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15. 07:15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 분포도

 

 

 


타오 시내 역사구역 도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장로교회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침례교회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 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반델리어 유적지가 자리 잡은 프리욜레 계곡을 벗어난 시각이 오후 4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뉴멕시코를 벗어나기로 한 애당초 계획을 버리고 별 수 없이 로스 알라모스의 한 부분인 화이트 락(White Rock)에서 1박을 하며 반델리어의 감동을 정리하기로 했다. 창밖으로 산타페 산맥의 연봉들이 아스라이 보이는, 아름다운 호텔이었다. 다음날 호텔에서 챙겨주는 아침을 먹은 다음 프런트의 아가씨에게 일기예보와 타오(Taos) 에 관해 물었다. 눈 올 확률은 20%. 그러나 타오는 반드시 들러 가야 할 곳이라고 강추했다. 에라, 모르겠다. 눈이 쌓이면 며칠 묵어가지. 앞으로 언제 이곳에 또 올 것이냐. 그래서 산타페 쪽으로 다시 돌아가 I-40을 타는 대신, 그 반대편에 있는 타오(Taos)로 기수를 돌리기로 했다. 푸에블로 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타오의 집단 거주지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화이트 락에서 타오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구간보다 아름다웠다. 겉으로 낙후되어 보이긴 했으나 연도의 촌락들도 모두 평화로웠고, 황량한 산하는 그 나름의 정제된 미학을 갖추고 있었다. 군데군데 퇴락한 도회들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들이 갖고 있는 역사성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멋지게 뻗은 502번 도로로 화이트 락의 호텔을 출발하여 잠시 가다가 30번으로 갈아탔고, 에스파뇰라(Espaňola) 턴파이크에서 68번으로 갈아탄 다음 두 시간 넘게 걸려 타오에 도착했다.

 

달리는 중간 중간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의 경관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발걸음을 주춤거리기도 했다. 예컨대, 아리바 카운티(Arriba County)를 지날 때 길 가에서 녹슨 간판을 보고 찾아 들어간 작은 도시 벨라르데(Velarde)에서 과달루페 성모가 모셔진 작은 성당 과달루페 성모 교회[Iglesia de la Virgen de Guadalupe Mission Church]를 만난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한적한 시골 동네 한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그 성당은 참으로 정결하고 가난해 보였다. 작은 나라에서 대형 교회들만 보아오던 내 눈에 큰 나라의 작은 교회가 주는 감동은 작지 않았다. 그런 감동을 안고 다시 먼 길을 달려 해발 2,124m의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는 면적 13.9 의 소도시 타오에 진입하게 되었다.

 

멀리 타오 마운틴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시가지가 비교적 널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은 좁았으나, 도시를 채우고 있는 어도비 양식의 집들은 따스해 보였다. 무엇보다 성당과 교회 및 공공건물들 대부분이 어도비 양식인 점이 좋았다. 번쩍이는 빌딩 식 교회들보다는 어도비의 그 따스함 속에 구원의 손길이 깃들 것만 같았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타오 푸에블로(Taos Pueblo)’까지는 타오 신도시[Modern City of Taos]에서 북쪽으로 1마일이나 더 가야 하는데,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St. Francisco de Asísi Church]’이 매혹적인 자태로 서 있는 것 아닌가. 안 들를 수 없는 일. 앞쪽으로 가보니 말문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건축미가 돋보였다. 이 지역의 교회들을 들르면서 느끼는 것은 종교적인 경건함보다는 건축미가 먼저 마음을 흔든다는 점이다. 교회 문을 살짝 밀고 들어서니 누가 죽었는지 장례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경건하고 슬픈 분위기를 해칠까 저어되어 살그머니 되돌아 나왔으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자꾸만 우리의 발걸음을 지척이게 하였다. 거기서 몇 블록을 전진하자 이번에는 어도비 양식의 장로교회와 침례교회 등이 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록 문은 잠겨 있었으나, 외양을 감싼 고즈넉한 분위기가 세상의 번잡함을 정화시키고 있는 듯 했다. 역시 그곳의 자연환경과 일치되는 분위기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쉽게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전체에서 풍겨나는 따스한 느낌 때문인가 이 지역의 교회를 볼 때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폭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생소한 모습으로 번쩍이는 교회로부터 구원의 희망을 찾기란 어려운 일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주변에 널린 갖가지 유혹들을 물리치고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 타오 푸에블로. 타오 마운틴을 뒤로 하고 먼지 풀풀 이는 벌판에 그득하니 서 있는, 어도비 양식의 집단 거주지였다. 밝고 따스한 주택의 색깔이 주변의 붉은 흙빛, 뒤에 버티고 선 타오 산의 푸른빛, 마을을 뚫고 흐르는 리오 그란데 강의 옥색 물빛 등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출입문을 통해서 들어가니 단층도 있고, 복층의 경우 5층까지 올린 집들도 있었다. 하나로 되어 있는 외벽 안쪽에 각자의 집들이 조합된 건축방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 기본구조였다. 이 공동체에는 1,900명 이상의 푸에블로 인들이 속해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근처에 현대식 집을 짓고 살다가 시원해지면 푸에블로의 자기 집에 머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그곳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대략 150명 정도 된다고 한다.

