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10. 12. 17:46

교수개혁이 대학의 개혁이다

개교 110주년. 개교 이래 한 세기를 넘기고 10년이란 세월이 더 흐른 시점이다. 어느 공동체이든 한 세기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략 ‘조(祖)-부(父)-손(孫)’ 3대의 계보가 완성되는 기간이며, 처음에 표방한 이념을 완성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거기에 ‘강산도 바뀔 만한’ 10년이 더 흘렀다.

제대로라면 새 세기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방향 지표에 구성원들의 총의가 결집되어 벌써 출발선으로부터 훨씬 멀리 떠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숭실의 구성원들은 그런 지향점을 공유하고 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KAIST와 서울대 등 앞서 가는 몇몇 대학들은 교수들에 대한 평가를 엄정하게 함으로써 대학의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학문과 지식사회를 선도하는 이들 몇몇 대학들은 대학의 수월성을 교수집단에 대한 엄격한 관리에서 추구하려고 한 것 같다. 만시지탄의 느낌은 없지 않으나, 맞는 방향이다.

사실 대학은 개혁되어야 하고, 대학개혁의 핵심은 교수개혁이다. 교육의 핵심은 교수에 달려 있고, 교수는 엄격한 평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기백명의 학생들, 적게는 10명 이내에서 많게는 십 수 명의 교수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 대학의 학과들이다. 매년 많은 수의 학생들이 사회로 배출되고, 그들은 각계로 흩어져 대학에서 자신들이 배운 대로 행동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의 핵심적 위치에 서게 되고 그가 이끄는 공동체 역시 그들의 생각대로 굴러가게 된다.

교수들이 잘못 된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 학생과 학교, 사회와 국가의 피해가 말할 수 없이 크리라는 점은 묻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다. 그간 온정주의나 연공서열 중시의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지내온’ 일부 교수들이 만에 하나 동료나 후배교수들을 ‘패거리’로 묶어 지배하려고까지 한다면, 학문은 실종되고 술수나 음모가 판치는 ‘조폭사회’로 변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도 바로 교수사회다.

학문적 담론의 질과 양, 강의를 비롯한 학생들에 대한 서비스의 질과 양으로 교수 자질의 적격 여부가 결정되어야 하고, 그것이 교수들에 대한 우대와 퇴출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수들에 대한 평가가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없어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한 번 교수가 되면 ‘어영부영’ 정년보장이나 받는 교수들이 적지 않은 집단이라면, 대학의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국문과 조규익 교수)

*이 글은 숭대시보 No.955, 2007년 10월 8일자 사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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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10. 1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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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0일 숭실대학교 조만식 기념관 앞 잔디밭에서 기념식수를 마치고


숭실 재직 20년만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2007년 10월 10일. 숭실대학교 110주년 기념식장에서 ‘근속 20년’의 포상을 받았다. 하루 종일 식장안팎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박수를 받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 겸연쩍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나이 이제 50이니 어느 곳으로든 뻗어나갈 수 없음을 위로라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간 내가 진짜로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이곳에서 해왔다는 말일까.

숭실에서의 삶을 시작한 1987년은 무척 혼란스런 시기였다. 폭력적인 5공 정권이 종말을 고할 즈음이었고, 88 서울 올림픽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사람들은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며, 약아빠진 자들과 미련한 자들의 세속적 득실(得失)이 하늘 땅 만큼 벌어지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독재정권을 종식시킨다는 대의명분으로 강의보다 무단휴강일수가 훨씬 많았고, 교수들의 나약한 목청이 강의실 앞에서 고성능 마이크로 선동하는 목소리들을 어쩌지 못하던 좌절의 계절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학문의 세계이자 대학의 본질이라면, 한 대학에서 20년을 근속했다는 것이 크게 자랑스러울 것은 없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지 못하고 한 곳에 ‘처박혀’(?) 온 사실이 학자나 교수로서는 일종의 수치일 수도 있으리라. 수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안일과 타성의 덫에 가위눌려 있으면서도 늘 무언가를 찾아 몸부림치고 있다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그간 20년, 30년 근속하신 선배들을 뵈며 한편으로 연민의 정을 느껴왔다. 철없던 시절의 내 치기어린 안목이 빚어낸 실수였다. 아니, 그 분들의 주름 진 얼굴에서 아무런 가치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오만함 때문이었음을 지금 비로소 깨닫는다. 나도 이제 그 때 그 분들의 연세에 도달했다. 그 분들이 서서 축하의 인사를 받던 그 자리에 올라 겸연쩍은 표정으로 다시 옛날 내 또래의 후배들로부터 축하의 인사를 받으면서 비로소 나를 응시하게 된다. 나는 과연 누구였으며, 앞으로 누구의 얼굴로 살아갈 것인가.

