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11. 09:00

못 말리는 한국인의 낙서벽(落書癖)
                 
                                                       
                                                                                                                        조규익

유럽여행 중 들른 하이델베르크. 그곳 대학가에서 낙서와 관련하여 기가 막히는 장면을 만났다. 그곳 학생감옥의 벽은 수감되어 있던 학생들의 낙서와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예술이었고, 멋진 관광거리였으며, 소중히 관리되고 있는 그곳의 재산이기도 했다. 휘갈겨 쓴 낙서들과 제멋대로의 그림들에는 학생들의 패기와 울분, 낭만과 치기(稚氣)가 듬뿍 배어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었다. 몹시 부끄러운 체험이었다. 낙서예술의 원판에서 한글 낙서들을 다수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일본글자도 중국글자도 영어도 없었다. 오직 한글만이 당당하게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한 층 위로 올라가자 벽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Please do not write on the wall
▪Bitte nicht auf die wände schreiben
▪감시카메라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낚서를 하면 처벌됩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가 열심히 돈을 벌어 세계 굴지(屈指)의 경제 대국이 되더니 드디어 우리의 글자까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도다. 저것 보라! 저들이 드디어 우리 한글의 우수성까지 깨닫게 되었구나. 비록 ‘낙서’를 ‘낚서’로 잘못 쓰긴 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리는 그 경고문 앞에서 한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었다. 그 경고문 속엔 그렇게 많이들 다녀간다는 일본인들의 글자도, 직전에 이곳을 휩쓸 듯이 떼거지로 빠져나간 중국인들의 글자도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이니 독일어 경고문이야 당연하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 경고문이 붙은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독일어와 영어를 빼곤 한국어만 남는다. 그렇다면 한글이나 한국어가 이곳 독일에서 제 2의 세계 공용어로 격상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유독 한국인들만 툭하면 그곳에 낙서를 해대는 모양이었다. 그곳의 당국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어 경고문을 써 붙인 것이었다. 우리들의 못 말리는 낙서벽(落書癖). 제대로 된 기록들은 남기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어딜 가나 그릴 데 못 그릴 데 가리지 않고 괴발개발 낙서들을 휘갈겨댄다. 당당하게 제 이름 석자를 걸고 말이다. 그래 그곳에 왔다 간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더냐? 제 이름 곁에 애인 이름까지 써놓곤 큼지막하게 하트를 그려놓은 녀석까지 있었다. 성당이나 교회의 벽에도, 성벽에도 우리의 한글은 멋진 자태로 국위(?)를 선양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낙서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심지어 가만히 있는 산 위의 바윗돌까지 쫓아다니며 낙서를 하는 민족 아닌가. 금강산 관광이 본격화 되면서 직접 가서 보거나 텔레비전의 화면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 민족의 낙서벽은 북쪽 사람들이라고 예외가 아님을 말이다. 경치 좋은 산 위의 거대한 바위에 무슨 놈의 낙서들은 그리도 많이 휘갈겨 대는지, 통탄스러울 정도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 만세!’ 매일 방송이나 신문들을 통해서 밥 먹듯, 아니 숨 쉬듯 뱉어내는 문구들 아닌가. 구역질나도록 유치찬란(幼稚燦爛)한 어구들을 고결(高潔)한 자연 속에 대문짝만한 글자로 파놓을 건 무언가. 금강산의 그 아름다운 바위에 새긴 낙서들. 그것 역시 못 말리는 ‘낙서벽의 소산’ 아니고 무엇이랴.


글자나 글은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한다. 써서는 안 될 곳에 쓰면, 아무리 고결하고 심오한 문구라 해도 그건 낙서에 불과하다. 우리의 조상들은 함부로 낙서를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학생들과 학술답사를 다니다 보면 명승지의 바위에 새겨진 시구들을 간혹 보게 된다. 그러나 그건 그 경치에 합당한 문구,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문구들이다. 쓰는 사람 자신의 헛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매한 후손들이 이 경치를 보고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 생각, 그것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경애하는 민족의 태양’ 운운하는 유치찬란한 수준의 낙서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의 대통령들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 사람들은 임기가 끝날 무렵이면 자기가 만들었거나 자기에 관한 기록들을 모조리 파기해 왔다. 뒤가 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좋든 싫든 대통령의 통치기록은 한 나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소중하게 남겨두어야 한다. 정작 그런 것들은 파기하면서 각처에 개발 새발 남겨둔 친필 휘호들은 자랑스레 남겨두려 한다. 그럴 경우 그것들 역시 낙서의 수준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사실은 나도 기록을 좋아한다. 어딜 가도 항상 ‘기록하는 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달프다. 허무함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이나 여행의 감동은 하루 이틀 만에 슬금슬금 기억의 창고로부터 빠져 달아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기억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삶의 피곤함이나 여행 중의 괴로움, 혹은 험한 기억들만 괴물처럼 남는다. 나는 그게 싫어서 꼬박꼬박 적어두곤 한다.

