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12. 24. 09:02
무지갯빛 기름띠 두른 바닷물이 바락바락 밀려드는 신두리 갯벌.
오늘도 그곳엔 검게 착색된 돌들을 닦고 훔쳐내는 손길들이 분주합니다. 이마에 솟는 땀방울마냥 표면에 기름방울 송글송글 달고 있는 돌들이 안타깝습니다. 흡사 식은땀 흘리며 병상에 누운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라 할까요? 지금껏 고향 바닷가의 돌들을 이렇게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그들의 몸을 소중하게 닦아본 경험이 없습니다. 지금껏 바닷물은, 바닷가 모래사장과 돌들은, 드넓은 갯벌은, 그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소품으로만 여겨왔습니다. 몹쓸 것들을 함부로 버려도 금세 정화시켜 우리에게 뛰어난 아름다움과 맛으로 되돌려 주는 ‘무한 희생의 어머니’로만 여겨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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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태안의 바다(최경자 촬영)


함부로 집어 던지고, 깨고, 침 뱉고, 툭하면 찾아와 욕설을 퍼부어도 그 바닷가의 돌들은 말 없는 고요함으로 우리를 맞아준 ‘묵언(黙言)의 성자’였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식놈들 얼굴 닦아주는 일도 귀찮아하던 제가 바닷가의 돌들을 정성스레 닦아 주면서 터져 오르는 회한의 오열을 삼키고 또 삼킨 것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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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에 절은, 자원봉사자의 고무장갑


울컥 치밀어 오르게 하는 기름 냄새와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 그것들을 빼면 그곳엔 살아있는 게 없었습니다.

             ***

낮이면 늘 그곳엔 새까맣게 몰려나와 해바라기를 즐기던 능정이, 쇠발이, 황발이, 송장망둥이 등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저 멀리서 다가서는 시늉만 해도 그들은 잽싸게 저들의 구멍으로 몸을 숨기곤 했지요. 그러나 기름 벼락을 맞은 이후 그곳엔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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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업보(최경자 촬영)

 아마 모두들 제 집 속에서 죽어있을 겁니다. 제 어린 시절의 삶터이자 놀이터였던 그 바닷가는 그렇게 숨을 놓아버리는 중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그 바닷가 모랫벌에서 달랑게와 경주를 하며 몸과 마음을 키워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역시 깡그리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

저를 아시는 분은 ‘저 촌놈이 또 고향타령을 시작했구나!’ 하시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오일펜스를 쳐도, 아무리 흡착포를 갖다 붙여도 물길이 이어져 있는 한, 네 바다와 내 바다의 경계는 없습니다. 기름 덩어리는 거침없는 해류를 타고 남으로 북으로 동으로 서로 마구 번져가, 결국은 우리 모두의 마음까지 황폐화 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터에 ‘독약’을 쏟아 붓고도, 달랑 흡착포 한 장 들고 걸레질이나 하라고 하는 우리의 ‘대책 없는 원시성’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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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인간(최경자 촬영)

 

             ***

기름 절은 자갈밭을 걸레질하며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연은 선택이 아닌 삶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를, 아니 상식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저만의 깨달음은 아닐 겁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었기에 이미 다녀간 자원 봉사자들이 또 찾아오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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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힘이다(최경자 촬영)


물론 한 뼘씩 걸레질을 해본들 우리가 바다에 가한 폭력의 상흔을 다 씻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기름이 절어있는 바다엔 절망만 그득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소중한 자식들의 낯을 닦아주듯 바다와 자연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만 갖게 된다면, 머지않아 바다는 다시 숨을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연과 환경이 우선이라는 인식만 갖게 된다면, 앞으론 많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오늘 걸레질을 하던 중 바위틈에서 살곰살곰 움직이는 아가 능정이를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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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능정이

분명 그건 희망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체구는 몹시 연약했지만, 조만간 그는 숨 쉴 만한 갯벌의 공간을 찾아낼 것입니다. 저는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태안의 바다가 여러분의 아낌없는 응원과 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007. 12. 23.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12. 12. 18:15
 

 안민(安民)의 불국토 건설, 그 이상과 현실

  -<안민가(安民歌)>의 내용미학-


                                                                            조규익


 Ⅰ. 정치, 백성, 그리고 질서와 무질서


국민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제1원칙이고, 국민이 편안하려면 국가의 질서가 잡혀야 한다. 무질서 속에 팽개쳐진 국민들이 부유할 수도, 편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 했다. 바르게 하는 것 즉 나라를 바로잡는 것은 왕의 책임이다. 왕이 솔선하여 바르다면 아무도 감히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노나라의 대부 계강자(季康子)에게 건네준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서양에서 정치(politics)란 용어는 원래 도시국가의 뜻을 지닌 폴리스(polis)의 파생어 폴리티쿠스(politikus)에서 나왔다. 폴리스의 전역에 걸쳐 살아가던 시민들은 민회, 평의회, 행정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국가의 정치에 관여했다. 그런 시공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정치행위는 공동체의 삶을 바르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중점이 놓여 있었다.

