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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23 김기덕은 반역자인가?
  2. 2012.04.04 국회의원 후보 김모씨의 '욕설난장'
글 - 칼럼/단상2012. 9. 23. 18:12

 

 

 

 

    <베드로 성당에서 감동적으로 만난 피에타상>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천계[天階, 발타키노]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 성인>

     <베드로 성당 큐폴라에서 내려다 본 바티칸 시티>   

 

 

 

김기덕은 반역자인가?

-영화 ‘피에타’를 맛보고-

 

 

                                                                                                                                                         백규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를 보았다.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지 24시간도 안 된 시점이었다. 되새기기 싫은 장면들과 메시지가 내 안의 알량한 양식(良識)과 벌이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 영화에 대한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를 우울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쓴 약을 한 봉지 털어 넣고 도리질하며 차가운 물을 마시듯 몇 자 남길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 감독이 새롭게 내놓을 또 다른 영화를 소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내 비위를 강하게 단련시킬 필요는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을 내려야 한다는 과제는 일종의 고문이었다. 영화를 접한 지 한 달이나 넘은 지금 몇 자 그적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별로 없지만, 그의 영화들은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나도 그 가운데 몇 편 접하긴 했으나, 늘 개운치 못했다. 그다지 절절하지 못한 이유로 때려 부수거나 치고받다가 마지막에 행복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내는, 속 편한 영화들의 문법. 그런 문법에 익숙해진 내 범속성(凡俗性)의 한계 때문이리라. 그러지 않아도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노라 피곤한데, 돈 내고 영화를 보면서까지 천근 무게의 메시지를 새겨야 한다면 억울한 일 아닌가. 깔깔 웃음이나 후련한 해결을 통해 내 안의 찌꺼기를 맘껏 풀어내는 배설의 장소가 바로 영화관이 아니던가. 그런데, 영화를 보며 배설의 쾌감을 맛보기는커녕, 오히려 무거운 과제를 받아 와야 한다면? 참으로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떨떠름한 기분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던 것이다. 과연 첫 장면부터 구역질이 나왔다. 한때 세상에서 불지옥으로 죄인들을 끌어 올리는 데 쓰였음직한 갈고리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말려 올라가고, 한 생명이 종말을 고하는 단말마에 내 가슴은 오그라들었다. 보이지 않는 죄악의 근원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주거환경이나 청계천 철거예정지역의 공작소가 보여주는 살풍경. 잔인무도한 표정과 어투의 ‘강도’ 이정진. 모두가 인간성 말살의 빗나간 이 시대의 ‘천민자본주의’ 혹은 그 터전을 대변하는 존재들이다. 불법 채권추심업의 비인간성을 온몸으로 보여준 이정진. 그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악마의 표본으로 제시된 존재였다. 자식을 죽인 원수 이강도에게 엄마를 가장하고 접근하여 복수를 시도하는 조민수의 무겁고 처절한 연기는 또 얼마나 섬뜩한가. 

 

 돈 때문에 남을 죽여야 하고, 자신이 죽어야 하는 세상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음습한 철공작소의 소품들이 빚어내는 살풍경과 무거운 공기. 그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대며 사라지는 생명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그려내고자 했을까. 자식을 죽인 원수를 만나 세속적인 복수의 방정식을 실천하는 대신 자신과 그를 함께 묶어 죽음으로 결산하는 서사를 통해 감독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 했을까. 세상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죽음을 당한 예수. 그를 무릎에 앉히고 무한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 왜 조민수는 지금 세상의 가장 극악한 범죄자,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음으로 회개시키면서까지 나 같은 범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구원의 방식을 세상에 내 보이고자 한 것일까. 강도의 처소에 들어간 뒤 음료나 음식물 속에 독약이라도 넣어 그를 죽여 버림으로써 세상의 어머니가 실천함직한 ‘범속한 복수’를 행하지 않고 그렇게 난해한 고차방정식을 풀어나간 것일까.   

 

 단언컨대, 단순히 감독 자신의 미학을 화면에 구현시킨 것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나 사건들의 의미를 감독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새롭게 발견되는 의미가 ‘텍스트의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단서라면, 감독은 자신이 던진 화두가 세상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목소리들을 통해 그를 확인하고자 했을 뿐, 그가 결코 단정적인 메시지를 던진 건 아니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읽어내는 메시지, 그 스테레오 타입을 멋지게 전도시킨 김 감독이야말로 얼마나 ‘멋진 반역자’인가!

