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1. 10. 16. 13:24

    
       일본에서 만난 한국학

-제 62회 조선학회(朝鮮學會) 학술발표회에 다녀와서-

                                                                                                                     조규익

지난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 천리대학(天理大學)[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오카야마[岡山善一郞] 교수를 통해 조선학회로부터 ‘초빙발표’의 제의를 받았다. 일찍부터 조선학회의 명성을 들어왔고,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응했고, 발표논문 또한 기한보다 앞서 마무리해 보낼 수 있었다. 발표 청탁부터 원고 수납, 일정 통보, 의전(儀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치밀함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 했다.

9월 30일 오후 3시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 도착. 출영 나온 두 명의 천리대 학생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천리시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는 흐려 있었다. 일본식 전통가옥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오사카 외곽의 모습이 차분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천리시. 천리교(天理敎)를 핵으로 이룩된 종교도시이기 때문일까, 일본의 중소규모 지방도시가 대부분 그러해서일까, 조용한 분위기가 약간은 이색적이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여 천리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고 소박한 다다미방에는 녹차 응접세트가 놓인 다탁(茶卓)이 앉아있고, 작은 테라스에는 앙증스런 탁자 및 의자와 함께 양치질이 가능한 세면대가 달려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파스텔톤의 일본 전통가옥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용납할 만한 화장실과 별도의 욕실이 참하고 청결한 자태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 및 현관 사이에 마련된 작지만 넉넉한 공간에는 옷장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일본에서 숙박할 때마다 그들의 고집스런 주거(住居) 철학을 깨닫게 된다. 깔끔한 다다미방과 작은 공간의 앙증스런 활용.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침대보다 ‘일본적이어서’ 괜찮다는 느낌이다. 굳이 일본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그들의 주거방식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녹차로 갈증을 달래고 로비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천리대학의 마츠오[松尾 勇] 교수가 우리를 반겼다. 참으로 우리말이 능숙한 젠틀맨이다. 그와 잠시 환담한 뒤 천리대학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과 20여명의 학자들[일본 전역에서 모인 조선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저녁식사를 겸한 환영행사를 가졌다. 참석자 개개인 앞에 놓인 커다란 도시락 형태의 식판에 맥주를 곁들인 ‘조촐하면서도 깔끔한’ 식사였다. 늘 지글지글 끓는 전골이나 고기구이 혹은 생선[회/매운탕]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마지막 날 밤 이자까야(いざかや)에서의 간친회(懇親會)를 빼곤 일본 체류 내내 ‘도시락 스타일’의 식사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이튿날. 일찍 호텔을 나서 천리교에 봉직하는 젊은 직원 요코야마씨의 안내로 신전을 방문했다. 시가지에 넓게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나 모습이 천리교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숭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안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큰 길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청동색의 큰 도리이(とりい[鳥居]) 가 서 있었으며, 길 건너에 박물관[천리참고관(天理參考館)]과 천리대학이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되어 있는 신전의 내부는 운동장처럼 넓었다. 목조 건물인 신전은 어느 곳이나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복도를 통해 걷고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일군(一群)의 교인들이 손에 큰 벙어리장갑 같은 것을 끼고 바닥을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바닥을 닦아나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근행(勤行?)’이라는 , 요코야마 씨의 설명이었다. 종교의 의식이야 원래 합리(合理)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런 근행이야말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신전의 내부를 닦는 일. 따로 품을 들여 청소할 필요도 없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으니, 그 아니 합리적인가.

요코야마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천리교는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에게 내린 ‘어버이 천리왕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버이 신(神)’은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생활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전 중앙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인 ‘터전[지바]’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상의 구제를 위한 근행이 올려 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곳을 온 세상 사람들의 ‘으뜸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천리교 본부는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을 갖는 한편 ‘즐거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강습회 또한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앞서 말한 ‘터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를 ‘본고장’이라 하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육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시내를 돌아보면 ‘○○詰所’나 ‘○○母屋’ 등의 간판이 붙은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신자들의 숙소라 했다. 누구든 원하면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신전을 관람한 후 들른 참고관 즉 박물관은 엄청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생활문화와 고고미술 박물관’이었다. 아이누, 한반도, 중국ㆍ대만, 발리, 보르네오, 인도, 아시아 전역의 강과 하천변, 멕시코와 과테말라, 파푸아 뉴기니, 일본인들의 아메리카 이민과 천리교 전도, 일본의 서민생활 등의 생활문화와 한국ㆍ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고고미술품들.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기에도 벅찬 내용이었고, 참으로 부러운 컬렉션이었다. 수십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천 여 점 만 전시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마침 우리나라의 석조유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珍貴)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