 <<관정경(灌頂經)>>에서는 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라 했으니, 정치에 대한 불교의 관점도 유교나 서양과 다를 바 없다. 이보다 좀 더 나아간 것이 <<출요경(出曜經)>>‘척요품’의 관점이다. 즉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알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교하지 않다고 알면 그는 곧 견고함을 구하는 것이니, ‘바른 다스림’으로 근본을 삼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정치란 바른 생각에 입각한 ‘바른 사유(思惟)’라는 것이다. 만약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 생각하고 견고한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견고한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삿된 소견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사람으로 하여금 삿된 소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삿된 소견을 갖지 않게 된다. 삿된 소견을 갖지 않아야 임금은 임금의 노릇을 신하는 신하의 노릇을 백성은 백성을 노릇을 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는 모든 질서가 바르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있었던 정치적 안정과 혼란의 원인은 정파들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거나 정치 행위 당사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직분을 망각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외세의 침탈을 불러오거나 모순의 극대화로 인해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지배자는 통치기반의 강화를 위해 애쓰고자 하나, 대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나 부침이 극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시대가 신라 경덕왕의 치세(742~765)였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시기와 달리 이 시기에 향가가 많이 등장했고, 그 가운데 ‘정치적 담론’으로 해석할만한 <안민가(安民歌)>가 제진(製進)되었다는 사실이다.

 경덕왕대의 향가로 기록된 <도솔가(兜率歌)>,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안민가> 등은 하나같이 시대 배경이나 내용의 면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들이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정파의 다툼과 그 해결을 상징적·제의적으로 드러낸 <도솔가>, 신라시대 관음신앙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도천수관음가>, 영웅적 인간상에 대한 찬양으로서 개인 서정의 실체를 보여주는 <찬기파랑가>, 정치의 요체와 국가적 지향점을 노래한 <안민가> 등이 그것들인데, 관점에 따라 노래들의 정신이나 주제는 달리 파악될 수 있겠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추측할 만한 단서들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이 글에서는 <안민가>가 드러내고 있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 혹은 착종(錯綜)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안민가>에서 노래된 치도(治道)의 요체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하)의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조에 다음과 같은 설화와 노래가 실려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과 삼산의 신 등이 가끔 현신하여 대궐 뜰에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누상에 앉아 좌우에게 물었다. “누가 능히 도중에서 영복승 한 사람을 얻어 오겠는가?” 마침 위의가 선명하고 조촐한 한 대덕이 바람을 쏘이며 거닐고 있었다.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왔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한 영승이 아니로다.” 왕은 그를 물리쳤다. 또 한 중이 가사를 입고, 앵통을 지고, 남으로부터 왔다. 왕이 기뻐하며 누상으로 맞이하여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중은 대답했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그럼, 어디로부터 돌아오시는가.” 충담은 여쭈었다. “승려들은 늘 중삼·중구일을 중시하여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옵니다.” 왕은 말했다. “과인에게도 한 잔의 차를 마실 인연이 있을 수 있겠소?” 충담이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그 차의 기미(氣味)가 이상하고 다구 속에 이상한 향기가 강했다. 왕은 또 물었다.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오?” 충담은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왕은 말했다. “그럼 짐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곧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로 봉했으나, 충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따스한 어미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신다면

 백성이 사랑을 알 겁니다

 꾸물꾸물 살아가는 중생들

 이들을 먹여 살리소서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

 나라 보전할 길 아시리다

 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시면

 나라가 태평하리이다


 이 노래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금은~알 겁니다’, ‘꾸물꾸물~아시리다’, ‘아으~태평하리이다’ 등이 그것들이다. 1단은 대전제, 2단은 방법론, 3단은 1단을 좀 더 구체화시켜 도출해낸 주제단락이다. ‘백성을 사랑함’, ‘백성을 먹여살림/나라 보전함’, ‘나라가 태평함’ 등은 각 단의 내용적 핵심이다.

 임금과 신하, 혹은 부자(父子)의 직분을 엄수하는 것이 이상 정치의 요체임은 <<논어>>에서도 설명된 바 있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우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경공은 “맞습니다. 만약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비록 식량이 넉넉하다 한들 내 어찌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으리오?”라고 공자의 현답(賢答)에 맞장구를 쳤다.

