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3. 8. 23:47


 1월 29일 아침 9시.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바르셀로나의 맥박을 느끼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28일 밤늦게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부터 비행기로 날아와 1박을 한 까딸루냐 사바델(Catalonia Sabadell) 호텔. 호텔은 좋았으나 휴식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 바르셀로나의 정수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기는 싸늘했으나 햇살은 깨끗했다. 달리는 버스의 차창으로 고풍스런 건물들과 정갈한 거리의 풍경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이크를 잡은 김은경 선생은 차분한 음성으로 바르셀로나의 핵심을 잘도 짚어 주었다.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 170 만 명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마드리드와 항상 경쟁관계에 있는 문화와 역사, 그리고 경제 도시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는 베소스강과 요브레가트 강 사이의 평야지대에 있으며, 제조업과 관광업 금융업 등으로 스페인 경제의 중심축이었다.

 1992년 이곳에서 개최된 올림픽과 당시 위원장 사마란치를 떠올리게 하는 도시, 몬주익 언덕의 황영조와 FC바르셀로나 같은 축구클럽을 생각나게 하는 스포츠의 도시, 그러나 무엇보다도 상식을 뛰어넘는 건축미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1852~1926)의 도시, 피카소 미술관이 있고 고딕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한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는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안고 있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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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로부터 1, 2, 3은 바르셀로나 시가지. 4는 수도국(아그바르) 건물, 5는 해변길. 6과 7은 점심식사를 한 식당의 요리사와 해물빠에자, 8은 그 식당에 진열되어 있는 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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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3. 6. 01:02

 우리는 신트라를 떠나 리스본 서쪽의 벨렝 지구로 향했다. 궂은비가 내리고 떼주 강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강가에는 벨렝 탑과 발견의 기념비가 웅장하면서도 도전적인 자태로 서 있었다. 대양을 향해 대항해 시대를 열어간 포르투갈 인들의 기상이 어려 있는 이 기념물들은 대로를 경계로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강가에 있는 기념물들이 세계를 향한 도전정신의 표현이었다면, 수도원은 이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이미지였다. 16세기 초에 항구를 보호할 목적으로 세워진 마누엘 양식의 건축물이 벨렝 탑이다. 포르투갈의 황금시대를 대변해주는 기념물로 콜럼버스도 이 항구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엔 대항해 시대에 세워진 하나의 탑이었지만, 8각의 요새는 군사적 목적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대양을 향해 항해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겐 희망과 안식을, 항해로부터 돌아오는 사람들에겐 안식과 평온의 기쁨을 준 것이 바로 이 탑이다. 2층의 강 쪽 테라스엔 벨렝의 성모상이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서 있고, 벽면은 예수회의 십자가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벨렝 탑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발견의 기념비인데, 떼주 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항해 왕자 동 엔리께의 500주기를 맞아 1960년에 세운 기념물로서 범선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상부에는 여러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맨 앞쪽이 동 엔리께였고, 선교사․선원․작가․천문학자․화가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기념비 앞바닥에는 대리석에 모자이크 된 세계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과연 대항해 시대의 주역다운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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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로부터 발견의 기념탑, 발견의 기념탑 앞 땅바닥의 그림1, 2, 벨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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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3. 6. 00:56

 점심 후 들른 곳이 바로 신트라(Sintra). 그 옛날부터 포르투갈의 왕족들과 영국의 귀족들이 즐겨 찾던 마을이다. 왕실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곳으로 별궁인 빨라씨우 레알(Palácio Real)과 뻬나 궁(Palácio de Pena)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원래 이 도시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에덴동산으로 일컬었을 만큼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곳이다. 그러나 비 내리는 지금 다소 칙칙하고 음침할 뿐 화사한 신트라의 빛깔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바이런은 이곳에 머물며 시를 지었다는데, 그의 이름을 딴 까페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까페 파리의 고풍스런 자리에 앉아 에스프레소의 진한 맛을 보며 신트라를 느꼈다.