10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된 학회는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마무리되었다. 하루 반에 걸쳐 2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를 비롯 한국에서 초청된 3명의 발표자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교수로 있는 한국인 등 12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발표논문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토론의 열기가 조선학회에 대하여 그간 지녀오던 호기심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깨달음으로 발효(醱酵)된 점이 나 자신에겐 큰 수확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학을 하면 얼마나 하랴?’라는 것이 평소의 ‘오만했던’ 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땅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그 땅의 말로’ 한국학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하는 한국학’과 다른 또 하나의 한국학이 일본에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또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솔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이란 바로 ‘한국어문학과 역사’였다. 1일 저녁의 간친회 자리에서 일본의 학자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선학회에 참여하여 다까하시 도오루나 오구라 신뻬이 같은 1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조선학회의 바탕이 된 그 분들의 후예들을 만나보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우리말과 문학,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이 땅에서 행해진 것이며 분야에 따라 왜곡의 정치적 의도 또한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어문학이나 역사의 연구에 매진토록 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로부터 근대학문의 방법을 익힌 그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우리를 앞서 간 그들이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을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만든 그들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나는 일본 학자들의 학술발표를 들으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영어영문학회’ 등 그들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를 참관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무슨 느낌을 가질까. ‘놀고 있네!’라고 할까?, 아니면 ‘어, 이 사람들 봐라. 제법인데?’라고 할까?, 아니면 ‘아, 놀랍구나!’라고 할까? 나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이어나가는 일본인들의 발표를 들으며 세 번 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곳의 말로 새로운 한국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학자이니 당신들이 하는 한국학의 정확성을 검증해보아야겠소!’라는 오만한 객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별개의 패러다임이 그곳에 살아서 통용되고 있었다. ‘한국이 한국어문학의 종주국이고 세계의 중심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어쩜 오만한 편견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문학연구의 핵심은 작품의 해석 작업이다. 무슨 언어로 해석하든 그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할만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변방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외국인들에 대하여 가당찮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 탈식민(脫植民)을 주장하면서 식민의 논리에 갇혀버린 셈이니,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학회, 특히 우리의 어문학을 대표하는 국어국문학회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최근 2년간 연속 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2년 전 경희대에서 발표할 땐 드넓은 발표장에 10명의 청중[그나마 경희대 교수들이 동원한 학생들로 보였다!]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허공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놓고 발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며 ‘다시는 학회에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때가 되자 습관적으로 역시나 그런 텅 빈 회의장에 가고 말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의 국어국문학회 학술발표장엔 회원들이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열기가 대단했다. 김동욱, 장덕순, 김석하, 황패강, 이기문 선생 등 원로들이 맨 앞자리에 좌정하여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이 이어지고, 발표자들은 적절한 대응으로 의기양양해 하거나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학문이 세대 간에 전승되어 내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넷 덕분인가, 아니면 인터넷의 독성 때문인가. 이제 학술발표회장에서 후학들을 질책하는 원로들이 사라지고, 아예 학술발표회장에 발품 팔아가며 갈 필요조차 없다는 듯 후학들도 사라졌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즉각 인터넷으로 내용이 배포될 텐데, 무엇하러 시간 죽여 가며 차비 죽여 가며 발표회장을 찾을 것인가. 말인즉슨 그럴 듯하지만, 학문이 전승되는 세대 간의 통로가 막히고 생명이 끊어진 곳에 유령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의 사막화 현상’은 어찌 할 것인가.

물론 장르별로 분화된 학회들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열띤 토론들이 이루어진다고 항변할 수 있고, 또 얼마간 그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일본에 하나 뿐인 조선학회와 한국의 여러 학회들을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의 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학 관계 논문들을 진지하게 발표한 뒤 젊은 학자들이 따라붙어 묻고, 반대로 젊은 학자들이 일본어로 진지하게 발표한 뒤 고명한 교수들이 세세히 질문하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느낌이 지나친 것인가.