전공 강의실. 얼굴에 제법 어른 티가 오르기 시작한 학생들에게 ‘1987년’을 물었다. 모두 한 목소리로 ‘한살 때’였단다. 그래, 내가 이곳에 부임하던 1987년이 그대들은 세상에 갓 태어나 첫돌을 맞이하던 때였구나! 끔찍한 세월이 흘러 그 때의 한 살 박이들과 마주 한 지금. 왜 나는 내 내면의 나이테를 헤아릴 자신이 없는 걸까. 잘 못 돌린 카메라의 하얗게 바랜 필름처럼 그간의 궤적이 깡그리 사라졌단 말인가.

그래서 오늘 다시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 오늘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가치 있는 삶의 궤적’이 또렷한 나이테로 내 마음에 각인되길 간절히 바라며, 내 사랑하는 학생들과 소망의 흙을 삽질한다.

2007. 10. 10.

조만식기념관 옆 잔디밭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9. 17. 17:57

'얼음을 함께 논할 수 없는 여름 버러지' 틈을 벗어나고자 한
 홍대용의 연행길 육천리-『을병연행록』


                                           조규익(숭실대 교수)

               연행 길, 고행 길

1765년(영조 41년) 동지사행의 서장관 홍억을 따라나선 그의 조카 담헌 홍대용. 자제군관의 자격이었다. 실학을 발흥시킨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그는 당대 유학자 김원행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대표 박지원과 교제가 깊었다. 그러나 화이관과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이 지배하던 그 시절. 명분과 현실은 크게 괴리되어 있었다. 담헌 스스로 벼슬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도 그 괴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이러한 괴리감을 청산하고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연행'의 기회를 고대하다가 드디어 그 기회를 잡았던 것. 거기서 나온 것이 "을병연행록"이다.
 그가 두 달 걸려 도착한 연경까지는 편도 3천리, 왕복 6천리의 장도였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도보로 오가던 '공무 여행길'. 교통편이 마땅치 않으니 숙박시설인들 변변할 리 없었다. 윗사람들이라고 으레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다. 목욕은커녕 제때 옷을 갈아입는 일마저 분에 넘치는 사치였을 만큼 행차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군말을 보탤 수 없었다. 지엄한 왕명으로 나선 길이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적 연결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 담당했다. 조선은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에 정례적인 사행단을 파견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 왕의 죽음에도 사행단을 보냈으며, 왕위를 물려줄 때도 선왕을 추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은 수시로 파견되던  임시 사행단이었다. 정사·부사·서장관 각 1인, 대통관 3인(수역 당상관 1인·상통사 2인), 호공관(護貢官) 혹은 압물관(押物官) 24인 등 30명 내외가 공식 인원이었으나, 의원·서자관·화원 및 기타 수행원과 노자(奴子)들을 합하면 총인원 기백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그렇게 다녀 온 사행이 조선조 말까지 수백 회. 경제와 문화의 교류도 사행단이 수행하던 실질적 사명의 큰 부분이었다.