도망치는 일상의 기억이나 여행의 추억들을 붙잡아매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기록이다. 사진도 있지만, 기록이 없는 사진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잠시의 여행이라면 그림만 보고도 기억해낼 수 있겠지만, 길고 복잡한 여행에서 단편적인 정지화면(停止畵面)만으로 추억을 되살릴 순 없다. 그래서 나는 한사코 기록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사코 기록하려는 일 또한 부질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척도를 갖고 있다. 모든 행위들 역시 그로부터 나온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그렇다면 내가 휘갈겨 대는 책이나 논문, 단상들 모두가 한갓 낙서벽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인생이 나그네길이라면, 그 여행 중에 지니고 다니며 유념해야할 하나의 화두(話頭)가 있다. 쓰고 싶을 때마다 반드시 떠올려야 할 경구(警句)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쓰는 글들은 과연 낙서인가 아닌가?’  

2007. 2. 25.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 - 학술문2007. 4. 10. 18:11
하나. 인간과 삶, 그리고 죽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만큼 무섭고 신비한 현상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스한 햇볕 아래 오순도순 즐기다가 한 순간 숨이 끊어져 깜깜하고 차가운 땅 속에 묻히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은 죽음의 불가항력에 당황한다.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다 결국 추하게 탈진한 상태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의 무자비함에 몸을 떤다. 인간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살아있는 동안 가차 없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다. 종교를 성립시키는 것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신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의 공포는 얼마간 해소될 수 있다. 그 신의 위력을 빌어 이야기되는 종교적 담론의 핵심은 죽음 혹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는 것은 죽는 순간의 통증보다 죽음 이후의 시공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살과 뼈가 원소로 해체되어 스며들거나 흩어지면 그 뿐인가. 아니면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이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판이해진다.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맞는 마지막 단계로 ‘사후 생명에 대한 희망’을 들었다. 사후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죽음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하여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네. 나는 죽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누가 더 좋은 일을 만나게 될 것인가, 신밖에는 아무도 모른다네.’ 라고 말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했지만, 소크라테스 자신도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후 세계를 믿는 것이 정신위생상 좋다는, 정신분석학자 융의 생각은 종교적 담론의 틀 안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는 현대인의 본능적 욕구를 적절히 지적한 경우다. 키엘케골은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고 그에 대한 희망을 갖는 일이야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니,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의 관념체계는 빛나는 인간 지혜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우주적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며, 조만간 직면해야 할 죽음으로부터 생겨하는 우울함이나 비애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오랜 세월 인간이 만들어온 문화적 집적(集積)의 대표 항은 ‘삶과 죽음’이다. 시간의 물결에 떼밀려가는 생명체들. 그래서 생명체에게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외연으로는 상반되는 개념들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동의어인 것도 그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수한 담론들을 만들어 왔다. 죽음의 미덕을 찬양하는 경지가 바로 그런 담론들의 극단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효과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이른바 자기방어(自己防禦)의 기제(機制)라 할 수 있다. 거추장스런 육신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상태로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 새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은 현세적 삶이 괴로운 민초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이승에서의 삶을 더 연장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이의 본능적 욕구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은 죽음을 거부하는 그들의 본능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 욕구의 한 편에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심지어 찬양하는 표현까지 생겨나는 것이다.
죽음은 문학이나 예술적 표현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제재들 중의 하나였다. <제망매가>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 가운데 꽤나 이른 시기의 노래다. 작자가 비교적 소상히 설명되어 있고, 표현기법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 사상적 배경 또한 분명하다. 그 뿐 아니라 노래를 둘러싼 정황이 신비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흥미를 끈다. 말하자면 가장 흔한 주제를 노래함으로써 보고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되, 그 정황이나 배경은 가장 신비스러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게 하는 점에 이 노래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누이동생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소재를 노래했으면서도 죽음 자체가 자아내는 미학이나 분위기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 특이하다.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지는 서정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불심(佛心)으로 윤색되거나 가공되었으며, 어떻게 지속되어 왔을까.

둘. <제망매가>에 내재된 두 얼굴의 사생관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47


‘작년에 왔던 각설이’마냥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5월. 달력을 본다. ‘5월 15일’, 붉은 색이 선명하다. 아, 살았다! 선홍색 카네이션 한 송이 받아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스승의 은혜>를 들어야 하는 고문을 면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도 없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건만, 놀랍게도 스승의 날만큼은 챙겨야 한다는 믿음(?)들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나마 스승의 날이라도 있어서 ‘선생 할 맛이 난다’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대접 받아도 좋을 만큼 제대로 교육을 시킨다고 자부하는 분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교육의 현장에 있으면서 ‘스승 노릇’ 하기 쉽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없는’ 기자들은 고등학교에서 내신이 강화된다는 신문기사를 쓰면서, 극성스런 ‘치맛바람’이 걱정된다고, 없어도 그만일 사족을 꼭 끼워 넣는다. 치맛바람이란 무엇인가. 그 속엔 ‘제 자식에 대한 불합리한 편애의 강요’와 촌지문화가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학기가 시작될 즈음이나 스승의 날 전후, 촌지의 지저분한 소식들이 언론매체들을 장식하기 시작하면 내 일이 아니면서도 곤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촌지 교사의 집을 급습하여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싸여있는 각종 명품들을 TV 화면에 비춰댈 땐 같은 선생으로서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진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첫 발령을 받은 시골 고등학교에서의 일이다. 말썽꾸러기 영수(가명)의 어머니가 찾아온 날이었다. 까맣게 탄 얼굴로 시종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나 또한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작별 인사차 밖으로 나간 내게 그 어머니는 계단 밑에 숨겨둔 콜라 두 병을 건네곤 도망치듯 내빼는 것이었다. 그 콜라는 유독 달고 맛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촌지’였다.
 
