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1. 11. 01:51


“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서울 시장의 홈피[원순닷컴]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찌르는 말 한 마디를 발견했습니다.

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어문대학장인 유재원 교수가 박 시장에게 보낸 메일의 제목이었습니다. 유 학장의 호소 속에는 언어학자의 프로의식과 함께 말기에 접어든 우리의 병통을 호소하는 지식인의 절규가 들어 있었습니다. 우선 유 학장의 메일 내용을 읽어 본 다음 제 생각을 덧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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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가 아무 소리 없이 학문어의 자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위치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부터 영국의 대학 평가 회사인 QS(Quacquarelli Symonds)와 공동으로 실시하는 “아시아 대학 평가”에는 한국어 논문에 대한 점수가 아예 고려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 QS라는 회사는 2003년부터 영국의 The Times와 세계대학평가를 실시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The Sunday Times와 US News and World Report를 통해 세계 대학평가를 시행할 예정이라 한다.

조선일보의 대학평가 기준은 ▶연구능력(60%) ▶교육수준(20%) ▶졸업생 평판도(10%) ▶국제화(10%) 등 4개 분야를 점수화해 순위를 매기는 것으로 연구 능력과 국제화가 모두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을 전제로 평가되기 때문에 결국 영어 논문 비중이 70%나 반영되게 짜여 있다. 또 평가의 총괄 책임자도 벤 소터라는 영국 사람이 맡고 있다.

QS의 대학 교수 연구 능력 평가는 ‘스코퍼스(
http://www.scopus.com’)라는 네덜란드 회사가 만든 데이터 베이스와 검색 엔진을 이용하여 각 대학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과 논문 당 인용수를 검색하여 교원 수로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서의 스코퍼스 관리는 ‘엘즈비어 코리아’에서 하고 있음.) ‘스코퍼스’사는 세계 약 25,000여 개의 학술지를 국제 저명 학술지로 등록하고 있는데, 이 학술지들은 모두 영어로 쓰여 있다. 이 기준을 따르면 한국어로 쓴 논문은 ‘0’점으로 처리되게 마련이다.

이런 평가 기준에 대한 각 대학의 반응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모든 대학은 국제 저명 학술지 게재율을 높이기 위하여 상당한 특혜를 베풀고 있다. 보기로 부산대학에서는 SCI나 SSCI, A&HCI 1 편당 현재 1 억을 지급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경희대는 국제 저명 학술지 논문 1 편당 600 점을 부여한다.

이와 같이 한국어로 논문을 쓰면 ‘0’점을 받고 영어로 논문을 써서 국제 저명 학술지에 실리면 거금의 포상금을 받는 현실에서 한국 대학 교수들이 한국어로 논문을 쓰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어로 논문을 쓰는 교수는 ‘패배자[looser]’임을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만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우리말 한국어는 이 땅에서 학문어로서의 지위를 영원히 잃고 저급한 2류 언어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이것은 예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대학 개혁이 성공할 경우,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나 인도, 필리핀과 같은 나라의 위치로 전락할 것이다. 이들 나라의 지식인을 비롯한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모국어로는 학문도 철학도 할 수 없어 영어로 모든 고급 문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최대 지성이자 사회의 지도 계층인 대학 교수들을 비롯한 한국 학자들이 더 이상 한국어로 논문을 쓰지 않을 때, 한국어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학문과 문학을 창조하지 못하는 언어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지극히 간단한 이치다. ‘청(淸)’을 세운 만주족과 ‘원(元)’을 세게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던 몽골족도 한자와 중국어에 문화 주도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인류 최초의 학문과 사상, 문학을 꽃피웠던 수메르어와 산스크리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라진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지금의 유럽 문명의 모태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아직도 서양 여러 나라의 언어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모든 고급문화 생활이 영어로 이루어지게 되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문맹’에 빠지게 된다. 지금 영어를 문화어로 내세워 한국어를 말살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일반 국민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언어 차별은 인종 차별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땅에서 영어를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인종 차별을 받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한국어 천대 현상이 계속되는 한, ‘영어를 하는 한국인’과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으로 나뉘어 차별을 받게 될 날도 멀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무도 나서서 저항하지 않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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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학장의 글을 읽어보신 소감들이 어떠신지요? 참, 절박한데도 그동안 여러분이나 저는 전혀 그 절박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요? ‘말 없는 삶’을 상상해 보셨나요? ‘말을 잃으면 정신을 잃는다’는 격언도 들어서 알고들 계시겠지요? 우리에겐 우리말을 빼앗긴 채 살아본 세월이 있었습니다. 또 우리말을 표기할만한 글자를 갖지 못하고 살아온 긴 세월이 있었지요. 최근 어떤 방송에서 한글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 세종대왕의 삶을 스토리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된 바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내용이 사실인지 허구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민족사[혹은 민족 정신사]의 방향을 바꾸게 된 세종대왕의 깨달음이나 결단이 어디서 나왔으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작가 나름의 ‘상상력’이 얼마나 핍진(逼眞)하게 마음에 와 닿는지 우리 모두 공감하지 않았던가요?