  까페 파리에 앉아

  바이런이 노래한

  에덴동산의 흔적을 슬퍼한다


  사람은 가고

  시도 없지만

  그의 글자들은

  음침한 이곳 골목을 맴돌며

  우리의 가슴을 이리도 심란하게 하는가      


  슬픈 파두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져

  나그네의 품 속으로 갈피갈피 파고드는 이 한낮

  자꾸만 빗방울은 굵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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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로부터 안개에 젖은 신트라, 신트라성 모형, 신트라 주택가 골목, 신트라의 물고기 요릿집, 까페 바이론1, 까페 바이론 2, 까페 바이론 내부에 걸린 그림, 신트라의 주택들, 신트라의 그릇가게, 까페 파리에서, 까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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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3. 6. 00:47

 1월 28일 아침 8시 35분 호텔을 나서 대서양 쪽의 땅 끝 마을 로까 곶(Cabo da Roca)으로 출발했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했다. 한참을 달려 로까 곶에 도착했으나 그곳에도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으며, 안개가 가득하여 바다를 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 해남에서 밟아보는 땅 끝의 감회를 이곳에선 느껴보기 어려웠다.
 그 옛날 대항해 시대에 세상을 향한 출발지가 되었을 이곳에서 그 장쾌한 기상을 맛보지 못하다니,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바다를 향해 높이 솟은 탑이 있었다. 그 탑에 적혀있는 시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땅이 끝나는 곳, 그리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내용. 바로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까몽이스(Camões)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었다. 안개에 갇혀 사방은 깜깜했으나 이 구절은 등대처럼 ‘땅의 끝, 바다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악천후에도 관광객들은 연신 드나들어, 대서양 쪽 땅 끝 마을은 끊임없이 북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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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로부터 안개 자욱한 로까곶, 로까곶 표지석에서, 로까곶 휴게소 안의 그림 1, 로까곶 휴게소 안의 그림 2, 바람 부는 로까곶, 로까곶 주변의 식생, 성찬을 즐기고 있는 로까곶의 달팽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6. 00:39

 1월 27일  2시 45분, 과디아나 강에 놓인 ‘시간의 다리’를 건너 드디어 포르투갈로 들어섰다. 포르투갈의 민중가요 파두(Fado)가 발산하는 아련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나그네의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우리처럼 오래도록 이민족의 억압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일까. 그들의 노래도 어쩌면 우리의 그것과 닮아있는 듯했다.

 눈을 차창 밖으로 돌리니 야산에 깔려있는 아몬드 꽃이 하얗게 눈부시다. 면적 9만 2천 평방킬로미터, 인구 1,100만 명의 소국.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고, 인구는 4분의 1에 불과한 나라다. 국민 1인당 연간 소득은 18,000불로 35,000불의 스페인에 비해 반이 조금 넘는 수준. 국토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붙어 있다. 1140년 알퐁소 엔리께가 왕국을 선포하기까지 기원전 그리스, 페니키아, 로마, 게르만, 무어인 등의 지배를 거쳤으며, 무어인들로부터 국토를 회복한 이후 리스본은 이 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국토가 좁은 대신 그들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희망봉과 인도항로, 브라질을 발견하는 등 식민지 개척을 통해 대항해 시대를 연 그들이었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의 지배하에 놓였다가 독립한 뒤 18세기 초 식민지 브라질로부터 금을 들여와 한동안 번영을 구가하기도 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브라질의 독립, 열강의 침입, 정파들 간의 싸움 등으로 화려했던 날들은 저물어 갔다. 1910년 선포된 공화정은 1930년대 살라자르의 독재로 막을 내리고 1974년 혁명에 의해 다시 공화정은 시작되었으며, 1986년 EU의 회원국이 되었다.

 우리의 눈에 포르투갈의 국력은 비록 약해 보였으나, 스페인에 비해 안온한 느낌이었다. 야산의 푸른 숲 사이에 조성된 마을들이 평화로워 보였고, 그 사이에 피어있는 아몬드 꽃들은 이국적인 정취를 발산했다.