***

허름하지만 낭만이 배어있는 이자까야. 그곳에서 어울린 일본의 조선학자들은 어쨌든 친한파(親韓派)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한국에서의 추억과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힘주어 한국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주가가 올라가고는 있으나, 어쨌든 마이너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하고 치밀한 태도야말로 무슨 대상을 연구하든 학자로서 지녀야 할 본령(本領)이라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들과 현지에서 함께 한 3박4일이 내겐 깨달음의 기회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는 특출하던 일제시대 일본의 한국학자들이 그랬듯 그 후예들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요즈음이다.



 <천리관광호텔의 모습>
 

 <호텔 테라스의 앙증스런 배치, 그리고 창밖 풍경>

 <호텔 방.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 후 오카야마 교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백규>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들른 이자까야 논따로>

 <이자까야 논따로에 걸려 있는 오래 된 시계. 명치시대의 것으로 현재도 살아 있음>

 <천리교 신전>

 <천리교 신전에 걸린 상징문양>

 <도리이를 통해서 바라본 천리교 신전>

 <천리 참고관[박물관]>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주택가>

 <천리대학 건물>

 <천리대학 강의동 앞에서>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츠오 교수>

 <천리참고관[박물관]>

 <발표회가 열린 후루사토 회관>

 <간친회장>

 <간친회장에서 오카야마 교수, 오카야마 카이미, 백규>

 <간친회장에서 후지모토 유키오 교수 등 일본학자들>

 <첫날 발표를 끝내고 이자까야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이자까야에서 오카야마 교수와>

  <첫날 발표 후 들른 이자까야의 메뉴들>
 

 <학회 접수처>

 <발표회장>

 <이광수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하다노 교수>

 <첫날 발표 후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모습>

 <천리대학 강의동>

 <발표하는 동경대학원의 이현준 선생>

 <천리시청의 특이한 모양>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들>

  <뒷풀이 자리에서 천리대학의 교수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천리대학의 모리야마, 김선미 교수등>

 <뒷풀이 자리에서 마츠오 교수와 백규>

  <호텔의 아침식사>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에서, 백규>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가부끼 배우의 모습>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기린맥주 포스터와 술 메뉴들>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달아맨 인형>

 <이자까야 내부의 벽에 붙은 각종 주류 및 음식 메뉴들>

<천리 시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물>

 <천리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母屋>

<천리시 도처에서 목격되는 신자 숙소인 쯔메쇼>

<오사카 외곽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건너가는 다리>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으로 떠날 ANA 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7. 8. 13:43


내게 북유럽은 늘 낯설고 먼 곳이었다. 깔끔하게 디자인된 도시들과 조화를 이룬 전통, 비싸게 유지되는 맑은 공기와 자연, 복지를 떠받치는 경제, 늘 모자라는 햇볕 등등. 참으로 존경스러우면서도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면모들을 고루 갖춘 곳. 스칸디나비아 반도 [Scandinavian Peninsula]를 간다.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발트해를 건너는 9시간여의 비행 끝에 헬싱키 공항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1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코펜하겐. 유럽 북서쪽 끝의 발트 해를 낀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북쪽의 러시아와 핀란드를 기점으로 남쪽의 덴마크까지 인상적인 모양으로 누워 있는 지역이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에 노르웨이, 동쪽에 스웨덴이 있는 곳. 우리가 도착한 미항(美港) 코펜하겐은 반도 최남단의 거점이다. 현대와 전통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시가지 곳곳, 질펀하게 흐르는 도시의 운하들에선 안데르센의 숨결이 느껴진다. 생수 한 병에 17크로네[1크로네는 대략 우리 돈으로 200원]나 하는 살인적인(?) 물가가 조용한 시가지의 이면에 꿈틀대는 현실로 다가왔지만, 안데르센의 동화적 세계를 품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런 엄혹한 현실 또한 극복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내일부터 그 숨결을 느껴볼 것이다. 수난과 영광의 역사를 직조(織造)해나온 그들 역사의 저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산업의 조화를 통해 삶의 질을 관리해 나온 그들의 지혜는 과연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풍족한 삶을 바탕으로 한 자기절제의 정신적 근원은 무엇인지 등을 스칸디나비아의 곳곳에 남아있는 물질적 증거들로부터 찾아볼 것이다. <2011. 7.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6. 30. 00:14