 

타오 푸에블로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사 문화 유적으로서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집들의 외양,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들과 집 앞의 빵 화덕들은 스카이시티나 마찬가지였다. 사철 물이 흘러내리는 냇물을 보니, 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거지는 냇물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으며, 왼쪽 주거지의 중심부에 멋지게 지어진 가톨릭 교회도 있었다. 앞에서 누차 언급했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전통신앙을 거의 포기하고 가톨릭을 받아들인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스페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은 결과라고 보지만, 신교 보다 가톨릭 쪽이 자신들의 전통신앙이나 가치관을 더 용인해준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여러 면에서 폐쇄적이었다. 가옥의 내부는 전혀 공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사진 찍는 일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 앞 화덕에서 구운 빵을 판다고 하여 들어가 보았으나, 페치카에 장작 한 올 겨우 넣고 간신히 추위를 참고 있던 할머니는 아예 카메라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끝까지 지키고 싶은 자신들만의 세계라도 있는 듯, 이들의 구역에 들어가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경계의 눈빛을 쏘아대는 그들이었다.

 

 

 


타오 푸에블로 입구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어도비 주거지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어도비 주거지. 앞 쪽의 반타원형 구조물은 빵을 굽는 화덕.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공동묘지를 갖춘 가톨릭 교회터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가톨릭 교회

 

 

 

타오 푸에블로 왼쪽 주거지와 리오 그란데강 지류

 

 

 


타오 푸에블로에서 만난 푸에블로 소년과 검은 개

 

 

 

 


타오 푸에블로의 빵 굽는 화덕

 

 

 


타오 푸에블로 주거지

 

 

 


차양 밑에서 보호받고 있는 화덕

 

 

 


리오 그란데 강물과 나무 다리

 

 

 


빵을 굽고 있는 듯 연기가 피어오르는 타오 푸에블로

 

 

 

 

이들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쭉 살아갈 것 같은 그들만의 주거지를 간신히 돌아본 다음, 우리는 타오 외곽으로 리오 그란데의 강줄기를 찾아 차를 돌렸다. 30분 정도 황야를 달렸을까. 엄청난 규모와 높이의 다리 리오 그란데 죠지 대교[Rio Grande George Bridge]’를 만났다. 저려오는 오금을 달래며 다리 한복판까지 걸어갔다. 비행기 창문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듯 갑자기 고소공포증이 밀려들었다. 멀리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고 나서야 이 다리가 없던 시절엔 타오가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지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고립지에 주거지를 건설하고 살았을까. 아마도 외부와 단절된 곳에 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지역들이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오늘날 그들이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것도 그런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나온 본능적 반응일 것이다.

 

대략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타오 푸에블로는 뉴멕시코 북쪽의 여덟 개 푸에블로들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비밀스럽고 보수적이며 사적인 영역을 많이 갖고 있는 부족이었다. 서기 1,000년부터 1,450년 사이에 세워져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 공동체인 타오 푸에블로. 그곳에서 우리는 화석처럼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다. 외부세계와 단절되고 싶긴 하지만, 적빈(赤貧)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인들의 접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과 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아직도 지킬 만한 것이 있다고 믿는 그들이었지만, 외부인들로서는 그 점을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속물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자신들의 원래 모습을 지키려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훌륭한가?