              서양문물과의 만남과 깨달음
                  
 "여름 버러지와는 족히 더불어 얼음을 이르지 못하고, 오곡한 선비와는 족히 더불어 큰 도를 의논치 못한다"는 『장자』의 말을 끌어와 담헌은 조선의 답답한 선비들을 비웃고 '길 떠나는' 자신의 결의를 다졌다. 그는 또 "간밤에 꿈을 꾸니/요야(遼野)를 날아 건너/산해관 잠긴 문을/한 손으로 밀치도다"라고 도도한 패기를 자신의 노래에 표현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평소 역관을 만날 때마다 한어를 부지런히 익혀둘 만큼 연행의 기회를 노리며 준비를 철저히 해온 그였다. 그 덕분으로 연경에 가서도 웬만한 대화는 한어로 통할 수 있었다. 오직 간정동의 세 벗(엄성·육비·반정균)과 나눈 대화들만은 필담으로 주고받았다. 정확성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연행 길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기록했으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정동 세 벗과의 만남, 서양문물과의 만남이었다. 담헌은 연경에 도착한지 두어 달 째인 1766년 1월 7일·8일·9일·13일·19일과 2월 2일에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사제 유송령·포우관 등과 만났다. 그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비로소 서양세계와 우리의 같고 다름을 깨닫고 개안을 하게 되었다. 정월 7일 천주당에 사람을 보내 유송령·포우관을 만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9일에서야 결국 두 사람을 만난다. 천주화상을 보며 그 화격(畵格)이나 천주교리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하고 오르간의 구조와 음계를 자세히 관찰한 다음 즉석에서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일에도 천주당을 찾은 담헌은 그들과 장시간 만나 종교와 교리, 역서(曆書), 혼천의, 관상대, 망원경, 흑점(黑點), 안경 등 과학과 문물에 관한 문답을 교환했고, 2월 2일에는 자명종, 서양과 중국의 문자 언어 및 방위(方位) 등에 관한 문답도 나누었다. 처음으로 접한 천주화상을 담헌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북편 벽 위에 당중하여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으니 계집의 의상이오,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색과 근심하는 기색이라. 이것이 천주라 하는 사람이니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있는 모양이오, 선 곳은 깊은 감실(龕室) 같으니, 첫 번 볼 제는 소상(塑像)인 줄만 여겼더니 가까이 간 후에 그림인 줄 깨달았으나, 안정(眼睛)이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격이오.

 처음 보는 예수상에 놀랐던 것일까, 묘사의 세밀함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사실 담헌은 그림 뿐 아니라 거문고를 능숙하게 탈 정도로 악기를 좋아했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처음 보는 오르간으로 우리나라의 음악을 연주해보이기도 했고, 악기를 접할 때마다 구조와 연주법을 묻거나 조선의 악기와 비교하기도 했으며, 거문고 연주를 들려주어 반정균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도 했다. 거문고 연주로 연경의 역관 서종맹의 탄성을 자아낸 담헌. 그는 악기상 유씨의 <평사낙안> 연주를 악사들로 하여금 익히게 한 다음 밤마다 그들을 불러 그것을 배웠다. 그처럼 그는 악기 연주의 매니아이기도 했다.

              간정동에서 만난 세 벗, 그리고 천고의 우정

 『을병연행록』 권 6에서 권 9까지 26일간은 담헌이 중국의 세 선비를 만난 간정동 이야기다. 이 부분은 전체 기록의 삼분지일을 넘을 만큼 양으로나 내용으로나 중국 체험의 핵심이다. 간정동을 처음 방문했을 때 왕어양의 『감구집(感舊集)』에 실린 김상헌의 시가 화제로 올랐으며, 2차 방문 때는 허난설헌의 시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담헌은 도학과 절의로 저명한 김상헌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려 했고, 시율에 비해 덕행이 미치지 못함을 들어 난설헌을 비판하기도 했다.
 다섯 번째로 간정동을 방문했을 때, 담헌은 육비·평중 등과 형제의 의를 맺고 '오늘의 모꼬지가 천고의 기특한 연분'이라 말하며 기뻐했다. 국경을 넘는, 지극한 우정이었다. 『담헌서』 외집의 <항전척독(杭傳尺牘)>은 연행에서 돌아온 담헌이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 33통이 실려 있는 글이다. 육비에게 주는 편지 4통, 엄성에게 주는 편지 3통, 반정균에게 주는 편지 5통, 손유의에게 주는 편지 4통 등이 그 중심이다. 이들 중 담헌과 특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엄성이었다. 엄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아버지·형·동생·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7통이나 될 정도였다. 엄성이 죽은 뒤 반정균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엔 감동적인 우정이 흘러넘친다.

 철교(엄성의 호 ; 인용자 주)의 무덤에 풀이 이미 두 달을 묵었구료. 매양 깊었던 우정을 생각하면 벽을 돌며 기가 꺾이고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 초상을 꼭 한 번 보고 싶건만 부쳐 주기가 쉽지 않겠지요.