 이런 <<논어>>의 말 가운데 부자(父子)를 백성으로 대치한 것이 <안민가>의 담론이니, 선학들이 <안민가>의 배경사상을 유가(儒家)로 본 것도 응당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금이 임금노릇을, 신하가 신하노릇을, 백성이 백성노릇을 제대로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는 말이 어찌 유가만의 논리일 것이며, 사상(思想)의 차원으로까지 격을 높여 따질 내용이겠는가. ‘누구나 제 할 일만 제대로 하면 세상일은 저절로 잘 돌아갈 것’이라는 평범한 시정(市井)의 담론에 불과한 것을 세상의 학인들은 지나치게 고답적으로 따져왔을 뿐이다.

 문제는 정치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현책(賢策)을 노래에 담아달라는 왕의 요청에 이와 같이 평범한 시정의 논리로 대꾸한 충담의 의도에 있을 것이다. 신라 중대에 속하는 경덕왕  대는 체제의 모순이 서서히 현실화 하던 시기였다. 지배세력 내부의 대립과 모순이 표면화 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위기를 느낀 경덕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하지만, 그러한 개혁정책들이 쉽게 정착되지는 못했다. 왕 혼자의 힘으로 구조적인 모순을 혁파하고 귀족세력이 이미 권력의 축으로 대두된 현실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특히 왕 자신이 후사(後嗣)와 관련된 무리수를 범함으로써 추락된 왕권은 치명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식으로 후사를 삼으려는 욕망’을 왕권강화책과 동일시한 것이 경덕왕이 범한 무리수였는데, 그 당연한 결과로서 후사인 혜공왕이 피살되고, 차후 신라의 정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경덕왕은 충담을 만났다. 그렇다고 왕이 충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당대에 유행하던 <찬기파랑가>를 통해 그 작자인 충담을 왕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충담과의 대화에서 왕은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사뇌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한가요?”라고 물었다. 그에 대해 충담사는 “그러하옵니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건넸다. 그렇다면 일말의 망설임이나 겸양의 의도도 없었던 충담사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왕이 작자인 충담에게 확인하고자 한 것은 ‘심히 높다’는 노래의 뜻인데, 그 경우 뜻이란 작자의 의도나 그로부터 구현된 주제의식일 것이다.

 그것은 ‘기파랑’이란 실존인물의 덕망이 왕을 비롯한 당대 권력층의 일반적인 성향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점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충담은 기파랑과 함께 권력에 발을 담그지 않으면서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일종의 ‘재야 덕망가’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권력을 잡지는 않았으나, 대중으로부터 권력 못지않은 사랑과 신뢰를 받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왕이 충담에게 ‘이안민(理安民)’의 현책을 <찬기파랑가>와 같은 노래의 형태로 요청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감동한 왕이 노래를 받은 다음 충담에게 왕사(王師)의 자리를 주었으나 그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은 점도 충담의 정신이나 현실적인 위치를 암시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왕사의 자리를 사양했던 것일까. 애당초 자신이 정치에 뜻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치 현실이 힘없는 재야 명망가가 나선다고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은 점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런 생각의 실천을 뒷받침할만한 힘이 필요한 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실현시키지 못할 아이디어라면 꿈에 그칠 뿐이고, 그런 아이디어를 지닌 인물은 단순한 ‘이상가(理想家)’ 이상은 될 수 없음을 충담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야 명망가의 자리를 고수하고 임금에게 실천자적 역할의 짐을 떠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노래 속의 핵심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에 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제대로 ‘안하는’, 당대의 현실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말하자면 당대에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있는 점을 충담은 적절하게 지적했고, 왕은 노래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셈이었다.

 경덕왕이 왕권 강화에 나서서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들을 시행한 것도 <안민가>의 제진(製進)과 맥을 같이 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문박사와 누각박사(漏刻博士) 등을 두어 기후의 변화를 살피고 백성들의 삶을 배려하려 한 것은 위민정치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도 경덕왕의 개혁정치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충담이 눈을 주었던 대상은 백성이었다. 그의 눈에 밟힌 것은 고통 받는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이 잘 살면 나라는 태평해지는 것이고,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대본(大本)이라고 본 것이다. 백성들이 잘 먹고 살아야 ‘이상적인 불국토’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 충담의 철학이었다. 백성들이 제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지배계층은 권력 싸움들을 그만 하고 제 할 일들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충담의 정치철학이기도 했다.

 이처럼 노래에 담긴 뜻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 ‘모두 제 할 일들을 다 하는 일’ 등인데, 임금으로선 그 속뜻을 좀 더 다르게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라는 두 조항에서 전자를 ‘임금다운 권력의 회복’으로, 후자를 ‘권신(權臣)들을 다잡아 신하다운 종속의 위치로 내리는 일’로 각각 해석했을 것이다.

 민심을 읽고 있던 충담으로서는 임금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민심을 얻는 지름길이며 궁극적으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일임을 ‘넌지시’ 알려주려 했을 것이고, <안민가>는 그러한 정치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덕왕이 귀정문 누상에서 기다린 ‘영복승’이란 ‘민심의 향배를 읽을 줄 아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승려’였을 것이고, 그에게 요청한 ‘이안민의 노래’는 난국에 처한 임금이 당장 취해야 할 정치적 조치를 담은 담론이었던 것이다.