 어두컴컴해서야 리스본에 들어갔다. 시내의 한 식당에 들어가 ‘바깔랴우(Bacalhau)'라는 대구 요리로 저녁을 때웠다. 이곳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요리라 하나 얼큰한 대구탕이나 대구머리 요리에 익숙한 우리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웠다. 식당에서의 실망은 그대로 호텔로 이어졌다. 방이 춥고 썰렁했다. 사실 이 시기의 유럽은 어딜 가나 난방이 문제다. 뜨끈한 우리나라의 온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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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로부터 포르투갈 고속도로 변 휴게소의 점원 아가씨, 리스본의 식당 발렌시아에서 먹은 바깔랴우, 리스본에서 1박을 한 호텔 코스타 다 카파리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1. 14:35
  그곳으로부터 5분 정도를 걸어가서 만난 것이 스페인 최대의 세비야 대성당(Catedral)과 히랄다탑(La Giralda). 원래 있던 모스크를 부수고 1402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00년 만에 완공한 성당으로 건축양식의 중심은 고딕이었다. 폭 116m, 높이 76m로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과 런던의 성 바오로 대성당에 이른 유럽 3위의 규모였다.

 대성당 정면의 ‘승천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므로, 우리는 히랄다탑 옆의 리카르토문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추측한 것처럼 내부는 대단했다. 돌로 깎아 만든 기둥들은 입이 벌어질 만큼 대단한 규모였다. 중앙의 황금빛 목제의 제단은 세계 최대의 규모라고 하는데, 성서에 나오는 내용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 안쪽의 왕실 예배당에는 알폰소 10세와 모후 베아트리스가 안치된 묘소가 있었다.

 시간에 쫓긴 우리는 잰 걸음으로 주변의 작은 예배실들, 성구실, 총회실 등을 둘러보았다. 무리요, 고야, 수르바란, 발데스 레알 등 스페인 거장들의 명화가 걸려 있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이곳에도 콜럼버스의 묘가 있었는데, 관에는 그의 유골 가루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콜럼버스의 아들 하나가 이곳 대성당의 성직자였다는 점도 콜럼버스 유해가 이곳에 안치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이었다.

 성당 안을 대충 훑어본 우리는 히랄다 탑으로 올라갔다. 92m 높이의 이 탑은 이슬람 건축. 원래 대성당이 지어지기 이전 모스크의 첨탑으로서 알모하스 왕 때 만들어졌다 한다. 밑으로부터 전망대가 있는 70m까지는 원래 이슬람 시대의 양식이고, 그 위 종루 부분은 16세기에 기독교인들이 덧붙인 것이라 한다. ‘히랄다’는 ‘hirar’ 즉 ‘돌다’에서 나온 말로,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는 닭이란 뜻이다. 이것은 탑의 꼭대기에 장식된 청동의 여신상이 바람에 따라 빙글빙글 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탑에 오르는 길은 계단이 아니라 나사처럼 돌아가는 평탄한 길이었다. 그 옛날 술탄이 말을 탄 채 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만들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히랄다에서 내려다 본 세비야는 아름다웠다. 과달키비르 강이 안고 도는 시가지는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훈풍과 하늘에서 부어주는 햇살에 밝게 빛나고 있었다. 시가지 주택들의 벽은 대부분 흰색이었고, 알카사르를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건축들과 그 사이사이의 오렌지 정원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황금의 탑, 마리아 루이사 공원, 마카레나 교회당, 세비야 대학, 필라토의 집, 산타크루즈 거리, 산타 파울라 수도원, 주립 미술관 등은 세비야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 주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바쁜 나그네의 일정 상, 어찌 세비야의 속살을 낱낱이 헤집어 볼 수 있을까. 히랄다탑에서 아름다운 세비야의 전경을 가슴에 안고, 우리는 포르투갈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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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로부터 세비야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히랄다탑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1, 히랄다탑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2, 히랄다탑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 뒤편 광장, 히랄다탑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의 오렌지 광장, 히랄다탑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