 

  <2012. 9. 23.>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4. 4. 15:34

국회의원 후보 김모씨의 ‘욕설 난장’

                                                                                                                                                               백규


국어선생으로서 낯을 들지 못하는 나날이다. 그간 어린 영혼들에게 교과서만 읽혔을 뿐 ‘정확하게 말하는 법’ ‘아름답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점을 통렬히 반성한다. 이 땅에서 우리말과 글을 팔아 밥을 먹고 있지만, ‘지저분하고 천한 말들의 향연장’으로 전락한 우리네 삶터를 목도하면서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는 나날이다.
  최근엔 더욱 기가 질리는 광경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선량(選良)[즉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김모씨. ‘몸집만 어른’인 그로부터 우리 사회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고 들어서도 안 될’ 최악의 언어테러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나이로 쳐도 불혹인 40이 멀지 않았고, 박사과정까지 수료했으며, 모 대학 교수까지 역임했으니, 그를 보고 ‘철이 없다’는 표현을 갖다 댈 수는 없으리라. 그 뿐인가. 아무나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정당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까지 받은 몸이다. 선량이 되어 민의(民意)를 대변하겠노라고, 정치 일선에 뛰어들어 이 나라를 바로잡아 보겠노라고 대단한 포부를 밝힌 ‘대단한 인사’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그는 입만 열면 하수구나 변기에서 풍기는 악취보다 더 구역질 나는 욕설들을 내뱉을 수 있을까. 그가 속한 그룹을 열렬히 지지하는 어떤 매체는 아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 매체와 비슷한 성향이면서도 얼마간 양식이 살아 있는 다른 언론들까지 그의 ‘지저분한 언사’를 대서특필할 정도로 그의 욕설은 우리 사회에 충격적이었다.
***
얼마 전, 길 가던 중 초등학생들 곁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의 대략 90%가 욕이었다. 그들은 욕설을 그야말로 숨 쉬듯 내뱉었다. 그 욕설의 대부분은 성(性)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들 대부분은 그런 욕설들이 진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그 초딩들’의 욕은 ‘나꼼수’나 유튜브를 통해 확인한 ‘그 어른들’의 욕에 비해 애교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튜브를 통해 접한 김모씨의 욕설은 구역질이 나서 끝까지 들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초등학생들과 김모씨의 언사가 연결되면서 나는 김모씨 같은 어른들의 말, SNS 등을 통해 여과 없이 중계되는 그 욕설들이 바로 우리 시대 아이들의 ‘언어 교과서’임을 알게 되었다. 나 같이 고지식한 국어 선생들의 입장에선 그들 말대로 우리들과 ‘쨉이 되지 않는’ ‘살아있는 국어선생들’이 바로 ‘김모씨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한편으론 고마운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요즘은 초등학생에서 어른들까지 욕이 일상화 되어 가고 있다 한다. ‘상아탑에 숨어 살아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험한 욕 한 번 듣지 않고 살아온 그대는 세상물정 모르는 말 하지 말라'는 면박을 친구로부터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요즘의 세태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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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모씨는 왜 그런 욕설을 내뱉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나꼼수’는 왜 욕을 일상어처럼 사용하는 것일까. 그들의 입장에서 그것을 ‘아주 잘 못 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내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오물’을 뱉어냄으로써 후련해지는, 일종의 자기중심적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노린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 모두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는 전제 아래, 그런 ‘오물 치우기’를 그들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소영웅주의’의 발로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길게 따질 필요도 없이 김모씨 역시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일 텐데,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들을 아내나 아이들에게 들려 줄 수 있을까. 자신의 아이들이 밥상머리에서 자신이 ‘나꼼수’에서 내뱉는 그런 말들을 내뱉는다면[왜? 아빠가 이미 대중을 상대로 내뱉었으니까!], 그는 아버지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
정치의 계절만 돌아오면 특히 ‘말’이 험해진다. 사실 김모씨가 뱉은 욕설은 ‘말’의 범주에 속하지도 못한다. 적어도 말이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욕설들에 대체 무슨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제대로 된 정치의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은 ‘말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기껏 교과서만 읽었지, ‘제대로 된 화술’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래서 정치인들만 모아 놓으면 육두문자와 폭력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지난 선거에도 나는 정치인들의 ‘담론 수준’을 비판하는 글들을 여러 편 쓴 바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저급해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한다. 예의를 갖춘 언사와 멋진 논리만이 상대를 굴복시키는 ‘최종병기’임을 알만한 인사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게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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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혀[즉 말]는 근심의 문이며, 몸을 죽게 하는[망치는] 도끼’라는 것이 <<명심보감>>의 금언이다. 철없는 아이들이 쳐주는 박수에 도취되어, 보기에도 딱한 ‘소영웅주의’에 도취되어, 아이들마저 사용하길 꺼려하는 욕설들을 마구 내뱉은 김모씨. 이제 그 말들이 가시가 되어 자신의 앞길을 막게 되었으니 ‘남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습기가 솜과 같고, 남을 해치는 말은 날카롭기가 가시와 같으니 한 마디 말이라도 무겁기가 천금과 같고, 한 마디라도 남을 해치면 아프기가 칼로 베는 것과 같다’는 <<명심보감>>의 경구를 재삼 명심하면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거나 가까운 교회당에라도 가서 꽤 긴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2012. 4. 4.>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