 Ⅲ. <안민가>의 정신, 그 지속과 변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상하로 묶여 국가가 지속되는 한, <안민가>의 정신은 정치의 대전제로 살아남기 마련이다. 다만 노래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제의식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정치의식을 담은 노래는 조선조의 악장이나 관각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변계량의 다음과 같은 노래는 변질된 <안민가>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서로 찾고 서로 응할 제

밝은 시절 용호(龍虎)가 만나 스스로 기약함이 있도다

신하의 절개 솔과 대라 추워도 변하지 않고

성은(聖恩)은 천지와 같아 가이 없도다

크시도다, 건원(乾元) 4덕의 온전하심이여!

황상(黃裳)의 곤도(坤道)는 하늘을 믿고 받드나이다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서로 만나 태평시절 이루셨도다

부모와 신명(神明)처럼

사람하고 공경함을 혹시라도 바꾸지 말아야 하니

임금과 신하는 오직 한 몸일 뿐이로소이다.


변계량이 세종에게 지어올린 <<자전지곡(紫殿之曲)>> 가운데 <군신지의(君臣之義)>다. 임금과 신하 간의 의리에 대한 담론인데, 내용의 핵심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에 있다. 전제 왕조시절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은 절대 불변의 명제였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 노래에서는 임금과 신하를 계약관계의 두 당사자로 규정한 셈이다. 그런 계약관계가 성립되어야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호족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움으로써 왕권과 신권인 호족세력의 상호 협조체제를 확립했던 고려 태조 왕건이나 혁명을 주도하여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공신세력과 왕권의 제휴관계를 맺게 된 조선왕조의 초기는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안민가>에서 언술된 군신관계와는 다른 모습이 이 노래에는 그려져 있다.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전제 군주체제의 기본성격인데, 왕과 신하들 간의 상호 거래를 문면에 명시한 것은 <안민가> 정신의 크나큰 변질이라 할 만하다. 만약 이 노래의 주지를 산문으로 풀어 표현할 경우 ‘군신 간의 힘겨루기’라는 서사적 주제의식이 생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만큼, 이 노래의 정치적 함의(含意)는 엄청나다. 이 노래의 주체가 변계량으로 대표되는 공신(功臣) 그룹이었다는 점은 이 노래를 <안민가>의 정신으로부터 이토록 현격하게 변질시킨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왕과 공신은 새로운 체제를 탄생·지속시키는 두 축이므로, <안민가>에 언급된 ‘군-신’과는 달리 이해(利害) 당사자일 뿐이었던 것이다.

 <안민가>와 <군신지의>에 언급된 ‘군-신’의 논리가 그 성격을 달리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면에서 담론을 달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두 노래 모두 전제왕조라는 동일한 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질된 모습을 보이긴 하나 <안민가>의 모티프가 이 노래에도 지속된다고 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안민가>는 현대시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수용되고 있을까. 이향아의 <신곡조 향가- 안민가>를 들어보자.


하루 세끼,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묵상하고 싶다

밥사발에 옹싯거리는 낱알의 변용

이것은 봄부터 가을

이것은 일년의 심판

일년의 울음과 고통

의심과 기다림에 내리는 응답

내가 감사하는 것은 세월이다

아랑곳없이 깊어지는 무심이다

끼니 때면 가끔 조상들을 생각한다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끼니마다 나는 목숨을 의심한다

이름도 벼슬도 허울임을 생각한다


그러나 밥을 먹는 평화여, 이 안분이여

결국은 감사한다

감사한다

때때로의 분망과

때때로의 무료와

때때로의 모멸과

때때로의 노여움을

지나간 시절을 거슬러 씹으며 삭힌다


내 사지와 동체 핏줄과 뼈가

일년에 일년씩 앙금으로 보태어져

아, 그 누구에게도 죄가 되는

평안을 회복한다

미안해라, 미안해라

평안 속에 갇힌다



이향아의 <안민가>를 관통하는 모티프도 ‘먹는 문제’의 해결을 통한 평안의 확보에 있다. 충담의 <안민가>에서도 중심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절박한 문제였다. 다른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조롱 속의 새’가 백성이 아닌가. 그래서 충담은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절규했다. 그렇게 갇혀 사는 백성들이 평안함을 느끼며 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길’이라 했다.

 이향아의 <안민가>도 세 개의 연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충담의 <안민가>와 같다. 첫 연의 핵심은 ‘밥에 대한 의심과 기다림’이고,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이며, 셋째 연의 핵심은 ‘평안’이다. ‘끼니마다 묵상하고 싶다’는 화자의 마음은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절절하게 드러낸다.