독일의 애국자이자 철학자인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를 잘 아실 겁니다. 그의 유명한 글 <독일국민에게 고함>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독일’ 대신 다른 어느 국가나 민족의 이름을 넣어도 통할만한 보편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글 가운데 오늘날의 우리 현실과 관련하여 큰 깨달음을 주는 문제가 바로 ‘언어’의 존재와 의미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언어를 매개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은 국어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 언어는 한 민족의 특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 즉 한국인[피히테가 말한 ‘독일인’을 제가 한국인으로 바꾸었습니다]은 한국어라는 살아 있는 특수한 언어를 통해서만 무한히 한국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 살아 있는 한국어를 말하는 한국인은 ‘신적 본질’을 지향하여 드높여질 수 있다는 것[고양(高揚)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가 주장한 민족어의 중요성이지요.

우리나라에도 고금을 통해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선각자들은 많았습니다만. 그 가운데 ‘한문지상주의(漢文至上主義)’ 시대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를 살다 간 최고의 지성 서포 김만중 선생이 그의 글「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펼친 다음과 같은 주장은 오늘날에도 금과옥조로 삼을만한 선언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생각[마음]이 입에서 나온 것을 말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어문(語文)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우니, 가령 십분 서로 비슷해 보여도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길거리의 나무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서로 깔깔거리고 화답하는 말들이 비록 비루(鄙陋)하다 해도 그 진위(眞僞)를 논한다면 정말 학식이 많은 사대부들의 이른바 시부(詩賦)라는 것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

한문으로 쓴 글만이 글로 인정을 받던 시절에 한문의 대가 서포선생은 이런 말로 ‘자국어’와 ‘자국 글자’의 가치를 설파했습니다. 그가 한문의 대가였으면서도 ‘우리말이나 글이 한문에 비할 바 없이 귀하다’고 한 것은 그 분 스스로 말과 글이 인간의 정신적 산물임을 깨닫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외국어문을 잘 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강점입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는 요인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자국어로 사색하고 자국어로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 인문학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인문학 논문을 영어로 써야 한다면, 그것은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쓴 논문[실제 종이 위에 적은 것이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든]을 영어로 번역한 데 불과한 것입니다. 독일어문이 언제 그렇게 훌륭한 학문어가 되고 문학어가 되었나요? 오랜 세월에 걸친 독일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민족자주’를 외칩니다. 일본에게 말과 글을 빼앗겼다가 간신히 찾은 때로부터 지금 몇 년이나 지났나요? 그 혹독한 시련에서 벗어난 지 겨우 60년 남짓 지났을 뿐입니다. 우리의 민족 지사들이 일본의 그런 무자비한 폭압에 맞서 얼마나 가열 찬 투쟁을 벌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말과 글을 빼앗은 일제시대의 민족적 비극과 저항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영어의 쓰나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말과 글을 버리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밤을 밝혀가며 우리말로 사유하고 우리 글로 써 내는 논문들을 평가의 대상에도 넣지 않으려 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니, 아예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민족을 떠들고 세종대왕을 우러러 본다고 하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것을 버리고 우리가 어디에 가서 우리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국제 학문시장에 나가 우리 인문학의 연구결과를 영어로 발표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일 뿐, 전체이거나 본질은 아닙니다. 요즘 들어 왜 우리 사회는 한사코 일의 본말(本末)을 뒤집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없는 정권이 몰고 온 말기적 증상이라 간단히 치부해 버리기엔 무언가 찜찜하고 불안한 구석도 없지 않습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우리가 지금처럼 중심을 잡지 못할 경우 앞으로 민족사의 비극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근래 들어 엄습해 옴을 느끼는 것은 저 혼자만의 기우(杞憂)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2012. 1. 10.>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 20. 20:30