 엄성은 담헌의 초상을 그려준 적이 있었는데, 정작 담헌은 그의 초상을 갖고 있지 못했으니, 엄성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으리라. 그토록 그들은 우정으로 맺어진 큰 선비들이었다. 담헌이 보기에 단순히 '오랑캐 나라의 시시한 선비'들은 아니었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조선의 선비들이 얕잡아 봄직한 인물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담헌은 연행 길에 나서면서 "대개 사람이 작은 일을 즐기고 큰일을 모르는 자는 그 가슴에 호준한 뜻이 적음이요, 좁은 곳을 평안히 여겨 너른 곳을 생각지 아니하는 자는 그 도량에 원대한 계교가 없음이라"고 일갈했다. 어쩌면 그는 중국에 가서 이런 선비들과 교제하고 좀 더 큰 문제들을 담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담헌은 당시 조선의 꽉 막힌 선비들을 비판하고 매도했다. 담헌 자신 연행을 통해 '얼음을 함께 논할 수 없는 여름 버러지들' 틈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는 우리나라의 예악문물을 소중화로 부르긴 하지만, 100리 되는 들판이 없고 천리를 흐르는 강이 없으며 땅덩어리가 좁고 좁아 중국의 한 고을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그 가운데 도사리고 앉아 부릅뜬 눈으로 소소한 영리를 추구하고 악착한 언론을 구사하니 그들이 가련하다고 했다.
 오랑캐가 웅거하여 중국의 문물이 비록 변했다 하나 사람만은 고금이 없으니,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며 저들의 규모와 기상을 한 번 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 포부를 지닌 담헌이었기에 국경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교우관계의 모범적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 반년 동안의 연행길이 그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7. 14. 11:57
*신정아 사기사건을 보며 참담함을 금할 수 없군요. 제가 옛날에 쓴 칼럼이 있어서 다시 이곳에 올려 봅니다. 우리가 학벌의 환상을 좇는 한 우리 사회에 '가짜박사' 사건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끊이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함께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이 글은 조선일보 2006. 3. 27. 시론입니다.


-원문보기 클릭-



[시론] '가짜박사' 부추기는 사회


허술한 검증에 간판 중시 ‘지식범죄의 온상’ 돼버려


▲ 조규익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최근 며칠째 가짜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은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지식사회의 아름답지 못한 이면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일종의 ‘테러’다. 피터 드러커의 설명처럼 지식 노동자가 권력을 갖는 사회가 지식사회라면 이 땅의 총체적 부패는 지식인들로부터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추악한 테러의 무대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넘어 러시아와 필리핀까지 번졌으니 다시 어느 나라가 이 행각의 새로운 현장으로 연루될지 자못 불안하기만 하다. 한국판 지식 범죄의 국제화라고나 할까. 얼마 전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우리 학자들의 표절사건, 온 국민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황우석 사건’ 등과 함께 이번의 가짜박사 사건으로 우리의 지식사회는 결정적인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국가 발전을 선도해야 할 지식사회의 휘청거림과 무관치 않다.
지금 우리는 가짜박사 학위를 남발한 외국의 대학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그런 대학들에서 사온 가짜 학위로 학술진흥재단에 학위등록을 하고, 어엿한 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올랐으니 문제의 근원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 옳다. 가짜박사를 교수로 채용할 정도로 진짜와 가짜도 걸러내지 못한 수준이 우리 대학들의 한심한 실태다. 이런 현상은 지식사회의 마비된 양식, 국가의 학문정책 부재, 대학개혁의 실패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은 개혁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치장에만 주력할 뿐 정작 개혁해야 할 본질적 대상은 초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의 목적은 대학정신의 정립에 두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의 신설이나 보완이 그 구체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박사학위 보유자 비율로 선두권에 서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없거나 부실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필연적으로 저질박사들의 온상 혹은 가짜박사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보여주는 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식정보가 널려 있고 표절행위 또한 여전한데, 오히려 논문의 심사단계는 전보다 간소화되고 있다. 적으면 한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의 심사가 박사논문 검증의 전부다. 박사 학위의 양산체제에 온정주의까지 가세하여, 저질논문을 걸러내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 기업들은 대학의 박사학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관들은 반드시 박사학위를 요구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연구업적이 뛰어나도 박사학위가 없으면 아예 서류조차 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채용 과정에서는 가짜박사를 걸러내지 못한다.

구태의연한 검증 시스템과 지식사회의 낮은 윤리의식, 실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인력 수요자들의 무감각이 지속되는 한 가짜박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짜박사들은 죽은 지식사회에 기생하기 마련이다. 지식사회의 핵심인 교수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과 성실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발표된 서울대의 교수윤리헌장은 늦었지만 적절하다. 지식사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진리다.