 

타오 푸에블로 인들의 고집스런 표정을 대충 마음에 담아둔 채 우리는 뉴멕시코를 재빨리 벗어날 지름길 엔젤 마운틴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리오 그란데 강줄기와 계곡을 가로질러 만들어진
'리오 그란데 죠지 다리[Rio Grande Jeorge Bridge]'

 

 

 


광야를 가르며 죠지 다리 밑을 지나는 리오 그란데 강

 

 

 


리오 그란데 죠지 다리 부근에서 바라 본 광야

 

 

 


산타페 광장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보여주는 타오 중앙광장

 

 

 


타오 광장 주변의 상가들

 

 

 


타오 외곽에서 만난 갤러리 'Happy Trails'

 

 

 


자료사진-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단무용 '콘 댄스(Corn Dance)'

 


 


타오 카운티를 비롯한 뉴멕시코의 영역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30. 12:17

Moore 시에서 들은 소녀의 울음소리 

 

 

 

금요일 저녁 OSU의 한국인 교수 모임에서 경제학과 김재범 교수는 내게 무어(Moore) 시를 가보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자연의 위력을 현장에서 느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지난 5월 무어 시를 휩쓸고 간 토네이도 소식을 한국에서 접했던 나로서는 자연과 인간의 대응구조에 대한 내 마음 속의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김 교수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929/일요일], 날이 밝자마자 아내를 채근하여 무어 시로 차를 몰았다. 35번 하이웨이를 타고 쭉 내려가다가 오클라호마 시티를 지나며 여러 번 길을 바꿔 탄 다음 무어 시로 들어갔다. 1시간 반 이상의 비교적 긴 여행이었다. 타겟이란 큰 마켓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산 다음 이곳저곳 둘러보았으나, 김 교수가 말한 폐허 같은 토네이도의 현장은 보이지 않았다.

 

점심 참으로 들른 월남국수집[Phao Lan] 종업원의 덕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길을 따라 달려가니 과연 토네이도가 할퀴고 간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입에 있는 침례교회[Southgate Baptist Church]로 들어가니 노신사[Mr.James Fugate] 한 분이 주차장에 서 계셨다. 다짜고짜 지난 5월 토네이도 피해의 현장을 보고 싶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말문을 열시 시작했다. 이번까지 자신들이 그간 겪어온 3차례의 토네이도, 토네이도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날아간 초등학생들, 집이며 자동차 등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소상히 들려주는 그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를 더 이상 처연함의 늪에 빠뜨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성함만 여쭙곤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 현장으로 달렸다

 


 무어 시 초입에 서 있는 조형물 


무어 시 Southgate Baptist Church에서 만난 James Fugate 옹이 토네이도 피해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이럴 수가! 허허벌판이었다. 김 교수가 말하던 가옥의 잔해들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휑하게 너른 벌판엔 인영(人影)이 불견(不見)’이었다. 토네이도 이전엔 예쁜 집들이 제법 촘촘히 들어 차 있었을 그곳엔, 부러진 나무와 지저분한 쓰레기들만 날리고 있었고, 벌써 잡초가 우거지기 시작했으며, 간혹 시멘트로 조성된 집터들이 보이기도 했다. 그 사이로 도로들은 간신히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온통 진흙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이제 몇 집은 새로 짓기 시작한 듯 뼈대만 세워두었거나 뼈대에 벽체까지 두른 집도 보였다. 그 넓은 피해지역의 외곽에 몇 채의 가옥들이 처참하게 뚫린 채 서 있었는데, 모두 지붕도 벽체도 마구 뜯겨 나가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없는 흉물들이었다.