‘인문학의 쇠락’이라는 절망적 징후의 고문 속에 지난해를 보냈다. 논문을 쓰고 학회에 참여하고 강의실을 들락거리는 등 습관화된 생활인의 자세를 견지하며 '늘 삶은 이런 거야!’라는 자조적(自嘲的) 자기암시에 길들여지고 있는 나날이다. 해가 바뀌면서 뭔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날이 갈수록 바뀌는 해가 결코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절망적 명제로 개칠되어가고 있음을 절감하는 요즈음이다. 학장직에 도전하면서 감히 ‘인문학의 부흥’을 선언했지만, 학장이 되고나서 어느 순간 스스로 인문학의 말살에 참여하고 있는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변의 교수들에게 그 대열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나를 발견하곤 더 깊은 절망과 회의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젊은 시절 나를 학문으로 이끌어주신 선생님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책'으로 승부할 것을 힘 주어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금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썩지 않을 책’ 아닌 ‘곧 썩어 문드러질’ 학진 등재 학술지 논문들의 작성에 정력을 불사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 논문을 심사할 가능성이 많은 동학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주장에 서 있는 날을 갈아대는 ‘약삭빠름’을 배운다. 그들의 ‘그다지 빛나지 않는’ 논문들을 참고문헌에 집어넣는 교활함도 익혀본다. 학회지의 정해진 규격에 맞추기 위해 ‘맛있는’ 부분들을 죄다 잘라내고 건조한 뼈다귀들만 남겨둔다. 혹시나 탈 잡힐까봐 ‘논리’라는 미명 하에 전혀 맛없는 문장으로 다듬어낸다. 그걸 학문이랍시고 매달려 사는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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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본부에서 학과평가를 하겠다는데, 학문의 독자성이나 절대적 가치성은 평가 기준에 들어있을 리 없다. 평가기준들의 바탕은 도구적 실용성, 적나라하게 말하면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경제성’이다. 그 뿐인가. 중점연구소란 제도를 만들어 예산과 공간을 지원해주는 제도에서는 ‘배금주의’의 극치를 발견하게 된다. 연구소가 아무리 훌륭한 논문집과 학술연구서들을 내도, 아무리 중요한 학술발표를 해도 평가점수에 큰 의미가 없다. 오로지 외부로부터 얼마나 많은 돈을 수주해 왔느냐가 평가의 결정적 기준일 뿐이다. 논문집이나 학술총서 한 권 내지 않아도, 학술발표회 한 번 하지 않아도, ‘큰 거’ 한 건만 수주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 분야의 연구소가 ‘돈 잘 버는’ 분야의 연구소들을 이길 수 없다. 단언컨대, 이런 대학에서라면 조만간 학문은 죽어버릴 것이다. 물론 이런 사례가 이 대학만의 일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들이 이런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단언컨대, 이 나라의 대학들이 허우대는 얼마간 살아 남을지 모르나, 정신 격인 학문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학과들은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고, 그런 학과에는 투자도 많을 것이니 교수들의 연구비 수주액 또한 높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평가 척도를 아무리 바꾼다 해도 인문학 분야의 학과들은 적빈(赤貧)을 면할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학문적 수월성(秀越性)의 구현을 위해, 존경받는 아카데미즘의 표상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줄어드는 입학생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원시적인’ 생존경쟁 그 자체에 몰두하는 현실이다. 지방대학들은 이미 사투를 벌이고 있으며, 수도권이나 서울의 대학들도 조만간 그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애를 더 낳을 가능성은 아예 없으니 상황은 갈수록 나빠질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중국 학생들을 유치하고 있지만, 중국도 언제까지나 사람 수가 넘쳐나지 않을 것임은 현지의 교수들을 만나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 우리나라 대학들이 누리는 ‘중국학생 특수’도 길어봐야 10년이 고작이다. 이제 목 좋고 산수 좋은 명당에 위치한 대학들의 건물은 양로원이나 위락시설로 용도 변경해야 할 날이 도래할 것이다. 그 때쯤 인문학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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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CEO들을 모아다가 인문학 강좌를 열거나, 심지어 노숙자들까지 불러 모아 인문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인문학의 생활화나 저변확대란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열악한 인문학의 상황이 도사리고 있다. 죽음을 앞둔 인간만이 가장 순수해지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거리의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문학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셈이다. 사실 잘 나가던 시절의 인문학도들은 밀려드는 대학생들을 감당하기에도 일손이 모자랐다. 그러나 학생들도 외면하고 대학의 재단이나 본부조차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지금, 인문학의 남아나는 일손들을 제대로 관리할 방도가 없다. 대학 외의 수요 창출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역시 한계가 있는 일이다. 옛날에는 글을 읽어 벼슬을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벼슬자리는 한계가 있고 수요자는 많으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쟁도 바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출발했다. 지금도 젊고 실력 있는 인문학도들이 대학에 입성하지 못한 채 거리를 방황하며 울분을 삼키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이들의 생활을 우리 모두가 책임 질 일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춘을 바쳐 ‘돈 안 되는’ 학문의 길을 선택한 지식인들이 최소한의 기본생활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적 현실이 어째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수수방관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방책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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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날이 저문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이데아는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설 수도 없다. 이 방 어디엔가 내가 찾아 헤매는 이데아는 숨어 있겠지만, 우둔한 인문학 교수의 머리통으로는 자취조차 찾아낼 수 없다. 따스한 방 안의 공기가 행복감보다는 절망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조만간 떠오르는 햇살 아래 참새 같은 새내기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작은 희망의 끈이라도 건네기 위해 이 겨울 인문학 교수는 무슨 지혜를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고민이다. 내 손이 비었다는 걸 안다면 그들 역시 풀솜에 물 젖듯 재빨리 절망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인문학 교수에겐 암흑의 시대일 수밖에 없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8. 25.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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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교수 영입의 전제