 ‘양순한 백성들’에겐 ‘봄부터 가을까지’ 기다려서 얻게 되는 한 해의 수확이 ‘일 년의 심판’일 수밖에 없다. 초조하게 심판의 판정을 기다리듯 한 해 열심히 노력한 백성들은 ‘배고프지 않길’ 바라면서 수확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싸잡아 ‘끼니 때면 가끔 생각하는’ 조상들이라 했다. 백성들의 배부름을 기원한 임금이나, 자신들의 배부름을 임금의 덕으로 생각한 백성들 모두 지금 끼니 때 굶지 않는 화자가 기꺼이 떠올리고 싶은 조상들인 것이다.

 ‘배불리 먹는’ 행복 앞에서 ‘이름이나 벼슬’은 허울일 뿐이라고 했다. 그만큼 시인은 먹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다. ‘밥을 먹는 평화’, 아니 ‘밥을 먹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와 그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부분이다. 밥을 먹고 평화를 얻어 감사하는 마음에 ‘분망, 무료, 모멸, 노여움’ 등은 모두 삭아 없어지는 감정의 찌꺼기들일 뿐이다.

 누구나 충담의 <안민가>에서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인식해낸다. 정치의 잘 되고 못 됨을 따지는데 다른 이론들이 있을 수 없다. 소박하고 양순한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는 것만큼 ‘잘 되는 정치’가 어디 있겠는가. 백성들에게 밥 한 술 제대로 먹여주지 못하는, 형편없는 정치집단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니 그 옛날 경덕왕 시절의 ‘재야 명망가’ 충담으로서야 못 먹는 백성들을 둘러보며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이 ‘이안민(理安民)’의 첫 조건임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왕이 물어왔을 때 임금이나 신하들이 제대로 자기들의 역할을 하라고 일갈했다. 그렇게 되어야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나라가 태평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충담의 그런 본심을 꿰뚫어 보았기에 오늘날의 시인 이향아는 자신만의 <안민가>를 읊어낼 수 있었다.


                      ***


 고래로 정치의 요체는 백성을 먹이고 편안케 하는 데 있다. 우리의 옛 노래들 가운데 충담의 <안민가>만큼 그 평범한 진리를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읊어낸 노래가 없다. 오늘날에도 그의 노래가 빛을 발하는 건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만큼 절박한 과제이기 때문이고,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12. 17:23
이탈리아 제2신
    
                          깊고 화려한 역사,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무질서
                              -나폴리의 환상과 현실


1월 3일 월요일.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폼페이를 떠났다. 하얀 눈을 이고 있는 베수비우스산은 여전히 말이 없고, 음산했던 폼페이는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스르르 묻혀져 갔다. 폼페이 시내에 있는 베수비우스 박물관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건져낸 삶의 편린들을 보고 싶었는데. 그들은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으로 가보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나폴리. 도시를 따라 펼쳐진 해변의 한 부분으로 들어온 듯, 차창으로 바닷 내음이 울컥 밀려들었다. 궂은비는 사정없이 내려 가난한 나그네들을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 신경질적인 경적소리와 위협하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난무했다. 도로 주변에 그득그득 쌓인 쓰레기는 비에 젖은 채 널브러져 있고, 가득 메운 차량들은 움푹움푹 파인 도로의 흙탕물을 사정없이 튀기며 질주했다.
주변에 호텔은 즐비했다. 그러나 어딜 가도 턱없이 비싸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이탈리아식 흥정’을 벌여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차장. 주차장을 갖고 있는 호텔이 거의 없었다. 늘 차량의 안위(安危)를 먼저 고려해온 우리였다.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차가 없었다면 그 먼 길을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보단 없어질 경우 그 골치 아픈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시종일관 호텔 선택의 첫 조건이 ‘차의 안전을 보장할만한’ 주차장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후 세 시 가까운 시각에서야 그 유명하다는 ‘나폴리 핏자’로 점심을 때웠다. 계속되는 호텔 탐색전. 어둑어둑해지는 4시쯤 구시가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과 차의 엄청난 물결이 휩쓸고 다녔다. 일방통행 구간이 많아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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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핏자와 파스타


3, 4차선 도로에도 보행자 신호등이 없었다. 차들의 눈치를 보며 길을 건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잽싸게 앞질러 달리는 차량들. 길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속력을 늦추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짜증스런 경적 소리. 도로 좌우로 꽉 들어찬 우중충한 건물들. 너무 좁아 있으나마나한 인도. 그나마 도처에 펼쳐진 공사판. 차와 사람들이 엉겨 붙은 차도. 그 틈을 비집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숨쉬기조차 어려운 매연. 비에 젖어 달라붙은 휴지조각들... 더러움과 무질서의 전시장이었다.
그 도로들을 오르락내리락 하길 여러 차례. 오후 6시가 넘어 깜깜해진 시각에야 항만에 인접한 호텔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나폴리를 그냥 포기하고 떠나버릴까’ 망설이던 끝이었다. 호텔은 허름했으나, 창문을 여니 전망이 기가 막혔다. 바로 앞에 부두가 있고, 그 너머로 지중해의 파란 물이 그득했다. 부두엔 환하게 불을 밝힌 페리선 여러 척이 정박해 있고, 선착장 곳곳에 서 있는 지구 모양의 조명등은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었다. 주차장과 배들 사이로 분주히 오고가는 사람들. 비로소 이곳이 항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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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항