                      <중국 호남성 장사시의 거리에서 만난 술(酒鬼酒) 기념 표지석>           

                                     <중국 호남성의 한 식당에서 맛본 술>



한국인이 본 중국의 술 문화

                                                                                                                                                       조규익

내가 중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95년,  연변대학의 학술발표대회 자리였다. 발표가 끝나 점심식사 자리에 가니 푸짐한 음식이 차려 져 있었고, 자리에 앉자 맥주 잔 반 정도가 채 안 되는 크기의 술잔이 돌았다. 말로만 듣던 중국의 음식과 술이었다. 당시 좌장(座長)이던 권철 교수가 술을 따랐고, 좌중의 참석자들은 권 교수의 선창(先唱)에 따라 ‘깐뻬이(干杯)!’를 화답(和答)하며 잔을 비웠다. 나 역시 그에 따랐고,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술이 채워졌다. 그곳의 주도(酒道)가 그러려니 하면서 주는 대로 벌컥벌컥 마셔댔다. ‘까짓것 중국술이라 해도 별 수 있겠나?’ 라는 배짱이 발동(發動)한 것일까. 소주 두 병 정도의 평소 주량과 젊음에 대한 과신(過信), 그리고 술에서 중국인들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미련한 오기(傲氣) 때문이었을 것이다. 넉 잔까지는 아무 기별도 없었다. 그러나 다섯 잔 째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여덟 잔쯤 들어가자 눈앞에 이상한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 잔이 들어가자 옆 사람들의 동작이 어항 속의 물고기들처럼 슬로우모션(slow motion)으로 보였고, 열두 잔 째 드디어 필름이 끊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호텔에서 간신히 일어나 위문 차 찾아온 중국의 교수에게 ‘어제 그 술 몇 도 쯤이나 되우?’ 하고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58도!’란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25도짜리 한국 소주 두 병 정도의 주량인 내가 58도짜리 중국술을 벌컥벌컥 마셔 댔다니! 함께 독한 술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은 중국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나의 미련한 호기(豪氣)가 심히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중국의 술을 만났고, 그 후 지금까지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곤경을 치르곤 한다.

백주(白酒), 모태(茅台), 오량액(五粮液), 죽엽청(竹葉靑), 수정방(水井坊), 이과두(二锅头), 공부가주(孔府家酒), 고량주(高梁酒), 검남춘(劍南春), 서봉주(西凤酒), 노주노교(泸州老窖) 등 진짜인지 짝퉁인지 알 수는 없으나, 4천여에 달한다는 중국 술 가운데 마셔본 것만 10여종이 넘는다. 그런데 이런 중국술들은 반드시 기름 진 중국의 음식과 함께 해야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반주(飯酒)문화도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밥상에는 대부분 술이 따른다. 그런데 중국의 술들은 대부분 알코올의 도수(度數)가 높아, 기본적으로 한국의 주당(酒黨)들은 중국의 주당들을 이길 수 없다. 중국 내에서도 북방 사람들이 남방 사람들에 비해 훨씬 독한 술을 다량으로 즐겨 마시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술 문화는  역사가 길다. 고대로부터 중국의 각종 문헌이나 문학, 예술 등에 남아 있는 술의 자취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연명(陶淵明)⋅이백(李白)⋅백거이(白居易)⋅소동파(蘇東坡)⋅이하(李賀) 등의 시인,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주호(酒豪) 유령(劉伶), 문인(文人)이자 정치가(政治家) 구양수(歐陽脩) 등은 자타가 공인하던 고금(古今)의 술꾼들이었다. 이 가운데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유령(劉伶)의 <주덕송(酒德頌)> 등은 중국인들의 술 문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하의 <장진주>를 살펴보자.

