지식사회의 낮은 윤리의식, 실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인력 수요자들의 무감각이 지속되는 한 가짜박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짜박사들은 죽은 지식사회에 기생하기 마련이다. 지식사회의 핵심인 교수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과 성실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발표된 서울대의 교수윤리헌장은 늦었지만 적절하다. 지식사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진리다. <2006. 3. 27.>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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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5:34
 대학은 국가와 사회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곳이다. 지도자란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앞서서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경륜과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존재가 되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그 출발점은 대학 교육에 두어야 한다.
 
사실 지금은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말하자면 대학 교육의 대중화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학교육이 대중화 되었다지만, 여전히 대학에 사회 지도자 육성의 책임과 사명을 떠맡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책임을 떠맡겼으면 그에 걸맞은 자율을 보장해야함에도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대학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정권이 돈이나 각종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대학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온 점에서 대학정신의 퇴보는 당연한 업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창립 1세기를 넘는 대학들도 여럿 있으나, 본격적인 대학사의 시작은 반세기 정도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대학을 제대로 발전시켰다면 기간으로 보아 지금쯤 제 구실을 하는 상당수의 대학이 등장할 때가 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학들이 늘 파행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그동안 정권으로부터 지나친 간섭과 통제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학 경영의 독자적인 철학을 가질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정부가 시키는 대로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육만 시켜오다 보니 대학들은 홀로서기를 할 필요도, 할 이유도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정권의 위탁을 받아 타율적인 교육을 해온 게 그간의 현실이었다. 정권의 지시를 외면할 경우 받아야 할 유형무형의 압력과 재정적 손실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대학이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 상당기간 없을 것이다. 입시 면접 문항의 내용까지 세밀히 따지는 등 학생 선발부터 졸업까지 현미경을 들이대고 감시하는 상황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운위할 수는 없다.
 
철학 없는 신자유주의의 맹신이 대학교육의 황폐화를 가속시키는 현실이나 그 연장선에서 획일적인 잣대로 전국의 학과들을 서열화하겠다는 발상 등을 보라. 이제 대학은 스스로의 진로조차 잡기 어려워진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실 대학은 일종의 ‘성역’이어야 한다. 무한의 책임이 전제된 자유가 자율이다. 자율이 신장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파행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성숙의 과정에서 겪어야 할 성장통일 뿐이다. 대학은 자율 속에 커야 한다. <숭실대신문 921호, 4. 17.>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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