누가 나폴리를 미항(美港)이라 했을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배들이 정박한 항구를 내려다보며 서운했던 마음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발만 시내로 들여놓으면 나폴리는 ‘지저분과 무질서’의 전시장이었다. 나폴리를 미항이라고 예찬한 누군가의 ‘턱없는 과장’, 우리는 그 실체를 확인해야 할 의무(?)까지 지게 된 셈이었다.
 1월 4일 아침, 창 밖으로부터 맑은 햇살이 비쳐왔다. 호텔방에서 내려다보는 에머럴드 빛깔의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페리들의 하얀색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내로부턴 여전히 차량들의 소음이 퍼붓듯 몰려오고, 도로엔 날 선 병 조각들과 날리는 휴지조각들이 여전했다. 어젯밤의 그 모습에 햇살만 사알짝 내려앉았을 뿐.
햇살은 비에 젖은 쓰레기를 말리고, 마른 쓰레기는 다시 먼지를 피워 올릴 태세였다. 차량들과 사람들은 어제처럼 한데 엉겨 도로를 가득 메울 것이고, 그 위에 또 휴지를 버리고 담배꽁초들을 뱉어낼 것이다. 그렇게 ‘미항’이란 ‘미명(美名)’이 붙여진 나폴리를 우리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깜빠냐Campania주의 주도 나폴리. 그러나 나폴리는 기원전 6세기부터 외세를 포함한 지배세력의 잦은 교체를 겪어왔다. 그리이스(기원전 6-5세기)를 시작으로 노르만족(12세기), 앙주Anjou·아라곤Aragon 가문(13세기), 스페인(16세기), 프랑스 부르봉 왕가(18세기) 등 다양한 세력들이 나폴리를 지배했다.
도시의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들. 그래서 단순히 항만도시라는 이름으로 나폴리의 역사적 의미를 덮어버릴 수는 없다. 복잡다단한 거리만큼이나 의미 있는 역사유물 혹은 유적들이 다양했다. 나폴리의 역사 유적 혹은 관광 포인트는 구역에 따라 대충 10 개 정도로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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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서점가 골목


플레비스치토Plebiscito 광장과 왕궁, 성 프란체스코 교회, 성 페르디난도 교회, 제발로스Zevallos 궁전, 성 브리지다Brigida 교회, 누오보 성Castel Nuovo, 성 지아코모 데글리 스파뇰리San Giacomo Degli Spagnoli 교회, 성 마리아Santa Maria di Portosalvo 교회, 성 피에트로 순교자San Pietro Martire 교회, 피에트라르사Pietrarsa 철도박물관 등을 첫 구역으로, 단테Dante 광장, 삼위일체 교회, 성령교회, 성 니콜라스 교회, 그라비나Gravina 궁전, 기우소Giusso 궁전, 파파코다Pappacoda 성당 등을 둘째 구역으로, 성 테레사 교회, 성 뽀티또Potito 교회, 벨리니Bellini 극장, 성 지오반니 바티스타 델레 모나체 교회, 국립 고고학박물관, 성 겐나로 카타콤, 카포디몬테 박물관, 천문대 등을 셋째 구역으로, 프라마리노 궁전, 대주교 궁전, 아포스톨리 교회, 성 죠반니 교회, 포르타 카푸아나 광장 등을 넷째 구역으로, 벨리니 광장, 성 피에트로 아 마이엘라 교회, 폰타노 성당, 로마 수도관, 성 로렌쪼 마기오레 교회, 카푸아노 성 등을 다섯째 구역으로, 성 세베르토 성당, 파로라미타 궁전, 몬테 디 피에타, 성 죠르지오 마기오레 교회, 코모 궁전 등을 여섯째 구역으로, 몬텔레오네의 피그나텔리 광장, 성 치아라 단지, 성 도메니코 마기오레 교회, 코리글라노 광장 등을 일곱째 구역으로, 벨베데레 저택, 루치아 저택, 성 카를로 교회, 타르시아 궁전 등을 여덟째 구역으로, 예술과 산업 박물관, 성 크로체 교회, 델로보 성, 세싸 궁전, 시나고그, 루터란 교회, 비르길의 무덤, 앵글리컨 교회 등을 아홉째 구역으로, 델라 보르사 궁전, 성 펠리체 저택, 페이르체 저택, 보비노 궁전, 갈리 궁전, 스페라 저택 등을 열째 구역으로 각각 나눌 수 있으리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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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 누오보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항