  <前略>               <전략>
況是靑春日將暮     하물며 청춘의 하루가 장차 저물려 하는데
桃花亂落如紅雨     복사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내리는 듯
勸君終日酩酊醉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토록 얼큰히 취하게나
酒不到劉伶墳上土   술이란 무덤 위의 흙까지 따라가는 게 아닐 것이니.
<將進酒>의 뒷 부분-

덧없는 인생에 대한 허무감과, 술에 기대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소망(素望)이 이 시에는 나타나 있다. 시 속의 화자(話者)가 잔을 건네는 상대는 아마도 자신처럼 젊은 친구일 것이다. 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처럼 떨어지듯 자신들의 청춘도 곧 지나갈 것이니 얼마나 허무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 내내 취하도록 술을 권한다고 했다. 유령(劉伶)처럼 술을 좋아하던 인간도 죽은 뒤엔 다시 술을 마시지 못하니, 죽기 전에 마음껏 마시자는 말이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이하(李賀)였다. 열매 맺지 못하고 져버린 복사꽃처럼 아름다운 나이에 죽은 이하는 어린 나이에 인생의 무상을 느낄 만큼 그는 감성적으로 출중했을 것이다.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은 또 다른 차원에서 중국인들의 술 문화를 보여준다.

花間一壺酒   꽃 사이에 한 병 술을 놓고
獨酌無相親   홀로 잔질하니 서로 권할 친구가 없네
擧杯邀明月   잔 들어 밝은 달 바라보니
對影成三人   그림자를 대하니 도합 세 사람이 되었구나
-<월하독작>의 첫 부분-

술은 권해야 맛이고, 술잔을 주고받는 사이에 좋은 인간관계는 형성된다. 중국인들은 상대방에게 술 권하기를 즐겨하고, 오고 가는 술잔을 통해 좋은 벗이 생긴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잔을 건넬 벗이 없는 외로운 상황이 그려져 있다. 꽃 사이에 한 병의 술을 놓고 홀로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대체로 서양 사람들은 혼자 술을 마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여럿이 함께 마신다. 그래서 시 속의 화자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밝은 달을 벗으로 끌어들인다. 그런데 달이 자신을 비추어 땅 위에 그림자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자신과 달,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 등 ‘세 사람의 벗’이 생겨난 것이다. ‘그림자도 마주하여 세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부분에는 시인의 행복감이 표출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얼마나 함께 마실 벗을 중시해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작품이다. 이하(李賀)도 이백(李白)도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호(酒豪)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일세(一世)를 울리던 시인들이었으므로, 인생에서 갖게 되는 허무감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평균적인 중국인들이 갖고 있던 허무감이나 술과 벗에 대한 사랑을 적절히 배합하여 절묘하게 표현한 셈이다.

중국문화가 세계로 확산되면서 중국의 술 문화 또한 세계인들을 매료시킬 것이다. 술은 벗과 함께 마셔야 한다는 관습도 세계인들을 움직일 것이다. 자, 중국의 주당(酒黨)들과 그들의 멋진 술 문화를 위해 ‘깐뻬이!’.