(조규익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7. 8. 14:04
정치인들도 교육에 동참하라!

이른바 ‘잠룡(潛龍)’들이 뛰어나와 하나밖에 없는 승천(昇天)의 티켓을 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금. 온갖 술수가 난무하여 혼란스러운 ‘2007년 6월의 공간’을 뜻 있는 사람들은 난세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정치’를 탓한다. 정치만 있고, 양식(良識)에 바탕을 둔 도덕이나 인간미가 상실되었다 한다. 제대로 된 정치나 정치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한비자(韓非子)는 말했다. 인정이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또는 생각’이 인지상정이다.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은 ‘나만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고집스런 편견을 대전제로 한다. 그래서 제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흠집만 캐내어 세상에 광고하기 바쁘다. 남의 흠은 작은 것이라도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것은 감추면서 남을 깎아내리려 한다. 이 대열에 후보들은 물론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원 등 이른바 정치인들이 뒤질세라 끼어들고 있다.

정치적 권위가 형성되는 핵심은 정책 결정자 또는 기관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치집단이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사회의 일반적 윤리를 바탕으로 정치집단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관념이 국민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설명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윤리를 외면하고 술수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현실은 비극이요 재앙이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는 모습, 비록 적이라도 장점을 칭찬해주는 금도(襟度)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오물 같은 증오의 언사들이야말로 그들의 적만 듣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의 걱정을 털어놓아보자. 우리의 교육이 걱정이다. 어른들보다 훨씬 영악하게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이 땅의 2세들이다. 그들은 발달된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다. 강단의 선생들이 내뱉는 고답적인 말보다 전투적이고 상스러운 정치인들의 말을 훨씬 빨리 받아들인다.

지금의 선생들은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 선생의 가르침보다 매스 미디어의 총아들이 보여주는 언행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까발리고 부풀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인들에게도 자식들은 있을 것이다.

한 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검증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검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을 검증하려면 철저한 자기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기검증만 제대로 한다면 굳이 남을 검증할 필요 없고, 그에 따라 ‘네거티브 전략’이란 저급한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우리 사회의 신뢰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결과는 교육의 황폐화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그저 폐쇄된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과서만 읽는 로봇들이 아니다. 어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복사하듯’ 배운다. 무슨 거창한 교육정책을 세워주길 기대할 만큼 정치인들의 자질을 믿는 우리도 아니다. 다만 평균적인 윤리의식이나 양식 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되, 자신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식들의 교과서로 수용된다는 사실만이라도 명심해달라는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7. 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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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 책 <<풀어읽는 우리 노래문학>>(논형, 2007. 7. 1.)을 펴냈습니다. 전공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우리 고전시가의 아름다움을 알려드리기 위해 쉽게 쓰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만, 독자 여러분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걱정스럽습니다. 다음은 이 책의 목차입니다.

머리말

1부 우리 노래 다시 읽기
이별의 비극, 승화된 넋두리의 미학  공무도하가·가시리·원부가
유리왕이 지은 ‘군–민 소통’의 태평가  두솔가
훔쳐보기와 일탈의 미학  서동요·쌍화점·간부가
‘무소유’와 버림의 힘, 그 예술적 발현  우적가
삶과 죽음의 이중주, 그 예술적 형상화  제망매가
위대한 모정의 승리  도천수관음가
비장한 사랑과 죽음, 그 제의적 등가성  불굴가
‘사랑노래’의 시 문법과 미학적 전형성  단심가
서울의 찬가, 인간 욕망의 정치적 수사학  신도가
역사와 현실, 그 경계의 시적 형상화  용비어천가
성과 속의 서사적 대결과 숭고한 결말  월인천강지곡
열어줌과 풀어줌  장진주사
성본능과 일탈의 꿈  만횡청류
완경의 서사로 위장된 정치적 메시지  관동별곡
시대정신과 지식인의 대외인식  일동장유가
패기의 젊음이 엿본 세계, 그 빼어난 표현미  병인연행가
부패한 지배층과 민중의 저항, 그 미학적 승화  물것노래·거창가

2부 삶과 노래, 그리고 노래문학
1. 우리 노래문학의 흐름
2. 우리 노래문학과 자연,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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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2007. 7. 3.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