<계속>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9. 18:02
이탈리아 제1신 :            삶은 축복인가 고통인가
                                   -폼페이의 비극을 보며


폼페이!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소설과 영화로 이미 우리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준 도시. 그러나 현장에서 보는 폼페이는 허구화된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정겹고도 슬픈 현실의 공간이었다.
정겨움과 슬픔. 일견 모순적인 두 감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모습들과 큰 차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전자이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 속에 생명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후자이리라. 그 날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던 베수비우스 산정엔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용하게, 흡사 경고라도 하려는 듯 침묵 속에 무언가를 피워 올리는 그 자태가 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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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폼페이 극장


지금으로부터 1926년 전인 A.D. 79년 8월 24일 이른 오후. 한창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시각. 대부분의 폼페이 사람들이 늘 그래왔듯 일상에 분주하던 바로 그 때, 엄청난 포효와 함께 베수비우스산은 폭발했다. 검은 화산재는 용암과 함께 분화구를 솟구쳐 나와 도시를 덮쳤고. 단숨에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린 죽음과 파괴의 견고한 울타리로 변했다. 영광과 긍지의 폼페이는 일순 지표에서 6-7m 아래로 매장되고 말았다.
기원전 8세기 경, 티레니안 해변을 따라가며 정착하기 시작한 일단의 오스칸(Oscan) 사람들. 과거 언젠가 베수비우스산의 융기로 만들어진 높은 지역에 마을의 중심을 만들었다. 그것이 폼페이의 두드러진 전략적 위치였다. 그 때문에 속속 이 지역의 주역들은 바뀌게 된다. 에트루스족(Etruscans), 그리이스족(Greeks), 샘족(Samnites) 등. 결국 폼페이는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고, 기원전 80년엔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콜로니아 베네리아 코르넬리아 폼페이(Colonia Veneria Cornelia Pompeii)'란 이름도 갖게 되었고.
화산재에 덮인 지 1천 7백년 후 사르노(Sarno) 계곡에서 터널을 건설하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가 명문(銘文) 석판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파묻힌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1748년 실질적인 첫 탐사가 챨스 부르봉(Charles Bourbon)의 지휘로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1세기 가량 뒤인 1860년 쥬제뻬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에 의해 ‘신화 속의 폼페이’는 기적적으로 우리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80% 정도만 빛을 보았고, 나머지 20%는 아직도 암흑 속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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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죽은 일가족의 모습


3km의 긴 성벽에 여덟 개의 문을 가진 폼페이. 서쪽에는 신전들과 공공건물들이 있는 포럼(Forum)이, 앞쪽에는 대극장과 일반 주택들이, 성문 밖에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가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바다로부터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폼페이. 그러나 화산 폭발 후 항만이 메워져 그 거리는 2km로 늘어났다. 물론 항만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도 알 수 없지만. 폼페이에서 가장 오랜 건물들은 기원전 6세기의 것들. 그 후 도시는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 2세기 후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여 폼페이, 스타비아(Stabia),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등의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의 장군 실라(Silla)가 이들을 재 정벌했다. 원주민들은 새 이주자들에게 공간을 내주고 떠나야 했다. 폼페이 유적들의 건설 시기가 대부분 기원전 80년경인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에 의해 정비된 폼페이에 적용된 것은 합리적인 도시 시스템. 특히 둥글고 넓은 돌로 포장된 도로와 물 공급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도로포장엔 베수비우스 산의 암반으로부터 가져온 둥글 넙적한 돌들을 사용했고, 사르노 강과 샘에서 물을 받아 도시 전역에 파이프로 공급해주었다. 주 송수관은 포장도로 밑에 묻혀 있었으며, 그 송수관들을 통해 부유한 주민들의 집과 공중목욕탕, 가난한 서민들이 사용하던 공공 파운틴으로 물이 공급되었다.
폼페이의 인구는 8000에서 1만명. 약 6할이 자유민, 4할이 노예들이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동방 출신들로서 교육수준도 높았다. 그 가운데는 주인보다 훨씬 교육수준이 높은 노예들도 있었다. 잘 사는 집은 2, 3명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고, 그보다 나은 집에서는 더 많은 수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노예들 가운데는 박사도 교사도 있었다는 사실. 어떤 노예가 원한다면 주인의 은전(恩典)을 입거나 많은 금액의 돈을 지불함으로써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미로와 같은 폐허를 누비고 다녔다. 사통팔달된 도로를 경계로 나누어진 구획들에는 주택들과 공공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각각의 주택들도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차이 때문인 듯 규모나 구조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호화로운 흔적들이 역력했다. 특히 화덕이 설치된 부뚜막은 그림 같은 무늬가 화려한 대리석을 매끄럽게 갈아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뿐 아니라 몇몇 집이나 건물들엔 아직도 생생한 그림들이 벽화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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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판 '비너스의 탄생'