一个韩国人眼中的中国酒文化
文/曹圭益

我第一次踏上中国国土是在1995年,当时是参加延边大学的学术研讨会。
那天,学术会结束后,我跟中方教授们共进了午餐。就座后,一盘盘丰盛的菜肴摆满桌子,一个个比啤酒杯的一半还稍小一点的白酒酒杯摆了一圈,这大概就是传闻中的中国酒桌了。当时由担当主陪的权哲教授倒酒后,只见其他参宴者随和着权教授,齐喊“干杯”之后,很爽快地干掉了杯中酒,我当然也不例外地跟着干了。可没等酒杯落桌,空杯又被斟满。或许这是当地的酒道吧!心里这样想着,我也就一杯接一杯地喝着。“中国酒也不过如此嘛?”不知道是酒多壮胆后口出狂言,还是对平日两瓶烧酒的酒量和自己的年轻过于相信,总之是缘于那份不想在酒桌上输给中国人的傲气才冒出这么个想法。4杯下肚后还没什么感觉,到第五杯时已经开始有点飘飘然,到了第八杯,眼前就开始出现奇异景象,第十杯喝下去,身边的人就像鱼缸中游来游去的鱼儿,上演着各种各样的慢动作,而第十二杯时,脑海中记忆的胶卷已经中断了……第二天艰难起床后才发现,自己不知道什么时候被送到入住的酒店。当向前来问候的中国教授打听“昨天的酒有多少度”时,他不以为然地答道:“58度!”我着实一惊。要知道,当时我的酒量是25度的韩国烧酒两瓶,竟然畅饮58度的中国白酒!我自己都不敢相信。回想前晚一起痛饮烈酒而不醉的那几位中国人,我那愚蠢的豪气顿时变成一种羞愧。
我跟中国酒就是这样相识的,直到今天,每次访问中国,都无法摆脱对它的那份执着,以致时常陷入困境。
在中国4000多种白酒中,我仅喝过茅台、五粮液、竹叶青、水井坊、二锅头、孔府家酒、高粱酒、剑南春、西凤酒、泸州老窖等十几种。不过我总结出一点:中国酒一定要配油腻的中国菜,那样才能喝出味道。中国的饮酒文化也是从这里开始的:饭桌出现的地方,差不多都会有酒。但是中国酒大部分度数很高,尤其是北方地区,相比南方,酒精度数更高。所以,一般韩国“酒党”(能喝酒的人)难以胜过中国“酒党”。
中国酒文化历史悠久,从古代流传下来的诸多文献、文学和艺术中都留有酒的痕迹。陶渊明、李白、白居易、李贺、苏东坡等诗人,竹林七贤之一的酒豪刘伶,既是文人又是政治家的欧阳修等,都是古今公认的“酒鬼”。其中,李贺的《将进酒》、李白的《月下独酌》、刘伶的《酒德颂》等更是把中国人的酒文化表现得淋漓尽致。先让我们来欣赏一下李贺的《将进酒》。
“……况是青春日将暮,桃花乱落如红雨。劝君终日酩酊醉,酒不到刘伶坟上土。”
诗人对如同白驹过隙一样短暂人生的空虚感和试图以酒消愁的心理,从诗中自然地流露出来。看到桃花像红雨一般无序地散落下来,联想到自己的青春亦将匆匆流逝,该有多么空虚?诗中主人劝酒的对象或许是跟诗人一样年轻的朋友,所以“终日”“劝君”,直到“酩酊醉”。即使像刘伶一样喜欢酒的人,死后不也是不能再喝。所以诗人劝道人们生前一定要尽情畅饮。这就是27岁年纪就离开人世的李贺。就像还没来得及结果就凋谢的桃花,在最美好的年纪便结束了人生,由此可见,李贺对人生的无常已经看得非常透彻。
而李白的《月下独酌》却是中国人酒文化表达出的另一番景象。
“花间一壶酒,独酌无相亲。举杯邀明月,对影成三人……”
酒要敬才有情调,觥筹交错间,就结成了良好的人际关系。中国人喜欢敬酒文化,他们相信在酒盏的你来我往之中,能交成好朋友。但是,在这首诗中,诗人没有可敬酒的对象,只好孤独一人,在花丛中自斟自饮。其实,西方人独自饮酒的情形不在少数,但是中国人和韩国人大都喜欢与他人共饮。所以,诗人百般无奈之下,只好邀天上的明月和月光下自己的身影做酒友,如此一来,三“人”同饮,诗人的幸福感便从字里行间情不自禁地表露出来。由此可见,中国人十分重视酒桌上一起喝酒的酒友。
李贺也好,李白也罢,不仅是“斗酒不辞”的酒豪,还是名噪一时的大诗人。因此,他们能把大部分中国人都会感到的空虚与对酒和酒友的热爱恰当地结合在一起,通过诗句,把人生中的空虚巧妙地表达出来。
中国文化在不断向世界传播的过程中,中国酒文化也錚醉着地球人。而酒要和朋友一起分享的习惯也逐渐受到世界各国人的认可。让我们为中国的“酒党”和精彩的中国酒文化“干杯!”

(本文作者:文学博士、崇实大学国语国文系教授、人文大学学长、韩国文艺研究所所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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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1. 4. 19:15
‘코 푸는 미녀스타’

                                                                                                         조규익

몇 년 전, 유럽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받은 문화적 충격 하나가 있다. 호텔, 모텔, 펜션, 민박 등 잠자리는 다양했지만, 정해진 시각에 다양한 사람들과 아침식사를 함께 한 점은 어디서나 같았다. 식당에 빵과 햄, 치즈, 우유, 요거트, 잼, 커피 등등, 다양한 메뉴들이 차려져 있고,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음식들을 담아다가 식탁에 앉아 먹은 다음 말 없이들 떠나곤 했다.