새 학기부터 20여명의 외국인 교수에게 강의를 맡기고, 2010년까지 그 수를 100명으로 늘이겠다는 최근 모 대학의 방침은 매우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이념과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류적 가치나 이상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학문임을 감안하면 그런 단안이 뒤늦은 감도 없지 않다. 상당수의 다른 대학들도 마음은 있으되 돈과 여건이 허락지 않아서 망설이고들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대학들이 수월성을 높이기 위한 방향만큼은 제대로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우수한 교수가 우수한 대학을 만들며, 교수의 개혁이야말로 대학의 개혁임을 알게 된 일이야말로 한국의 대학들이 그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게 된 의미 있는 수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외국으로부터 뛰어난 교수들을 영입하고자 하는 최근의 움직임들이 ‘스타 마케팅’의 일환이거나 세계적인 석학들을 불러와 그간의 ‘뒤쳐짐’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복권심리’ 혹은 ‘영웅 대망심리’의 발현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학계를 위해 매우 우려스런 시도일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표면상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교수 채용 시 아직도 학자의 능력이나 업적보다는 학맥과 같은 비본질적 조건이 암암리에 큰 힘을 발휘하는 현실은 엄청난 재원을 투입하여 외국인 교수들을 영입하려는 대학들의 노력과 명분을 무색하게 한다. 교수채용 때마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학연에 의한 밀어주기나 세칭 낮은 서열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능한 학자들을 외면하는 폐쇄성 등은 우리 지식사회의 선순환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다.

 사실 외국의 석학들은 우리 학생들에게 큰 가르침과 자긍심을 줄 수 있고, 그들 스스로도 이곳에서 큰 연구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의 실력과 함께 교육적 열성, 학습자들의 동기가 겸비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런 바탕이 마련된 후에야 교육의 효과는 확실해진다.

 외국인 교수들의 영입이 성공하려면 우리 자체 내에 온존하고 있는 각종 심리적 장벽의 철폐가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가 벤치마킹하고 있는 선진국의 대학들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런 장벽들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자국 내의 인재들을 능력 위주로 끌어 써왔으며, 그런 바탕 위에서 세계 각처의 인재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상당수의 우리 ‘토종학자’들이 그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스카웃 제의를 받는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대학사회가 우리 스스로에게 마음을 열고, 선의의 경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게 되기 위한 첫 단추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무엇보다 인재 발탁의 1차적인 조건을 능력과 업적에 두어야 한다. 그것만이 교수시장의 경직성을 해소시키는 관건이다. 교수시장의 경직성이 해소되어야 능력 있는 인재들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대학 간 교수 간 경쟁의 분위기가 살아나며, 외국 석학들의 영입이나 우리 인재들의 외국 진출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효과들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학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인다면서 3년 혹은 5년의 프로젝트를 내세우는 일이야말로 대부분 공수표일 가능성이 크다. 학계나 대학의 발전은 한 순간의 쇼가 아니라 장기간 노력의 축적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겨우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태만해왔던 부분을 한꺼번에 메우려는 다급함으로 외국의 석학들을 대거 초빙하는 일이 자칫 ‘우물에서 숭늉 찾기’나 ‘꾀 벗고 장도칼 차는’ 격이 되지 않으려면, 좀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편견과 장벽을 먼저 없애야 할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