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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26 게리를 하늘나라로 보내며 1
  2. 2015.03.03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글 - 칼럼/단상2016. 1. 26. 21:09

 

게리를 하늘나라로 보내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 폰을 켠 게 불찰이었을까.

이메일 함에 레슬리(Lesley) 교수의 이름과 함께 떠오른

‘Very sad news’란 세 단어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게리(Gary Younger)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각주:1]

그의 어머니와 함께 휴스턴에서 스틸워터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갑자기 캄캄해진 눈앞에서 추억의 필름 한 통이 스륵스륵 돌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던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의 고속도로들.

주변의 경관들이 단조롭고 광활해서 짜증나던 곳.

풀을 뜯던 목장의 소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새김질에 몰두하던 곳.

사마귀 모양의 원유 채굴기들이 끄덕거리며 열심히 원유를 퍼내던 곳.

그런 한가한 도로에서 웬 교통사고?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연구원으로 한 학기를 지낸 곳이다.

그곳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던 그를 만났다.

고등학교 교사를 몇 년 지낸 뒤 진학했기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보였다.

한국 현대사, 그 중에서도 한미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그였다.

자주 내 연구실을 찾아와 물었고,

우리는 꽤 긴 시간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문제에 관한 논평을 내곤 하는 미국의 전문가들이 있었는데,

알고 보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통이었다.

가끔 내가 너를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

가당찮은 너스레를 떤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귀국 무렵 그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프로그램에 지원하게 했고,

귀국 후 얼마 만에 한국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그는 열심이었다.

한국말도 열심히 배웠다.

연구기관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도 열심히 수집했다.

내 말대로 몇 년 안에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로 열심이었다.

술자리에선 미국인답지 않게 소주를 잘 마시고 삼겹살도 잘 씹었다.

‘1년 만에 한국사람 다 되었다는 농에 식당 가득 파안대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하늘나라로 갔다는 그의 부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려는 꿈을,

이승 아닌 어디서 펼치겠다는 것일까.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박사 후 과정을 하겠다는 그 계획을 어디 가서 이루겠다는 것일까.

어학능력도, 분석력도, 아시아 역사에 대한 지식도 출중한 그였다.

그래서 앞으로 10. 아니 사실은 10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그였다.

미국의 일본이나 중국 전문가들이 곁다리로 내 뱉는 한국 관련 논평들이 못마땅하여

그가 제대로 된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기를 기원해온 나였다.

지금 30대 초반이니, 어쩜 40대 초반에는 미국의 실력 있는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여

내 속을 후련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가고 말았다.

흔적도 없이, 누구 말대로 나 이제 갑니다라는 말도 못한 채

그는 그렇게 가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죽음보다 삶의 덧없음, ‘수포로 돌아간 삶의 계획,

아무 약속도 할 수 없는 공허함이 두려운 것이다.

그가 가꾸어 온 꿈과 삶의 흔적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간 것인가.

저 숲속의 늠름한 나무들은 못 된다 해도

하다못해 길 가의 못난 띠 풀로라도

하다못해 보이지 않는 메아리로라도

모습을 바꾸어 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잠시 고갤 숙여 내려다보면 보일 것이고

잠시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들릴 것 아닌가.

그렇게도 열심히 꿈을 보듬어가며 살아온 인생인데...

 

게리여,

부디 이 땅의 하찮은 꿈 따윈 접어두고

그곳에 맞는 새 꿈을 가꾸며

행복한 삶을 누리시라!

머지않아 찾아갈 그대의 동료들을 위해

그대만의 멋진 영역을 잘 가꾸어 놓으시라!

 

 

2016. 1. 26.

 

게리 영거의 부음을 듣고

 


숭실대 교정에서

 

 


올림픽 공원에서

 

 


백규 연구실에서 게리와 세바스티안

 

 


백규 연구실에서

 

 


숭실대 교정에서

 

 


학교 앞 식당에서

 

 


선무치료학 전문가 이선옥 박사 및 이 박사의 지인들과 함께

 

  1. *레슬리 교수로부터 온 이메일의 번역문과 원문// 조박사님께 얼마 전부터 박사님께 편지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제 급한 일이 생겨 연락드리네요. 오늘 아침 일찍 게리 영거와 그의 모친이 휴스턴에서 스틸워터로 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끔찍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어요.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저는 우리 학과에서 지금까지 가장 우수한 학생들 중의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에 비통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명랑했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자신의 공부에 관하여 열심히 말했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가 한국 역사의 뛰어난 학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너그러웠으며, 그래서 전 학과가 모두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박사님께서도 그에 관하여 똑같은 느낌을 갖고 계시리라 믿어요. 특히 박사님과 그가 한국에서 얼마동안 함께 계시기도 했잖아요? 그는 박사님이 OSU를 방문해주신 점에 대하여 매우 고맙게 생각했어요. 글쎄요. 유감스럽게도 제가 나쁜 소식을 전한 사람이 되었네요. 저는 박사님께 저의 위로를 보냅니다. 게리의 죽음이 박사님께도 굉장한 상실이겠지요. 레슬리 림멜 드림 Dear Dr. Cho, I've been meaning to write to you for some time, but now there is something else that is rather urgent. Earlier today I learned the horrible news that Gary Younger and his mother were killed in a car accident on their way to Stillwater from Houston. I don't know any details, and I am heartbroken about the loss of one of the best students we have ever had in our department. He was always so cheerful and eager to work and to talk about his work; we were all certain that he was going to be an outstanding historian of Korea. He was also so kind and generous to others, and the whole department is in mourning. I am sure that you felt the same way about him, especially as you and he spent time together in South Korea. He so appreciated your visit to OSU. Well, I am sorry to be the bringer of bad news. I send you my condolences; this must be a great loss to you, too. Sincerely, Lesley Rimmel [본문으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3. 17:01