그러나 대학에는 학부모가 찾아 올 일도, 학부모를 부를 일도 없다. 그래서 촌지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대학이기도 하다. 그 대신 곤혹스런 일이 하나 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교수들을 세워놓고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곤 한다. 그런데 부르는 학생들도 듣는 교수들도 참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물론 노래를 통해 당위나 이상을 표현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노래에 표현된 ‘스승’과 나 자신을 비교해보면서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은 것은 왜일까?
 
오늘날의 대학이 ‘완성된 인간’을 기르는 수양의 공간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기능적 일꾼들’을 길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 시대의 대학교수들이 스승을 자처하기란 좀 계면쩍은 일일 수밖에 없다. ‘의식(衣食)이 족한 뒤에야 예절을 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다. 더욱이 물질이 정신을 확실하게 지배한다고 믿는 요즈음, 정신적 양식만으로 현실적인 허기를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학이란 직업 양성소가 아니라고 제 아무리 ‘고담준론’을 펴 보아도, 현실을 외면할 도리는 없다. 스승의 날을 목전에 둔 지금, 4년간 기른 제자들이 학교 울타리 밖에서 할 일 없이 서성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대부분의 교수들은 ‘좌불안석’이다. 죄인이 따로 없다. 그러니 무슨 기분으로 <스승의 은혜>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요일인 5월 15일’이 고맙고도 고마울 뿐이다. <2005. 5. 9.>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43
우리 인구의 상위 1%가 전국 사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상위 100명이 여의도 면적의 절반 수준인 평균 115만평씩을 갖고 있다 한다. 행정자치부의 이 발표는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사회적 함의(含意)를 지닌다.

이성계(李成桂)와 신흥사대부들에게 체제전복의 명분을 부여하여 고려의 명줄을 결정적으로 끊은 것은 토지제도의 문란이었다. 어림짐작으로 100명도 안 되는 여말(麗末)의 권문세족들이 점탈(占奪)·겸병(兼倂) 등 온갖 탈법적 만행으로 대토지를 소유하여 국가의 재정을 파탄내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림으로써 혁명세력에게 좋은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불과 6-7세기 전의 일이다.

‘이쪽 산봉우리에서 저쪽 산봉우리/이 골짝에서 저 골짝’ 으로 표현되던 그들의 땅. 그 규모와 ‘여의도의 절반 크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순과 역리(逆理)의 역사는 이 시점에도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상당수의 권문세족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농민을 폭행하거나 협박하여 토지를 빼앗았다는 기록들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것은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와 체제의 붕괴가 서로 맞물리는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물론 오늘날의 대토지 소유자들이 여말의 권문세족과는 사회적 위치가 다르며, 토지를 소유한 경위나 배경 또한 다르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대대로 권력과 부를 세습하는 가운데 형성된 문벌들이다.

지금의 대토지 소유자들 가운데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부는 투기(投機)와 탈법(脫法)으로 당대에 부를 이룬 경우도 적지 않다. 고위직에 발탁되었다가 여론의 질타에 밀려 낙마한 일부 인사들의 사례는 그런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이 즐겨 사용한 ‘위장전입’, 금융이나 세제상의 각종 탈법·위법 등은 토지를 점탈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 여말의 권문세족들 못지않게 사회정의 상 용납되기 어렵다. 법망을 피한다거나 규정을 왜곡시키려면 작으나 크나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권위와 공권력을 능멸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경제는 나날이 나빠지고 있으며, 국민들 간의 빈부 격차 또한 점점 벌어지고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과 권력을 소유하는 것을 질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우리는 다만 탈법을 통한 부의 편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할 뿐이다. 정당한 룰(rule)을 지키며 얻은 부와 권력은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치부의 과정이 대부분 떳떳치 못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토지 소유자에 대한 조사가 20 여 년 전에 이루어졌으면서도 지금까지 발표되지 못한 점을 새삼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라를 소유한 자는 백성의 재물이 적음보다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고, 가난함보다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했다. 즉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목하면 적게 가진 불만이 없으며 백성들이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난함에서 오는 고통보다 균등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고통이나 불안의 사회적 파장이 훨씬 크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고려 왕조가 무너진 원인은 편법과 탈법에 의한 대토지 소유가 백성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든 데서 찾아져야 한다. 이 땅은 대토지를 소유한 100명만의 나라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2005. 7. 19.
           
Posted by kicho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