                                                 


토네이도가 모든 것을 쓸어간 현장에 남아 있는 나목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아 엉망이 되었으나,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주택

 

나는 질퍽거리는 폐허 위를 걸었다. 그러다가 어떤 집이 통째 날아간 집터(시멘트로 만들어진)에 오를 때였다. 집 앞 풀밭에 이쁜고양이 인형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주인이었을 소녀의 장난감과 함께 흙투성이가 되어 나동그라져 있었다. , 그 눈은 바로 소녀의 눈이었다. 아마도 그 소녀는 토네이도가 들이치기 직전까지도 저 인형을 안고 있었으리라. 차마 눈도 감지 못한 채 그녀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나는 그 고양이를 바라보며 한동안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혹시 그녀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그녀의 강아지 토토와 함께 토네이도에 휘말려 뭉크킨에 갔다가 여러 가지 모험을 거친 다음 다시 고향 캔자스로 돌아오듯,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난 것이나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는 왜 사랑하는 고양이를 이렇게 버려두고 떠난 것일까. 나는 그 고양이의 눈을 차마 정시하지 못한 채 원래는 집 안이었을 시멘트 바닥 위로 오르기 위해 몇 발짝 옮기다가 시궁창에 쳐 박혀 있는 넥타이, 양복, 키보드 등을 보았다. , 그 소녀의 아버지 또한 어디론가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엔 소녀가 토네이도에 휘말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며 남겼을 마지막 외침만 남아 맴돌고 있었다. 과연 그 소녀는 동화속의 도로시처럼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어떤 꼬마가 데리고 놀았을 고양이 인형과 장난감 


토네이도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키보드와 넥타이 


다 날아간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변기와 욕조 

 

차를 돌려 스틸워터에 돌아오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원주민이든 이주민이든 미국인의 조상들은 자연과의 대결을 통해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했다. 자연의 위력에 인간의 의지가 꺾인 듯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뒤에 보면 인간 의지의 승리를 입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끝내 어찌 자연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과학의 힘을 발판으로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는 미국에서 이토록 참혹한 인간 패배의 현장이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보라. ‘토네이도는 이 넓은 숲이나 들판을 지나지 않고 왜 하필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도심만을 골라 지나는지 모르겠다는 아내의 말 속에서 의미 있는 자연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무어 시는 다시 일어서겠지만, 자연이 던져 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는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지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다.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은 무어 시의 당시 모습[Google.com] 


토네이도 피해지역 외곽에 설치된 희망 기원 조형물[꽃송이로 HOPE라는 단어를 만들었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9. 12:12

근황 1

 

 

미국식 혹은 오클라호마 식 인간관계

 

 

김형!

 

오랜만이오. 이곳에 온지 벌써 정확하게 한 달이 지났소. 외국에 나가면 조심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외국 생활을 두루 경험해 온 형은 잘 아시리라 믿소. 특히 외국에 정착하기까지 참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들이 많은 건 우리처럼 단기간의 체류자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오. 우리가 잠시 엉덩이를 붙인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Stillwater)는 미국의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도 참으로 특이한 곳이오. ‘조용함깨끗함단조로움으로 요약될 만한 자연 및 생활환경, 바이블 벨트(Bible Belt)로 통칭되는 이 지역의 정서, 그리고 미국인들 특유의 개인주의 등이 어울려 빚어내는 지역 색깔 말이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평지에 띄엄띄엄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그 한복판에 널찍이 들어선 대학 캠퍼스. 바둑판의 줄처럼 그어진 도로들을 따라 듬성듬성 조성되어 있는 상가들에나 나가야 그나마 다운타운의 맛을 약간 느낄 수 있을까요? 학생들과 대학 종사자들을 포함하여 2만 여명이 생활하는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면 사람 만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이 지역이오. 복잡한 서울에 살다가 이곳에 온 우리는 일종의 문화충격을 다독여 가며 쉽지 않은 적응의 한 달을 지내온 셈이오. 15년 전에 1년 남짓 살던 LA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이곳에서 맛보고 나서야 미국인들의 생활철학과 그들이 신봉하는 합리주의 혹은 실용주의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으니, 우리도 이제 철 들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백규 연구실의 달력


                                         연구실의 백규

 

***

 

이곳 도착 사흘 뒤 학과장[여기서는 ‘Head’라고 함] 로간 교수와 학과 비서들을 만났소.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인사가 끝난 뒤의 대화는 사무적인 내용으로 일관했소. 학과장은 학과 전반에 대한 소개와 부탁의 말씀을 한 다음 강의에 들어갔고, 비서들은 건물 출입문과 내 연구실 키를 주고 학과 시설에 대한 안내와 설명이 끝나자 모두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업무들을 보는 것이었소. 차나 한 잔 하자거나 점심이라도 함께 하자는 등의 말 거래는 일체 없었소.