 


떠나기 전날 찾아온 게리와 함께 숭실교정에서

 

 

 


어느 여름날 찾아온 두 사람.
왼쪽부터 게리, 백규, 세바스티안(시조를 전공하는 독일인)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작년 9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6개월을 보낸 게리(Gary Younger)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간 한국말을 열심히 배운다고 했는데, 30여년 모어(母語)인 영어만 쓰다가 처음으로 한국어를 접해서인가. 귀국 인사차 연구실로 찾아온 그의 한국어 실력을 테스트하다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참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구나!’란 깨달음과 함께, 나이 들 만큼 든 지금도 영어 책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에게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

 

201391일부터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에서 나는 한 학기 예정의 풀브라이트 방문학자(Fulbright Visiting Scholar)’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중국인 두 교수(Du, Yongtao), 학과의 비서인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 등이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이었고, 연구실로부터 가까운 우편함이나 복사실 혹은 간식이 준비되어 있던 휴게실에서 만나는 교수들이 주로 접하는 대학인들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두 교수도 강의실-연구실-복사실등을 통통거리며 굴러다니듯 바쁘게 지내는 바람에 대면할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이나 되었을까. 두 교수가 메일과 전화로 강사 중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한 공간에 살면서 그냥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되지, 중간에 누구를 넣는 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Any time okay!’라는 답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 주일이나 되어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전형적인 코카서스 인종의 미국인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예의 바르다고 할 수도, 낯을 가린다고 할 수도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있다가 사직한 뒤,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미 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 때부터 우리는 간간이 만났다. 주로 내 연구실에서, 가끔은 학교 안팎의 식당들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와 내가 번갈아 정했다. 나는 한국의 정치 외교적 이슈들에 관해 주로 Korea Herald에 실리는 칼럼들을 소개했고, 그는 NYTWP 등에 실리는 미국의 정치 외교 관련 기사들을 준비해왔다. 내가 말하는 한국의 사정, 그가 말하는 미국의 사정은 수산시장의 새벽 경매에 나온 물고기들처럼 늘 싱싱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종횡무진이었다. 그는 내게 최고의 미국 선생님, 나는 그에게 최고의 한국 선생님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가끔 호기를 부리며 여기서 나를 몇 달 동안 만나고 직접 한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면, 머지않아 당신은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리라!”고 큰소리치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사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돈 한 푼 안들이고’, 아니 오히려 약간의 돈이라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내 분야이든 정치 외교 분야이든 외국인의 한국 연수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던 나로서 약간 켕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책도 없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내 미국 체류 예정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도 내 눈치를 보는 듯 했고, 나 역시 뱉어놓은 말들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연락을 넣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답이 왔다. 게리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으로, 외국의 젊은 학자 혹은 학자 지망생이 돈을 받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목 말라오던 차에 발견한 오아시스가 바로 이런 것인가. 다음날 게리를 만나 상세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두 주의 여유를 줄 테니 양식에 맞추어 작성한 프로포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득달같이 프로포절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지도교수의 확인을 거친 다음 약속날짜 이전에 건네주는 게 아닌가. ‘한국전쟁 이후 한-미 외교 현안들의 이념적 기조라는 제목의 글. 아마 그가 박사논문으로 쓰려고 준비하던 내용의 일부인 듯, 논리가 매우 치밀하고 온당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기대지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 판단했는데, 과연 그는 선정되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넉 달 동안 연구원 내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수강했고, 나머지 두 달 동안은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간혹 내게 찾아와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며 자신의 한국생활을 말하곤 했다. 작별의 인사를 하러 온 날. 그의 턱과 볼을 에워싼 멋진 수염을 보게 되었다. 객지에서 매일 수염 깎는 일이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자신의 변화를 가시화 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었으리라.

 

많은 말들을 남긴 채, 또 멋진 수염을 통한 모종의 암시를 남긴 채, 그는 떠났다. 난생 처음 겪는다는 해외 체류이자 한국 체류 6개월. 그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내가 큰소리 친 것처럼, 머지않은 장래에 그는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추석 지난 뒤 문현 선생의 작품 발표회에서. 왼쪽부터 세바스티안, 게리, 문현 박사, 백규, 
송지원 박사(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케이트 교수(영국 런던대 음악과) 등과
숭실대 국문과 학생들(이수빈, 박문성, 리아, 최연, 권리나) 

 

 


2014년 추석날의 멋진 모임.
선무치료학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 뒷산의 '노래와 담소 모임'에 합류한 게리와 세바스티안.
왼쪽에서 두번째 인사가 이선옥 박사, 그 다음이 범패의 대가 범진 스님, 백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