원형 경기장, 극장, 공공건물, 신전, 일반 주택 등을 비교적 자세히 돌아본 우리들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있었다. 서쪽 메인 포럼의 아폴로와 다이애나 신전, 공중목욕탕, 그리고 그림들.
메인포럼은 폼페이의 아크로폴리스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이곳엔 아폴로와 다이애나 신전이 있었다. 그곳 정면에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활을 쏘는 아폴로. 근육질의 몸매가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얼굴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들도 태양과 달을 숭배하여 가장 높은 곳에  둘의 신전을 세워 놓았던 것인가.
다음은 공중목욕탕. 기원전 수세기의 도시인들이 공중목욕탕을 사용한 흔적을 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서울이나 지방에서 가끔씩 사우나엘 가보지만, 그 때마다 형편없는 시설과 서비스에 불만을 느껴오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3, 4백 년 전의 이들이 멋진 목욕탕에서 향유하던 삶의 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건물 벽이나 바닥, 혹은 천장에 남아있는 상당수의 그림들도 만났다. 화려한 채색이, 멋진 선이 아직도 살아 생생했다. 그 뜨거웠을 화산재도 그들의 예술을 망가뜨리진 못했으니, 놀랍도다.
그림들의 오브제는 신화 속의 인물들이 대부분이고, 가끔 화조(花鳥)나 사자 등 동물들도 있었다. 두루미와 원앙이 연꽃을 희롱하는 그림은 흡사 동양화를 보는 듯 했고, 모자이크 화의 섬세함은 참으로 놀라웠다. 뛰어난 형상력과 색채감, 지금의 그림들 못지않거나 오히려 능가한다고 보면 좀 지나친가.
그런데 어찌 이것밖에 없는 것인가. 그곳 담당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출토된 것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라고. 그러자 그는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폼페이 그림의 진수는 모두 그곳에 가 있다는 대답이었다. 내일 나폴리에 가면 우선적으로 고고학박물관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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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의 탄생' 근처에서 발견한 그림('옥타비안의 최후'로 기억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음)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놀랍고 슬프게 한 것은 출토품들을 임시로 저장해놓은, 이른바 ‘뮤지엄’이었다. 그곳엔 대량의 그릇들(주로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담기 위해)이 있었고, 간간이 미이라처럼 굳어진 시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 그대로의 미이라가 아니었다. 화산재에 묻힌 시신들은 썩어 없어졌고, 굳어진 화산암 속에는 시신들이 사라진 공간이(사람들이 죽을 때의 모습으로) 생겨난 것이다. 훗날 발굴할 때 그 틈에 석고를 부어넣어 응고시켜 만들어낸 것들이 바로 그 시신들이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모으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엎드려 몸부림치는 모습,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꼬부린 모습 등.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 순간만은 모호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그들은 죽음의 재가 덮이는 순간 과연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가슴에 밀려드는 슬픔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약한 인간의 무력함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한낮이었으면 낮잠을 즐기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일터에서 땀을 흘리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길 하나 건너 이웃집에 마실 나간 아낙도 있었을 것이고, 동네 파운틴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등물을 하던 떠꺼머리총각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그들은 화산재에 묻혔다. 일가족이 얼어붙은 듯 죽어있는 모습. 어른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저 젖먹이는 어째서 이런 천재(天災)의 희생이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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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수비우스 산(이 산이 그토록 무서운 불을 뿜었답니다)


서유럽에서 우리는 매끈한 현재진행의 역사만 보았다. 과거가 고스란히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 잘 나가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우리는 정지된 시간과 공간을 보았다. 건물은 부서져 폐허로 남아 있었다. 대리석 기둥은 연필심처럼 부러져 나뒹굴고, 단단한 초석도 조각조각 난 채 쳐 박혀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건 처참한 패배이자 소멸이고, 좌절이었다. 소생의 가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투철한 안목을 지니지 못한 우리에겐 일단 ‘허무’였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욕망이었다. 인간 욕망의 보편적인 귀결은 허무임을 그들은 깨어진 돌조각으로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잠시 혼란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었다. 과연 지금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지금 죽은 듯이 보이는 그 역사가 과연 완전 소멸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지금도 9·11테러, 이라크 전쟁 등 인간 문명에 관한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사건들은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들은 물질의 폐허가 아닌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또한 ‘쯔나미’처럼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초토화시키는 자연재해 또한 빈발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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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구시가지와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시가지의 대비되는 모습


폼페이에서 인류문명이 봉착할 수도 있는 위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우리.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인근의 나폴리로 향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폼페이 유물들을 통해 폼페이의 문명사적 의미를 좀더 살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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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