 

며칠 뒤 아무래도 이게 아니다 싶어 한 수 가르쳐 줄 요량으로 로간 교수에게 연락하여 점심약속을 잡았소. 그런데 까페테리아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그는 먼저 작은 머핀 하나와 음료수를 고르는 것이었소. 그러는 그를 보며 나 또한 더 비싼 것을 고를 수 없어 같은 것으로 골라잡았소. 그런 다음 그는 자기 것을 자기가 계산하려 했소. 내가 화들짝 놀라며 오늘은 내가 함께 계산하겠다고 하자 마지못한 듯 그러라고 하는 것이었소. 내가 궁금하여 머핀 하나로 점심이 되냐고 묻자 집에서 빅디너(big dinner)를 먹기 때문에 괜찮다는 대답이었소. ‘참 인심 고약한 동네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소.

 

그 뒤 한 주쯤이 지나서 대닐로위츠 학장과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소.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 메일이 도착했소. “Dear Kyu-Ick/ I am delighted you have made it safely to our campus, and meeting you would be very nice. I have copied Terri Cushing to this email- she will contact you soon to see when we might be able to get together for 30 minutes or so. If you come to my office, I can provide coffee or soda as we visit./Sincerely, Bret[친애하는 조 선생님/당신이 우리 캠퍼스에 안전하게 오셨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나는 이 이메일을 비서인 테리에게 복사해주었습니다.-그녀가 조만간 당신에게 우리가 30분쯤 함께 만날 수 있을 때를 상의하기 위해 연락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내 사무실로 오신다면 나는 우리들이 방문할 때처럼 커피나 소다를 대접할 수 있습니다.]”

 

문면에서 친밀함이 넘쳐나긴 하지만, ‘30분쯤 만날 수 있다는 것’, ‘커피나 소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등의 말을 형은 이해할 수 있겠소? 워낙 시간 제약을 많이 받는 자리이니 전자야 그렇다 치고, 후자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소? 그들의 표현대로 거한 빅런치빅디너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커피나 소다를 대접한다는 자신들의 관습을 언급하며 생색내듯 한 건 왜일까요?


                                        Gary Young 선생과 점심을 하고                                      

 


                                           Stephen과 학교 바깥에서 점심을 하며

 

지난 주 수요일. 내가 이곳에 온 뒤 첫 패컬티 미팅(faculty meeting)’이 있었소. 우리로 말하면 학과 교수회의인 셈인데, 저에 대한 학과장의 소개에 이어 제 인사말이 끝나자 적지 않은 안건들이 논의됩디다. 무려 1시간 반이 넘는 회의였는데,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활발한 토론을 거쳐 결정하는 그들의 공동체 문화가 제 눈에 좀 자잘해 보이기는 해도, ‘별 뒷말들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교수회의를 하면서 차 한 잔도 함께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간다는 사실 등이었소. 한국에선 회의 중에 반드시 차 아니면 하다못해 물 한 잔씩이라도 앞에 놓아주고, 학과회의가 끝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저녁자리가 마련되곤 하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놀라고 말았소.

 

그 뒤로 점심시간에 교수들의 동태를 예의 관찰해 보았소. 점심을 싸와서 연구실에서 먹든가 각자 까페테리아 등에서 학생들 틈에 앉아 다소곳이 한 끼를 때우는 것이었소. 서울에서 점심때가 가까워 오면 혹시 누가 없는가 이 연구실 저 연구실로 전화를 넣곤 하던 내 문화와 관습이 여지없이 망가져버리는 순간이었소.