유럽 사람들은 동양 사람들 특히 중국이나 한국인들과 달리 식탁에서 말이 없거나 톤을 낮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들의 ‘코 푸는 습관’이었다. 대부분 앉자마자 아니 식사 중에도 이곳저곳에서 예사로 ‘팽! 팽!’하면서 코들을 풀어 제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만 서로 어안이 벙벙하여 앉아 있을 뿐, 그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밥상 앞에서 말을 많이 하여 꾸지람을 들어온 우리였다. 밥그릇을 앞에 두고, 더구나 많은 손님들이 주변에 앉아 있는 자리에서 소리 높여 코를 푸는 일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말로 나직하게 ‘야만인들이로군!’하면서 킥킥댄 것도 당연했다. 우리는 그들이 밥상 앞에서 코를 푸는 행위에 대해 관대한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코에 무언가 들어 있으면 숨을 쉴 수 없고, 숨을 쉬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밥을 먹는 일보다 코를 푸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다!’ 라고 그들은 오랜 세월 생각해왔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며 그들의 무례한(?) 행위를 용인하기로 했다.

       ***

오늘 아침 인터넷 속의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다가 영화배우 송승헌이 “바로 옆에서 ‘팽’하고 크게 코 푸는 김태희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는 기사를 보고는 픽 웃음이 나왔다. 송승헌이 아마도 유럽여행 중에 식탁에서 거침없이 코를 풀어 제끼는 선남선녀들을 보았다면 졸도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배우 김태희는 해외여행을 하다가 식탁에서 코를 푸는 외국인들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일들이 국제 예의의 표준 상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는 착각을 했으리라. 그러나 유럽은 유럽,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다. 송승헌 같은 멋진 신사가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공개된 장소에서 코를 ‘팽!’ 푸는 일을 생소하게 받아들일 만큼 우리는 아직 꽉 막혀버린 동방예의지국에 살고 있는 걸까?
                                                                   <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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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1. 3. 08:10

2011년=민족자존심 회복의 원년


                                                                                                    조규익
                                                                        
 지난해의 천안함 격침과 연평도 포격만큼 최근 들어 우리의 현실을 각성시켜 준 사건들도 없었다. 북한에 의해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그간의 도발들이 지난 정권들의 '햇볕정책'과 맞물려 '안보 현실의 추상화'에 기여했다면, 이번 사건들은 우리에게 '안보 현실의 문제적 실상'을 구체적으로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지난 정권들의 '햇볕정책'이 얼마나 공허한 '짝사랑'에 불과했는가를 만천하에 드러낸 동시에 반사적으로 우리의 체제나 대비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사건들이다.