 

점심이나 저녁만 문제겠소? 밥도 함께 안 하는데 술자리야 엄두도 못 내지요. 몹쓸 동네에 왔다는 생각이 무겁게 나를 누르는 것이었소. 한국에서야 밥 먹으러 가면 우선 두꺼비참이슬이 밥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이 공식 아니오? 그런데 도통 이곳에서는 술을 구경할 수가 없소. 하도 궁금하여 술가게[Liquor Store]를 찾았더니, 그마저 몇 군데 없었소. 그 크고 흔한 월마트에서도 맥주조차 팔지 않는 동네임을 깨닫고, 그 원인을 내 나름대로 요모조모 분석해 보았소. 거리에 나가면 고색창연한 교회들이 곳곳에 멋진 자태를 뽐내며 서 있어요. 주로 침례교회[Baptist Church]가 많은데, 이곳이 그 유명한 바이블 벨트의 한 부분임을 많은 교회들이 입증해주고 있었소. 아직 교회 예배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도들로 가득 찬다고 합디다. 서구사회에서 주일마다 신도들로 가득 차는 교회를 구경해 보신 적 있소? 그러니 사람들의 일상이 매우 단조로우면서도 정결하고, 조용하면서도 경건하기까지 하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소.


                     First Baptist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First Methodist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First Presbyterian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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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고 나서 여러 경험들을 했고, 한 주 두 주 그런 경험들이 겹치면서 처음 가졌던 내 느낌과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은 이상한 일이오. 잘 아시지 않소? 서울에서야 때마다 호기롭게 점심을 사는 사람도 많고, 반면에 뜬뜬하게구두쇠 노릇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요. 그러다 보니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아무개는 술 한 잔 사는 법이 없다!’는 투의 원망과 비난이 자주 생기고, 그게 상호간의 반목으로 커지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 아니겠소? 끼리끼리 술자리에 어울리다 보면 이해를 달리 하는 타인에 대한 험담[이른바 뒷 담화]이 오가기도 하고 정당하지 못한 거래도 이루어지는 법이니, 그 자체가 투명사회에 역행하는 일이지요. 그 때문에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부패 선진국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아닌가요? 모두 술 인심, 밥 인심, 담배 인심이 후한 데서 빚어지는 악폐라 할 수 있지요.

 

서로 간에 밥 한 끼, 술 한 잔 안 사는 미국교수들을 보며 투명한 미국사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어요. 생각해 보시오. 툭하면 갖는 저녁회식에서 술 몇 잔 돌리다 보면 2, 3차로 이어지고, 그 후유증으로 한 두 주 허송한 다음 몸에서 알코올 기가 떨어질 즈음이면 다시 그 일을 반복하니, 강철로 된 몸인들 배겨날 것이며, 책상 위에 그득 쌓인 연구는 언제 할 수 있겠소? 술 마실 땐 즐겁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허탈과 상실, 미움과 반목의 갈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 아니겠소? 선진국 교수들은 제 밥 저 먹고 조용히 앉아 강의와 연구에 매진할 때,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일부교수들은 술친구 따라 우왕좌왕하며 시간만 죽이며 지낸다면, 참으로 암담한 일 아니겠소?

사실 한 달쯤 이런 문화에서 지내다 보니 언젠가부터 이곳 분위기가 참으로 편하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소. 우선, 술을 사지도 얻어먹지도 않으니, 마음이 태평양만큼이나 여유로워졌소. 술을 사기 위해 지갑 속의 돈을 헤아릴 필요도, 술을 사지 않는 구두쇠를 원망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말이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여기서 한 달 동안 지내다 보니 한국에서 평균 한 달에 한 번 꼴로 마셔댄 알코올 기가 내 혈액에서 모두 빠져나갔다는 점이오. 술에 잠겨 해롱거리는 인간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나도 이젠 술 생각 전혀 나지 않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났으니, ‘미국의 바이블 벨트에 온 보람이 있지요? 엊저녁 이곳 대학의 한국인 교수 모임에 참석했었지요. 한국인들의 밥상에 술 대신 물이나 탄산음료가 나오는 것을 보며 참으로 신기한 생각이 듭디다. 이곳 학과 교수회의 때 경험한 일을 옆의 장영배 교수께 여쭈었더니, ‘이곳은 어느 학과나 그래요. 그리고 그게 마음 편하고 좋아요. 그게 한국과 다른 점이에요.’라고 하십디다. 나도 그 말씀에 맞장구를 치며 속으로 재미는 없지만, 길게 보면 이 길로 접어드는 것이 한국 지식인들의 의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소.

 

또 연락하리다. 편안히 계시오.

 

2013. 9. 28.

 

스틸워터에서 백규 드림



Stillwater Public City Library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Melania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