 그런데 두 사건의 바탕에는 간단치 않은 국제 정치적 맥락이 깔려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 뒤 한국과 미국은 서해에서 대규모 연합훈련을 했고, 이어 우리 군은 포격사건으로 중단되었던 정례적 사격훈련을 재개했다. 이 훈련을 트집 잡아 북한은 보복타격의 협박을 공언했고, 연평도 포격사건의 책임소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던 중국과 소련이 들고 나서서 사격훈련을 저지하려 했다. 심지어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한 국가가 자기 영토 안에서 실시하는 정례적 훈련'까지 포기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다수 이사국들의 반대로 무산되긴 했으나, 일방적으로 북한 편을 들고 있는 러시아나 중국의 태도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적 역학의 미래에 대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또 한 가지 공교로운 일은 한국과 미국의 공조로 연평도 포격사건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응급대비를 하는 와중에, 미뤄두었던 '한미 FTA'의 원안이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수정·타결된 점이다. 의도 여부를 불문하고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한미 FTA'를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타결되도록 한 지렛대로 작용했음은 뻔한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면 한반도의 현상유지가 바람직하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남한에 의한 통일국가가 출범하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게 껄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버려두면 무너지게 되어 있는 북한을 어떻게든 떠받쳐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이들 나라의 최고 전략이다. 더욱이 조만간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만나 대화의 재개에 합의할 것으로 관측되고, 그간의 강성 기조를 바꾸어 6자회담의 수용을 암시한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언급을 미루어 본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주판알 튀기기가 이미 본격 가동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그것대로 그들에게는 기회이고, 단순한 분쟁으로 끝난다 해도 한국에 고통을 주면서 통일한국의 출범을 막을 수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이익이다. 이런 와중에 국제적인 바보 역할을 하는 것이 남북한의 권력집단이고, 희생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민초들이다. 자국 내 이권을 담보로 식량이나 물자를 구걸하러 뻔질나게 중국을 찾는 김정일 집단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그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이익 확보에 바쁜 미국이나 일본의 힘을 빌려야 하는 남한 또한 떳떳치 못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의 안이했던 자세를 고쳐 안보 분야의 '주적 개념'을 손 보고, 북한 주민들을 회유하는 방향으로 통일정책을 수정한다 해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구조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렵다. 북한이 불시에 붕괴하도록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의 흡수통일 또한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의 입장에서야 분단구조의 고착화를 원할 텐데, 그 구조가 지속되는 한 안보 불안은 상존할 것이다. 이런 쉽지 않은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남북한 모두 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김정일 사후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탈북자들을 관리하는 현행 체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정비하여 통일 이후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불안감을 없애주어야 한다. 주변 열강들의 이해에 휘둘리는 것이 남북한의 현재 모습이다. 남북통일의 대전제는 민족의 자존심이다. 2011년을 남북한이 함께 민족자존심 회복의 원년으로 삼을 수 있도록 힘을 합해야 하는 것은 남북한이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지속되어 온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8. 15. 23:42
역사, 이젠 제대로 가르치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CIS(독립국가연합) 등에서 만나는 해외동포 3~4세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말을 모르니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없고, 우리의 역사를 모르니 그들과 함께 민족 정체성을 공유할 수가 없다. 다민족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고국의 말과 역사조차 모르는 처지에 고국에서 온 동포를 ‘동포 아닌 제3국인’ 혹은 그들과 공존하는 ‘타민족’ 정도로 인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원래 이민지와 고국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계인’으로 머물러 온 그들이 이제는 그런 중간자적 인식마저 상실하고 대책 없는 미아(迷兒)로 떠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해외의 동포들에게서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세대들이 겪는 ‘민족 정체성의 위기’는 더욱 우려스럽게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 없는 기성세대나 나라를 경영한다는 지도층이 무사려(無思慮)하게 지향해온 ‘세계화’의 비극적 소산이다. 든든한 경제나 국방만이 세계의 복판에서 한 나라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발판은 아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한갓 ‘경제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의 우리처럼 어려서부터 영어에만 몰입하게 하고 역사나 민족문화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새로운 세대들은 스스로 ‘세계시민’의 착각 속에 빠져들고 만다. 각자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바람직한 세계시민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때 늦은 감은 있으나,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독도 교육을 강화하는 내용의 교육과정’을 발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독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 이유나 역사적 당위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조만간 우리는 제 땅마저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민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억지를 역사 교과서에 반영하여 가르쳐 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동북공정’이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역사의 날조에 동참했다. ‘날조된 역사’를 당당하게 교육시키는 그들의 심리 저변에는 그것이 자라나는 세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경우 미래는 그 방향으로 되어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긴 시간이 지나 날조된 역사가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었으면’ 하는 헛된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날조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지만, 제대로 된 역사마저 가르치지 않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명한 직무유기이니 그것 또한 죄악이다.

우리의 편견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지금’만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과거나 미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거기서 역사나 민족문화에 대한 몰각(沒覺)은 비롯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재는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역사 철학자 E.H.카아는 역설했다. 과거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현대사회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원인은 과거에 있으며, 미래의 원인은 현재에 있다. 주변의 타민족, 타 국가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적 관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려면 원인으로서의 과거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무엇보다 긴요하다. 사실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이 독도만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문학, 역사, 철학 등 전통인문학의 핵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신세대를 국제 미아로 만들고 있는 점은 기성세대들이 직시해야 할 문제적 현실이다. 경제와 군사, 문화면으로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일본이나 중국이 이 시점에 왜 ‘역사의 날조’와 ‘날조된 역사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들에 비해 한참 늦었지만, 우리도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멀지만 확실한’ 길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